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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전거
해가시선ㆍ21
아버지의 자전거
발행 | 2017. 9. 20.
지은이 | 정순란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5918 강원도 삼척시 오십천로 301-30. 101-1503
전화 033-573-4613 ․ 010-3341-3327
e-mail: 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29-0 (03810)
ⓒ2017 정순란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책값은 표지 뒷면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강원도, 강원문화재단
후원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당신이 평창입니다 lt's you, PyeongChang
Pre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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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자전거는 유일한 아버지의
교통수단이며 삶의 동반자였다
나의 유년 시절엔
새벽 다섯 시면 중고 짐자전거 뒷 칸에는
무거운 곡식을 (쌀, 고추 잡곡 등)싣고
한재 넘어 비포장 도로인
근덕장으로 향하셨다
여든 다섯 연세에도 페달을 밟으시고
삼척 오일장마다 구경 다니면서
막걸리를 즐겨 드셨던 아버지
당신이 정말 그립습니다.
2017. 초가을에
정 순 란
차례
머리말 | 11
제1편
가을의 노래
한재에서・1 | 18
한재에서・2 | 20
오분리 연가・1 | 21
오분리 연가・2 | 22
오십천・1 | 23
오십천・2 | 24
죽서루 | 25
천은사 | 26
번개시장 | 28
가을, 부석사 | 30
삼척역에서 | 31
도계역 | 32
4월 맹방 | 33
벚꽃의 귀가 | 34
슬픔의 질량 | 35
가을 손님 | 36
가을의 노래 | 37
안고 싶다, 너를 | 38
바람난 봄날 | 39
너 없는 바다에서 | 40
제2편
아버지의 향수
42 | 가족
43 | 언제나 사랑 안에서
44 | 우리집 四季
46 | 홍고추를 말리는 동안
47 | 사랑이 꽃처럼 아픈 날
48 | 나에게 당신은
49 | 불청객
50 | 투쟁 앞에서
52 | 담배
53 | 네가 꿈으로 오는 날엔
54 | 어머니 마음
55 | 아버지의 자전거
56 | 아버지의 향수
58 | 여름 계곡
59 | 담배의 죽음
60 | 중환자실
62 | 부음訃音
63 | 통증
64 | 가면부부
66 | 운수 좋은 날
제3편
홀로 가는 길
친구 같은 오월 | 70
오월, 친구야 | 71
초등학교 동창회 날 | 72
그대가 내 친구라서 | 74
조각공원 | 76
카페에서 | 77
물방울 같은 여자 | 78
재즈바에 앉아 | 79
인사동 거리에서 | 80
여름날 저녁 | 82
12월 | 84
홀로 가는 길 | 85
열정 | 86
그리운 것들 | 87
춤추는 버스 안 | 88
파도처럼 흔들리고 싶다 | 89
가을 속으로 떠난 하루 | 91
잠깨는 봄 | 92
희망을 노래하는 봄 | 93
별명 | 94
봄꽃에 물든 오후 | 95
제4편
흔적
98 | 꽃들의 웃음소리
99 | 태백산
100 | 맹방 벚꽃길
101 | 진달래
102 | 벚꽃나무 아래서
103 | 아찔한 봄의 첫 키스
104 | 팽목항의 울음소리
105 | 장마
106 | 흔적
107 | 여름바다 작은 음악회
108 | 용추폭포 가는 길
109 | 구룡골
110 | 억새에 묻힐까 단풍에 물들까
111 | 갈대가 되어
112 | 칼국수
113 | 가을 오후
114 | 가을은 아픔이더라
115 | 폭설
116 | 검은 연탄
118 | 사내 같은 그 여자
120 | 파문
122 | 겨울축제 평창
124 | 해설⋅정일남
향토애 시학과 서정의 품위
제1편 / 가을의 노래
한재에서*・1
거미줄처럼 얽힌
삶에서 잠시 벗어나
구겨진 나의 마음을
담아낸 한재에 올라
갈색 추억을 노래하네
봄을 낚은 밤바다와
너의 숨겨진 상처를
다 비치는 소줏잔을 기울이며
짧은 입맞춤 하네
바람이 거칠고
바다가 시려도
버거운 삶 짊어진
도시에서 온 시골 친구는
빛도 어둠도
슬픈 추억으로 새기며
말로는 다할 수 없었던 언어를
달빛에 널어 말리며
마약 같은 슬픔으로
몸의 중심을 잃었네
봄바람 사이로
내 몸을 잠그는 순간
옹이처럼 숨어있던 이야기는
고구마 줄기 되어
다시 세월 속으로 걸어가네
내가 밀어낸 시간 밖에서
너와 앉았던 자리 쓸어내며
막막한 울음으로 채워진 한재에서
눈부신 5월조차 서러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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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길
한재에서・2
시원한 바다의 실감을 맛본다
인생의 결승점은
꼴지도 없는 한재에서
무거움도 끌어안고
웃고 있는 여름 햇살
유년의 내가
흘렸던 사연이 이곳에 있었구나 하고
타버린 붉은 열매의 기억을
오랫동안 헤매었던 시간 내려놓고
너의 바람을 맞는다
눈물이 수십 층의
구름으로 쌓일 때까지
아직 나는 너를 잊지 못했구나
오늘도
그리운 이름과 숨바꼭질 한다
오분리 연가・1
흙먼지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던 길목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놓고
시간은 선풍기 바람 되어
묵은 그리움으로 흔들린다
평화롭던 마을에
태풍 루사가 밀려오던 날
강풍과 맞설 수 없어서
온 몸으로 우시던 아버지의 뒷모습
첫사랑 보다 더
애절한 실핏줄로
소리 내어 불러본다
어 ․ 머 ․ 니
금빛 향수가 살아있는 가을이면
어머니의 사랑이
상추 잎 같은 온정의 눈물로
내 좁은 뜰 안으로 보듬는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곳
길가에 피어난 꽃송이 숫자만큼
오분리에 대한 그리움 더 심해진다
오분리 연가・2
잡초처럼 쓸쓸해진 어르신들이
제 빛을 잃은 낙엽으로 속삭이고
아버지 어머니가 젊은 시절
걸었던 길이 자꾸만 떠올라
애꿎은 마른 땅만 한참 보다가
미련한 바보처럼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금빛 향수가 살아있는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사랑이
상추 잎 같은 온정의 눈물로
내 좁은 뜰 안을 보듬는데
오분리 사람들은
떠나간 이를 서로 그리워하며
수두자국처럼 얼굴에 꽃주름 지면서
서글픔을 꾹꾹 쟁여 넣고
시치미를 뚝 뗀다
해가 저물고 가로등이 켜지자
산책하던 습관으로
어둠이 내린 작은 다리를 건너다
지난날 쓰라린 기억이 더 이상덧나지 않았으면…
바람과 구름이 머물던 골목길은
내 귀를 간질이며 속살댄다
총총한 별빛으로 채워진 오분리
언젠가 또 이곳을 찾아오겠지
오십천*・1
한바탕 퍼부은 소나기
어둠의 머리칼로
내 속을 잔뜩 헤집어 놓고
삽시간 오십천을 덮친다
종일 들썩이던 물줄기
초록 멀미로 마음 흔들어
젖은 빨래처럼 궁색해지는
남은 사랑에
알 수 없는 눈물만 고인다
한동안 오십천을 바라보다
내 안에서 부는 바람 어쩌지 못해
수채화 마냥 물들고 끊임없는
강물소리에 마음 빼앗긴다
제법 많은 비가 쏟아진 오후
본연의 색깔 한껏 드러내며
추억의 건반 위 잠드는 장마
풀잎은 손 흔들어
여름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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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노곡, 신기, 미로면을 거쳐 삼척시내를 지나 흐르는 강
오십천・2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은
아침의 얼굴
물밑에 잦아드는 아름다운 소리는
내 맥박을 뛰게 한다
오십천을 눈으로 당기면
햇살 같은 미소로
하나씩 벗겨지는 그대의 옷자락
간혹 스치는 옷자락이
나를 흔들지 않았다면
고요가 주는 낯설음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늘 빗물에 취해
둑도 없이 흐르는 바람은
여름날 아픈 기억들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추억도 풍경도 혹독한 시련도
자연의 색으로 다 품어주는 그리움의 길목
숨막히도록 아름다워
낮은 탄성을 내지른다
죽서루*
안개 속 굽이굽이 떠오르는
하얀 목련
살아온 세월만큼 울었다
강물 넘어온 실바람
그대 사랑 얼비치면
오십천 역사 빚어낸
파스텔로 그린 풍경화
절벽 밑 홀로 핀 야생화는
나뭇가지 시름 풀고
봄날 소의 하품처럼 순박한
강물에 취한 내 사랑아
외로움 달래 눈물 시로 씻고
얼어붙었던 가슴 열리면
그대 아카시아 향기처럼 그윽하고
내 사랑 키워주던 가파른 언덕길
서둘러 마당 귀 나갈 적에
대숲 웃음소리
그대 사랑처럼 흔들린다
애절함으로 피는
한 무더기 그리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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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누각(보물 제231호)
천은사*
길을 오른다
두타산 아래 자리를 지켜온 천은사
곳곳에 나오는 약수터를 지나
오십년지기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들뜬 기분
육화전, 삼성각, 영월루, 극락보전
각각의 건물이 아름다운 자태로
역할 분담을 다한다
일주문에 들어서서
파란 가을 하늘과 벗하니
동안거사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사당이 담장 너머로 보인다
한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바람소리 새소리 벗삼아
사문에 꽂혀 넋을 놓고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본다
누군가 소원을 빌며
열심히 쌓아올린 작은 돌탑들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
동안 이승휴도 이곳에서 소원을 빌었겠지
단군을 한국사에 정착시킨
사상가이고 정치가이며
또한 문장가인
동안 이승휴 선생이 머물렀던 천은사
다람쥐 한 마리가
바위 위로 오른다
오래된 고목들로 둘러싸인 풍경은
조용하고 아득하여 잠시
머물다 가는 저녁노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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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에 소재한 사찰
번개시장*
어딜 가도 새벽시장 풍경은
음악처럼 행복한 하루가 열린다
번개시장도 예외는 아닌 듯 싶다
안개의 품에 빨려들어간 사물들은
달래며 냉이의 푸른 잎과
이지가지 농수산물을 만날 수 있다
생선전 채소전 과일전 등을 두루
구경하다 보면 시골 인심이 분위기를 한껏 반긴다
겉보다 속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젖은 행주처럼 조그맣게 쭈그리고 앉아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번개처럼 깜박인다
갓 시집오던 해 시부모님과 같이
지은 채소를 이고 이른 아침
번개시장으로 나가면
반나절 지나서야 수고가 밴
하루가 끝났던 어머님의 사계절
꽃잎 한 장
제대로 쓰지 못하시고
벌거벗은 외로움으로
떠나야만 했던 어머님을 생각하면
잊어버렸던, 잊고 살았던 삶에
그리움 가슴 아린다
좌판에선 갓 잡아온 생선이
쉼 없이 조잘거리며
동해바다의 싱싱함이
광복군의 투사처럼
귀청 따갑도록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상인들의 잦은 노래 소리가 연기되어
시장 구석구석을 채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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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시 사직동 삼척역 맞은편에 위치함.
