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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정사
 
 
 
카페 게시글
선- 개론,심층고찰 스크랩 禪佛敎 공부 2
원명 원적 추천 0 조회 130 18.09.30 14: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禪佛敎 공부 2


禪語錄일일용이부지用而不知 날마다 쓰면서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원래 周易에서 나온 말인데 人間 누구나가 本來 가지고 있는 自己平常心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참된 本質이요 主體임을 알지 못하고 佛法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함을 指摘한 것이다.

 

: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 어떤 것이 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측백나무.

 

참으로 엉뚱하기 짝이 없다

達磨印度에서 中國으로 와서 전파傳播하려 한 佛法眞理가 무엇이냐는 形而上學的인 높고 높은 물음에 겨우 절 마당의 측백나무라고 對答을 하다니


趙州庭前柏樹子眞理到達하려면 論理로 따지는 相對的 知慧分別心을 버리고 日常生活을 이끄는 根源的인 마음, 平常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平常心이란 萬法根源인 때 묻지 않은 淸淨한 마음을 말한다.

 

봄에 새잎 나고 가을에 落葉 지는 宇宙自然의 섭리攝理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배고프면 밥 먹는 眞理야 말로 眞正佛法實踐이요 불도佛道의 현현이다.

庭前柏樹子는 이같은 눈앞의 現實直觀的으로 通察, 佛法根本體得하라는 가르침이다.

 

세발우거洗鉢盂去 밥그릇이나 씻어라!


趙州는 또 어느 날 한 學人이 찾아와 佛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哀怨하자 다음과 같이 

平常心이 바로 佛法임을 일깨워주었다.

 

조주 : 아침은 먹었는가?

학인 : , 먹었습니다.


조주 : 세발우거洗鉢盂去 그러면 밥그릇이나 씻어라

 

밥을 먹고 나서 밥그릇을 씻는 日常行爲(平常心)가 바로 實踐이다

밥을 먹었으니 무심히 밥그릇을 닦는 素朴하면서도 根源的平常心 속에는 어떠한 造作分別心도 없다.


세발우거洗鉢盂去라는 이 話頭意味하는 것은 自己라는 存在意識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발우鉢盂(승려들의 밥그릇)를 씻는 眞實平素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바로 無心이고 見性이다.


莊者는 가장 賤視되는 오줌과 똥 속에도 있다고 갈파喝破한 것과 같은 脈絡이다

밥그릇을 닦는 하찮은 일에도 도內在한다

趙州庭前柏樹子洗鉢盂去現實直視하라는 禪思想核心을 일깨운 간곡懇曲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는 어디로 돌아 갑니까?

: 아재청주我在靑州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작일령포삼作一領布杉 베적삼을 한 벌 해 입었는데

     중칠근重七斤 무게가 일곱 근 나갔다.


萬法歸一이라는 話頭는 선장禪匠 趙州宗心禪師와 한 중의 이러한 問答에서 나왔다

萬物의 뿌리는 하나(萬物一體)’라는 東亞細亞인들의 천명관天命觀을 잘 드러낸 話頭이다.


話頭近代 韓國佛敎 中興祖인 경허禪師19세 때 들었던 공안公案이기도 하다.

質問存在根源이 무엇이냐는 매우 哲學的이고 深奧疑問提起하고 있다.

 

'萬法'肯定. 差別. . 現象. 諸法實相. 방행防行絶對現實을 하나는 不正. 平等.

本體. 諸法無我. 파주把住의 일체공一切空을 뜻한다. 방행防行과 파주把住各各 肯定差別, 不正平等意味하는 禪學用語.


核心적삼일곱 근이다

베적삼은 누구의 것이든 그 옷감(재질)이나 외형에선 똑같다

그렇지만 體軀에 따라 裁斷하는데 드는 옷감은 다섯 근, 여섯 근, 일곱 근 등으로 각각 달라진다.


일곱本體와 구분된 現象, 하나에 비해 많은 것. 平等에 대한 差別을 나타낸다.

禪學에서는 이를 無分別(베적삼)分別(일곱 근). 

