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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千字文』 누가 지었을까?
주흥사(周興嗣)의 ‘백수문(白首文)으로 알려진 경위
유학경전의 방대한 내용과 자신의 인생역정을 천 개의 글자에 압축해놓은 천재적인 작가는 누구일까? 지금까지 가장 많이 알려진 속설은 당나라 때 이작(李綽)이 지은 『상서고실(尙書故實)』에 근거하고 있다. 주흥사(周興嗣)가 ‘夕編綴進上(석편철진상), 鬂髮皆白(빈발개백)’, ‘하루 저녁 만에 엮어 진상하려다 보니 머리카락이 다 희어졌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조선으로 전해져 숙종 때 편찬한 『어제천자문(御製千字文)』 서문에 『상서고실』의 이야기를 담아내면서부터 천자문은 일명 ‘白首文(백수문)’으로 주흥사 작품설로 전파되어 온 것 같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 재위 502~549)가 은철석(殷鐵石)에게 명하여 여러 왕자들에게 가르칠 문장의 문자들을 위(魏) 종요(鍾繇 151~230년, 字 元常, 시호 成侯)와 동진 때 왕희지(307~365년)의 서예작품 중에서 탁본해오게 했는데 모두 일천(一千) 글자였다고 한다. 양무제(梁武帝)가 보기에 일천 글자가 순서도 없고 번잡하였기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주흥사(周興嗣:470?∼521, 字 思纂)로 하여금 다시 편집하게 하였더니 주흥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자문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에 양무제가 극찬을 하고 상을 많이 내렸다고 하며, 아울러 주흥사가 온 정신을 쏟아 글을 만들고 보니 머리가 하얗게 쇠어 후에 천자문에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尙書故實은 ‘경전에 얽힌 옛 이야기들’을 다룬 책이다. 당대의 공식적인 문헌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전해져 내려오는 속설을 정리한 책이다. 이처럼 주흥사 창작설은 공식적인 문헌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데다 천자문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 내용 가운데 주흥사의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말 그대로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
주흥사 창작설의 문제점을 보면,
① 천자문 창작시기가 연표상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백제 무령왕의 무덤 속에 부장된 물건 가운데 양나라의 물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나라와 백제는 빈번한 교류를 하면서 많은 서적도 오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왕인(王仁)박사가 천자문과 논어 등을 일본에 전한 시기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로 알려져 있는데,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를 살았던 주흥사의 생존 시기(470년?~521년)와는 대략 1세기가 차이 난다.
② 천자문의 내용이 철저히 유학사상을 토대로 한 것인데 반해 주흥사가 생존한 양나라 시대는 유교가 쇠퇴하고 불교와 도교가 흥성하던 시기라는 점이다. ‘황제보살’이라고 부를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양무제가 유학의 핵심사상을 담은 『천자문』을 짓도록 지시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다만 종요의 필체를 모아 놓은 저서 書法十二意(서법십이의)에 주석을 달 정도로 종요를 존숭하였다고 하는 양무제이기에 주흥사로 하여금 종요의 작품을 정서하도록 했다고 볼 수는 있다.
③ 尙書故實도 주흥사가 명백히 창작했다고 단정한 것이 아니라 편철(編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宋史・列傳』 李至傳에 “천자문은 양문제가 파지에 새겨있는 종요의 글씨를 구하여 주흥사로 하여금 次韻케 해서 완성한 것이라.”고 했고, 당대 나온 여러 책에도 주흥사 次韻을 얘기했고(박광순・형광석・정성일 지음. 『왕인과 천자문』 영암군・(사)왕인박사현창협회부설왕이문화연구소, 2008년), 王羲之의 7대손인 王智永의 眞草千字文이나 懷素의 草書千字文 등의 서두에는 모두 周興嗣 次韻이라고 적혀있다는 점이다.