가을, 부석사*
노란 은행잎은 가을 산행의 쉼표다
손에 손을 잡고
노오란 천국을 거닐다 보면
그곳엔 낭만이 흐르고
인정이 넘친다
지친 여행객을 품어주는
은행나무가 옷을 벗고
도란도란 속닥속닥
휴식을 위한 연인들의 미소 또한 정겹다
낙엽보다 추억이 더 많이 쌓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을바람에
샛노란 은행잎 떨어지자
아직 아물지 않은 지난날 상처에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게 된다
부챗살처럼 예쁜 잎들이 천지사방
아름다움으로 피어나
눈에 익은 영화와 같은 일들이
노크도 없이 무작정
위태위태하게 심장에 매달려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네
자연의 소리와 함께한 반나절
은행나무사이로 걸린 눈부신 노을
굴비마냥 자꾸만 쳐다보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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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위치
삼척역에서*
새들도 여권 없이
해외로 넘나든다는데
나도 차표 없이 열차 한 구석에 스윽 기댄다
시간은 기억 속에 내려앉아
작은 휴식을 선물하고
긴 봄볕으로 찍혀와
애틋한 그리움 한 토막
피리소리 되어 흔들린다
행선지도 없이 무작정 떠났던 시간들
봄바람에 온 몸을 풀어놓고
뱀 같은 기차는 이별을 삼키며
미끄러져 간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고통의 소리를 감싸 안고
오늘 나의 여행 친구가
내 삶을 물들이고
마음이 열리듯
눈물샘도 열린다, 삼척역에는
사랑도 이별도 추억도 멈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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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삼척시 사직 번개시장 맞은편. 삼척선의 종착역
도계역*
까만 어둠으로 끌어안은
대합실의 지친 얼굴들
담뱃갑을 비워내고 낯설지 않는
이별의 슬픔마저 토해내는 소리는
쉴 새 없이 어딘가를 향한다
기억의 꼭지들은 하나같이 여물어
스스로를 단죄하듯 버티어 가지만
두려움으로 걸어가는 시간 속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만 느껴지던 유년 시절
4월의 봄비는 희미한 기억을
눈앞으로 끌어당겨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느낀다
도계장날이면
어머니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짐이 얹혀져
온통 땀으로 절여진
자비롭고 잔인한 여름날
행선지도
목적지도 밝히지 않는
세월의 흔적을 쫓아
모진 기다림은
꽉 잡았던 손을 놓는다
--------------------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 위치한 영동선의 철도역
4월 맹방*
햇살 한 잎
꽃향기 한 모금
봄과 살아 움직인다
정성껏 가꾼 문화의 향기 속
천진한 아이들의 몸짓은
앙증맞게 브이를 하며 웃는다
벚꽃 사이로 떨어진
꽃잎이 하늘로 올라가
농부를 닮은 씨앗을
흠뻑 뿌려주면 참 좋겠다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것들은
흐린 날에도 지친 기색 없이
친절한 스튜어디스처럼 인사한다
간간히 흘러나오는
구성진 노랫소리에
바람도 구름도
옛사랑을 불러오니
만나는 꽃잎마다
내 귀를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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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삼척로 유채밭 일대
벚꽃의 귀가
발가벗고 뛰노는
너의 하루는 꽃가루로
분홍빛 되지만
나는 너를 매일
배가 봉긋하도록 비벼 먹는다
느긋한 한 끼의 식사
친구마냥 격이 없이 많이 놀았다
반나절 꽃 속에 숨어
푸른하늘을 부르니
햇살에 감전된 벚꽃이
한없이 후덕해 보이더니
툭 터진 웃음으로
바닥에 떨어진다
새로운 입맛으로
다시 일어서는 꽃의 귀가
웃음꽃 덩실덩실
너와 더불어 요동치던 날들도
잔잔한 강물이 되고
벚꽃의 그리움
우리 사랑을 하루 더 키운다
바퀴소리 요란한
들판을 내달리며
소식 없이 가버린
벚꽃 속 이별이 아쉽다
슬픔의 질량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남은 꿈들을 하나씩 버리는 일과
입 안에 약을 털어 넣는 일이다
추운 겨울
담장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장미는
몸과 마음을 수혈하기도 한다
오래 묻어 두었던 속울음은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수많은 말들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왜 이토록 생경한지
3D영화같이
숨조차 쉴 수 없다
가끔은
가까운 사람 이름도 증발하여
한참을 더듬거려야 떠 오를 땐
촉각 잃은 곤충마냥
헤매야 한다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진다
나의 내면에
곰삭아 있는 공포를 몰아내고
묵은 입맛이
계절 앓이를 한다
가을 손님
가을을 밟고 가는 길은 숨이 차다
전류처럼 숨이 차다, 비틀비틀
밤마다 스텝을 밟으며 걷는다
연애처럼 멈출 수 없는
사랑처럼 얼룩을 남기면서
세상소리와 함께 어울려 걷는다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는 것 같다
걷고 또 걷는 길은
무수한 사연들과
숱한 슬픔을 견디며
한시도 정지돼 있지 않는
미끄럼틀로 뭉개진다
매일 밤 가을 낙엽과 걷는 길은
흔적이 소멸하는 야경일 뿐이다
가을의 노래
설악 단풍의 주연은 붉음이다
원색 하나로만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새삼 깨닫고
단풍이 속절없이 붉기만 하다면
얼마나 숨 막힐까
단풍은 사라질 것들이 남기고 간
내 입술의 색감이다
더러는 나뭇잎이 붉게 타다가
낙엽 되어 떨어지는 것은
수컷의 욕망이었나
아픔으로 넘어졌던 마음이
가끔 멈춰서야
안보이던 사랑도
애절한 슬픔도
五音으로 봐야 아름답다
가을의 비밀인 사랑은
젊음이 예쁠까
단풍이 예쁠까
첫사랑에 부족한 나였기에
저녁놀 타는 너에게
가만히 묻고 싶다
안고 싶다, 너를
해가 저물고 가로등이 켜지자
바닷바람은 어린아이 숨결처럼
부드러웠다
바위를 핥는 하얀 파도
내 가슴을 달뜨게 하는데
넓은 바다 한번 안고 싶었다
도시에선 귀를 열어도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파도소리…
四季가 모두 제 멋을 가진 바다는
봄날의 냉이 꽃처럼 아름답게 파도치는데
그 사람과 파도타기를 하고 싶었다
붉은 사랑 익어 갈 때까지
바다는 푸른 속삭임으로
반환점을 돌아올 그 사람을
다시 기다리라고 말한다
지나쳐온 길들은
무리지어 하나 둘
슬그머니 걸음을 늦춘다
파도소리가 차가워진
내 심장을 열고 들어 온다
하나의 맑은 사랑이
하얀 입맞춤으로 다정히 내려앉는다
너만이 나를 채울 수 있었다
바람난 봄날
바람이 그림을 그린다
오분리 한재에서
종종 청량제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며
언어의 차분한 질서는 무시하고
뒤죽박죽 이야기꽃 피우는
초등학교 옛 동무들
한바탕 물감통을 흔들어
빛깔대로 하늘을 그리며 뛰어논다
바닷속 사랑 이야기와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소곤대던
옛 친구와 흘렀던 사연이
어제의 색깔로 채색되어
한발한발 눈 앞으로
끌어당겨 붉게 물든다
한낮의 바다는
거대한 푸름이 춤추고
뜨거운 바람의 포옹과
친구들의 혀끝은
싱싱한 바닷속을 유영한다
이렇게 좋은날, 떠나지 않고도
하늘의 열매를 줍는다
바람이 놀다간
오분리 한재 정자에 앉아서
꼼꼼한 화장으로 주름을 감추려는
웃음이 하루치 주름을 더 그어 놓는다
너 없는 바다에서
여물지 않는 표피에 갇혀
동강난 삶을 하나씩 이어가는
팔월의 갈증은 목이 마르다
세상의 고달팠던 소리
듣고 싶지 않아
파도는 오늘도 숨바꼭질 한다
조심스레 사랑을 풀어
헤어짐보다 더 두려운
달빛과, 바닷바람, 파도소리는
이별의 슬픔을 뒤척인다
돛단배마냥 뒤집혀 버린 흔적은
한여름 빙수 같은
바다를 가슴에 안고
오늘도 그 아픔조차
달빛에 메달아 잊기로 한다
혀끝에서 떨어진 너의 이름
다시 주워 담으면
뜨거웠던 기억의 문이 열린다
보고 싶다
느린 걸음으로 오던 너를
제2편 / 아버지의 향수
가족
밤새 토닥거리며
창문 두드리던 빗소리가
만물을 깨우는 아침에
사람 냄새 가득한 요즘
가족의 정이 샘물처럼 넘쳐흐른다
둥근 해처럼 듬직한 아들 내외와
옹알이 하는 손주 녀석
식탁에선 소박한 반찬이 즐비하고
숟가락 위로 가시를 발라낸
생선이 듬뿍 올라가면
가족들의 목소리가 우박처럼 쏟아진다
때론, 모자람을 채워가며
서로 염려하며
서로 배려하며
보듬어 안으면서
내 몸의 수분이
모두 빼앗긴다 해도
그대들과 함께 있음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작은 생명 하나의 온기가
지친 가장의 날개를 쉬게 하고
힘겨운 삶에 풍성한 행복을 낚아 올린다
언제나 사랑 안에서
― 손주 첫돌
점 하나로 시작해서
태어난 생명의 신비감은
꼬물꼬물 알몸으로 춤을 추다
매순간 허우적거리는 속삭임
간간히 그리움 되어 너에게로 가는 길
착한 척, 순수한 척, 거절하는 척
너의 몸 녹이는 해동의 시간이
바닥날 때까지 낮게 엎드려
나의 보물로 너를 껴안을 것이다
노을만큼 스마트폰 속의 동영상은
매일매일 콘서트를 열어주지만
가끔은 네가 뿌려놓고 간 시간을
꽃바람에 소중히 줍기도 한단다
한 발씩 다가오는 어색한 너의 발걸음
온 몸에 풀물이 들도록 사랑한다
내가 너의 지붕이 되어 줄게
우리집 四季
봄이 오면
흩어진 정원의 모습은
유성물감으로 들락이고
연산홍과 봉숭아는
예쁜 꽃등 달고
세 살배기 조카 키보다
앙증맞게 서 있다
여름 볕에 달아오른
화분 속의 붉은 고추는
정겨운 모습으로 의욕이 넘쳐 보이고
별과 섞이는 밤이면
