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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대승론 상권
1. 의지승상(依止勝相)
1.1. 중명품(衆名品)
1) 이 경의 개관
섭대승론은 아비달마의 가르침[阿毘達磨敎]이며, 대승의 수다라(修多羅)이다.
불세존 앞에서 바르게 대승구의 정의에 들어간 보살마하살은 대승에 수승한 공덕이 있음을 대승의 교설에 의거하여 드러내고자 하며, 이와 같이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뛰어넘는다.
[열 가지 수승한 모습]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란,
첫째는 응지(應知:인식)의 의지(依止)가 수승한 모습이며,
둘째는 응지가 수승한 모습이며,
셋째는 응지에 들어감의 수승한 모습이며,
넷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수승한 모습이며,
다섯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여섯째는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 의지해야 하는 계학(戒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일곱째는 이 가운데 의지해야 하는 심학(心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여덟째는 이 가운데 의지해야 하는 혜학(慧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아홉째는 학의 결과인 적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열째는 지혜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이 열 가지 정의의 수승한 상으로 말미암아서 여래께서 설하신 바가 그 밖의 다른 가르침보다 우월하다. 대승에서 나타나는 수다라의 문구를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진실로 불설(佛說)이다.
또한 어찌하여 이 가운데 간략하게 설명하여 대승이 그 밖의 다른 교설(敎說)보다 수승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간략한 해석[略釋]으로 이러한 열 가지 정의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대승에만 있으며, 소승에는 없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아리야식을 설하여 응지의 의지의 모습이라고 하며,
첫째는 의타성(依他性)이며, 둘째는 분별성(分別性)이며,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인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응지의 상이라고 하며,
유식의 가르침을 설하여 응지에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하며,
6바라밀을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보살의 10지를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모습이라고 하며,
보살이 받아 지니며 수호하는 금계(禁戒)를 설하여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의 계학(戒學)의 모습이라 하고,
수능가마(首楞伽摩)와 허공기(虛空器) 등의 정(定)을 설하여 심학(心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분별지를 설하여 혜학(慧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주처열반을 설하여 학의 결과인 적멸의 모습이라고 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자성신(自性身)과 응신(應身) 그리고 화신(化身), 이 셋을 설하여 무분별지의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처(處)는 오직 대승에만 있어서 소승과는 다르기 때문에 제일(第一)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는 오직 보살을 위하여 이 열 가지 정의를 설하셨다.
따라서 대승에 의거하여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넘어선다.
또한 다시 어찌하여 이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설한 것이 비길 데가 없으며, 대승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 여래의 바른 교설은 소승이 결코 대승이 아니라고 가로막는다. 소승 가운데에서는 이 열 가지 정의를 일찍이 보지 못했다. 하나의 정의를 따라 해석하더라도 단지 대승 가운데의 해석을 볼 따름이다.
또한 다시 이 열 가지 정의는 위없는 보리를 이끌어낼 수 있어서, 성취함이 순차적으로 뒤따라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모든 중생이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응지의 의지와 상(相)과
들어감ㆍ원인과 결과ㆍ닦음의 차이와
세 가지 학(學)과 결과인 멸(滅)과
지혜가 위없는 승(乘)에 포섭된다.
열 가지 정의는 다른 곳에는 없으며,
이것이 보리(菩提)의 원인이라는 것을 본다.
따라서 대승은 부처님 말씀이며,
열 가지 정의를 설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수승하다.
[열 가지의 차례]
어찌하여 열 가지 정의는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여지는가?
보살은 처음으로 배움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모든 법의 여실한 인연(因緣)을 관하여야 한다.
이 관으로 말미암아 12연생(緣生)에서 총명한 지혜를 생하게 된다.
이후에 연생하는 법에서 그것의 체상(體相)을 요별하여야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극단[二邊]의 과실을 끊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하여 마땅히 연하여지는 여실한 모든 상[諸相]을 통달하여야 한다.
차후에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하게 되며,
다음에는 마음이 이미 응지(應知)의 실상을 통달한다.
먼저 행하여졌던 6바라밀을 다시 성취하여 청정케 하고 다시 물러나 상실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의식 속의 청정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의식 속의 청정함에 섭지되는 모든 바라밀을 10지의 차별에 의거하여 하나를 좇아서 3아승기겁(阿僧祇劫)을 마땅히 수행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보살의 세 가지 학(學)을 원만하게 하여야 한다.
이미 원만하여진 것은 학의 결과인 열반과 위없는 보리를 차후에도 닦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열 가지 정의의 순서는 이와 같다.
이 순서를 설하는 가운데 모든 대승이 원만하여짐을 얻는다.
2) 응지의 의지를 세우다
[아리야식]
처음으로 설하는 이 응지의 의지를 세워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어느 곳에서 이 식을 설하셨으며,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식이라고 하셨느냐?
