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를 처음 뵌 기억은 광복 후 6.25전쟁 전 어느 때였다. 그러니까 내가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 언젠가 할매가 안동에서 서울 사는 아들네 집에 다니러 오신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시골에서 서울 오기가 지금 미국 가기보다 훨씬 더 드물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풍산에서 사십 리 밖 안동 읍내에 가기도 드물었던 때라 시골 사람들은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던 시절이었다.
모처럼 서울에 오셨으니 우리 식구들은 할매와 함께 서울 구경을 나섰다. 효창동 집을 나서서 우선 원효로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에 내렸다. 당시도 유명했던 동대문시장 구경이었다.
지금은 동대문시장에 근사한 시장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그 때는 단층 가게가 즐비하고 좁은 통로에 사람들이 무척 붐볐다. 게다가 비 내린 뒤처럼 시장 통로가 질퍽해서 걷기가 불편했다. 물이 괴인 곳은 널판때기가 깔려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아가다 보면 청계천이 나타나고, 그러면 다시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기를 거듭하며 시장 구경에 열중했다. 그 때는 물론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이어서 청계천 바닥의 물길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의 청계천처럼 콘크리트 옹벽 아래 직선으로 뻗은 물길이 아니었다. 둑은 흙 비탈이고 냇바닥엔 물길이 구불구불 자연스레 굽이돌았다.
그런데 큰일이 났다. 빽빽한 사람들 틈을 일렬종대로 비집고 나가면서 시장 구경을 하던 중 할매가 보이지 않았다. 식구들은 이제 할매 찾기에 나섰다. 더욱 난감한 것은 시장에 나온 사람들 거의 모두가 흰옷을 입고 있어서다. 할매도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이어서 흰옷 입은 군중 속에서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백의민족의 전통이 철통 같았던 때였으니.
요즘처럼 식구마다 휴대폰이 있었다면 오죽 좋으련만, 해가 기울 때까지 시장을 샅샅이 헤맸으나 결국 할매를 찾지 못했다. 식구들은 애가 타고 무척 걱정스러웠다. 날은 저물고 이제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경찰에 신고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식구들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새자마자 경찰서로 달려갔다. 아! 할매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이다. 할매는 여순경을 만나 친절히 보호 받고 계신 것이었다.
여순경이 전하는 말이다.
“할머니, 어디 사세요?”
“풍산 사니더.” 여순경은 시골 면소재지 풍산이 어딘지 몰랐다.
“서울은 어떻게 오셨어요?”
“아들네 집에 댕기러 왔니더.”
“아들네 집이 어디세요?”
“철둑 밑에 있니더만...” 우리 집은 효창동 용산선 기차 철롯둑 아래에 있었다. 시골 할매가 서울 아들네 주소를 알고 계실 리 만무하다.
매미 울음소리 속에 칠월이 다 가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는 목화꽃이 피기 시작한다. 목화꽃이 지면 다래가 맺히고 다래가 익으면 뭉게구름 같은 새하얀 솜 송이가 터져 나온다. 그러면 할매와 나는 다래끼를 메고 웃마를 지나 덕안으로 넘어가는 길목 계단밭에 가서 목화송이를 땄다.
가을이 되어도 목화그루엔 미처 목화송이를 터뜨리지 못한 다래가 달려 있다. 그러면 목화그루를 뽑아서 바짓골 뒤 양지바른 풀밭 잔등에 가지런히 널어 놓는다. 그러면 가을볕이 남은 다래를 터뜨려 새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목화송이를 피운다. 그 때 할매와 나는 또 풀밭에 앉아 다래끼에 뭉게구름을 주워 담았다.
목화꽃 피는 이 계절에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우리 할매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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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형진14.07.20 05:38
아주 어릴적 기억을 자세히 적어서 그것도 해방전의 일을... 우리의 옛날을 회상하게 합니다. 그런 시대를 지나서 이렇게 좋은 세상을 살고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