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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지혜와 역량을 모으는) 홍주정신 -
<윤봉길 & 이형관 예술學橋학교>와 윤봉길 시인님의 월진회 95주년의 의미
김창호
반제대일항쟁시기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이은 한족회와 윤봉길 시인님의 월진회의 정신과 맥을 이은 한길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황야 100주년을 1년 정도 앞두고 2023년 3월 11일 윤봉길 & 이형관 예술學橋학교 제2강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이형관 민주열사 묘역 답사 후에 남양주시 진건읍 춘원 이광수 선생님의 집필터 인근 하천을 " 매헌 적성천 "이라 부르기로 창지명하였습니다.
임강서원의 마지막 종주 역할을 하셨던 필자의 고조부님께 독립운동 하시는 분들께서 " 우리가 1당 100으로 싸우면 독립을 할 수 있을까요? 1당 천으로 싸워야 독립을 할 수 있을까요? " 물을 때 필자의 고조부님께서는 " 영국은 셰익스피어 하나와 인도를 안바꾸겠다고 하니 우리는 천이 아니라 억을 상대로 싸워 이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하시며 우리의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진화하고 발전시켜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1991년 군산대학교 독문학과 1학년 시절 피터한트케의 “관객모독”의 연극 연습과 공연 때에 필자는 당시 필자의 조부님께 들은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실천한 창주 이성길 선생님과 윤봉길 시인님의 삶과 이솝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 그리고 이해조 선생님의 신소설 “자유종”의 내용에 기반해 “관객모독”를 이해하며 초등학교 때 교회에서 한 성극과 학예회 때 연극을 생각하며 성공은 당연하고 공연을 마쳤을 때의 큰 파장을 예감했었습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윤봉길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학자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라.
- 윤봉길 시인님이 두 아드님에게 보낸 서신 속 시 -
登白雲峯
(등백운봉) : 백운봉에 올라 - 李成桂 이성계 詩
引手攀蘿上碧峰
(인수반라상벽봉)
손을 끌고 담쟁이를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올르니,
一庵高臥白雲中
(일암고와백운중)
한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구나.
若將眼界爲吾土
(약장안계위오토)
만약 장래에 눈앞에 뵈는 땅이 내 땅이 된다면,
楚越江南豈不容
(초월강남기불용)
초나라든 월나라든 강남땅을 어찌 마다 하겠는가.
2022년 6월 11일 울뫼숲 준비 모임이후 2023년 2월 11일 윤봉길 & 이형관 예술學橋학교를 열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통일 보다 우리의 통일은 너무나 늦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향한 지혜와 역량을 모으는 "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는 ' BOOK 경기 평화로 동두천시 윤봉길문화마을' " 과 " 정치는 중업 (重業)이다 "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BOOK경기도의 희망! <윤봉길 & 이형관 예술學橋> 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계기가 되는 특별한 담론과 활동은 반제대일항쟁기 윤봉길 시인님의 월진회 활동 등에 선례가 되는 경기도 양주 출신인 독립운동가 윤원세(尹元世)[1890~1939] 선생님께서 양주군 자둔면 금오리[현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에 거주하면서 천도교 양주교구장으로 이곳의 3·1 운동을 주도하신 역사와 1916년부터 천도교 의정부교구장으로 있으면서 천도교당 내에 야학당을 설치하여 생도들에게 일본 배척 사상을 고취하며 청소년과 부녀자에게 한글을 가르치신 것을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미래 지향적으로 재조명해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1919년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자, 윤원세 선생님께서는 3월 15일 고향 양주군 자둔면 금오리에서 이윤의(李允儀)님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의정부로 진출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저지되었습니다. 1923년 11월 27일 금오청년회(金梧靑年會)와 부인회를 조직하여 부락 갱생·부업 장려 등 농촌 계몽 운동과 성미(誠米) 운동에 앞장서고 1936년 8월 14일에는 멸왜(滅倭) 기도와 특별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하셨습니다.