불세존께서는 아비달마략본(阿毘達磨略本)의 게송에서 설하셨다.
이 계(界)는 시작함이 없는 때부터
모든 법의 의지이다.
만약 있다면 모든 도(道)가 있으며,
열반을 증득함이 있다.
아비달마 가운데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의지하고, 간직되고, 머무는
일체종자식이다.
따라서 아리야(阿梨耶)라고 한다.
나는 수승한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
이 아함의 두 게송은 식의 체와 이름을 입증한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하셨는가?
모든 유(有)가 생하는 부정품법(不淨品法)이 이 가운데 숨어 간직되어 과(果)가 되기 때문이며, 이 식이 모든 법 가운데 숨고 간직되어 인(因)이 된다.
또한 다시 모든 중생은 아상(我相)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이 식 가운데 간직되기 때문에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아함에 해절경(解節經:解深密經)에 설하여진 것과 같은 게송을 읊고 있다.
집지식(執持識)은 심오하고 미세하며,
법의 종자가 항상 흐른다.
범부에게 나는 설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物]을 집착하여 자아[我]로 삼는다.
[아타나식]
어찌하여 이 식을 혹은 설하여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는가?
모든 색이 있는 제근[有色諸根]을 잡아 유지[執持]할 수 있어서 모든 생을 받는 취(取)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색이 있는 모든 근은 이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어 무너지지 않고 상실되지 않으며, 내지는 뒤의 시기에도 서로 이어져서 생을 받는 때에 취음(取陰)을 생하기 때문이다.
6도(道)의 신(身)은 모두 이와 같은 취이며, 이 취는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는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타나라고 이름한다.
혹은 설하여 심(心)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 심ㆍ의(意)ㆍ식(識)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의(意)의 두 가지]
의(意)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과 더불어 차제연(次第緣)의 의지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멸한 식이 되며, 또한 식이 생하는 의지를 의(意)라고 한다.
둘째는 더러움에 물드는 의가 있으며, 네 가지 번뇌와 더불어 항상 서로 응한다.
첫 번째는 신견(身見)이고,
두 번째는 아만(我慢)이며,
세 번째는 아애(我愛)이고,
네 번째는 무명(無名)이다.
이 식은 그 밖의 다른 번뇌(煩惱)인 식(識)의 의지이다.
이 번뇌인 식은 첫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생하고, 둘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러움에 물든다.
진(塵)과 차제를 연함으로 말미암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의라고 한다.
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이 마음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5식과 더불어 비슷한 이 법(法)은 당연히 없다. 왜냐 하면 이 5식은 공통적으로 일시에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니, 안(眼) 등은 안근(眼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의명(意名)은 당연히 의(義)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정(無想定)과 멸심정(滅心定)은 다름이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무상정(無想定)은 더러움에 물든 마음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 있고, 멸심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정(定)은 다르지 않아야 한다.
또한 더러움에 물듦이 없기 때문에 무상천(無想天)에서는 한 시기에 흐름도 없고 상실함도 없음을 이루어야 한다. 그 가운데 아견과 아만 등이 없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또한 모든 시간 가운데 아집을 일으켜서 선과 악과 무기(無記) 가운데 두루하여야 한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단지 악심만이 아집 등과 더불어 상응해서만 아(我)와 아소(我所)인 이것이 있으면 행할 수 있고, 선과 무기 가운데서는 곧 행할 수 없다.
만약 두 마음을 동시에 생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없거나, 만약 여섯 번째의 식과 서로 응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있다.
독행무명(獨行無明)과
이와 유사한 5식이 없고,
두 정(定)에 차별이 없으며,
의명(意名)은 의(義)가 없다.
무상천은 아집이 없다면
한 시기에 생하여 흐름이 없고,
선과 악과 무기 가운데
아집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염오심을 떠나, 있지 않다고 한다면
둘과 더불어 셋이 서로 어긋난다.
이것이 모든 곳에 없다면
아집은 생할 수 없다.
진실한 의(義)를 깨달아 보아버리면
혹장(或障)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항상 모든 곳에 행하므로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기 때문에 무기성에 포섭되며, 항상 4혹(惑)과 함께 서로 응한다.
색계와 무색계의 혹과 같이 유부무기(有覆無記)이다.
이 두 계의 번뇌는 사마타(奢摩他)에 소장(所藏)되기 때문에, 이 마음이 항상 생하여 없어지지[廢] 않는다.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 번째의 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아리야식을 성취하여 의(意)라 해야 한다.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종자를 삼아 그 밖의 다른 식이 생할 수 있다.
[마음, 심(心)]
어찌하여 이 의를 다시 설하여 심(心)이라고 하는가?
많은 종류의 훈습종자가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3) 성문승의 경의 논의들
[성문승이 마음의 상(相)을 설하지 않는 까닭]
어찌하여 성문승은 이 마음의 상(相)을 설하지 않으면서 아리야와 아타나라는 이름은 설하는가?
