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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교회와 농민기본소득
최용기목사
(전북동노회 율곡교회)
농목연대 농민기본소득 특위: 각 교단의 농목이 모여 농목연대를 이루고 있다. 농촌선교를 목적으로 세미나와 사례발표, 단합대회등을 한다. 특별히 2019년 농민기본소득을 의제화하기 위해 농민기본소득특위를 만들어 농민기본소득강연회, 강사교육 연대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농민기본소득 추진 전국운동본부를 만들어 국회입법화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1. 들어가며(성구)
*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 23)
*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전 5:9)
*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3~16)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2: 44~45)
*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5:34~35)
*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6)
대부분의 농촌교회에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진지 오래다. 연로하신 소수의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교회를 지켜가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썰물처럼 빠져 나갔던 과거는 또 다른 현재가 되어 지금도 조금씩 도시로 빠져나가고 있다. 종종 귀농 귀촌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팍팍한 현실에 막혀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정착에 필요한 집과 토지를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고 농사는 재난에 가까운 이상기후, 여러 가지 농사기술 부족으로 소득으로 이어지기 쉽지 않다. 원주민들과의 갈등, 적응해야 되는 낯선 환경도 어려움의 이유가 되고 있다.
농촌에서 살기 가장 힘든 것은 경제적인 이유일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드니 점점 인구가 줄고 있고 인구가 주니 마을 공동체가 깨어지고 소멸되어 가고 있다. 농촌과 농촌교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현실이다. 이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농민기본소득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농민 뿐아니라 농촌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본소득을 주어 농촌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농촌기본소득).
농민기본소득(농민수당) 논의가 대두된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산업화, 민주화, 개방화 과정에서 농업, 농촌, 농민의 소외와 배제를 심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 UR 농산물 시장개방 협정을 시작으로 진행된 무분별한 자유무역협정 체결의 확대로 농업과 농촌의 기반은 무너지고 농업과 농촌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이제 농민의 삶 자체가 존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나마 정부에서 농업의 공익적 가치와 소득 보전을 위해 지급하는 농업직불제와 각종 보조금 사업은 농가 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켜왔다. 이제는 농민의 ‘생존권’ 차원에서도 농민기본소득제 도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한 마디로 농촌은 살 수 없는 땅이 되었고 소멸되어져 가고 있다. 당연히 농촌교회도 같은 형편이다.
2. 기본소득에 대한 성서적 조명
1)구약 성서가 증언하는 말씀공동체의 기본소득정신
(1) 모세의 광야공동체는 언약의 공동체였다. 안식일을 정례화하여 노예노동으로부터 해방을 선포하고 말씀의 예배를 통하여 상처받은 생명을 복원하는 새로운 예배공동체는 그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게 하려는 기본소득제의 이념위에 정립하였다. 십일조를 위시한 모든 헌물은 노예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 사상위에 세워졌으며 모든 물질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에게 우선으로 배분되었다. 이로써 공동체 내의 평등한 체제가 정립되고 지속될 수 있다.
말씀공동체를 세우는 두가지 사상의 축은 야훼하나님을 창조주로 선언한 것과 모든 피억압자들을 해방시키는 구원주로 고백한 것이다. 창조주 신앙으로 모든 생명의 보편적 존엄과 평등을 선포하고 모든 토지의 공공성을 선언하였다. 세계의 땅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임을 천명함으로써 토지공개념을 정립하는 데로 나아갔다. 오경은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비젼을 제시하여 초태생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레위인들에게 주어야할 십일조 등 공공기금을 법제화 했으며, 이로써 토지의 공개념과 노동의 휴식과 사회적 공공기금의 기본소득제가 제국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정립되었다. 오경공동체는 작은 규모의 마을공동체로서 국가권력이 아니라 순전한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가운데 부단히 자신의 사적 소유를 공공과 하는 과정에서 기본소득제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다.
(2)기본 소득의 가장 강력한 성서적 근거는 레위기 희년신학
구약성경은 모든 토지가 하나님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레 25:12).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땅을 빌려 살아가는 존재라고 명시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땅에서 '각자의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경작하며 평안히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왕상 4:25; 미 4:4). 다만 '공평과 정의'라는 임대료를 지불하면서 말이다(사 5:1-7).