이 시대 봉선사에는 홍월초 대사님께서 계셨는데, 천도교의 교령인 의암 손병희 선생님께서 오시면 김성숙 선생님에게 보좌하도록 해 예산군 인근 홍성이 고향인 한용운 선생님 등과 3ㆍ1혁명을 계획할 때 김성숙 선생님께서 보좌하면서 자연스럽게 3ㆍ1혁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님께서 북경으로 유학을 가서 1924년 2월경 철학, 시, 단편소설, 문학 일반에 걸친 내용으로 『황야(荒野)』라는 문예지를 발간(격월간) 했습니다. 사무실은 베이징세계어전문학교 안에 두고, 출판비용은 회비로 충당하며 주요 집필자는 김성숙ㆍ김봉환ㆍ윤종묵ㆍ차응준ㆍ김규하ㆍ김천ㆍ한봉신ㆍ김봉수 등 이었는데 『황야』는 매호 40~50페이지 분량이었음에도 당시 베이징 한인사회에서 발행한 출판물 중에서 가장 짜임새 있는 잡지로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윤봉길 시인님께서는 천도교 기관지 <개벽>이 폐간 되기 두 달 전인 1926년 6월호에 실린 이상화 시인님의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읽다가 눈물을 터뜨리고 대륙으로 독립운동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윤봉길 시인처럼 삼일혁명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가며 삼일혁명 전후의 역사를 재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남남갈등을 치유하며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낼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며 인류사의 진정한 진일보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 지도자를 자처하는 몰지각한이들은 어두운 역사를 변혁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 사례로 1868년 일본의 오랜 막부시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무사들을 거론하며 영웅시 하며 추앙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저들 일본에게는 영웅일 수 있지만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는 암흑의 시대를 더 암흑의 시대로 이끈 이들로 진정으로 어두운 역사를 변혁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 분들은 황야를 발간하고 의열단을 이끈 우리의 운암 김성숙 선생님과 윤봉길 시인님과 같은 분들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긴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기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네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움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은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 70호, 1926. 6)
그럼! 그 잃어 버린 마음을 찾아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 천하의 질서를 바로 잡아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議政 의정 '인 것입니다. 시호는 사후에 정해집니다. 우리 김문희 할머니의 시호 ' 문명왕후 文明王后 ' 는 여기에 기인한 것이며 조선 태조께서 조선을 개국하고 의정부를 설치한 뜻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윤봉길 시인님의 월진회 등을 본 받고 손병희(1861 - 1922) 선생님을 도와 천도교 양주교구장으로 활동한 면암 윤원세(1890~1939) 선생님의 멸왜기도운동과 삼일혁명가 남강 이승훈(1864 ~ 1930) 선생님의 물산장려운동을 뛰어넘는 진일보를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요?
독일도 빌리브란트가 나치 척결과 동방정책을 펼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정치와 인사 행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통일과정을 보면 우리의 삼한일통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독일은 괴테(Gethe, Johann Wolfang von, 1749~1832)가 문화적인 글쓰기를 하며 모국어를 사용하는 예술가를 모아 '사교적 교양의 시대'를 열고 이러한 사교모임을 발전하여 '사회적 또는 문명적 시대'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이 더 증가하고 확대되어 가면서 그들 스스로의 의견교류가 '용해(Verschmelzen)'되어 대화집단간의 사상적 의견이나 서로의 소망이 이해될 수 있는 '보편적 시대(die allgemeine Epoche)'로 끌어 올렸습니다.
오늘날 독일은 괴테의 이러한 시도에 힘입어 이해집단들이 서로의 목적이나 주장을 상호이해하고 시시각각으로 전개되는 '세계의 흐름(Weltauf)'을 현실적 의미로나 이상적 의미로 받아들여 서로의 비전을 공유할 필요성을 느낀 '일반적 시대(die univeselle Epoche)'를 연 것입니다.
괴테가 이러한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독일은 유럽의 전장터에 지나지 않았고, 문화적으로 유럽의 열등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괴테는 문학을 통해 독일의 점진적 발전과정을 함께 체험하며 유럽 사상가들과의 사상적 정신적 교류를 통해 독일의 문화지체현상을 극복하고 독일을 세계사를 주도하는 나라의 토대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럽의 몽마르뜨 언덕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찾으려 적금을 들기 보다 오히려 윤봉길 시인님의 월진회 활동 등을 본받아 임강서원 선현분들과 월초대사님과 삼일혁명 등의 가르침이 서려 있는 우리의 역사 현장을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님처럼 찾아 생산적이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작품을 쓰고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 주세요.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 보면 우리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유럽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청교도 혁명, 프랑스 혁명 등은 반역이고 쿠테타가 아닌지요? 저들 땅의 탐욕스런 절대군주로부터 지배받던 이들이 자유를 얻어 하느님의 사람들을 강탈하는 집단약탈로 바뀌어 아프리카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 노예로 삼고 매매하고 아편 등까지 팔아 세상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세태를 양산시키지 않았나요?
이들을 등장하게 한 것과 이후락의 공덕비가 봉선사 어귀에 세워져 있는 것과 비교해 보아 주세요. 운허대사님께서는 진정으로 이후락이 공덕이 있어 공덕비를 세웠을까요? 아니면 월파 이후락의 돈으로 당시 대중을 살리는 활인의 도를 펼치시고 후학들을 깨닳게 하기 위해 세우셨을까요?
다시 살펴 보아 알고 보면 인류사의 진정한 혁명은 월초대사님과 남강 이승훈 선생님 등의 삼일혁명 아닌지요? 역사가들이 사회과학자들이 혁명가라 교육하는 레닌을 자세히 살펴 보면 얼치기 폭괴에 지나지 않는지요?