④ 남사(南史) 심약전(沈約傳)에는 양무제 때에 한차례 ‘천자문 열풍‘이 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에 양나라에는 속천자문 재독천자문 별본천자문 서고천문 등과 같은 속편과 개편의 천자문을 지은 사람이 유달리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양무제 때 주흥사의 손을 거쳐 나온 『천자문』 덕분에 『천자문』 열풍이 불고, 그 내용이 널리 회자되고 전파되는 과정에서 주흥사가 창작자로 둔갑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⑤ 천자문을 짓고 ‘하루 만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속설에 대한 신뢰성의 문제이다. 더욱이 주흥사 창작설이 공식적인 문헌으로 확인되고 있지 않는 점도 속설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킨다. 그런 점에서 白首文이라 불리는 배경에는 저자가 하루 만에 머리가 희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하얗게 쇤 늙은이가 글을 지었다는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에 백발노인이라 하면 환갑을 넘은 6, 70살에 달하는 노인을 지칭하는데, 주흥사는 대략 50살에 죽었으므로 주흥사 백발론이야말로 가공된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다.
⑥ 앞서 제1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제12절 제112장의 안짝인 骸垢想浴(해구상욕)의 글귀에서 骸는 일반적인 몸이 아니라 깡마른 몸을 뜻한다. 遺骸(유해) 骸骨(해골)이라는 단어와 ‘뼈 골(骨)’과 오른쪽의 ‘열두 번째 지지 해(亥, 주역의 괘상으로는 重地坤卦䷁로 속이 텅 빈 상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몸 체(體)’나 ‘몸 궁(躬, 躳)’ ‘몸 신(身)’처럼 일반적인 사람한테 붙일 수 있는 ‘몸’의 뜻은 아니다. 곧 骸垢想浴의 글귀를 통해 지은이는 자신의 나이가 70을 훨씬 넘긴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의 늙은이의 몸을 뜻한다.
⑦ 천자문 본문(천자문역해 분류에 따른 제6절 鳶飛戾天)에 제61章의 안짝인 ‘杜稿鍾隸(두고종예)’라는 글귀가 있다. ‘두조의 초서요, 종요의 예서라’는 뜻으로 초서와 예서에 뛰어난 한 사람씩을 거론한 내용이다. 종요 창작설의 유력 근거중의 하나이다. 글씨라면 東晋시기의 인물인 왕희지를 빼놓고 거론할 수 없는데, 정작 왕희지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⑧ 또 하나는 周易의 十翼傳(십익전)에 훗날 학자들이 공자의 해설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子曰’이란 글자를 달아두거나, 『대학』의 문장 가운데 ‘曾子曰(증자왈)’을 붙여서 지은이를 드러내듯이 양무제가 종요와 왕희지를 존숭하였기에 편찬자인 주흥사가 ‘종요 창작’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편찬과정에서 보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⑨종요 창작설의 가장 유력한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은 천자문의 내용이 주흥사의 일생과 시대적 배경보다는 종요의 일생과 시대적 배경에 부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자문에서 다루고 있는 황하문명권의 역사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시기부터 시작하여 요순(堯舜)시대를 거쳐 하(夏) → 은(殷) → 주(周) → 춘추전국(春秋戰國) → 진(秦, 서기전221~206년) → 한(漢, 서기전206~서기220년) → 삼국시대(魏・蜀・吳, 220~280년)까지이다.
천자문이 다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은 연대기적으로 수천 년의 역사이고, 그 속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된 인물은 41명이다. 천자문에 등장하는 41명의 인물 가운데 가장 마지막 인물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자 휘파람을 매우 잘 불었다는 위(魏)나라 출신의 완적(阮籍, 210~263)이다. 그리고 『천자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대인물은 한나라 출신으로 7명이다. 한나라는 중국의 두 번째 통일국가로서 유학을 국교로 삼아 중국에 문화부흥을 일으킨 나라이다. 한나라 다음으로 천자문에 많이 나오는 인물은 천자문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위・촉・오 삼국시대의 위나라(220년~265년) 출신이다. 종요와 혜강, 완적, 마균 모두 네 사람이다. 통일국가도 아닌데다 집권기간도 4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위나라 사람을 4명이나 선정하여 넣은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이다. 동시대 인물인 여포까지를 포함하면 이는 파격적인 대우라 할 수 있다.