平等속의 差別. 差別속의 平等이라고 한다


그 긍극적인 指向點生死一如, 즉 모든 差別對立消滅이다

差別平等對立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空間

이것이 옷으로 보면 平等’, 무게로 보면 差別인 베적삼이다.


萬法歸一을 쉬운 예를 들어 說明하여 보자

家庭主婦가 보자기를 들고 장을 보러 간다

콩나물, 두부, , 가지, 등을 사니 각각의 비닐봉지에 넣어 준다.

主婦는 이 각각의 봉지들을 보자기에 묶어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主婦의 시장보따리는 겉으로만 보면 하나다

그러나 풀어헤치면 콩나물봉지, 두부봉지 등 여러 개다

이것이 바로 萬法이 하나고 하나가 萬法道理.

 

森羅萬象存在現象도 이와 같다

모든 것을 平等이라는 큰 보자기에로 싸버리면 높은 사람, 낮은 사람도 없고, 富者도 가난뱅이도 없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貴賤, 上下 등 무수한 相對的 差別이 마치 主婦의 장보따리 속 콩나물봉지, 두부봉지처럼 우글거리고 있다.


은 이같은 萬物一體 思想具體的 實踐方法으로 몰아 統一的 純粹經驗提示한다

바로 꽃을 볼 때에는 꽃이 되고 물고기를 볼 때는 물고기가 되는 自己對象渾然一體. 이것이 自身을 비워 對象과 하나가 되는 物我統一이다.

 

槪念論理拒否하고 對象 自體로 바로 들어가 그 內部에서 있는 그대로의 事物을 보고자 한다. 이것이 곧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것이다.


꽃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가 꽃이 되어 꽃처럼 비를 맞고 햇빛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꽃이 나에게 對話를 하고 나는 그 꽃의 모든 神秘와 기쁨. 괴로움을 알게 된다.

萬物은 한 根源이라는 觀點에 서면 生死對立이 있을 수 없다

人間 宿命 가운데 가장 치열한 難關生死 問題도 이렇게 한 마디로 끝내는 것이 이다.

 

萬法歸一을 다룬 趙州의 다른 禪問答을 살펴보자.

 

: 한 줄기 빛이 수십만 갈래로 갈라진다면 이 한 줄기 빛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 (趙州는 아무 말 없이 짚신 한 짝을 벗어 던진다)

 

質問은 역시 만법귀일萬法歸一과 같은 脈絡哲學的 問題

그러나 趙州의 답은 萬法歸一때보다 훨씬 더 當惑스럽다.

 

조주척혜趙州拓鞋라는 이 話頭는 짚신을 벋어 던진 데 焦點이 있다

質問者는 하나와 많은 것을 區分하고 오고 가는 것을 分別하는 잘못된 旣成論理的 思考에 빠져 있다. 質問者槪念論理要求하는 참된 실재實在와는 無關人間造作産物이다. 그래서 趙州는 그 따위 質問은 아무 意味도 없다고 對答한다

마치 짚신을 벋어 던진 것이 無意味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은 이러한 無意味속에서 意味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무는 유의 어머니가 된다

手段(直觀力)에 의해서만 파악把握할 수 있지 개념화槪念化로 묶는 制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짚신을 벗어 던진 意味


있는 그대로를 보아라

빛이 여러 갈래일 때는 여러 갈래로, 한 줄기 일 때에는 한 줄기로만 보면 된다

公利的 論理直觀妨害할 뿐이다


은 우리가 기존旣存觀念으로 事物을 바라보는 걸 막기 위해 奇行. 逆說. 矛盾. 난센스 등을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禪師使用하는 言語行動槪念性을 갖지 않는 一種의 부르짖음이며 感歎이다.


짚신도 두 짝이 아닌 한 짝에 주의해야 한다

봐라

하나(짚신 한 짝)가 어디서 비록 되었고, 또 하나가 어디로 가는지를

짚신이 떨어지는 곳(現實 속의 一介 地點. 數十萬 갈래의 빛)이 나 온 곳(趙州의 발. 빛이 온 곳)이 무슨 意味가 있단 말이냐. 짚신()은 그대로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네 質問觀念的이고 理論的일뿐인 헛소리가 아니냐

그의 不條理行動은 실제 있던 그대로의 世界를 보여주는 한 소식이다.


