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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불교의 흐름과 이해
김경집
1. 한국 근대불교의 동향
개항 이후 한국 사회에 西學이 전래되자 자연적으로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불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하에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한 것은 開化派였다.
개화파를 지도한 유대치는 중인 출신이었지만 서구의 선진문물을 교육하며, 신앙적으로 불교를 믿도록 하였다. 그런 영향으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은 불교사상을 토대로 오랫동안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유교를 부정하는 한편, 양반 정치체제를 타파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정변을 일으킨 후 자신들의 이념을 보여주는 정강을 발표 하였다. 정강 제2조에서 당시 봉건사회가 지니고 있던 신분제의 한계성을 탈피하기 위해 그들은 인민평등권을 주장하였다. 이런 평등관은 불교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근대 개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수행자는 李東仁과 無不이었다. 이동인은 개화파의 일원으로 직접 일본에 건너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사회를 살펴보는 등 호기심이 강했다. 그의 개화 의식은 한국이 빈약하여 부강하지 못한 인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런 한계적 상황에 직면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부국강병으로 보았다. 그 방법으로 공업과 상업의 발달을 꼽았다.
공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풍부한 광산과 개발되지 않은 땅을 활용하자는 방안이다. 우리에게 자본과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일본과 힘을 합하여 개발한다면 한국도 무비를 갖출 수 있다고 보았다. 다음 상업이 발달하려면 육의전에서 배를 구입하고 일본인 상인을 고용해서 한국의 내륙과 개항장 사이에 통신의 길을 만들어 사람들이 개항장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하며, 그에 필요한 재정은 일본 정부에서 빌어 상인들에게 빌려준다면 육의전의 상업이 발전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무불의 본명은 卓挺埴이다. 그는 백담사 출신으로 처음에 覺地라는 법명을 쓰다가 뒤에 무불로 바꿨다. 화계사에서 김옥균을 만나 뜻이 일치된 이후 개화파의 일원이 된 이후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지식을 체득하였다.
무불은 한국의 현실을 아직도 문명의 개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생각하였다. 그런 야만적 상태를 벗어나려면 서양의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의 습득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이 급병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던 몇 안 되는 불교인 가운데 하나였다.
사회적 분위기와 같이 교단에서도 점점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쇠락한 자질을 향상시켜 교단을 부흥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이 1899년 시작된 鏡虛의 定慧結社이다. 그는 1899년 해인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결사를 결성하여 1903년까지 5년간 영남과 호남지방에서 선풍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불맥이 쇠퇴해져 發心修行의 의욕이 상실되었고, 밖으로는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이 변질되기 시작한 혼돈의 시대에 경허는 결사운동을 통해 선의 중흥하여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경허는 결사에 동참하는 자는 승속은 물론 남녀노소 현우귀천을 가리지 않고 참여를 허락하였다. 다만 수행의 분위기와 이타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참여 대중들의 화합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런 경허의 결사는 사상적인 면에서 보조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2. 종단건립 초기 단계
1) 대본산 元興寺 건립
대한제국은 흐트러진 교단을 정비하고 격변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행해진 것이 대본산 원흥사의 창건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불교 가운데 정토종의 교세가 경성 내에서 상당히 위세를 발휘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경기도 내의 승도들을 모집하고 정토종의 회원들을 흡수하여 정토종을 고갈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런 목적을 지닌 원흥사가 1899년 동대문 밖의 영미정을 매입해서 처음 사찰을 창건할 때는 소흥사였고, 1902년 1월 25일 원흥사로 바뀌었다.
원흥사는 창건되면서부터 한국불교 총본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라진 승직을 부활하는 한편 13도에 수사찰을 두어 도내 사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때 지정된 13도 16개 중법산은 경기도 봉은사 봉선사 용주사, 충청도 마곡사 법주사, 전라도 송광사 김산사, 경상도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강원도 월정사, 유점사, 함경도 석왕사 귀주寺, 평안도 보현사, 황해도 신광사였다.