도회지에서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
오십천을 감싸면서 신비한 자연탐험
반딧불이 축제를 벌인다
슬그머니 내려앉은 가을은
바람도 다 못 쓸고 간 낙엽에
현기증이 나는지
휴대폰 액정화면으로
꽃망울 담아
몸 굽혀 왕족처럼 나를 반긴다
싸아한 겨울 향기는
옷 벗은 카키색 잎들에게 푸념을 하고
뒷마당엔 활처럼 휘어진
자전거 바퀴가 햇살에 감기어
익숙한 손놀림에 퉁탕거리다
누군가의 장난치는 소리로
행복을 전한다
그리고 자박자박 사계절 추억이 쌓인다
홍고추를 말리는 동안
앞마당에서
홍고추를 말리는 동안
투박하고 마디 굵은 손과 가까워진다
바지런한 그의 손놀림에
해맑은 웃음과 찡그린 모습이
뒤범벅 되어 보지만, 세월은
이십대의 풋풋함을 걷어간 대신
오십대의 넉넉함을 심어 준다
모자람을 채워가며
서로 염려하고
서로 배려하며
보듬고 안아온 날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주름 사이로 빠르게 굽어진
당신의 손마디가 나를 슬프게 한다
늘어난 주름 만큼
당신과 나의 사랑도
홍고추처럼 쭈글쭈글 깊어만 가고
두둑한 뱃살에 탁한 눈빛은
가을볕 아래서 빨갛게
나의 몸을 태운다
홍고추를 말리는 동안
손끝으로 전달되는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함을 준다
사랑이 꽃처럼 아픈 날
밤새 따라오던 달은 빛을 잃고
얼음 같은 냉기가 병실을 무겁게 누른다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여자는 가늘게 떨고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또 꼬리를 문다
아침드라마 같은 일들이
쓰나미 바람같이 지나가고
며칠 사이 주름이 곱절로 늘어난
사내의 얼굴은
가을처럼 물들어
바람 속 풀잎처럼 뒤척이다
구겨진 신문지처럼 일그러진다
사흘째 사내의 짜증은 연기처럼
병실 구석구석을 채운다
어쩜 예고없이 찾아든 기압골이
사내의 신경세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시술 이후, 사내의 몸은 자꾸만 밑으로 처지면서
링거줄이 철재 침대 위에 길게 달려 있다
똑, 똑, 노크소리가
해바라기처럼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누워있던 사내는
삐에로처럼 반갑게 웃는다, 그러자
지문처럼 남아 있던 아픈 상처는
천둥과 번개를 친다
사랑이 꽃처럼 아픈 날
나에게 당신은
끊임없는 시작이고
아파할 수 없는 인연으로 살아갑니다
부서질 듯 위태로운 삶도
서글픔을 참아 넘길 때마다
함께하는 당신, 고맙습니다
긴 시간 땀에 젖고
외로움에 흔들리며 걸었을
당신의 내공은 바람에
흔들리며 잘 지켜집니다
내 지독한 통증이 당신을
희망, 행복, 사랑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지루한 화면들이 반복되고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그대는
생명의 촛불 되어
참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성급한 가을꽃들은 바람에
멍들어 떨어지고
잠든 당신 얼굴이
나무 등걸처럼 주름져 있습니다
나에게 당신은
나날이 변하는 아름다운 병풍입니다
불청객
― 갱년기
덥고 습한 공기가
열어둔 창문을 통해 들어와
얼굴에 닿는다
숨이 막힌다
외부에서 내부를 달리는
피부는 후텁지근하게 뜨거워져
몸의 템포를 조금 늦추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자의 울림은
누구 하나 듣는 이가 없다지
나를 던진 음표 하나
쉰 목소리의 높이가
몇 계단 뛰어 오르다가
탁하게 갈라진다
우울한 아침
하나씩 벗겨지는 옷들
내 몸 심상치 않음을
그를 배웅하고 나서야
텅 빈 염전처럼 쓸쓸해졌다
투쟁 앞에서
헬멧 쓴 우체부 아저씨는 오전10시
성남동 2길 136 우편함에 우편물을 넣고
언덕 아래로 돌아간다
설상가상으로 배달된 미납요금
독촉장의 숫자들은 온통 개미떼처럼
줄 지어 종이 위를 기어 다니다
혼자 시치미를 뚝 뗀다
그리고 안부를 묻듯
몇 달째 홀연히 도착되어
부동자세로 침묵한다
질경이처럼 짓눌려온 독촉장은
한바탕 폭풍을 몰고 와
세월의 무게를 잡지 못하고
맨바닥에 엎드려 가뿐 숨을 몰아쉰다
사슴처럼 마음 착한 아들이 저지른
비참한 현실의 휴대폰 요금
내 안에서
어찌 너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구겨진 슬픔은 미움 한 자락되어
눈물 툭 떨구자, 명치 끝이 아파온다
날씨보다 더 알 수 없는 아들은
노란 가을의 유혹을 후회하고
내 안의
모든 숨구멍이 서늘한 공기로
힘껏 빨아들였다 내 뿜는다
아름다운 이 가을에
뒤틀린 너의 생각을
가끔은 순대처럼 푹 삶아버리고 싶다
담배
나는 몰랐다
베란다에 앉아
시름없이 빨아대는
아버지의 담배를
손가락 끝마디까지
타올랐던 불꽃
꽁초 하나까지도
끝까지 빨아대는 주름진 손
웃음처럼 피어오르던 ‘장미’는
능숙한 구름 속으로 사라져
산불 지나간 자리 마냥
아버지의 가슴을 너구리굴에서
숯덩이로 변하게 할 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겨울비 되어 촉촉이 내리던 날
귀도 가슴도 먹먹했다
네가 꿈으로 오는 날엔
저녁 밥상에서
입맛을 돋우어 줄
산나물 향기가 홀연히 나타나
너를 찾게 되는 나의 일상
울적해진 나는
허전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오고
전화선을 탄 너의 목소리
어스름한 골짜기 바람을 몰고 와
천둥과 번개로 쩡쩡 울리곤
구름으로 이동통신 폴더를 닫는다
익숙한 것이 가져다주는 손실 속으로
언제나 넌 내 안에
그림처럼 걸려 있었지
언제쯤 내 안에서 널
내려놓을 수 있을까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너의 바쁜 걸음은
도시의 빌딩 숲에 도착한다
네가 꿈으로 오는 날엔
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너의 울림을 스며들게 한다
어머니 마음
정겨운 얼굴로 이야기 꽃피운
창호지 빛깔의 다락방에서
온 가족 모여 나누던
시루떡 만한 웃음
저녁 향기 내 뿜을 때
포근히 구름 내려와 덮는 고향 문간방
차 막힐라 서둘러 떠난 길
횡단보도의 건반 무늬
깡충깡충 건너가는 발걸음
그 속으로 플라타너스 잎새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도로는 온통 연어들의 긴 행렬
보따리 가득한 어머니 마음
푸짐해서 미처 몰랐는데
다시 보니 외로움도 담겼습니다
어깨 위 머무는 바람 뒤돌아
옷깃 여며 가슴 닫으신 눈빛
검은 구름 흘러 촉촉이 젖은 하늘
고향집 아랫목은
언제나 설설 끓습니다
아버지의 자전거
짐을 꾸립니다
목마른 그리움만 피우다가
오늘 식구들이 모두 모여
푸른 날개를 그리워 합니다
아직은 서러운 냇가에 빨래를 씻고
바람은 외로이 떠도는데
무거웠던 가슴속 이랑에
시린 마음 덮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숨 쉬던 길
세월은 가고
수해에 상처를 핥으며
서둘러 길 떠나시는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어둠의 틈을 열며
황톳길 앙상한 개울 건너 오시던 길
이제는 사라진 그 모습들
돌아갈 곳이 없기에
고향은 슬픔으로 남습니다
아버지의 향수
아버지 기분 좋은 날
나는 주막골로 향한다
양은주전자에 넘치도록 담은 막걸리
한 방울이라도 쏟아질까봐
조마조마했던 유년시절
여든 다섯 해 동안
막걸리는 아버지의 동반자였다
빨랫줄처럼 삶이 흔들리는 날엔
당신이 드신 밥그릇에 가득 따라 마시곤
마당 한가운데 앉아
뽕짝 가락에 맞춰 즐겨 드셨던 막걸리
오늘, 사기그릇만큼이나 정겨운 막걸리로
가족들은 음복을 한다
아버지의 두 번째 제삿날이다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제주잔에 넘치도록 올린다
어둠이 깊이 쌓인 자정
촛불이 흔들린다
그리고 누군가 잠깐 다녀간다
넉살 좋은 사위 셋은
막걸리로 음복하고 입가를 흠친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아버지의 향수
여름 계곡
햇살처럼 쏟아지는
아이들 웃음소리
시원스런 물벼락에
등을 내밀고 계신 아버지
산과 산을 휘감고
돌아가는 계곡의 맑은 물
돗자리 서너 장 깔고 앉아
굵은 소금 뿌린 꽁치 타닥타닥
고즈넉하게 울리고
석쇠 위 움츠리는 닭새우의 맛
계곡을 삼킵니다
분홍색 튜브에 물을 젓는 쌍둥이 조카
폭포 아래서 더 신난
개구쟁이들의 비명
두 눈 질끈 감고 물싸움하는
가족의 재미 허물이 없어집니다
마른 자갈 위
흠뻑 젖은 옷가지 말려갈 무렵
두런두런 자연의 품에 안긴 이야기 소리
솨솨 골바람 타고
여름은 그렇게 갑니다
담배의 죽음
까맣게 닫힌 과거의 문에서
균형을 잃은 대가는
4시간의 함몰과
열흘간의 고통
더는 다가갈 수 없는
불빛 속으로 자꾸만 뒤돌아 본다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불빛은
모두가 그대의 흔적들임을
반평생 그대에게 쫓기다가
이제 더는 숨을 곳 없어
스스로 저무는 사랑의 열병
오늘에야 비로소
그대 죽이려고
밤낮 불을 지폈다는 걸
끝내 떨치지 못한
나의 사랑을
또 한 번 꺼내본다
나 그대 사랑한 적 없다고
중환자실
강릉아산병원* 중환자실
산소마스크와 링거 주사바늘이
꽂힌 양쪽 팔 의료사고로
미동도 하지 못하고 누워 계신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외삼촌
수염이 잡초처럼 드문드문 자란
입술 주위와 말라비틀어진
귤껍질 같은 빰 일흔 고개에서
길을 잃고 헤매신다
발가벗은 외삼촌의 맨발은
차가움을 머금은 안 좋은 예감
여자의 하이힐 소리처럼
뚜 ․ 뚜 ․ 뚜 하는 기계음
가습기에 물안개만 슬피 올라
중환자실은 냉동창고처럼 싸늘하다
날이 갈수록 희망의 뼈들이
뭉그러지는 두 다리
개구리처럼 엎드려
채탄더미 쌓인 먹장구름
이쯤 되면, 산소호흡기만 빼면
이승과 저승의 선명한 선을 긋는다
중환자실 입구에서
육남매의 자식들 문어다리처럼 누워
사음절 노랫소리로
살려 내라고 몸부림친다
--------------------
* 강원 강릉시 사천면 방동리에 있는 의료기관
부음訃音
핸드폰 벨소리
진동으로 요동친다
수화기를 들었더니
부고를 알리는 음성
온 몸이 부들부들
꾹 참았다
정말? 진짜?
왜 그랬을까?