천자문의 저자가 梁나라 시대의 주흥사라면 마지막으로 거론된 위나라 시대의 완적과 주흥사 간의 시대적 간격이 250여 년에 달하는데, 이 사이에 활동한 인물이 왜 거론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적어도 양나라나 동시대인 위진 남북조시대의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이 거론되어야 하는데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도 거
론한 왕희지와 함께 가난한 가운데 열심히 공부했다는 동진(東晉)시기의 차윤(車胤)과 손강(孫康)의 螢雪之功(형설지공)이 없다는 점이다. 주흥사보다 1백50년 이상을 앞서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은 빠져 있고, 훨씬 앞서의 인물인 후한 때의 왕충(王充)을 들어 제99장에 “耽讀翫市 寓目囊箱(탐독완시 우목낭상 : 글 읽기를 즐겨 저자에서 익힘에 눈을 붙여 주머니와 상자에 담은 듯이 하였음이라.)”이라고 하였다.
천자문의 저자는 유학경전에 정통한
고위관료 출신의 종요(鍾繇)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천자문의 저자는 천자문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또는 천자문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시대적 배경을 같이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한나라를 거쳐 위나라에서 활동한 인물이 가장 잘 부합된다. 종요가 바로 이러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천자문역해 해설에서 볼 수 있듯이 천자문은 유학의 각종 경전을 토대로 한 유학의 통치사상과 함께 군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다룬 유학경전입문서이자 사상서이다. 유학 경전에 정통한 유학자이자 또한 시대를 두루 꿰뚫고 있는 고위 관료출신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글이 바로 천자문이다. 종요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이는 당시 魏나라 동궁이자 후일 위문제(魏文帝)가 되는 조비(曹丕, 재위 220~226년)가 종요에게 준 글에서도 확인된다.
“위엄이 혁혁한 위대한 위나라는 지금 한(漢)왕조의 번국(藩國)으로 보좌하고 있다. 위나라 상국(相國, 재상)은 오직 종요뿐이니, 그대는 실로 국가의 심려(心膂:가슴과 등뼈)를 담당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숙히 공경하고 편안하게 쉴 곳을 찾지 않는다. 그대는 모든 관료의 사표이며, 그들을 재는 본보기이다.(진수의 삼국지 ‘종요전’)”
제51장의 “堅持雅操하면 好爵自縻니라”(바른 지조를 굳게 잡으면 좋은 벼슬이 저절로 얽어지니라.)에서 보듯이 종요는 한나라 말기에 효렴(孝廉)제도를 통해 중앙정부에 천거되어 고위직을 거쳐 위나라 때는 재상으로 삼공(三公)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당시 관리로 선발되어 고향인 영천(潁川)땅에서 낙양으로 올라가 관직에 나아가는 모습이 제6절 제52장부터 제66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 魏書(위서) ‘鍾繇傳(종요전)’에 나오는 내용을 볼 때, 천자문에 전개되는 내용이 종요가 직접 겪은 인생역정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천자문은 저자 개인의 일생에 해당하는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한 예로 종요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이 매우 어렵게 되자 재당숙(再堂叔)인 종유(種瑜)의 보살핌으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을 담은 것이 제44장의 “諸姑伯叔 猶子比兒(제고백숙 유자비아 : 모든 고모와 백부, 숙부는 조카를 자식과 똑같이 대한다)”이다. 그 덕분에 종요는 중앙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고, 조조를 도와 한나라 말기 삼국초기의 혼란한 상황을 헤쳐 가며 정치를 바로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그 속에서 늘 모범으로 삼았던 인물들이 제7절의 名臣列傳인 제67장부터 제70장에 등장한다. 건국공신이거나 혹은 국가의 혼란기 때 군주를 도와 이를 잘 극복한 인물들이다.