김회권 교수는 구약의 땅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창세기, 레위기, 신명기 등이 주장하는 땅 신학은 네 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첫째,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다. 둘째, 모든 이스라엘 자유 농민은 땅의 소작인이며 그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칠 소작료는 공평과 정의, 1/10조를 통한 사회부조,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하나님 예배,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셋째, 이스라엘 땅의 소출은 경작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무산자 성직자)에게까지 향유되어야 한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땅의 소출 향유권을 보편적으로 누리도록 규정한다. 레위기 25:23(땅은 하나님의 것!)과 신명기 15:11(어느 누구도 땅의 소출 향유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은 성경의 기본 소득 사상 대헌장이다."
구약은 모든 사람이 자기 노동을 투입하는 일자리이자 고단한 하루를 쉴 수 있는 삶의 안식처로서 자기 몫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몫을 돌려주는 기본 소득은 구약의 땅 신학, 레위기 희년신학의 지지를 받고 있다.
기본 소득의 정신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시혜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각자 자기의 몫이 있다는 사실을 재천명한다. 땅, 물, 바람, 주파수 등 인간이 만들지 않은 공유 자원과 수천 년 누적된 인류의 지식은 특정 개인이 사유화할 수 없다. 개인의 노력분은 개인에게 돌려주어야 하지만,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낸 가치, 천부적 자원들은 인류 공동 재산이라고 기본 소득은 재천명하고 있다.
2) 신약성서의 교회
(1) 기본소득제를 실시한 말씀공동체
예수교회가 태동한 현장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활동하신 갈릴리였다. 갈릴리는 민중의 현장이었고 해방을 갈구하는 피억압민들의 부르짖는 현장이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는 굶주리면서도 말씀을 들으러 나아온 오천명의 민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당하는 소외된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되셨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영생의 빵이 되셨다. 예수의 선교 속에는 기본소득제의 기본 정신이 담뿍 담겨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성령께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기본소득제로 실천하시는 모습이 사도행전에 보도되고 있다(행2:45, 4:35). 사도들 대신에 기본소득제를 초대교회에 실시하기 위해서 일곱명의 일꾼을 뽑아서 시행하였다(행6:3). 말씀을 통해서 기본소득의 복음이 빈곤으로 고통당하는 모든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2)성령 충만한 교회의 급진적 율법 실천
신약은 구약의 율법을 창조적으로 계승합니다. 돌판에 새긴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만드는 데 한계를 드러냈지만, 신약시대에서는 모든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전폭적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 이후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가 구약의 율법을 급진적으로 실천했고,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행 4:34).
"구약성경의 성전 중심의 제사 법들과 의식 법들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창조적으로 폐기되었지만 구약성경의 십계명, 시민 법 특히 십일조 법, 토지 법 등 주요 공동체 규약 법은 신약의 성도들과 교회에 고스란히(한편으로는 더 급진적으로 재해석되어) 이월되었다.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은 훨씬 더 급진적으로 수정 증보되어 신약의 성도와 교회로 이월되었고 희년법이나 십일조 부조법 등은 동시에 고스란히 이월되었다. 그래서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이전까지 모든 교부들은 구약성경의 경제 율법을 특별히 강조하여 교회 공동체의 급진적 사랑, 이웃 봉사, 사회봉사 등을 실천했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은 토지 절대 사유 금지와 토지 공유제를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인 가나안 땅이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속했듯이,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사도행전 2:43-47, 4:32-37에서 희년적 부조 사회를 이루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꺼이 공여했고 희사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같은 교회가 착한 삶이라는 빛을 사방에 비추어 외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김회권)
(3) 포도원 주인 비유: 업적과 보상 분리, 필요와 보상 연계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주인 비유'는 일견 우리의 정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진대 포도원 주인은 일찍 와서 종일 일한 사람에게나 1시간 일한 사람에게나 동일한 하루 품삯을 줍니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 모두에게 하루치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넉넉함과 자비로움은 인간의 선의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영적인 원리를 드러내는 비유로 많이 소개됩니다.
영혼과 육체를 모두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원리는 영과 육의 구분 없는 구원·통치 원리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각 지파와 각 가족별로 토지를 나누어 주셨던 하나님이 신약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하루 품삯을 얻기 원하신다는 것을,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강원돈 교수는 포도원 주인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느님의 기이한 의'를 묘사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이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하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하게 자리를 잡은 탓이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에 참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강원돈)
3. 기본소득이란?
기본소득(Basic Income)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체가 모든 구성원 개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다.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정기적으로 지급하자는 기본소득제(basic income guarantee)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성남시의 청년배당과 서울시의 청년수당을 시작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기본소득 논쟁을 촉발시켰다. 특히,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지원금이 전국민에게 배당되어 기본소득의 유용성을 체험할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기본소득(bssec income)’이라는 용어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용어가 되어버렸다.