베일에 싸인
모든 의혹들이
검푸른 바닷물 되어
애타게 흐른다
포도송이 같은 멍을
가슴에 달고 살았던
쉰아홉의 그녀는
한 남자를
너무 사랑했지만
지워진 여자로
살아온 세월
깨진 조약돌은
납골당에서
슬픈 사랑노래 부른다
통증
내 몸이 무거운 돌 되어
스무날 넘게 침묵해 있다
발등은 내 살 같지 않게 꿈틀거리고
발바닥은 밟을 때마다 무디어져간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울적함
병실 창가의 어둠은
곡소리로 터저 두려움으로
비도 사람도 숨막히는 대결
덤덤하게 전하는 아픔은
침대에 파묻혀 조용히
순한 아이처럼 길든다
난초마냥 다소곳이 앉아
나의 내면에 곰살아 있는 공포를 몰아낸다
이틀 동안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시트의 싸늘한 감촉이
어깨와 등을 옮겨 놓는다
낮시간의 통증은 빗살을 뚫고
눅눅한 습기로 몰아온다
가면부부
오랜만에 대추차를 마시며
허구와 진실을 낱낱이 투영해 본다
풍성한 화제를 낳은
바람막이 비닐창도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숨어 있다
속 깊이 감추어 둔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웃부부는
몰래 하늘 보며 눈물짓는다고
동네 사람들 수군대는 소리
헛말이 아니었다
꽃은 언제나
그 빛깔로 피지만
소리 없는 내면의 몸짓은
거짓 사랑의 슬픈 자화상이다
기쁜 추억이
새겨진 사랑은
낯익은 포스터 되어
아픔을 숨기며 살지만
가면부부假面夫婦는 언제나
드라마처럼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행복을 연기하며 거짓으로 삶을 영위해 간다
온 몸에 명품을 휘감고
철쭉에 몸이 단 사람
이 세상 어지간히 많다
운수 좋은 날
살다보면 밤하늘처럼 캄캄한 날이 있다
아주 잠깐의 눈앞에 벌어진
한낮의 소란함이
나를 눈길로 몰아넣는다
눈 속의 등굽은 지붕은
머리와 땅이 맞닿아 있고
입술은 돌처럼 굳어진 채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목은 자라처럼 움츠러져
위태롭게 벼랑을 향해
끝없는 물음표로 부서진다
양배추처럼 꽉 낀 안전벨트 사이로
유리파편들이 나 뒹굴며
차 안의 어둠은 정글 숲처럼 복잡해진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들려오는
견딜 수 없는 신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숨 막히는 소리에 내 귀를 의심한다
덩달아 내 몸도 연체동물처럼 흐느적 거린다
가슴으로 튀어나오는 언어들이
옷을 벗으며 부르르 떨자
하얀 나라에 길 잃은 미아가 된다
어둠에 감금된 작은 공간에서
목까지 차올랐던 죽음과
살아 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쁨이 산이 되어 차오른다
저 멀리 납작하게 구겨진 침묵이
울퉁불퉁 상처를 입은 채
고봉암을 휘감는다
운수 좋은 날
내 몸은 오래된 바게트처럼
건조하고 파삭파삭하다
제3편 / 홀로 가는 길
친구 같은 오월
봄은 하나의 추억을 머금은 채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친구 같은 오월
내 삶이 즐거운 건
우정이란 뜰에 친구라는 나무가
세상의 풍파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친구는 산길과 같은 것이라고 했지
자주 오가지 않으면 수풀이 우거져
없어진다는 말을 되뇌이며
친구라는 이름은 나에게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 숨겨둔 그리움 달래고
서로 힘이 되어 줄 추억 만들기를
기록할 수 있는 오월을 기다린다
친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고향의 들판에는 초록이 가득하다
그 초록 뒤에 별자리 같은 꽃들도 어여쁘다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친구가 있어
꽃들은 활짝 피어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구름꽃 핀 초등학교 언덕에서
봄꽃처럼 환한 모습으로
친구를 만나고 싶다
사랑 한다 친구야!
보고 싶다 친구야!
오월, 친구야
높은 산만큼 인정도 많았던
오월을 닮은 친구야
수국같이 환하게 웃는
친구들의 크고 작은 웃음소리가
꽃샘바람에 실려 기억의 문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날아다닌다
덩달아 나의 추억도
소매치기마냥 거꾸로 올라간다
멀고 긴 그리움
시간은 기억 속에 내려앉아
우리들의 삶을 물들이고
감자처럼 뒹구는 내 몸뚱이
세월에 비탈지는데
새로운 시간의 빛이 꽃물결을 이룬다
친구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루만지는 오월의 바람과 같다
언제부턴가 작아진 운동장에선
골뱅이와 두릅을 초고추장에 무쳐
어린 시절 진한 우정에 술잔이 비어간다
혀끝에서 떨어진 유년시절 이름을
내 귀에 다시 주워 담으면
바람결에 묻어나오는 친구들의 냄새
난 그대의 꽃이 되련다
초등학교 동창회 날
친구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32년 만에 은사님을 모시고
동창회가 진행됐다
유치원 다니는 조카를 부르듯
오랜 만에 친구의 별명을
이렇게 불렀다. 짱돌아, 둥글아, 검둥아 …
친구는 하얀 목련처럼
흰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다
고향을 여섯 시간 넘게 달려온 친구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그사이 나는 해맑은 봄꽃이 된다
내가 어둠에 갇혀 있을 때
용기와 힘이 되어준 유년의 친구는
소리 없이 내 안에 스며들어
따사로운 햇볕 한 줌이 된다
친구의 우정은 꽃이고 바람이고 낙엽이다
밥알같이 엉겨 붙은 우리는
코흘리개 시절
함께한 시간들이 행복했다며
가난한 마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자정을 넘긴 친구의 얼굴은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져
봉숭아꽃 빛깔로 물들었다
봄 햇살같이 따뜻한 친구들은
꽃처럼 활짝 웃으며
우리의 우정이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건 너무나
감사할 뿐이라며 술잔을 부딪친다
인생이란 잔치에서 친구가 없었다면
어떻게 한 세상을 살 수 있었을까
25시 편의점 같은 친구들과
32년 만에 초등학교 교가를 목청껏 불렀다
그대가 내 친구라서
― 초등학교 40주년 기념행사에 부쳐
별도 꽃도 많은 오월
힘들었던 어깨를 잠시
꽃게처럼 내려놓고
고향마을 지도처럼 나란히 앉아
환환 웃음으로 재잘거리는
풍경은 어둠으로 쏟아져 내린다
작고 여린 꽃잎들
이슬도 바람도 불행도 너끈히 견디어 냈구나
바둑알처럼 고만고만한
유년시절 진달래꽃 속에서
함께 뛰놀던 시간이 꿈틀꿈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오늘도 그리운 이름을 불러본다
친구야!
너의 주름진 목소리에 물든다
가끔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토라지기도 했지만
가파른 깊은 계곡과
굽이 굽은 능선을 만나면서
또 하나의 인생에서
널 이해하게 되었지
아주 가끔
뭐하냐?
잘 지내지?
전화해 주는 네가 참 고맙더라
우린 명성과 권세
재력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말자
따듯한 오월 저녁
깔깔대며 함께 나눈 기억 꺼내들고
담소하는 시간은
그대가 내 친구라서 참 좋다
조각공원*
알몸으로 일어선 그대
파도에 미끄러져
하얀 구름되어 세상을 떠도는
어부의 깊은 주름살
하루의 수고를 끝낸 고깃배
바닷물 가르며 달리기 선수되어
하나 둘 희망의 물결로 돌아가고 있다
그댄 언제나 많은 인파를
파릇파릇 새 봄 오듯 반기고
음악을 즐기려는 사람들
봄 꽃 활짝 핀
꽃송이로 맘 붉어진다
조각상에 깃든 바다의 숨결
너와나 사랑되어 야광봉 흔들며
붉은 저녁 요란한 록 음악 소리
객석에서 터져 나온 박수소리
바위 속으로 메아리친다
--------------------
* 강원 삼척시 새천년도로 326에 소재한 상설공연장이 있는 곳.
카페에서
오늘 중년의 육체는 슬프다
배추처럼 구석구석 절여져
짭짤한 바닷바람으로
거대한 그물로 감싸이고 싶다
긴 시간 고독을 먹고
지친 가장이 숨 고르며
작은 슬픔들 꽃처럼 일어난다
창가 가득 찬 하늘 풍경
허브향기 품어져 나오는
촉촉한 페퍼민트 꽃잎에선
기침소리까지 덮어준다
버스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규칙적으로 흔들거리며 달리고
거품 이는 맥주가
그녀의 내부로 차갑게 스며든다
물방울 같은 여자
와인 잔 같은
그 여자는
언제나 잘 깨지고
얼룩도 잘 묻지요
밤마다 심장에 고춧가루 끼어
부엉이 울 듯 그렇게 울어도
다음날 아픔도 손님처럼 맞이하면서
행복한 하루를 시작해요
초록빛 여름 마당 속에서
해초처럼 깔깔거리던
그 여자의 얼굴이
자꾸만 시야를 흐리게 해요
우산도 없이 비바람을 맞아야 하는
그 여자는
마지막 불꽃을 채워야 한다는
지독한 사랑 때문에
늦가을 나뭇잎처럼 시들어가요
상자 속에 숨기고 싶은
그 여자의 인생은
작은 물방울처럼 연약하지요
재즈바에 앉아
무심한 시간은
날개 짓 재우고
오후 햇살이
구두 콧등에서 오물거린다
나를 흔드는 겨울바람
그림처럼 바쁘게 지나가고
하얀 그리움 재즈바에 앉아
가슴 뚫리는 시원한 기타의 화음과
하나 둘 바람꽃으로 피어
다채로운 색깔로 내 마음 표현한다
가끔 절제된 선율에서
풍성한 행복을 낚아 올리며
나의 삶도 반동을 등지고
꽃처럼 활짝 일어난다
인사동 거리에서
고향 친구 넷은
낯선 곳을 관광하듯
인사동 거리를
구석구석 둘러보며
마치 광고 속 모델 같이
추억 한 점과 마주친다
외국인들이 넘쳐나고
수공예 작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한국 전통문화의 거리에서
탁구공같이 오고가는 대화와
여행 같은 시간을 즐기며
순수한 꽃잎마냥 서로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어여쁜 모습에
짧은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목젖이 보일 만큼 웃는 경순이의 웃음
한 옥타브 높은 명랑한 혜순이의 목소리
가을빛 노을처럼 피어난 행숙이의 얼굴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눈에 담으며
우린 서로의 얼굴을 굴비마냥 자꾸만 쳐다본다
왜 이리 이쁜 것들 천지냐고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든 천연 염색 스카프는
녹슨 말초신경에 싱그런 풋내가 든다
분홍 볼이던 인사동 거리에서
삶은 광대廣大 하나 기쁨은 소박했다
여름날 저녁
무더운 여름날 저녁
바람꽃이 낸 길을 따라
전에 살던 아파트로 걸음을 재촉한다
현관문을 열자 흰 꽃처럼
우아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는
여인은 박하사탕같이 산뜻했고
연륜의 빛이 묻어있는 머리는
살짝 형형색색 염색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삼십 촉 조명 아래서
기억의 조각을 이어붙이며
감당할 수 없었던 아픔을 길어 올려
잃어버린 것들을 촛불처럼 밝히며
답답한 가슴속을 후련하게 풀어내며
장기간 발효시킨 술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준다
재미 한잔 웃음 두 접시
손으로 입을 막고 휴지로 눈물 닦으며
깨알 같은 추억과 깨꽃처럼 사락대는
행복한 수다는 삶의 에너지에 어깨춤 추게 한다
시간은 자정을 알리고
여섯 명의 여자는
들꽃처럼 거실 바닥에 앉아
럭비공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천진한 소녀가 되곤 한다
간간히 들려오는 기타 소리에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물들어
인생의 평화로움을 전하니
세상이 회전목마 같다
12월
늦은 오후
머리는 우주를 떠받들고
눈은 가물가물해지면서 시야가 흐려진다
바깥의 데크 위 낙엽이 휘리릭 소리를 내며
종이비행기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바람소리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다
음악처럼 흐르던 하루가
참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은 좀 쉬자, 몸으로만 느끼자
내 안의 창문을 열어
아무런 고민이 없는 것처럼
짧은 시간을 어루만진다
비탈진 오르막길을 숨이 가쁘게 올라간 것에
찾아온 보약 같은 휴식
진한 헤즐럿 커피향이 실핏줄처럼 퍼진다
소파 옆에는,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김민정 시집이 손에 잡힌다
먼 훗날 나의 역사가 되는 시집은
언제쯤 세상 밖을 나올는지
내 마음의 꾸물거림이 집 밖을
배회하는 아이의 마음인 양
12월의 생각들이 삽시간에 날 쓰러뜨린다
볼링공처럼
홀로 가는 길
앞만 보고 뛰다보니 어느새 중년
내가 끌고 온 삶은 어디에 있을까?