이러한 교단의 구성과 승직의 설치는 조선조 배불정책에서 본다면 승정의 대변화라고 할 만큼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의미하며 불교가 다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근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원흥사였지만 1904년 사사관리서의 폐지와 함께 그 역할도 지속될 수 없었다.
2) 寺社管理署와 현행세칙
근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불교의 활동에 대한 경각심과 한국불교 중흥의 소임을 가지고 설립된 것이 원흥사였다면, 사사관리서는 그러한 조직 관리를 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의도에서 1902년 4월 11일 설립된 부서였다.
사사관리서는 많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정치가 부패의 극에 달하여 아무리 훌륭한 법령도 결국은 관리의 사리에 악용되는 경우에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찰에 대해서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효성을 거둘 수 없었다.
정부도 예기했던 성과를 거둘 수 없자 1904년 1월 관리서를 폐지하였다. 관리서가 폐지되자 그 소관업무는 내부관방으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2월에 칙령 제15호로 이 사사에 관한 사무를 내부지방국 주관으로 하게 하였다.
3. 근대적 종파의 성립
1) 圓宗의 설립
개항이후 일본불교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지켜본 한국의 승려들도 자신들을 대표해서 부를 수 있는 종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1908년 3월 6일 각 도의 사찰대표 52인이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李晦光을 대종정으로 金玄庵을 총무로 추대하였다.
원종의 설립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불교인들의 시대인식으로 종단이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큰 사건이다.
원종의 활약 가운데 커다란 특징은 불교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다. 전국의 사찰조직을 정비한 후 지금까지 불교의 교육기관으로 유지되어 오던 명진학교를 고등전문학교 정도의 수준으로 승격시키기로 의결하고 학부에 청원하여 1910년 4월에 고등학교 정도로서 승인을 받았다. 교과과목도 포교전도의 인재를 양성하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편성되었다. 그 후 불교사범학교는 1914년 4월 1일에 高等佛敎講塾으로 이름을 바꿔 원흥사에 설립되어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臨濟宗의 설립과 역할
이와 같은 활동에 비해 비민족적 활동도 있었다. 한일합방이후 종단 내의 지위만을 확고히 하려는 이회광은 정치적 흐름에 편승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와 연합시키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연합은 체결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한국의 통치를 주도해 온 총독부의 반대와, 다른 하나는 한국 내 반대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불교에 있어서 일본불교의 침탈에 항거하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종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백양사의 박한영, 화엄사의 진진응, 범어사의 오성월과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전라․경상남도의 사찰이 단결하여 임제종을 설립하고 원종의 연합사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임제종의 민족적인 활동도 오래갈 수 없었다. 1911년 6월 3일 일제는 전문 7조의 사찰령을 발표하여 한국불교를 완전히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2년 6월 21일 원종과 임제종의 문패는 철거되었다. 이후 한국불교는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통제 받는 위치로 전락되어 다시 암울한 시대를 거쳐야 했던 것은 우리 불교사의 불행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4. 일제하 종단 건립운동과 총본산 출범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1911년 6월 3일 제령 7호로 전문 6개조의 사찰령을 제정하였다. 이 사찰령과 동시에 전문 8개조의 사찰령시행규칙이 제정되어 그해 9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런 법령의 제정으로 일제는 행정적으로 전국의 사찰을 30본산과 그 말사로 등록하는 본말제도를 확립해서 주지의 임면권을 총독부와 지방장관이 장악하였다. 그리고 사찰의 폐합, 이전, 재정의 처분 등 각가지 규제로 한국 불교를 억압하여 1,300여 불교 사찰을 지배할 수 있었다.
1) 조선불교총무원 설립
1922년 1월 7일 10본산[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석왕사, 백양사, 위봉사, 봉선사, 송광사, 기림사, 건봉사]은 조선불교도총회 개최하고 한국불교 통일기관으로 조선불교총무원을 두기로 결의하였다.