기본소득은 세 가지 점에서 기존의 생활보장제도와 다르다.
첫째, 기본소득은 보편적으로 지급되어야 합니다(보편성). 즉 나이와 성별, 지역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지급되는 소득입니다. 어떤 정치공동체에 거주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무조건적 보장소득입니다(무조건성). 즉 재산과 소득 심사를 하지 않고 어디에 쓸 것인가 정하지 않으며 어떤 노동이나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셋째, 개별적 보장소득입니다(개별성). 즉 가구 단위가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에게 직접 지급하는 소득입니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이자 그 이상입니다. 모든 구성원의 적절한 삶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복지이고, 단순한 소득 재분배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전환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기본소득은 사람의 생명과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권리 선언인 것입니다.
2. 기본소득은 정당한가?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돈을 주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갖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의문에 대해서 미국의 독립운동가로서 건국의 아버지인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은 <토지 분배의 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땅은 자연상태에서 인류 공동의 재산이다. 땅이 경작되어 개인소유가 되는 것은 개선된 가치이지 땅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땅의 소유자는 그 땅의 기초지대를 공동체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 기초지대를 걷어서 21살이 되었을 때 한 번, 그리고 50살 때부터 매년,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그것은 토지소유 제도의 도입으로 자신의 천부적 유산을 빼앗긴 모든 사람의 정당한 권리이다.”
이처럼 토마스 페인은 소위 문명화, 근대화 과정에서 부의 양극화는 심화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부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처럼 소유재산을 일방적으로 몰수해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식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부의 형평성을 위해 상속재산 가운데 일정한 비율을 적립해 기금으로 마련해 이를 모든 이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배는 단순히 국가에서 베푸는 혜택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권리임을 분명히 했다.
“현재의 소유자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정의에 반하는 죄를 일부러 저지른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에게는 어떠한 불만도 토로할 수 없다. 잘못은 제도에 있다. … 그러나 이 잘못은 이후 세대들에 의해 시정될 수 있다. 현재 소유자들의 재산을 축소하거나 훼손하지 않고도 기금의 운영이 가능하다. … 내가 바라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권리이며, 은혜가 아니라 정의다. 현재 문명의 상태는 혐오스럽고 부당하다.” 토마스 페인, <토지 분배의 정의> 중에서
쉽게 말해 땅은 인류 공통의 ‘부’라는 것이죠. 땅뿐이 아닙니다. 태양, 물, 공기 등의 모든 자연, 지하자원, 지식, 제도, 빅데이터, 주파수 등 ‘인류 공통의 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알래스카에서는 석유는 모두의 ‘부’라는 생각에 기초해 그 수익을 기금으로 조성하여 1982년부터 모든 알래스카 주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거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것으로부터 모두의 ‘몫’을 배당받는 정당한 권리 행사인 것입니다.
4. 왜 농민기본소득인가?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 모두의 권리인데 왜 농민만 주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농민만 주자는 것이 아니라 농민부터 주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왜 농민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일까요?
첫째, 농업은 식량의 기지이자 생명창고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식량주권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농업이 소멸하면 공동체의 생존이 위태로워집니다.
둘째, 도시 중심의 개발과 농산물 시장개방의 결과로, 대부분의 농민이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노동자 가구 대비 농가소득의 비율은 63.3%에 지나지 않습니다.(2017년) 문제는 현재 농촌에 뚜렷한 소득원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도농소득 격차는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식량의 안정적 공급 외에도 농업·농촌은 국토환경 및 자연경관의 보전, 수자원의 형성과 함양, 토양유실 및 홍수의 방지, 농촌사회의 전통과 문화의 보존 등 많은 다원적, 공익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가치를 굳이 수치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우리 농업은 우리에게 필요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공급해주는 산업이고 농촌은 우리들의 삶의 뿌리이자 미래세대를 위한 보금자리이기 때문에 농업과 농촌을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1990년대 시장개방 이후에도 지속적인 재정 투입이 이뤄져왔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재정투자에도 불구하고 농가의 경영여건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향후 농업직불제는 농업과 농촌의 다원적‧공익적 역할과 가치에 더 많이 투입되어야 하고 이러한 투입은 기존의 농지 면적 기준이 아니라 농촌주민에게 보다 골고루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농민기본소득을 먼저 지급하면, 과밀 집중된 도시로부터 농촌으로의 자연스러운 인구 흐름을 만들어 내어 도시의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의 비접촉시대를 준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농산물에 대한 시장개방 확대로 농촌인구는 1980년 1,083만 명에서 1996년에는 469만 명으로 절반으로 감소했고 이후 2017년(추정)에는 245만 명으로 다시 절반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추세라면 2027년에는 200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농가인구는 감소한 반면 고령인구의 비중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2017년(추정) 농촌인구의 고령화율은 41.2%로 이미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상태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2027년 농가인구의 고령화율은 49.6%로 약 절반을 차지할 전망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농촌사회 전반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위기에서 농정의 획기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스위스는 농가소득에서 직불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78.6%에 달합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농촌은 국가의 아낌없는 소득 지원의 결과인 것입니다.
