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원 문학, 글 안의 행복. 2
돌아보니 70년의 세월이 내 손안에 쥐어지네
- 행복한 시 낭송이라 하지만 나는 한 번도 행복하지는 못했다
문학에 뜻을 두고, 그 좋다던 교사의 자리도 박차고 나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철딱서니 없는 짓거리였다.
당시 깡촌이라고 하는 임계면 골지리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집안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강릉에다 집을 짓고 학교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버님은 선각자셨다. 아이들이 고생할까 봐 어떻게든 교육을 시키려고 했고 또 그렇게 하여 동생들은 모두 학교를 다녔고 막내 여동생은 결혼도 잘하여 지금 미국에서 자식들 키우며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인생살이의 실패자임에 틀림없다. 아버님은 나를 교육대학에 보내 교직에 근무하게 하였다. 문학이 좋으면 그냥 교직에 있으면서 좋아하는 문학을 하면 되는 것이지, 사표까지 내고 나오다니 … 생활에 아주 무책임한 짓거리였다. 남들은 다들 교직에 종사하면서 취미생활을 하였고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취미 활동을 하며 즐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문학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팔자가 사나워서 그런지 결혼 생활은 늘 분란이 일어났고 아이들은 모두 말썽만 피워서 내내 고충 속에 살았다. 아내는 집 나간 아이를 찾아다니느라고 전국으로 밤낮 승용차를 몰고 돌아다녔으니 그 비용은 또한 얼마였을까.
생활이 풍족해서 잘 시는 것이 성공이라면 나는 아주 철저한 실패자에 속한다. 아내는 암으로 팔팔한 나이 56세에 세상을 등졌고 나는 58세에 홀아비가 되었다. 딸 아이는 30세에 아내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으니 적막하고 고독한 팔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어찌 되었든, 교직을 떠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커피전문점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종종 문예창작반 강의를 나갔다. 제일 처음 강의를 한 곳은 강릉예총에서 실시하는 문예창작반이었다. 당시 엄창섭 선생(당시 관동대학교 교수)이 예총 회장으로 계셨다. 지금 강릉의 많은 시인들과 수필가는 그 당시 문예창작반에 오셨던 분들이다. 이 분들 중에 지금도 막역한 교류를 하는 분들은 정경헌 시인과 박순옥 시인이다.
그 후 강릉여성문예회관에서 실시하는 문예창작반 강사를 하였다. 아마 2001년 쯤 된 것 같았다. 그 전에 심재교 시인께서 맡아 하시다가 수강생 중에 누군가 나를 추천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는 자세한 내역도 모른 채 그곳에서 문학 강의를 하였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강의를 하고 강사료도 얼마 되지 않으니 크게 생활에 보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배정순 시인과 채정미 시인, 유지숙시인, 현재 강원문인협회 사무처장을 하는 이연희 시인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당시 배정순 시인과 채정미 시인은 문재가 뛰어났다. 유지숙시인은 상대방에대한배려심이 컸다. 이연희 시인은 회원들 중에 미모가 돋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 강의가 신통치 않아 그만 두었나 하는 생각이 그 때 들었다. 나중에 보니 정선에 문학기행을 갔을 때에 찍은 사진에도 이연희 시인이 동행을 한 것을 알았다. 문예창작반에 나왔을 때에는 열성적이었는 데 나는 우둔하여 미처 생각지 못핬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