그토록 소망했던 것들을
이루어내고 있는 지금
배움이 주는 낮은 자리에서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본다
몰래 한 사랑처럼
슬픈 것은 단단하게 뭉쳐
삶 속에 펼쳐놓지 못하고
일상과 일탈 속에
머무름과 떠남으로
멀리서 서성이면
가끔은 미치도록
나를 관통하며
뒤흔들어 놓는다
인생은 열정과 희망으로
달리는 시간 위에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한의 우주와 미완성에 감사하며
때론 꽃보다 잎이 아름답다
열정
반쯤 저문 노을은
분홍 입술을 옴짝대며
나이에 굴하지 않고
기쁨의 봇물로
한바탕 물감통을 흔들어
빛깔대로 뛰어논다
모든 걸 나눈
만개의 불꽃과
단풍 같은 불빛
몸속의 혈관이
높은 소리로 활동량을 부여한다
바람난 가슴에 쏟아지는 음악소리
선홍빛 중년의 꽃잎은
붉은 웃음 쏟아내며
짐승마냥 몸부림치다
울부짖는 아 우 성
시원한 여름 바다의
파도가 솟구치는 짜릿함에
명품 콘서트장의 열기는
폭발 직전이다
힐링의 에너지를 충전시킨
빛의 소리
목소리의 힘은 대단했다
그리운 것들
신사동 안부가 가끔씩
그리울 때가 있다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포스터 같은 풍경에 걸음을 멈추고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잘 꾸며진 공간은
눈이 즐겁다
음악도
사람도
미움도
마주앉아 차 마시던 날
어긋난 사랑에 애가 탄 젊음은
거친 파도 같은 맛을 본다
허기진 까치에게 내어준
떫은 맛 붉은 기억은
여자의 한 생애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생애 층계를 숨 가쁘게 오르면
오래전 나를 다시
만나기도 한다
춤추는 버스 안
사람들은 공처럼 튀어 일어났다
끝없이 변하는 세상을 향해
약간의 비틀거림과 교양 좀 버무려서
시원스런 탁성으로 가수를 꿈꾸는 꽃노래는
시속 사십 킬로미터의 속도를 견디는 버스 안에서
모든 근육이 무방비로 확 풀어지면서
빨갛게 몸을 태운다
사람들은 선풍기 바람처럼 쉬지 않고 돌아간다
여인들은 사슴처럼 날렵하고 유연하게
몸의 균형을 잡으려 가무를 즐긴다
버스도 따라서 춤을 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중독이 된다
어느새 몸은 버스에 부딪혀 팝콘처럼 가벼이 튕겨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버스 안 사람들은
꽃 문을 열고 해초처럼 깔깔거린다
파도처럼 흔들리고 싶다
혼자 견뎌야 할 슬픔을
조금씩 모래성처럼 허물어 버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매혹적인 삶 속에
감미롭게 밀려오는 재즈의 언어들
어느새 난
분주했던 여백의 시간을 묶어서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던
잠든 너의 빈자리 쓸어내며
지친 내 마음 어루만진다
가로등 어둠이 단풍잎으로 변하는
저물녘 바다는
잠시 머무는 피서객과
갈매기의 사연도 애잔한 해국도
하나 둘 바람결에 흔들리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감싸 안는다
파도소리가 별과 섞이는 밤
상처를 입은 바위는
군데군데 눈물을 찍어내고
에너지 넘치던 너의 숨소리
내 안을 사정없이 간지럽힌다
오늘 밤
너를 향한 마지막 여름을 보내며
깊어가는 가로등 아래서
파도처럼 흔들리고 싶다
가을 속으로 떠난 하루
신종플루와 겹친 가을 하늘은
어느 해 보다도 불안하고 무겁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감염되는 신종플루
끝없이 변하는 세상을 향해
아주 천천히 길을 나서 보지만
어수선한 내 마음은
약간의 비틀림과 삐걱거림을
깨끗이 치유될 수 있을는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날이다
햇살에 머물다
바람에 걸쳐간다
네비게이션이 설정한
자유의 끝자락
그토록 바빴던 논밭이
여유로운 숨을 쉬며
푸른 물결을 이루고
말라 비틀어져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에도 생명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늘거리는 풀숲의
꽃내음 풀내음 섞여
나도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잘 익은 가을 속에서 時를 줍는다
잠깨는 봄
쓸쓸한 봄기운에
오늘도 어김없이 그릇 부딪치는
소리로 하루를 여는데
물방울 같은 봄날이
예쁘고 치열하게
살아보겠다고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다
산줄기들 어깨를 걷고
푸른 이끼가 뜰에 깔리고
꽃잎이 길바닥에 가득할 터인데
약간의 쓸쓸함으로
찾아온 세월에 잠시 쉬어보며
봄의 겸손함과 부지런함에
나도 덩달아 잔기침을 하며
감히 봄으로 물들고 싶어진다
소담한 통나무집
숭숭 뚫린 돌담 사이로
오십천 강물이 수런대며
소풍삼아 들르라는 소리에
정겨움이 한껏 묻어난다
흔들리는
땅의 틈새에서
봄은 깨어나고 있다
희망을 노래하는 봄
그냥 좋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다가오신 걸
공유와 소통의 날개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으로
봄의 풍경을 담아서 합창을 합니다
비 오는 날 독일 카페에서
시골집 구수한 이야기거리가
내 팔에 안기어 잠들어 갑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당신과 평행선을 가렵니다
한때는 여물지 않는 표피에 갇혀
몇 번이고 허물어지며 터지는
꽃잎이었습니다
3월의 투명한 얼음알갱이도
진눈깨비로 때리는 통증을
맛보고 있습니다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다른 적응이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맛있는 세월을 발효시키고
폐경의 끝을 다하여
두려움의 중량을 덜어내고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요
별명
굴뚝새 한 마리
동그마니 앉아
내 눈을 응시하는 아침
귓볼에 하느적이는
바람 속으로 다시 불러본다
짱돌, 쪼조, 놀래기, 주막골, 불사조…
“얘들아 한 번 뭉치자.
벌써 40년이란 세월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
나뭇잎 위에 피는 밤꽃 향기
순수한 사랑과 우정
웃음꽃을 피운다
밤늦도록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별명을 불러대던 골목길
책 속에
끼워놓았던 누런 단풍잎처럼
가난을 퍼 마시던 동무들
추억은 어느새 아련한 전설 되어
뭉클한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봄꽃에 물든 오후
늦겨울 심술 시달려도
어김없는 꽃 소식은
정라항 파도소리와
봉황산 벚꽃 연주로 시작 된다
봄의 무게에 힘겨운 벚꽃은
내 뜨거운 손을 잡고, 가끔
차가워진 등걸로 미안한 듯
봄보다 먼저 까르르 웃는다
사람이 풍경보다 아름다운 시간
꽃들은 파도 타듯 끊임없이 피고 지고
벚꽃터널로 흥얼거리며 나들이 나선다
봄꽃에 유혹돼 흠뻑 물든 오후
화려한 꽃들의 손짓을 견디지 못한 나는
봉황산을 오르며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는
너에게 전화를 건다
사랑이 첫눈에 반한 떨림이라면
꽃은 만지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간절함이고
그리움은 하루 온종일 멀미 같은 울렁거림이다
습관처럼 내 주위를 채우던 꽃잎은
연분홍 입술로 벌어져
고양이 걸음으로 내가 걷는 길보다
한 발 앞서 걷는다
이 짧은 봄
흐드러지는 것이 어디 꽃 만이겠는가
제4편 / 흔적
꽃들의 웃음소리
천만 송이 꽃 속에 숨어
푸른 하늘을 부른다
내 몸의 꽃은
한 번 지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데
자연이 가진 힘은
유혹의 저녁 빛에
즐거운 웃음소리로 다시 피어난다
꽃잎 물고 꽃바람에 살랑대며
떨고 있는 소리
내 마음에도 즐거운 소리 전해진다
꽃향기에
붉은 꽃은 햇살 아래 과식한다
오가는 사람 소리 보다
꽃들의 웃음소리에 발걸음 멈춘다
꽃빛 바람은 왈츠를 추고
찔레꽃 피듯 모두 한바탕 뛰어나와
색깔대로 웃는다
조율되지 못한 꽃이 아프다 한다
소리 반 공기 반으로
불안한 소식
두터운 비바람이 왈칵 쏟아진다고
천만 송이 꽃들이 소리를 낸다
태백산
흰 구름이 연기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길가의 흙내음
꽃향기만큼이나 향기로운 숲길
한 걸음 두 걸음 인생길 오르며
폭죽마냥 터져 오르는 가슴
짐승같이 토해낸다
가파른 천제단
산을 쓸고 가는 바람
한 여름 목물 만큼
시원하게 등줄기 식혀준다
유난히 빛깔 연한 태백 철쭉
하늘도 들판도 붉게 물든 유월
주목나무 사이 우리 사랑 흔들어준다
그대와 내가 철쭉으로 피어
구름으로 누워 있었다
맹방* 벚꽃길
핑크빛 하늘이 열렸다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벚꽃 길은
네 명의 여자에게
풍성한 꽃잎과 미소를 뿌린다
제 빛깔을 드러내지 못한 꽃잎도
모습만은 또렷하다
매년 맹방 벚꽃길은 추억을 남긴다
꽃잎 속에 숨겼던 엄마의 그리움
바람은 아버지의 숨결 몰고 와
꽃잎 속에 연등 하나 밝힌다
연분홍 꽃잎이 눈처럼 내리는 날
여자 넷은 벚꽃보다
더 활짝 웃는다
유채꽃밭과 어우러진 환상의 벚꽃터널
행복했던 분홍빛 시간들
꽃잎 떨어지면, 어느날
푸른빛으로 기억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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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삼척로 유채밭 일대
진달래
꽃불잔치 열린 태백산은
선남선녀 연분홍 얼굴로
바위 틈 숨어 눈웃음치다
달짝지근 사랑의 눈길 보낸다
햇살 빚은 산천
진달래 두 잎 입 안 넣었더니
연한 꽃향기 가슴팍까지 스며
허기진 뱃속을 꾹꾹 눌러 채운다
강렬한 꽃봉오리
딸아이의 가슴처럼 둥글게 부풀어
꽃잎 묻어간 유년의 그리움으로
노래와 탄성을 흩뿌리고
소리없이 내 안을 짓눌린다
아직 여물지 못한 나의 봄은
너와 함께 공유한다는 것으로도
봄바람에 마구마구 피어
살랑대는 분홍색 옷을 입는다
치열하고 예쁜 삶을 살아온 넌
태백산에서 시름 풀고
생명 짓는 산속의 수런거림
꽃향기에 마음 빼앗겨
사랑의 에로스 화살을 쏜다
벚꽃나무 아래서
오후의 꽃들은
따뜻한 체온과
좋은 향기로 후르르
중년의 여인네 마음을 두드리곤
분홍빛 기억과
첫사랑 그 소년을 꼬드긴다
봉긋하게 어여쁜 얼굴들은
저마다 눈빛을 빛내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살랑살랑 분주하다
자전거들이 말처럼 달리는 도로에
벚꽃송이 팡팡
공짜로 쏟아져 내려
아름다움의 극치다
바람에 분홍색 꽃잎이 뒹굴어
오감에 걸리는 숨 막히는 절정
부지런히 많은 추억과
그리움 등을 불러 모은다
뒤늦게
여인의 가슴속에 깃발처럼 남아 있던
그 소년의 호흡이 가까워진다
아찔한 봄의 첫 키스
“나 왔어”
숨바꼭질하는 흰 봄날
느닷없이 바람 따라 앙다문 살구꽃 봉오리
아지랑이 아물아물 춤추는
소리들이 행복지수를 올린다
어지럼증도 즐겁다,
샛노란 얼굴과 이 자유로움