4. 누가 농민인가?
농민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할 때 처음 부닥치는 문제는 ‘농민’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23조 4항, 5항에는 “농‧어민”이란 표현이 있지만, 각종 법령에는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을 제외하고는 ‘농민’이란 표현 대신 “농업인”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시행령」에 따른 ‘농업인’ 기준1)1) 1,000㎡이상의 농지 경영/경작, 연간 농산물 판매액 120만 원 이상, 1년 중 90일 이상 농업 종사, 영농조합법인/농업회사법인에 1년 이상 계속 고용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너무 느슨해서 ‘농민으로 보기 어려운 농업인’을 양산하였습니다. 거꾸로 각종 농업정책의 기초가 되고 있는 ‘농업경영체’가 되려면 1,000㎡이상의 농지 소유 혹은 법률적 임차가 필수인데, 그 결과 농업경영체에 등록하지 못하는 사실상의 임차농이나 농업노동자, 여성농민과 고령농민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아 왔습니다.
농민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농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직능 범주이기 이전에 사회적 범주입니다. 따라서 ‘농업인’ 혹은 ‘농업경영체’ 기준에서만 농민을 규정하고 농민기본소득을 추진하면 안 됩니다. 농업인이지만 농민이 아닌 사람을 빼야 하고, 농업경영체는 아니지만 농민인 사람을 포함해야 합니다.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농민’ 기준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① 3년 이상 해당 시군에 실거주하면서 농업경영체에 등록된 농민
② 농업경영체 등록을 못했다 하더라도 3년 이상 실거주하면서 농업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농민과 농업노동자
③ 해당 시군에서 10년 이상 농업 생산에 종사하고 은퇴한 65세 이상의 농민과 농업노동자.
실 거주 여부와 실제 생산의 참여 여부를 행정력만으로 알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을별로 (가칭) ‘농민기본소득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5. 농민기본소득의 액수는?
농민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의 근본원리에 따라 가구별이 아니라 개인 단위로 지급되게 됩니다. 그럼 개인 1인당 어느 정도 지급해야 적절할까요?
우리는 농민 1인당 월 30만 원으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19년 연간 도시근로자 1인당 평균소득(가구당 평균 2인)은 약 3,300만원인데 반해 연간 농가 1인당 평균소득(가구당 평균 2.3인)은 1,869만 원으로 그 격차는 약 1,431만 원에 달합니다.
이 격차를 완전히 해소하려면 월 120만 원의 농민기본소득이 필요하겠지만 당장은 격차 액수의 1/4을 보전한다고 계획을 세워본다면 농민 1인당 월 30만 원 내외에서 시작하는 것이 됩니다.
장차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실현된다면, 도시-농촌 간의 소득 격차를 고려하여 농민에게는 ‘보편적 기본소득 + α’를 지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보편적 기본소득이 30만 원이고 α가 20만 원이면 농민 1인이 받는 기본소득은 50만 원이 될 것입니다.
6.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2018년 현재 농업경영체에 등록된 농업인은 약 2,44만 3천명입니다. 여기서 농민으로 보기 어려운 농업인은 빼고 농업경영체에 미등록된 농민은 더한다고 보고, 이 인원으로 농민기본소득의 재원을 추산해 보겠습니다.