이러한 問題理解하는데는 知性이란 아무 쓸데가 없다

오직 새로운 제3의 눈,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禪的 方法으로서만 可能하다.

 

趙州語錄에는 萬法歸一問題를 다룬 問答3개나 나온다

또 하나의 問答은 이렇다.

 

: 모든 存在根源은 무엇 입니까.

: 용마루와 대들보, 서까래, 기둥이다.


: 저는 모르겠습니다.

: 두공枓栱이 차수叉手를 하고 있는데 자네가 모르고 있는 거야.

 

問答 역시 萬法根源萬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 라는 觀念에 사로잡힌 간택揀擇이 된다

趙州는 눈에 보이는 現實事物을 곧바로 提示 함으로서 이같은 揀擇의 딜레마를 脫出한다.

 

趙州는 기둥 위에서 대들보를 받쳐주는 보조 나무토막 두공枓栱(一名 玉露)이 가슴에 손을 모으고 경건敬虔禮法姿勢(叉手)로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다고 일깨워 준다

옥로는 대들보, 기둥과 함께 집을 지탱하는 萬法의 하나다

이처럼 差別相(기둥, 석가래. 두공)속에서 平等相()을 터득하는 것이 의 묘체妙諦라는 이야기다.

 

萬法은 공일 뿐이기에 그 絶對 가 바로 萬法根源이 된다

平等差別은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이 자리하는 곳이다

아니오’, 하나와 많은 것을 西洋的 二分法으로 兩斷하지 않고 자재롭게 넘나든다. 이는 東洋式 男女 愛情 表現그를 사랑하느냐고 묻을 때 내심은 이면서 겉으론 아니오를 답하는 것과도 相通한다.

 

조주석교趙州石橋 조주의 돌다리

 

: 오랫동안 趙州의 돌다리를 그리워했습니다만 막상 와서 보니 그저 통나무다리가 보일뿐입니다.

: 너는 다만 통나무다리를 보았을 뿐 아직도 趙州의 돌다리는 못 보고 있구나!


: 그 조주석교趙州石橋란 어떤 것입니까?

: 당나귀도 말도 건네준다.

 

趙州石橋라는 이 古佛 趙州은 사람은 물론 당나귀, 말까지를 包含한 일체 衆生濟度하고 解脫시키는 偉大道力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다시 말해 一體 衆生은 모두 佛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趙州禪門에 들어오면 누구나 解脫을 얻을 수 있고 成佛할 수 있다는 것이다.


衆生이 곧 부처라는 涅槃經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體衆生悉有佛性을 멋지게 說破趙州의 구순피선口脣皮禪이다. 이러한 涅槃經의 불성론佛性論萬民平等思想源泉이다. 禪學萬民平等 대신 絶對平等이라는 用語를 즐겨 使用한다.

 

强調하는 絶對平等共産主義式無條件的 平等이 아니다

누구나 佛性을 소유하고 있다는 側面에서 平等할 뿐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側面에서 平等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可能性은 똑같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깨우침이라는 過程을 통해서만 비로소 實現된다

그래서 깨우치면 부처, 못 깨우치면 凡夫라는 現象界差別性이 엄연히 存在하게 된다.


森羅萬象演出하는 現象界世俗的 現實은 거슬러 올라가면 本體라는 하나의 뿌리로 歸結된다. 그렇다고 現象界一考價値도 없는 虛像일 뿐이라고 無條件 否定하면서 絶代平等主張하는 것은 이 아니다. 다만 本體現象一體라는 原理만 깨달으면 現象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眞理收用할 수 있다는 것이 禪思想本質이다

 

이것이 바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이라는 雲門文偃禪師(864-949)話頭가 뜻하는 宇宙肯定이요, 現實肯定이다.


話頭  趙州石橋는 어떤 것이냐는 學僧의 두 번째 물음에 

과래過來 건너갔다 오너라. 過來 건너갔다 오너라

하고 對答한다.

 

過來 過來빨리 그 다리를 건너오너라는 애기다

잔소리 말고 공부(參禪修行)나 빨리하라는 질책叱責內包되어 있다.

 

조동종을 開昌한 동산양개와 조산본적선사가 開發조동오위라는 存在論이 있다.