고향소식 물으면 첫사랑
그 소녀는 석고처럼 굳는다
새로운 시간의 강변길을 나는 걷는다
물소리 찰찰 넘치는 바람 든 햇살
분홍 볼이던 녀석을 기억하며
피하지 못한 세월의 거울 속을 들여다 본다
하늘을 만나고 구름을 만나고
자장면 집 오토바이는 오늘도 곡예를 한다
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어서
알록달록 초록색 발자국을 남긴다
팽목항*의 울음소리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내가 숨 쉬고 있는
공기라도 나누어주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들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가는 시간에
모든 신경 세포들은
태풍이 되어 위협적인
예리한 칼날로 변해
칼춤을 춘다
온 국민과 세계인들을 참담하게 한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침몰사고 닷새째 날
가슴이 미어지고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눈치도 없는 비와 바람은
날카로운 통증으로 깨어날 줄 모르고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울음바다로 눈물짓는다
실낱 같은 정조 시간에
바다의 어둠 되어 물음표들이
숨바꼭질 한다
골목이 길수록 우울의 깊이도 깊다
--------------------
*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리 마을의 항구
장마
산과 들판이 연주하는 날
주름 골이 푹푹 패이고
언덕 너머에 산책 나온
산새 소리와 시냇물 소리
서둘러 온 여름 장마에
와장창 깨진다
거센 줄기가 후다닥
귓전을 울리는 비 소리
어깨가 저절로 들썩인다
풀냄새 실린 바람이
방안까지 진한 냄새로 가득해
긴장감과 초조함을 동시에 준다
안대 속의 윙크처럼
쓸모없는 장마는
아무런 눈짓도 주지 않고
자정을 넘긴다
질척한 빗물의 감촉
스산한 음률의 소리로
취기마저 앗아 간다
흔적
한밤의 소란함
누군가 필사적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16호 태풍 산바의 위력”
미친 듯 비와 바람이 운다
저 견딜 수 없는 울음소리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이 돋아
가슴을 끌어안고 움츠려본다
어린 시절 악몽이
되살아나는 서글픈 밤이다
바깥의 어둠은
세상을 향해
주먹질 발길질을 마구 해댄다
아무도 그를 막지는 못한다
커다란 굿판처럼 빨려 들어간 사물들
천천히 땅 위로 흘러
붉은 흔적으로
한바탕 몸살을 앓는다
밤사이
동굴처럼 움푹
파여져 나간 시간들
여름바다 작은 음악회
후끈 달아오른 모래사장에
피서 온 관광객들이
간식처럼 앉는다
오늘따라 바다는 들뜬 기색이다
한 낮의 볕은 발가벗어놓은
녹색 아이들 같다
여름바다 작은 음악회는
시간의 태엽 감는 매미소리 되어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깨알같이 쓰인 처방전을 건넨다
그리고 시원한 바다 속 푸른 여행을 떠난다
맛있는 옥수수를 먹기 위해 껍질을 벗기듯이
서로를 벗기며 음악을 마시며 바다처럼 순수해진다
제 빛깔을 드러내지 못한 초승달은
어둠이 깊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내 목소리에 눌려 제멋대로 건반을 누른다
어느새 슬그머니 내 입 안으로
바다가 들어찬다
그리고 아주 커다란 하트모양의
따뜻한 행복이 찾아오고 있음을 전한다
용추폭포* 가는 길
바람이 낙엽을 굴립니다
햇살 가득한 능선을 타고
나무 끝에 가을이 걸려 있는 사이로
그냥 걷고 싶은 계절입니다
긴 호흡에 느린 걸음으로
만나는 사람들
그 사이 오가는 다람쥐와 청설모
빨갛게 달아오른 산
끊일 듯 이어지는 폭포 길
바람이 나무의 몸 타고
온통 나를 휘감고 갑니다
잎새 떨군 나뭇가지
연두빛 스카프 유혹이
농밀한 분홍빛 사이로
하나씩 벗겨지는 그리움
돌아갈 길 없는 시간이
가을빛 낙엽들로 가득 찼습니다
수다로 시작된 산행
손을 잡고 끌어주는 길동무의 오후
가을날 행복 한 줌
곱기만 합니다
--------------------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에 있는 폭포
구룡골*
재잘거리는 새소리 뻐꾸기 울음소리
어느 악기로도 연출할 수 없는
구룡골 용소폭포소리
생명의 푸르름 속으로
물고기 떼지어 돌아다니고
땀으로 끈적거린 어머니 낮 빛
뜨거운 실바람에
풀 누이듯 흐무러진다
사랑의 콧노래 부르며
자연 속 피워낸 가족의 웃음꽃
굽이굽이 고단함 풀어놓고
시각적 즐거움 만끽하는 계곡 풍경
한 폭의 수채화 그려낸다
화사한 몸짓의 찔레꽃
종일 사람을 그리워하며
솔솔 피어오르는 장작불 위
지글지글 삼겹살 파티는
산 전체를 세낸 듯 했다
--------------------
*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 마을 산 속 두타산 계곡
억새에 묻힐까 단풍에 물들까
대자연의 축제에 초대받았다
은빛 물결의 떨림과
슬쩍 던지는 바람
몸을 떠는 여리고 여린
햇살의 자식들, 작은 것들이
존재의 귀함을 일깨우며
맑은 공기를 내놓는다
가을산은
단풍과 억새로 물들어가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갖가지 색채가
연민, 고독, 추억에
온 몸을 불태운다
뜨거운 눈물로 닦아내는 산책로
詩가 되는 금빛 너울과
단풍 한 아름 안고
함께 걸어도
혼자가 되는 갈색 목소리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조차
그리워지는 단풍철
때로는 사슬이 되었던
젊은 날의 사랑도
마음 열고 귀 열어준다
갈대가 되어
시계추처럼 방황하던 갈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늘게 휘청거리며
소녀 같은 미소를 띄운다
버겁고 힘겨운 날들 지워버리고
저 혼자 쓸쓸히 저물어 가는 저녁 햇살
괜스레 눈물이 핑 도는 여린 마음
고독의 상처에서 사랑으로 껴안던
이별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바람이 거칠고 바다가 시려도
아름다운 것들도 언젠가는
푸석푸석한 잡초가 된다는 것을
서해의 저녁노을, 그리움 묻어나고
작은 나의 가슴에 흔들리는 하얀 솜털
내 눈앞에 없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칼국수
물음표들이 창밖의 어둠처럼 쏟아져 내릴 때
팔순 노파의 이마는
바지 주름마냥 우그러져 있다
한 사나흘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으려고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칼국수를 허겁지겁 먹는 노파의 모습
맛의 액체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지
연거푸 잔기침을 해댄다
한때는 연붉음으로
수를 놓았던 꽃잎이였을 텐데
노파의 눈에선 뜨거운 물기가 흘러내려
앞의 정경이 흐려진다
옆에 있던 아들이 붙임성 있는 말투로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으라고
초등학생마냥 몇 번을 곱씹으며 말한다
세월의 창가에서 가을 청풍소리가 왈츠를 춘다
아들과 노파는 칼국수로 공유되어
허허로운 웃음기가 병든 마음의 눈물을 삼킨다
노파의 벗들은
침대 위에 볏단처럼 누워 꼼짝 할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밤에
발음이 불분명한 웃음소리는 끝없이 새어 나온다
가을 오후
노랗게 익은 들판 위
숨 막히는 대결을 한다
시청 앞 거리
구성진 노랫소리로
원전건설 백지화 투쟁의 함성이
행복한 나라로 진입해 간다
바람도 웃음도
들풀의 흔들림
환상의 등산코스로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가난하게 살던 유년시절
끼니를 풍요롭게 해주던
누렁 둥이 호박은
어깨를 맞대고 속삭인다
꿈이 크는 시간
저마다 목소리로
세대 간
갈등을 부각시킨다
가을은 아픔이더라
가을바람이
굴뚝 같은 골짜기를 통하여 빠져 나간다
그리고 낯선 얼굴들이 눈가를 훔치며 빠르게 스친다
숨막히는 하루는
썰물처럼 사라지고
자꾸만 숙여지는 나의 몸짓은
서늘해진 목덜미를 매만진다
내 고운 사랑도
사계절 모이를 쫓는 닭처럼 지나가고
혼자 익어버린 그리움은
레코드판 같이 돌아간다
다시, 가을은 아픔을 거듭한다
쑥처럼 흔한게 사랑인데
가끔, 내 몸에도 노란 그리움 같은
선물이 필요하다
어둠이 잠긴 거리에
낮게 깔린 색소폰 소리가
붉은 도시를 깨우는데
가을을 몰아낸 바람이
차갑게 함성을 지르자
내 몸 구석구석 흔들리기 시작한다
폭설
구름 끝에서 곧게 자란 외로움이
마지막 겨울을 뚫고 거침없이 달린다
방황하는 눈발의 변주곡은
적당한 온도로 알맞게 뒤척이며
설렘과 종알거림으로 멈출 줄을 모르고
하얀 생명의 축제가
하나의 사랑이 숨 쉬는 세상에
너는 나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그렇게 고요히 입맞춤 하더니
자유의 바람 따라 불거지는 앙가슴 사이로
상처를 내며 툭! 툭! 쌓여만 간다
모닥불 지피듯이 쉬지 않는 사랑은
밤새 이스트를 잔뜩 넣은
밀가루 반죽으로 부풀어 올라
어느새 창문 사이로 고약한
폭설이 어둠에 떨고 있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설 줄 모르는
정지할 수 없었던 사랑의 무한질주
잠든 시간 깨운 소스라치는 분노에
눈 폭탄은 문신으로 새겨져
백 년만의 폭설이 볏짚 되어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검은 연탄
지하철 속 가득 싸인 검은 연탄들
다닥다닥 붙은 옷깃 사이로
차곡차곡 쌓여져 고무줄놀이를 시작 한다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검은 물결의 흔들림에도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며
두 발에 못이라도 박혔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서로 마주보는 연탄들의 속마음은
알코올이 분해되지 않은 채
각진 턱을 어루만지며
어제의 피로를 쓸어내린다
역마다 배달된 연탄들은
나와 딸아이를 아궁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어쩌면 공포의 위험을 불러일으킬
비참한 지하철의 곡선과 함께
매일 두 세 겹씩 엷어지는 어둠속은
햇볕도 바람도 흔들리지 않는
폐쇄된 공간에서 무거워진 눈꺼풀은
번개탄을 피워 올린다
주름진 노동자의 손끝이
손잡이를 더듬는다
삶의 무게는 침침한 지하의
곰팡이 냄새보다 무거운 것일까
빨간 스웨터를 걸친 연탄과
카키색 코드를 걸친 연탄은
환풍기 속으로 재빨리 이동 한다
시간이 갈수록 검은 연탄들은
지하철 안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세상을 향해 주먹질 발길질을 해댄다
아직 다 배달되지 못한 연탄은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겨울 땔감을 준비 한다
사내 같은 그 여자
차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오후의 시간은 눈치 없이 흘러
오십천 광경을 지나간다
간밤의 소란으로 도로가
무겁게 가라앉아 울부짖는데
