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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이런 말들이 있읍니다. ‘교종의 여러가지 언설(言說)과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은 서로 같다’라고 합니다. 즉「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일체법이 그대로 마음 속에 있는 자성(自性)임을 알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 밖에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또 「법회경(法華經)」에서 말한, ‘이 법은 사량분별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경우와,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 ‘모습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와,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다’라고 한 것도 그 증거입니다.
또한 「원각경(圓覺經)」에서 말한 ‘이것이 헛꽃〔空華〕인 줄 알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며, 또 몸과 마음도 생사의 윤회를 받지 않는다’고 한 경우와, 「능엄경(楞嚴經)」에서 말한 ‘6근(六根)과 6진(六塵)이 같은 근원이므로 속박과 해탈이 둘이 아니다’라고 한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밖에도 여러 경전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는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교(敎)와 선(禪)의 뜻이 서로 같은 줄을 알게 됩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문자를 사용하여서 총지(總持)를 밝힌 것이라고. 진실로 자기 마음 깊이 한 번 이라도 깨달아 보지 못하면, 부질 없이 약(藥)만 늘어놓을 뿐,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한 번이라도 본성에 계합하여 깨달은 자라면 어찌 대승경론의 귀절들만이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겠습니까? 대승경론은 말할 것도 없고 하찮은 이론과 바람소리, 빗빙울소리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달마스님이 전한 바로 기리키는 선〔直指法門〕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만약 언어와 형상을 떠난 상태에서 자기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다만 대승경론의 서로 그럴듯한 말만을 기억해 둔다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읍니다. 옛사람들이 말씀한 ‘마음밖의 것에 의지하여 깨달으려 한다면 스스로가 깨닫는 길을 막는 꼴이 된다’라고 한 것과, 또 ‘금가루가 눈에 들어간 것처럼 그 자체로는 값 나가고 보배로울지 모르지만, 눈에는 이로울것이 없다’와 같은 비유가 꼭 들어 맞습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마음에 깊이 새겨서 스스로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어찌 경전을 통한 가르침만이 유독히 달마스님의 바로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 일치하지 않겠읍니까? 보통 선(禪)을 한다는 부류들 속에서도 그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즉 이조(二祖) 혜가(慧可)스님의 안심(安心), 삼조(三祖) 승찬(僧璨)스님의 참죄(懺罪), 남악(南嶽)스님의 기왓장 갈기〔磨塼〕, 청원(靑原)스님의 발 내밀기[垂足], 비마(秘魔)스님의 나무집게〔擎叉〕, 설봉(雪峰)스님의 공 굴리기, 덕산(德山)스님의 몽둥이질〔棒〕, 임제스님의 할(喝)에 이르기까지 1700공안은 물론 여타 모든 인연을 불립문자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에서는 모조리 물리칩니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대로 깨닫는데 어떤 것이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만일 육신의 굴레를 몰록 벗어나지 못하고, 알음알이〔情意識〕를 가지고 깨달으려 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마치 ‘기름이 국수그릇에 들어간 것과 같으며 온갖 독이 심장에 들어간 것 같다’는 비유와, 또 ‘제호(醍醐)의 뛰어난 맛은 세상의 제일이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도리어 독이 된다’는 비유와 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선〔直指法門〕은 마음을 이용하여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 자리는 발들여 놓을 틈도 없고, 손을 쓸 수도 없는 곳입니다. 이 자리는 친히 자신의 본성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한 걸음에 성큼 밑바닥까지 쑥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침 밸으며 팔 흔드는 등의 하찮은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가 대상에 관계없이 저절로 여기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사자(獅子)가 도와줄 친구를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1700공안이 마치 여우가 흘린 침에 잡다한 독이 들어 있는 것처럼 쓸데 없는 소리인 줄 알게 됩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바깔 경계에 휘둘리겠습까?
애석합니다! 때로 총명하다고 자처하는 무리들이 스스로 깨달으려고는 하지 않고, 밤낮으로 잡다한 독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힛된 짓을 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향상(向上)이니 향하(向下)니, 전제(全提)니 반제(半提)니, 최초(最初)니 말후(末後)니, 정안(正按)이니 방고(旁敲)니, 조용(照用)이니, 주빈(主賓)이니, 종탈(縱奪)이니, 사활(死活)이니 하는 등등으로 억지로 쓸데 없는 헛된 이론만 늘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자기와 가문(家門)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받들며 후인들을 현혹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선배들의 문장과 이론만을 비판 검토하여 평가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선배의 말씀은 ‘전제(全提)와 향상(向上)이기 때문에 결가지는 모두 잘라버렸다’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어떤 선배의 말씀은 ‘신기하고 교묘하여 고금을 통하여 제일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어떤 선배의 말씀은 ‘올바른 방법이기는 하나 죽은 선〔死禪〕이기 때문에 거칠다’라는 등등으로, 수만 가지로 비교하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크게 통달한 선배들이라면 심장이 천 갈래 만 같래 찢어지더라도 가슴 속에 한 물건도 남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임제스님은 외물(外物)을 대할 때에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집어들었지, 애초부터 이리저리 궁리하여 선택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대로 손을 놀리는 것이 우뢰와 번개 같았읍니다. 그러니 어찌 자취나 이유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찾을 수 있었다면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이 떠나버린 지가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어찌 사량분별에 읽매여 선사들의 빼어난 기연〔峻機〕을 회롱하고 교묘한 말을 꾸며서 후배들을 부채질하여 유혹할 수 있겠읍니까? 더구나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주장을 떠받들도록 유혹하기까지 하겠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