本體客體關契說明조동오위론의 다섯 단계란 다음과 같다.

 

1) 정중편正中偏 : 現象에 의해 감추어진 本體

2) 편중정偏中正 : 本體接近

3) 정중래正中來 ; 現象界回向

4) 겸중지兼中至 : 煩惱와 보리의 造化

5) 겸중도兼中到 : 造化中心 到達


은 본체. 어둠()을 뜻하고 편現像, 밝음()을 뜻한다

이를 圓相의 그림으로는 각각 , , 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겸중지라는 단계段階本體를 확실히 깨달은 후 世俗으로 돌아와 먹을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운수급반시運水及搬柴日常生活具體的 實踐으로 펼치며 사는 解脫道人의 삶이다.

 

<진주보화화상>

진주보화화상은 하북성 일대를 떠돌아다니면서 行化를 펼쳤다

居處는 언제나 墓地였다. 生沒年代未詳이다.

 

반산진영盤山眞影 반산의 진짜 초상화

반산보적 禪師入寂에 앞서 學人들에게 自身의 진영眞影을 그려오라 했다

弟子들이 精誠을 다해 各自 사가師家肖像畵를 그려다 바쳤다

그러나 盤山은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肖像이 없다며 모두 퇴짜를 놓았다.


이때 首座 진주보화가 제가 스님 진짜 얼굴을 그리겠습니다.’하고 큰 소리를 치고 나왔다. 보화는 盤山앞에 나와 서더니 느닷없이 물구나무를 서서 한 바퀴를 빙 돌았다

그러자 盤山이 사나이야말로 내 眞影을 그렸다며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이 친구는 뒷날 미친 놈처럼 사람을 敎化하며 世上을 시끄럽게 할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어린애 장난 같기도 하고 미친 사람의 狂氣 發作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風光의 기초基礎를 이루는 주춧돌이다

속은 멀쩡하면서도 겉으로만 미친척하는 풍광風狂, 양광佯狂, 풍전風顚達磨로부터 시작된 의 저류低流이며 本質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卓越精神에는 다소나마 狂氣가 섞여 있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어쨌든 보화는 古今에 내놓아 손색이 없는 禪門 風光最高峰이다.

 

반산진영盤山眞影이라는 話頭禪思想의 바탕을 이루는 風狂哲學과 사자상승의 心印直指逸話.


盤山要求한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眞影이란 있을 수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난 畵家라도 사람의 얼굴을 솜털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살아 있는 生生模襲으로 그릴 순 없다. 따라서 반산이 바란 것은 제자들이 繼承師家家風. 정법안장 禪思想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 보이라는 뜻이었다.

 

보화의 물구나무는 스님의 境界와 견지堅持를 이렇게 내 것으로 해버렸습니다.’라는 行動言語라 할 수 있다.

筆舌로써 說明할 수 없는 제일의第一義(佛法)表現하고자 할 때 이처럼 곧장 狂氣어린 行動言語를 구사한다.

 

이는 旣存固定觀念과 패러다임을 타파打破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臨濟境遇 人間槪念的 認識傳統的 權威를 두들겨 부수기 위해 一生동안 學人들에게 몽둥이질과 고함질을 해댔다.

 

雪峰義存禪師(822-908)와 한 중이 주고받은 거량擧揚을 적어본다

 

: 옛날 승유가 왜 지공화상의 肖像畵를 그릴 수가 없었습니까?

: 붓끝이 종이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유는 어느 날 지공의 肖像畵를 그리라는 무제의 御命을 받았다

그러나 마음이 영 安定 되질 않아 어디에 붓을 대야 할지 가늠이 안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지공화상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헤집고 열어 제치니 11觀音菩薩이 나왔다. 이렇게 그리면 된다고 일렀으나 승유는 지공의 얼굴이 너무나도 자비慈悲롭고 수려秀麗해 끝내 그 모습을 그려낼 수 없었다.


결국 見性道人의 얼굴

佛法이란 具體的 形象이 없기 때문에 그 肖像畵를 그릴 수 없다는 얘기다.