재정은 전국 900여 사찰의 전 재산을 3등분 하여 1/3은 사찰운영, 1/3은 그 지역 포교와 교육사업, 나머지 1/3은 경성에서 조선의 모든 사찰을 대표한 불교 사업에 사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를 집행하기 위한 임시 원장 1인, 부장 2인, 부원 4인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총무원 설립에 반대한 16본산은 강대련이 주지를 맡고 있는 용주사에서 30본산 주지회의를 개최하는 등 총무원과 대립하였다.
총무원은 1922년 3월 24일 각황사에서 총회를 열어 불교개혁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 26일에는 종헌을 통과시킬 예정이었으나 이 날 ‘명고사건’이 발생하였다.
2)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설립
총독부는 1922년 5월 24일 30본산 주지들을 불러 종래 30본산 연합 제도를 폐지하는 동시에 10본산이 설립한 총무원도 폐지하고 새로운 통일기관 설립을 기획하였다. 1922년 5월 27일 총회를 열어 경성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설립을 결정하였다. 부서는 서무, 교육, 포교, 재무, 사교부를 두고, 임원은 임기 2년으로 30본산 주지 중에서 전임이사 5명을 두기로 하였다.
1922년 10월 15일 통도사, 석왕사, 범어사를 제외한 27본산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설립을 신청하여 28일에 인가를 받았다. 설립목적은 ‘조선불교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종교 및 교육 사업을 시행하고, 조선 사찰 각 본말사의 연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1924년 4월 3일 갈등 관계에 있었던 총무원과 교무원은 총독부의 개입으로 타협을 이루어 30본산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1920년대 불교계에서 볼 수 없었던 ‘재단법인’이라는 근대식 제도를 통해 자산을 확보하여 교계의 주된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런 교무원의 사업은 포교사업과 교육 사업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포교 사업에는 기관지인 『불교』의 간행과 聖典의 간행, 강연회 등이 포함되었고, 교육 사업은 1924년부터 경영한 보성고보와 1928년 개교한 중앙불교전수학교를 들 수 있다. 그 후 불전을 전문학교로 승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3) 조선불교선교양종의 설립
불교계는 1929년 1월 3-5일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를 통해 자주적인 종회를 설립하고 종헌을 세워 교단을 정비하였다. 종헌에 따라 敎正으로 김환응, 서해담, 박한영, 이용허, 김동선, 김경운, 방한암 등 7명이 선출되었고, 조선불교의 선교양종의 종지와 태고보우를 종조로 하는 종통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제반 법규를 제정하는 법규위원회가 교육 법안을 만들고 종립학교 관리 규칙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불교선교양종은 조선총독부의 방해 공작과 친일적인 본사 주지들의 비협조로 대회 도중에 많은 사람이 이탈하여 좌절되었다.
4) 조선불교 선종의 설립
1921년 설립된 선학원은 1922년 선우공제회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24년부터 침체되었다. 1931년 김적음에 의해 중흥되면서 한국불교 선풍진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12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을 설립하고 1935년 1월 5일 수좌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불교선종 종헌’을 선포하고 대표 종정에 만공, 종정에 해월, 수월, 한암을 추대하였다.
선포된 종헌에 ‘신라의 도의국사가 창건한 가지산문에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 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선종이라 칭한다.’고 하여 전통불교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식을 표출하였다.
1935년 3월 조선불교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해 院規와 규약을 제정하고 종정과 원장, 이사와 선의원 등을 추대, 선출하였다. 수좌들이 안심하고 수행할 수 있는 수행 전용 사찰의 할애를 교무원 종회에 요구하였다.