미세한 경계에 섭지되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성문인은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位階)가 없다.
따라서 성문인에 있어서는 이러한 교설을 떠나서도 지혜를 성취함으로 해서 본래의 원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위하여 설하지 않는다.
모든 보살에게는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위하여 설하신다.
왜냐 하면 이 지혜를 떠난다면 위없는 보리를 얻는 이러한 곳은 없다.
[중아함경에서 다른 이름으로]
또한 성문승에 있어서는 이 식을 다른 이름으로 여래께서 일찍이 드러내셨다. 『증일아함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세간에서는 아리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아리야를 갈애(渴愛)하고, 아리야를 익히며, 아리야를 집착한다.
아리야를 멸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른 법을 세간은 기꺼이 듣고자 귀를 기울인다.
뜻을 지어 알고자 하여 정근(正勤)을 생하여 일으켜서 이제 아리야를 멸하여 다하는 것을 얻으며,
내지는 여래의 바른 법과 유사한 법을 받아들여 행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심으로 해서 이 첫 번째로 희유한 불가사의한 법이 세간에 드러나니 본식과 같다.
이 『여래출세사종공덕경(如來出世四種功德經)』이 다른 정의로 말미암아 성문승에게 이 식을 이미 드러내었다.
[부파에서, 근본식, 궁생사음]
또한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의 아함 가운데서는 근본식(根本識)이라는 다른 이름으로써 이 식을 드러내어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미사색부(彌沙塞部)도 역시 다른 이름으로 이 식을 설하여 궁생사음(窮生死陰)이라 일컫는다.
왜냐 하면 색과 심이 어느 때에는 서로 이어짐이 단절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 마음 가운데 그 종자는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응지의 의지인 아타나, 아리야, 질다(質多), 근본식, 궁생사음 등의 소승 가운데의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아리야식이 이미 왕로(王路)를 이룬다.
[심(心)ㆍ의(意)ㆍ식(識)은 이름만 다르고 그 정의는 같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심(心)ㆍ의(意)ㆍ식(識), 이 셋이 단지 이름만이 다르고 그 정의는 동일하다고 집착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옳지 않다.
의와 식이 그 정의가 다르다는 것은 이미 보았으니, 마땅히 심의 정의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여래께서 세간에서 아리야를 희락한다고 설하신 것을 집착하여,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이 가운데 있는 5취음(取陰)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한다.
또한 어떤 스승은 즐거움을 받음[樂受]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는 것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신견(身見)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이와 같은 모든 스승들은 아함과 닦아 얻음으로 말미암아 아리야에 미욱하여, 이와 같은 집착을 일으킨다.
소승의 가르침과 행을 따름으로 해서 이 스승이 세운 정의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아리야식에 미욱하지 않다면, 가장 수승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리야식에 미욱하지 않다면 소승의 이름에 있어서 이 식을 세우면 그 정의가 가장 수승하다.
어찌하여 가장 수승한가?
만약 취음(取陰)을 잡아서 아리야라고 한다면, 악취(惡趣)에서 하나의 도(道:趣)를 따라 한결같이 고통을 받는 곳, 거기에서 생을 받는다.
이 취음은 가장 싫어하고 거슬릴 수 있어서, 이 취음 가운데서 한결같이 애착할 수 없으니, 중생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가운데서 중생은 취음이 단절되어 생하지 않기를 항상 원한다.
만약 이 즐거움을 받음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면, 네 번째의 정[第四定]으로부터 그 위의 계(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받아들임이 없다.
만약 사람이 이미 이 받아들임을 얻는다면, 상계(上界)를 얻고자 구함으로 해서 곧 싫어함을 생한다. 따라서 중생이 이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신견(身見)이라면, 정법 속의 사람은 무아(無我)를 즐거이 믿으니, 신견은 애착할 것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생하지 않는다.
이 아리야식인 중생심을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자아[自內我]로 삼아 집착한다.
만약 도(道:途) 가운데서 한결같이 고통을 받음[苦受]을 생한다면 그는 고음(苦陰)이 영원히 멸하여 다시 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리야식은 아애(我愛)에 의해 얽매여지기 때문에 일찍이 자아를 멸하여 없애기를 기꺼이 바라지 않는다.
네 번째의 정(定) 이상에서 생을 받는 중생은 비록 다시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서 즐거움 받기를 욕구함이 있으니, 스스로 아애를 좇아 따라서 떠나지 않는다.
또한 정법 안의 사람은 비록 다시 무아를 기꺼이 원해 신견을 피하여 거역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에 역시 스스로 아애가 있다.
아리야라는 이름으로써 이 식을 안립하니 곧 가장 수승하게 된다. 이 이름은 아리야의 다른 이름을 성립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