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약동(李約東, 1416∼1493년)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70년 제주목사가 되어 재직할 때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관물(官物)인 말채찍을 손에 들고 온 것을 알고 성루 위에 걸어놓고 왔으며, 항해중 배가 파선의 위기에 이르자 하늘을 속인 노여움이라 단정하고 배 안을 살펴 몰래 부하들이 넣어둔 갑옷을 찾아내어 강물에 던진 투갑연(投甲淵)일화는 유명하다.
그 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7년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후손들이 선생의 옛터에 비석을 세워 그 유덕을 기렸으니 글은 철종 때 판서를 지낸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이 지었고 글씨는 이석(李奭)이 썼으며 현재 경북 김천시 양금동에 소재하고 있다.
평정공노촌이선생유허비(平靖公老村李先生遺墟碑)
영남의 김산(金山 : 지금의 김천) 남쪽 15리쯤에 있는 하로촌(賀老村)은 바로 노촌(老村) 이선생이 거처하시던 옛 터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별세하고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니 이는 죽은 뒤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 의리가 되는 것이며 한문공(韓文公 :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이 이야기한 바 ‘자손들은 고향을 버리지 않은 것을 법으로 삼고 죽은 다음 묘사(廟社)에서 제사를 지낸다’(한유의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書)는 것이다.)
선생의 휘(諱)는 약동(約東)이요 자는 춘보(春甫)이다. 정통(正統) 신유년(1441년)에 진사가 되고 경태(景泰) 신미년(1451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뽑혀서 청현직(淸顯職)에 두루 등용되었으며 다섯 번 지방의 수령을 지냈고 세 번 감영과 병영을 관장하였다. 사이에 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갔었고 마지막에는 이조참판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승진하여 관직에서 은퇴하고 홍치(弘治) 계축년(1493년) 6월 1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8세이다.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을 쌓고 경서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충성을 다 하여 임금의 잘못을 고치고 바로잡았다. 탐라(제주도)에서 돌아올 때 단지 채찍 하나만 가지고 오다가 잠시 후 이것도 또한 제주도의 물건이라며 관청의 누대(樓臺)에 걸어 놓고 왔다. 세월이 오래 되어 채찍이 낡아버리자 고을 사람들이 그 자취를 그림으로 그려 흠모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뱃길에서 태풍을 만나 위급한 상황이 되었는데 막하의 사람이 몰래 갑옷 하나를 가지고 온 것을 바다에 던지자 파도가 가라앉아 무사히 바다를 건넜으니 제주사람들이 그 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고 이름 짓고 생사(生祠 :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 이는 선생에게 있어서 자그마한 일이지만 또한 평소에 수양한 것을 증명할 만한 일이다.
선생은 천성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지키는 바가 굳고 확실하였다. 치산을 일삼지 않고 가볍고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으니 사람들이 감히 이러니저러니 평하지 못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강직하고 바르며 청렴하고 신중하여 뇌물이 통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것을 들어 은퇴할 것을 청하고 고향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그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리를 마쳤으니 이름과 실상이 순수하였다. 당시 세상의 여러 어진 사람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면서 찬술하기를 ‘옥으로 만든 호리병 속의 맑은 얼음’이라고 하며 ‘옥수(玉樹 : 신선세상의 나무로 고결한 인품을 말함)에서 나는 맑은 향기’라고도 하며 ‘마음은 물속의 달 같으며 절조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다.’라고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공(김종직)은 문무의 재덕과 시와 예로 군율을 삼는다는 말로써 허여하고 조정에서 재상의 책무에 적합하다고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아름다운 명망에 대하여 어떠하였는가?
지금 선생께서 가신 지 삼백년이 되어 남기신 풍도와 여운이 세상과 함께 점점 멀어지니 선생의 청렴함과 곧음을 칭송한다면 구림의 재석에 비견할 수 있고 선생의 은퇴를 칭송한다면 감호(鑑湖)의 추잠(抽簪 : 벼슬을 그만 두는 것, 당나라 명황제때 하지장(賀知章)이 은퇴를 청하자 감호의 섬수(剡水) 한 굽이를 하사하였다.)으로 작록할 따름이다. 능히 명성을 울리고 일의 공적이 떨쳐 빛나며 훌륭한 정치가 아름다워 국가의 충신이 된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근본을 둔 사람은 드물다. 선생은 김강호(金江湖 : 김숙자)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김점필재(金佔畢齋 : 김종직), 조매계(曹梅溪 : 조위)와 함께 도의와 덕업으로 서로 교제하였고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의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행실과 치적, 문장이 유림의 영수가 되었다. 관직을 사양하고 받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각각 그 바른 도리에 알맞아 선생에게 있어서는 대덕 중에 천류가 된 것이다. 무릇 사람들의 착한 것을 칭찬함에 반드시 그 부형이나 스승, 친구에게 근본을 두었으니 그 너그러움이 지극한 것이다. 선생이 도에 나아가 덕을 이룬 것이 탁월할 따름이니 도를 전수받은 연원이 또한 성대하지 아니한가. 선생이 별세하니 임금께서 슬퍼하여 관리를 보내 치제하시고 평정(平靖)의 시호를 내리셨다. 공은 청백리에 선발되셨으니 후손들이 대대로 수록되었고 또 고향에서도 영예롭게 여겨 그 영령을 경렴서원(景濂書院)에 모셨으니 상하에서 존경하고 보답하는 은전이 또한 지극하였다. 선생의 내외자손은 매우 번창하여 셀 수 없는 지경이지만 이름난 선비가 배출되어 영남의 명문이 되었으니 하늘이 보답하여 베푸시는 것이 그 바로 여기에 있구나. 선생의 후손은 서울과 고향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혹시라도 선생의 옛 터가 오래되면 잊혀질까 걱정하여 비석을 세워 표시하고자 하였으니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은 명준(明峻)과 종화(琮和)이다. 옛날 정백자(程伯子)가 안락정(顔樂亭)의 명(銘)에 말하기를 “물도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도 차마 황폐하게 할 수 없다. 아아! 정학(正學)을 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직필(直弼)도 선생에게 대하여 또한 그렇게 말할 뿐이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병오년(헌종 12, 1846년) 4월 일
외후손 통정대부 성균관 좨주(祭酒)겸 경연관 홍직필(洪直弼)은 글을 짓고,
통정대부 전임 이조참의 이석(李奭)은 글씨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