어둠은 나를 상보처럼 덮으며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닳아져
슬픈 소설처럼 삽입되어가는
이 어색한 공기
저녁 하늘을 몰아낸
어둠은 얇은 바람을 몰고 와
헝클어진 추억들을 바로 서게 한다
생전에
사내 같은 그 여자
유난히 굵은 목소리에
시끌벅적 구수한 얘기로
진공청소기 되어 흡입시키곤 했었다
잡힐 듯이 보고 싶은 그 여자
지금쯤, 그녀의 삶도
육백산자락 포도처럼 익어 갈 텐데
머릿속이 정글 속처럼 복잡하게 만들며
조그만 모빌 되어 흔들거린다
사랑은 떠나가도
사랑의 기억은 절실하게
그 자리에 남아 끝끝내
그 사랑을 지켜주는 후배가 되련다
무더운 여름의 포도가 순간
그리움으로 뜨거워진다
파문
살다보면 충치처럼
뽑아버려야 할 사람들이 있다
청와대는 언제부터
미로 같은 거미집이 생겼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산은
온통 땀으로 절여지는데
들풀 같은 그녀는 머리만 내 젖는다
추악하고 부끄러운 세력들에게
터져 나오는 곡소리
장난감 블록 같은
비선실세들
하늘 보다 높은 청구서 앞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미친 그녀는
바퀴벌레 같은 조직과
어둠으로 덮어진 친군親軍들의
관계 속에서 숨 막히는 대결을 벌인다
비밀의 숲은 탐욕에서
깨어날 줄 모르고
폭주기관차처럼 움직인다
한때 그녀의 붉은 꽃을 부러워했건만
오늘 그녀의 꽃잎은 울고 있겠지
채송화처럼 피어나던 손때 묻은
인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콧등은
겨자 뒷맛처럼 욱신거린다
그녀의 서툰 집짓기는
산불 되어 번졌다
겨울축제 평창*
― 성공기원 G-500
빛과 어우러진 얼음조각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설경
설경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겨울 축제 평창
낭만과 동심의 세계로
만끽 할 수 있는
멋진 겨울 왕국
지구촌의 눈과 귀가 하나 되어 모인다
700m의 고원지대인
은빛 설원은
아시아의 알프스다
피어라 평창
눈꽃들의 함성
하늘과 맞닿은 산들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이제 지구촌은
눈부신 겨울축제
평창을 주목하라
문화 ・ 평화 ・ 희망
올림픽으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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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올림픽로 108
해설
향토애 시학과 서정의 품위
정 일 남 시인
한 시인에 대한 작품 해설이나 분석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시인에 대한 생애와 환경과 사생활 전반에 걸쳐 숙지熟知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시인과 오랜 친분이 있던가 그렇지 못하더라도 서로 마주 앉아 살아온 얘기를 대담 형식으로 나누지 않은 채, 무작정 작품만을 대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작품 해설이 성립될 수 없으며 분석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문학평론가도 아니고 문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상상과 추론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시인 당사자와는 전연 다른 해석으로 곤욕스러운 글이 될 공산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며 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타인의 시를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막다른 골목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시 해설이 될 수 없으며 시의 감상문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점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해둔다.
문학은 수학數學처럼 정답이 하나가 아니다. 방정식을 풀어 하나의 답을 찾아내는 수학처럼 문학은 답이 하나가 아니란 얘기다. 같은 시를 두고도 평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이 문학이다. 때문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의 감상은 저자의 생애와 살아온 환경을 소상히 알지 못하고는 시의 분석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필자가 임의로 해석해서 작자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을 내려 누를 끼칠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시인이 어떤 처지와 환경과 어떤 기분으로 시를 썼는가를 모르고는 시의 해석이 시인의 의도와는 상반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객관성이 결여되고 주관적 아류에 빠지는 글이 될 것 같다. 이점을 독자들이 이해해 주면 좋겠다.
백두대간이 한국의 등뼈다. 설악산이 남으로 달려오다가 이룬 산이 오대산이다. 오대산이 남으로 달리다가 다시 이룬 명산이 있으니 그게 두타산頭陀山이다. 두타頭陀란 뜻은 닭소리 개소리가 나지 않는 산 속에서 세속의 의식주에 집착하지 않고 지붕이 없는 곳에서 정좌해 마음을 닦아 어떤 경지에 도달하려는 수행을 말한다. 두타는 불교에서 온 말이지만, 오늘날 문학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이 두타산 구산동에서 병든 노모를 모시고 말년을 보내며 저 유명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했던 고려의 문인 이승휴李承休의 문학 정신을 이어받은 후예들이 있으니 그게 오늘의 『두타문학』이다. 이 『두타문학』을 이끌고 나가는 회장이 정순란 시인이다. 매달 두타시낭송회를 이어온 것이 323회(2017년 5월 현재)에 이르렀다. 2005년 문화관광부는 이승휴를 10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한 바가 있다. 또한 이승휴사상선양회는 매년 10월 3일 이승휴문화상을 수여한다. “두타문학”의 자부심이 여기에 있다. 첨부하건대 필자는 타인의 시를 비판하지도 못했고 칭찬하지도 못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려 한다.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은
아침의 얼굴
물밑에 잦아드는 아름다운 소리는
내 맥박을 뛰게 한다
오십천을 눈으로 당기면
햇살 같은 미소로
하나씩 벗겨지는 그대의 옷자락
간혹 스치는 옷자락이
나를 흔들지 않았다면
고요가 주는 낯 설움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늘 빗물에 취해
둑도 없이 흐르는 바람은
여름날 아픈 기억들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추억도 풍경도 혹독한 시련도
자연의 색으로 다 품어주는 그리움의 길목
숨 막히도록 아름다워
낮은 탄성을 내지른다
―「오십천・2」전문
오십천은 이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흐르는 냇물이다. 강물이라 하긴 규모가 크지 못하나 어느 지역에도 강물이 흐르듯이 이 고장의 젖줄로 유구히 흘러온 강물. 인간들은 물이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 오십천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이 흐른다는 것은 ‘햇살 같은 미소가 된다. 고요가 주는 낯 설움’ 그게 어떤 낯 설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고 진술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설움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여름날에 물장구치며 놀았던 기억과 그리고 무언가 아팠던 기억들이 오십천에는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들어내지 않고 내부에 숨겨 둠으로서 이 시에는 비의悲意가 있다. 그러니까 오십천은 ‘혹독한 시련’이 있었던 것 같다. 즐거움도 있었지만 슬펐던 시련이 있었던 곳.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름다웠던 것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오십천은 이 시인의 정서와 사랑과 자연을 끌어안게 했으며 그 품속에서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는 게 아니라 여물어갔다고 보아야 하리라. 향토를 사랑한다는 것은 오십천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안개 속 굽이굽이 떠오르는
하얀 목련
살아온 세월만큼 울었다
강물 넘어온 실바람
그대 사랑 얼비치면
오십천 역사 빚어낸
파스텔로 그림 풍경화
절벽 밑 홀로 핀 야생화는
나뭇가지 시름 품고
봄날 소의 하품처럼 순박한
강물에 취한 내 사랑아
외로움 달래 눈물 시로 씻고
얼어붙었던 가슴 열리면
그대 아카시아 향기처럼 그윽하고
내 사랑 키워주던 가파른 언덕길
서둘러 마당 귀 나갈 적에
대숲 웃음소리
그대 사랑처럼 흔들린다
애절함으로 피는
한 무더기 그리움으로
―「죽서루」전문
죽서루는 이 시인이 사는 삼척시의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다. 세인들이 다 아는 관동팔경의 하나다. 한양을 비롯해서 전국의 문객들이 이 지방을 스쳐가며 많은 시편을 남긴 곳이다. 이 누각 죽서루를 가장 사랑했던 문사를 들라면 고려의 이승휴李承休를 말하게 된다. 이승휴는 죽서루를 자주 들렸으며 또한 죽서루 동편 대숲 유희소에서 살았던 기녀 죽죽선竹竹仙과의 사랑 이야기도 일화로 전해온다. 기록에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정순란 시인이 죽서루에 대한 시를 쓰지 않는다면 그건 이 고장 시인이 아니다. 죽서루 아래 아침 물안개 끼이면 살아온 세월만큼 울었다는 것이다. 죽서루란 누대가 살아있는 역사다. 정철鄭澈이 관동별곡에서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동해로 흘러가니…’라고 읊었다. 문화관광부가 죽서루에 ‘관동별곡 가사의 터’란 문비를 세웠다. 절벽 밑의 야생화도 기억할 만하고 강물에 취한 사랑도 가슴을 열어준다. 지금은 흔적뿐이지만 죽장사란 사찰도 그립고 대숲에 있었다는 유희소 또한 그립다. 죽서루의 시는 이 고장 시인들이 다 한 편씩은 소재로 삼았던 게 아닌가. 천년 누각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라져 가는 고적에 대한 애정의 발현이겠다.