농민 1인 당 월 30만 원(연 36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볼 때, 연간 8조 9,468억 원의 재원이 필요합니다. 2020년 농림축산식품부 예산은 15조 7,743억 원인데 국가 전체 예산의 3.08%에 불과합니다. 산술적으로 보면 농정예산을 국가 예산의 4.8% 정도로 높이기만 해도 위의 농민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농정예산만 그렇게 늘릴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예산에서 농정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히 감소해 왔습니다. 이명박 정부 동안 국가 예산이 평균 6.5% 증가하는 동안 농식품부 예산은 2.5% 증가했을 뿐이고, 박근혜 정부 때는 국가 예산이 평균 4.2% 증가하는 동안 농식품부 예산은 1.2% 증가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이런 상황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현 정부 3년간 국가예산이 7.1%, 9.5%, 9.1% 증가하는 동안 농식품부 예산은 0.08%, 1.1%, 7.6% 증가했을 뿐입니다. 국가예산 증가율에 훨씬 못 미치는 농정예산 증가율에 비추어 볼 때, 농정예산의 비율을 높이자는 것은 비정상적이었던 예산 편성을 교정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과잉생산을 유발하는 각종 생산보조금이나 지역사회의 갈등을 조장하는 농촌개발 사업을 축소하고, 각종 간접사업 예산 절감, 농어촌상생기금 내실화, 행정비용 절감만으로도 1∼2조 원의 재원을 추가 조성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농촌, 농업의 “다원적, 공익적 가치”로 볼 때 농민기본소득의 재원을 꼭 농식품부 예산에서 찾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농업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로 본다면 기획재정부 예산이나 별도의 특별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 수 있습니다.
7. 농민기본소득만으로 충분한가?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 중에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기존의 사회보장 제도가 약화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돌봄 등의 사회서비스를 없애지 않으며,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사회서비스는 오히려 강화되어야 합니다. 기본소득 운동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주거공공성, 무상보육, 노후보장 등의 ‘보편복지’와 함께 가야 합니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서 소득만 모자란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사회서비스도 농촌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학교도 교사도 교육 인프라도 부족합니다. 아프면 대도시 병원을 찾아가야 합니다. 문화생활을 위한 여건도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농민기본소득과 함께 사회서비스, 문화 인프라가 확충되어야, 그동안 약화되어 온 신뢰와 규범, 교환과 보상, 협동과 갈등 해소라는 농촌 사회의 ‘사회적 자본’이 다시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도시로 떠난 청년들, 도시에 염증을 느낀 청년들이 농촌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농촌공동체가 되살아날 것입니다.
8. 농민기본소득은 농촌을 어떻게 바꿀까?
농민기본소득은 농민에게 작은 월급을 주는 것입니다. 이 ‘작은’ 월급은 농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일단 농민의 최저 생계가 보장됨으로써 실질적 자유의 폭이 늘어날 것입니다. 더 많은 현금만을 벌기 위한 농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각자의 농민기본소득을 종자돈으로 갹출하여 다양한 사회적 경제의 실험과 실천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구가 아니라 개인별로 지급되는 농민기본소득의 성격으로 인해 여성농민들의 역할이 커질 것입니다. 농촌의 자치기반이 서서히 살아날 것입니다. 면 단위 주민 자치의 근거가 생기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중심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농민기본소득이 지역화폐로 지급된다면 지역 상권도 활성화되면서 지역경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청년이 농촌으로 돌아오면서 농촌의 소멸을 막고, 농촌 마을이 유지되면 국토와 자연, 생태 환경을 지키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결국 농민기본소득은 과밀화된 도시 인구의 분산, 국가의 균형발전과 분권화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9. 나가는 글
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가 만들어져 첫 번째로 외쳤던 구호가 ‘농민에게 농민기본소득을! 국민에게 국민기본소득을!’이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경제, 4차혁명속에서 일자리를 기계에 뺏겨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이 무엇일까? 기본소득이 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 기본소득을 외치고 있다. 현재 모 의원은 2020년 9월 16일 2022년부터 전국민에게 매월 30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법을 발의하였고 농목연대 농민기본소득 특위와 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는 농민기본소득법제화를 위해 초안을 다듬고 있다.
농촌이 있어야 농촌교회와 농촌선교도 존재한다. 다시 교회당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3대,4대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꿈을 꾸어 본다. 코로나19는 인류의 미래를 바꿀 것이 분명하다. 도시의 인구는 농촌으로 흩어져야 한다. 코로나19 확산 분포도를 보면 도시의 인구밀집도와 거의 같게 보인다. 많이 모여 있으면 위험하다. 농민기본소득은 자연스럽게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유인할 수 있는 좋은 정책이 될 것이다.
“농민기본소득이 나라를 살린다” 녹색평론을 만들어 생태적인 삶과 환경보전과 전향적인 삶을 주장하였던 고 김종철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외치고 외쳤던 구호다. 또한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한다. 농민기본소득은 나라의 일용할 양식을 구축하는 일이다. 농촌이 지속가능해야 우리의 미래도 지속가능할 수 있다. 농촌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정책이다.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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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설교를 다른 곳에 올리고 싶은 데 어떻게 허락을 받지요?
ds2sgt@daum.net
부족하지만 쓰셔도 됩니다.
농민‘만’이 아니라 농민‘부터’
농민기본소득, 농촌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을까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