1939년 개최된 전국수좌대회에서도 이 같은 요구를 주장하였고, 초학 수좌의 지도를 위한 모범 선원을 금강산 마하연에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조선불교 선종은 1941년 2월 26일 유교법회 개최하여 일제의 불교정책과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청정 승려들이 전통이 희박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조계 종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1942년 경허집을 발간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선지를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5)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산 설립
1930년대 총본산 건설이 주장되자 총독부는 1937년 2월 26일과 27일에 개최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종교의 정신적 역할과 함께 한국불교도의 단결을 훈신 하였고, 본산 주지들은 총본산의 설립을 결의하였다. 그 후 3월에 이르면 사찰령을 개정하여 총본산 설치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31본산 주지회의는 그 명칭을 ‘조선불교선교양종총본산’ 각황사로 하며, 현 재단법인인 교무원은 해체하여 총본산에 귀속시키며, 그리고 각황사는 매각하여 기지 확장에 사용하는 등 구체적인 안을 결의하였다. 그 밖에도 종정과 종무총장 그리고 각 부장의 선출과 임기 등을 정하였다. 31본산의 총본사 건립은 1937년 7월 27일 시작해서 1938년 10월 25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총본산은 1940년 4월 寺名을 북한산에 있는 태고사를 옮겨오고, 그해 11월 31본사 주지들이 모여서 종래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사용해 오던 종명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개정하였다.
1941년 4월 23일 총독부는 사찰령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이를 인가하였고, 이때 제정된 태고사법은 1941년 5월부터 시행되었다. 그로 인해 태고사 안에 종무원을 설치하고, 31본사 주지 회의에서 종정 선거를 실시한 결과 방한암이 당선되었고, 종무총장은 월정사 주지였던 이종욱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6월 6일 종무를 시작하게 됨으로써 불교인들의 여망이었던 총본산 건설을 이룰 수 있었다.
근대사회와 불교 | 민족 불교의 발전 | 1876~1912 | 근대사회의 전개와 불교/ 거사불교, 개화파, 개화승의 활동 경허의 근대불교 중흥/선풍진작, 선원복원, 정혜결사 불교계의 항일운동/을미의병, 국채보상운동 참여 국가관리 체제의 불교교단/ 원흥사 건립과 사사관리서-명진학교 성립과 근대식 불교교육 근대적 종단건립/ 원종과 임제종의 설립 1908년 3월, 원종 성립-각황사 설립, 조동종 맹약 1911년 11월 임제종 성립-조선선종으로 활동 1912년 6월 사찰령에 의해 양종 폐지 한국불교 개혁론 제시/권상로, 한용운, 이영재 |
일본 불교의 진출 | 1877~1910 | 1877년 진종 대곡파 부산별원 진출 1895년 일련종 사노젠라이 도성출입금지 해제 1906년 통감부의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 제정 | |
일 제 강 점 기 한국불교 | 일제의 한국 불교 통제 | 30본산 시대 1912~1924 | 1911년 6월 ‘사찰령’ 제정 1911년 9월 사찰령 시행령에 의해 사법 제정, 30본산 체제 1915년 ‘포교규칙’ 제정 |
중앙교무원 시대 1924~1937 | 1922년 1월 10본산, 조선불교도총회를 개최(중앙 총무원) 1922년 10월 28일 통도사, 석왕사, 범어사를 제외한 27본산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인가 1924년 4월 3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 ||
조선불교 조계종 1937~1945 | 1937년 3월 5일 제1회 총본산건설위원회를 개최 1938년 7월 27일 기공식, 1938년 낙성식 1940년 4월 寺名을 태고사, 1940년 11월 종명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개정 1941년 4월 23일 개정된 사찰령 시행규칙을 인가, 6월 5일 종정 한암, 종무총장 지암 선출 | ||
민족 불교 운동 | 1912~1945 | 1919년 3.1 운동과 불교 1920년 불교계의 계몽운동 1920년 6월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유신회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 1월 3-5일 교정 7인 선발, 종헌 제정 1921년 11월 선학원 설립 1935년 조선불교 선종 종정 선출-만공, 혜월, 한암. 1939년 전국수좌대회 개최, 1941 유교법회 개최, 1942 경허집 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