 

어떤 學人趙州禪師肖像畵를 그렸다

趙州肖像畵를 보더니 

만약 나를 닮았다면 나를 때려 죽여라. 만일 닮지 않았다면 불태워 버려라

하고 힐란詰亂했다.


아주 극단적極端的이고 단호斷乎하다

弟子가 스승의 견지堅持를 참으로 자신의 것으로 消化해 가지고 있다면 스승은 죽어도 좋다. 반대로 스승의 人格에 미치지 못한 弟子라면 죽여 버려야 한다

이게 바로 趙州의 호통 속에 담겨있는 격렬激烈한 뜻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 화상께서 入寂하신 후 어떤 사람이 네 스승의 肖像畵를 그릴 수 있냐고 물어오면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 그저 그것 그대로다라고만 대답해라.

 

조동종 개산조인 동산양개와 그의 스승 운암담성선사(780-841)問答이다.

동산은 스승의 대답을 理解하지 못한 채 계속 疑問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울을 건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순간 하고 그 뜻을 깨우치고 다음의 悟道頌을 읊었다

 

과수게過水偈

절기종타멱切忌從他覓 절대로 남에게 구하지 말라

초초여아수迢迢與我殊 멀고멀어 나와는 성글어 진다.


아금독자왕我今獨自往 내 이제 홀로 가노니

처처득봉거處處得逢渠 곳곳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


거금정시아渠今精是我 나는 바로 지금의 이지만

아금불시거我今不是渠 나는 이제는 가 아니다.


응수빙마회應須憑麽會 이렇게 깨달아 알아야

방득계여여方得契如如 여여한 진리에 계합하리라.

 

동산의 이 開悟詩歷代로 손꼽혀온 有名禪詩의 하나다

偈頌核心은 셋째구절의

主體的 自己(진아眞我)를 말하고 는 그림자인 허깨비의

자신의 實體發見한 견성見性을 아주 簡明하게 드러냈다.

 

禪思想創意性 尊重自律性 力說은 오늘날에도 아무리 强調해도 지나침이 없는 價値德目이다. 이것이 바로 禪問答東門西答의 맹랑한 옛 이야기로만 치부置簿해 버릴 수 없는 소이所以이다.

 

이 거듭 强調하는 獨創性自律性의 예를 잠시 살펴보자.


潙仰宗 開山祖潙山靈祐의 사제師弟 장경대안선사(793-883)는 다음과 같은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내가 潙山에 기거 한지 30

潙山의 밥을 먹고 潙山에 똥을 누웠지만 潙山만은 배우지 않았다.”

 

덕산선감선사德山宣鑑禪師弟子이지만 조동종 개산조 동산양개선사 밑에서 오랫동안 

寄居했던 암두전할도 역시 獨創性强調 했다.


나는 동산을 參禮했지만 동산을 따르지 아니하며

德山을 이어받았으나, 德山을 따르지 아니한다

그러나 德山和尙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은 모방模倣絶對 禁忌視 한다

성불成佛이라는 一大事도 오직 自律性 위에서만 可能하다고 斷言한다

그래서 禪宗은 스승이 제자에게 認可할 때 獨創性이 없는 박식博識한 지해知解나 

模倣 따위는 ‘0점 처리를 해버린다.

 

사가師家弟子에게 法統을 넘겨줄 때 學人이 스승보다 實力이 높고 獨自的 創意性을 

갖추지 않으면 絶對 認可하지 않는 것이 철저한 不文律禪林 傳統이다.

 

話頭 반산진영盤山眞影이 전해 주는 한 소식은 바로 이러한 사자상승師資相承强調. 弟子信賴를 바탕으로 스승의 心印을 이어 받는다


信賴確實經驗을 통해 얻는 것이라면 弟子는 언제나 스승의 精神(메시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무슨 肖像畵必要하고 說明必要하단 말인가

弟子가 곧 스승의 肖像畵이며 스승의 정법안장이 아니겠는가

弟子는 스승의 禪思想 自體인 것이다.


아버지를 꼭 빼닮은 아들의 경우 굳이 病院에 가서 血液型 檢査를 해 親子 確認을 할 必要가 없다.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이야 말로 어떤 畵家가 그린 아버지의 肖像畵 보다도 正確하게 잘 그려진 肖像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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