일주문에 들어서니
파란 가을 하늘과 벗하니
동안거사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사당이 담장 너머로 보인다
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바람소리 새소리 벗 삼아
사문에 꽂혀 넋을 놓고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본다
―「천은사」일부
천은사란 절은 두타산 구산동에 있는 절이다. 이 사찰이 돋보이는 것은 동안 이승휴가 이곳에 은거하며 쓴 한국의 대서사시 ‘제왕운기’ 때문이다. 동안은 제왕운기를 집필하면서 한국이 중국과는 달리 독자적 국가라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단군을 상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로 규정한 것이다. 정순란 시인은 진술한다. 일주문에 들어서서 가을 하늘을 벗하니 동안 선생이 집필한 사당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당은 후대가 세운 것이고 실은 동안의 유허지遺虛址가 있다. 시인은 아마 바람소리 새소리도 들었거니와 동안 이승휴의 헛기침 소리도 듣지 않았을까. ‘다람쥐 한 마리가 바위로 오른다.’ 현실과 고려라는 천년의 거리가 합쳐지는 순간 시인은 감당할 수 없는 상상에 몰입하고 만다. 이 천은사란 사찰의 위치가 이승휴가 거쳐했던 은거지라고 생각하면 천은사를 두고 뒤돌아설 수 없었으리라. 그렇지 않겠는가.
가을을 밟고 가는 길은 숨이 차다
전류처럼 숨이 차다, 비틀 비틀
밤마다 스탭을 밟으며 걷는다
연애처럼 멈출 수 없는
사랑처럼 얼룩을 남기면서
세상소리와 함께 어울려 걷는다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는 것 같다
걷고 또 걷는 길은
무수한 사연들과
숱한 슬픔을 견디며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는
미끄럼틀로 뭉개진다
매일 밤 가을 낙엽과 걷는 길은
흔적이 소멸하는 야경일 뿐이다
―「가을 손님」전문
가을을 밟고 가는 시인이 있다. 전류가 흐르는 듯이 숨이 차다. 왜 그럴까. 세상은 많은 소리가 있다. 즐거운 소리도 있고 슬픈 소리도 있다. 그런 소리들을 감수하면서 걷는다. 그냥 있으면 그건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 세상엔 많은 길이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은 없다는 게 시인의 주장이다. 어떤 사람은 힘들지 않게 평탄한 길을 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파르고 험한 길을 힘들게 간다. 누가 응원가 불러주지 않는 세상. 이런 길을 정순란 시인은 걸어왔고 또 걸어가는 과정에 있다. 낙엽과 같이 가는 길. 낙관적이 되지 못하고 어두운 야경 길을 간다는 것은 이 시인이 처한 현실의 반영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다. 가을엔 기쁜 손님이 찾아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익은 과일이 굴러오는 것도 아니니, 시인이란 손에 잡히는 실물이 없는 가을이다. 그래서 시詩는 항상 뒷전이다. 이런 생각이 시인의 마음을 허전하게 해준다. 시가 영혼의 산물이니까 그렇다.
짐을 꾸립니다
목마른 그리움만 피우다가
오늘 식구들이 모두 모여
푸른 날개를 그리워합니다
아직은 서러운 냇가에 빨래를 씻고
바람은 외로이 떠도는데
무거웠던 가슴 속 이랑에
시린 마음 덮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숨 쉬던 길
세월은 가고
수해에 상처를 핥으며
서둘러 길 떠나시는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어둠의 틀을 열며
황토길 앙상한 개울 건너 오시던 길
이제는 사라진 그 모습들
돌아갈 곳이 없기에
고향은 슬픔으로 남습니다
―「아버지의 자전거」전문
이 시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는 빈약하다. 하지만 ‘짐을 꾸린다’는 것으로 보아서 삶의 터전을 잃고 식구들이 모두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수해를 당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장마가 오래 지속되었고 낮은 지대에 집이 있어 수해를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떠나기는 했으나 물이 빠지고 집을 새로 정리하기까지 자가용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 아버지의 낡은 자전거가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어릴 때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다니던 추억도 있었을 것 같다. 다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전거는 아버지와 함께 어디로 갔는지 그 귀추가 궁금하다.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낡은 자전거에 얽힌 생각은 이 시에서 지워질 수가 없겠다.
하루의 수고를 끝낸 고깃배 / 바닷물 가르며 달리기 선수 되어 / 하나 둘 희망의 물결로 돌아가고 있다 / 그댄 언제나 많은 인파를 / 파릇파릇 새 봄 오듯 반기고 / 음악을 즐기려는 사람들 / 봄 꽃 활짝 핀 / 꽃송이로 맘 붉어진다 / 조각상에 깃든 바다의 숨결 / 너와 나 사랑되어 야광봉 흔들며 / 붉은 저녁 요란한 록 음악소리 / 바위 속으로 메아리친다
―「조각공원」일부
삼척에는 해변을 감도는 새천년도로가 있다. 이 해변도로를 자가용으로 질주하면 동해의 빼어난 절경을 맞볼 수 있다. 이곳에 조각공원이 있다. 공연무대도 마련되어 있다. 음악무대가 되기도 하고 해마다 열리는 시낭송회는 더욱 유명하다. 해변시낭송회는 밤 7시에 개최되며 밤바다의 오징어잡이 배들의 밤 등불이 시낭송과 어울려져 더욱 화려하다. 만선으로 돌아오는 고깃배. 그리고 무대에서 펼치는 음악회 이런 것이 조각공원의 조각상과 조화를 이룬다.
무심한 시간은 / 날개 짓 재우고 / 오후 햇살이 / 구두 콧등에서 오물거린다 /나를 흔드는 겨울바람 / 그림처럼 바쁘게 지나가고 / 하얀 그리움 재즈바에 앉아 / 가슴 뚫리는 시원한 기타의 화음과 / 하나 둘 바람꽃으로 피어 / 다채로운 색깔로 내 마음 표현 한다 / 가끔 절제된 선율에서 / 풍성한 행복을 낚아 올리며 / 나의 삶도 반동을 등지고 / 꽃처럼 활짝 일어난다
―「재즈바에 앉아」전문
오늘의 삶이란 누구나 피로하다.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병이 찾아온다. 쌓인 피로는 풀어야 한다. 시인은 재즈바를 가끔 찾아가는 것 같다. 음악이 인간의 정신질환에 좋다는 것은 정신과 의사들의 공통된 이론이다. 시와 음악이 정신건강에 도움을 준다. 정순란 시인도 재즈바에 앉아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음의 다채로운 색깔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때문. 이런 삶이 없다면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풀겠는가. 비관적인 생각은 털어버리고 낙관적으로 사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재즈바에 자주 갔으면 좋겠다. 삶의 활력소를 위해서.
앞만 보고 뛰다보니 어느 새 중년 / 내가 끌고 온 삶은 어디에 있을까? / 그토록 소망했던 것들을 / 이루어내고 있는 지금 / 배움이 주는 낮은 자리에서 /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본다 / 몰래 한 사랑처럼 / 슬픈 것은 단순하게 뭉쳐 / 삶 속에 펼쳐 놓지 못하고 / 일상과 일탈 속에 / 머무름과 떠남으로 / 멀리서 서성이면
―「홀로 가는 길」일부
문득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말은 성자 싯다르타의 명언이다. ‘홀로 가는 길’의 시에서 위의 명언을 생각했다. 인간은 홀로 가는 길이 맞다. 내 가족이 있고 친척이 있고 형제가 있어도 혼자 가는 것이다. 나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삶을 누가 대신 살아줄 것인가. 정순란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무소처럼 홀로 가다보니 중년이 된 것이다. 소망했던 일을 이뤄가는 지금. 가능한 목표를 세워 아무도 몰래 한 사랑처럼 머뭄과 떠남을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자세가 믿음이 간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노정이기에 외롭고 괴롭지만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바람이 낙엽을 굴립니다 / 햇살 가득한 능선을 타고 / 나무 끝에 가을이 걸려있는 사이로 / 그냥 걷고 싶은 계절입니다. 긴 호흡에 느린 걸음으로 / 만나는 사람들 / 그 사이 오가는 다람쥐와 청설모 / 빨갛게 달아오른 산 / 끊일 듯 이어지는 폭포 길 / 바람이 나무의 몸 타고 / 온통 나를 휘감고 갑니다
―「용추폭포 가는 길」일부
이 시의 계절은 바람이 낙엽을 굴리는 가을이다. 가을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나무 끝에 있다. 그리고 시의 주인공은 호흡이 긴 걸음으로 일행들과 같이 가을 산행을 하는 것이다. 무릉계곡을 거치는 과정이 있다. 그리고 완만한 산길이 이어진다. 다람쥐도 청설모도 길섶에서 만날 수 있다. 산은 ‘초록이 지쳐’(서정주의 푸르른 날) 단풍 드는 산에 등산객들은 취한다. 이곳 출신의 옛 시인 최인희가 ‘낙조’를 써서 등단한 현장이기도 한 곳. 더 오르면 쌍폭이 있다. 옛 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무릉계곡은 실제로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말했던 무릉에 해당되며 용추폭포는 ‘도원桃源’에 해당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용추(도원)에 가려면 예로부터 목욕재계 하고 부정 탄 사람은 갈 수 없는 곳이다. 용이 등천한 곳이기 때문. 시인이 과연 이곳에서 이승이 아닌 선경을 보았을까.
이 외에도 ‘오분리 연가’ ‘번개시장’ ‘맹방’ ‘구룡골’ ‘어머니 마음’ ‘갈대가 되어’ ‘도계역’ 등등의 시를 더 다루고 싶었다. 위의 시들이 모두 향토애의 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의 길이 때문에 제외된 것을 아쉽게 여긴다.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등단하게 되면 무슨 출세라도 하려는 듯이 중앙으로 몰리는 것이 현 추세다.
이상으로 정순란 시인의 시를 산책해 보았다. 시를 쓰는 것을 출세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학연과 지연과 혈연에 의지해 별 볼일 없는 시를 서로 치켜 주고 칭찬해 주는 문단 풍토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 시단의 앞날은 희망이 없다. 좋은 시를 쓰고도 운이 따르지 않아 빛을 발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시가 얼마나 많은가. 엄밀히 따지면 김소월 시인도 향토 시인이고 신석정 시인도 향토 시인이며 박용래 시인도 향토를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이제 시인들은 한국 문단의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시를 쓸 것이 아니라, 자식과 후손과 그리고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일 것이다. 먼 후대에 가서 후손들이 몇 대의 선조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인생관을 갖고 세상을 보았으며 어떤 시학詩學으로 시를 썼는가를 시를 통해서 평가할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시인들이 시 한 편을 쓰기가 얼마나 조심스러울 것인가. 함부로 시를 발표할 수 없을 것이다. 정순란 시인의 시를 산책하면서 느낀 점은 향토를 사랑하고 아끼며 서정의 품위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과욕을 부리지 않고 어색한 수사와 기교에 치우치지 않은 것도 장점이다. 현학적이지 않으며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향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고향의 토양을 사랑한 것이며 조상의 뜻을 섬겨온 애향심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