만약에 종요가 조실부모(早失父母)하지 않았다면 『詩經』 小雅(소아) 蓼莪(육아)편에 나오는 “아버지여,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여, 나를 기르시니, 나를 어루만지고 나를 길러주시며, 나를 자라게 하고 나를 키워주시며, 나를 돌아보고 나를 살펴주시며, 나가고 들어올 때에 나를 품으시니, 덕을 갚고자 할진댄 넓은 하늘같아 다함이 없으셨다(父兮生我하시고 母兮鞠我하시니 拊我畜我하시며 長我育我하시며 顧我復我하시며 出入腹我하시니 欲報之德인댄 昊天罔極이셨다)”는 인용하여 부모에 대한 사랑을 두루 나타냈을 터인데 그러하지 않고 오히려 ‘諸姑伯叔’을 더욱 드러냈다는 점이다.
『詩經』 蓼莪편의 내용은 오히려 어린이용 학습서인 四字小學의 첫 문장으로 들어가 “父生我身하시고 母鞠吾兮러시다”로 읽히고 있다. 우리가 흔히 천자문을 서당에서 배우던 어린이용 학습서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렇게 공부하기에는 매우 무리라는 점이다. 천자문을 둘러싼 여러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듭 강조하건대 천자문은 어린이용 학습서인 四字小學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천자문은 두루 인생역정을 거친 어른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정리한 글이기에 서당에서 어린이들이 익히기에는 매우 어려운 글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천자문을 ‘종요의 대서사시(大敍事詩)’ 곧 종요라는 개인의 인생역정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문집의 대서사시라 하는 이유이다.
천자문역해에서 나눠본 제12절(回顧)과 제13절(修人事待天命)인 제111장부터 제125장까지의 내용 전개로 보아 개인 문집이라는 차원에서 종요는 죽기 마지막 전까지 천자문을 손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천자문이 종요의 작품이라고 해도 연표상 맞지 않는 대목이 있다. 제115장의 바깥짝인 “嵇琴阮嘯(혜금완소 : 혜강은 금이오, 완적은 휘파람이라.)”의 대목으로 종요의 사망시점인 230년에 금(琴)의 명수라는 혜강은 8살이고, 휘파람을 잘 불었다는 완적은 20살이니, 종요가 말년에 천자문을 지었다 하여도 혜강과 완적을 책 내용에 거론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는 점이다.
천자문은 종요 사후 첨삭되었다.
다만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종요가 말년에 개인문집 형태로 남긴 천자문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당시 흥성하던 도가(道家)와 관련이 있는 위나라 사람이나 혹은 종요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문집을 세상에 펴내면서 죽림칠현의 일부 인물을 기리기 위해 일부가 첨삭되었거나 주흥사의 손을 거치면서 보완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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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과 완적 등을 도가인 죽림칠현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은 본래 당대 귀족 집안의 자제들로 관직에 몸담았다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정치판에 분노와 염증을 느껴 세상을 피한 인물들이다. 혜강과 완적은 천자문의 전체 흐름과는 잘 맞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특히 혜강은 나이 40세에 종요의 막내아들인 종회(鍾會, 225~264년)의 무고로 사마소(司馬昭, 211~265년)에게 처형을 당한 인물이다.
한편 종회 또한 훗날 사마소에게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했고,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司馬炎)이 西晉의 초대 황제인 武帝가 된다. 이런 와중에 종회를 제외한 종요 후손의 집안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데 이것이 제121장의 “指薪修祐 永綏吉卲(지신수우 영유길소 : 섶을 가리키며 몸을 닦으니 길이 편안하며 길하고 우러르리라.)”의 내용으로 나타난다.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정황과 사실(事實)들을 미뤄볼 볼 때, “천자문의 저자는 종요이고, 후손들과 주흥사에 의해서 일부 수정 편찬되었다.”라는 것이 본서의 주장이다. ☯
왕희지(王羲之)가 임서(臨書)한 종요(鍾繇)의 해서체(楷書體) 중 대표작인 ‘선시표(宣示表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