삼일반제항일혁명이라말로 진정으로 인류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진정한 진일보를 가져 온 혁명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제 치하 스페인독감이 만연한 와중 삼일반제항일혁명 할 때 보다도 출산율이 낮을 것을 보면 이 시대 종교인들과 예술가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생각들지 않는지요?
그래서 필자는 광릉숲유네스코운동과 우리 한탄강네트워크 운동의 보다 구체적인 실행으로 윤봉길 시인님의 월진회 활동 등의 가르침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뛰어넘는 월초대사 남강선생 삼일혁명 순례길과 가연령 임강서원 순례길 참선 수행 운동을 윤봉길 시인님의 상하이 의거 상월결사(霜月結社)정신으로 소신공양하는 마음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최근 " 서울의 봄 " 영화 관련 뉴스로 다시금 생각 나게 하는 1986년 광동중학교 2학년 때 월초대사님과 운허대사님의 맥을 이은 월운큰스님의 강연 내용 등은 지금의 조계종 주요인사들도 들었을텐데 저로서는 그분들의 가르침과 납득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또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도 제대로 이해했으면 남강 이승훈(1864 ~ 1930) 선생님과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런지요? 다시 한번 차분하게 함께 생각해 보아 주세요. 지금의 정치와 여러 환경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스페인독감을 겪을 때 보다 나쁘지 않은데 출산율이 최악인 상황이 무엇 때문인지를요?
특히 어쩌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우리의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윤봉길 시인님의 시 보다 미국의 로버트 프로스트 등의 시를 읊조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소개하는 종교인들을 따르게 된 것일까요?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은 일본의 언론 조차도 저출산으로 소멸되어 망할 것이라고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닐까요?
100여년전의 남강 이승훈 목사님과 1924년 북경에서 문학과 예술로 천하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고 문예지 " 황야 " 등을 발간하시던 태허스님 같은 분은 어디에 계신지요? 월진회 95주년의 역사와 상하이의거 92주년의 역사가 있음에도 홍주의 윤봉길 시인님과 같은 분을 소개하는 종교인과 정치지도자 나아가 교육계의 원로를 보기 힘이 드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종교지도자와 국가지도자가 의식이 바뀌지 않고, 사회의 공기가 되어야 할 언론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더욱 이 시대의 교육이 그 역할을 해 내지 못한다면 세상을 바로 보고 있는 국민 개개인이 예술로 의롭게 연대하여 바꿔 나가야 할 것입니다.
문학가는 세상을 정화시키고 밝히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하는 글을 쓰고 도예가는 작품을 만들고 공연가는 무대에 올리고 사진작가와 화가는 사진과 그림으로 전시하면 어떨까요? 도예가의 다용기 잔은 환경을 살려 우리의 미래도 살려 내면 되지 않을까요?
광동중학교 2학년 시절 월운큰스님의 전교생 특강( 최근 " 서울의 봄 " 영화 관련 뉴스로 다시금 생각하니 당시 강연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직원들에 대한 훈시도 포함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후에 " 큰스님! 봉선사 입구 이후락 공덕비를 저대로 나두시면 큰스님은 스승님입니까? 중입니까? "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원적에 드시기전 2023년 부처님 오신 날 봉선사 다경실로 월운큰스님을 찾아 뵙고 ' 황야문학 ' 중광 重光 (복간)호를 드리며 " 큰스님께 중학교 2학년 때 드렸던 질문의 답을 이제는 큰스님의 제자로서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 하고 말씀 드렸더니 동자승처럼 환하게 미소지어 주셨습니다.
봉선사 어귀의 이후락 공덕비는 이제 철거의 대상이기 보다 월운큰스님과의 추억의 대상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참혹한 인류사를 미화한 것을 바로 잡아 나가며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글쓰기와 예술, 즉 문예혁명의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운허대사님의 표석이라 생각됩니다.
윤봉길 시인님과 같은 홍주 출신의 만해 선생님께서 출가한 지 10년이 되던 1917년 겨울 백담사 오세암에서 견성한 뒤에 읊은 오도송(悟道頌)을 생각하면 윤봉길 시인님의 상하이 의거는 최고의 공연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남아가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나그네 수심에 오래 잠긴 이가 몇이던가) /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한 소리 질러 삼천 세계 깨뜨리니)/
雪裡桃花片片飛(설리도화편편비, 눈 속에 복사꽃이 흩어져 날리네).
‘ 진리는 눈보라 몰아치는 현실 속에서 피는 꽃과 같은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외가가 목은 이색 선생님과 토정 이지함 선생님 그리고 이산해 선생님 등을 배출한 한산 이씨 가문인 홍주 출신의 김좌진 장군님은 일제의 최정예 연대인 가노연대를 궤멸시키는 청산리대첩 후 1921년경 홍범도 장군님과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과 장기 항전을 결의하고 ' 대한독립군단 '으로 조직을 재편합니다.
이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은 기자 등으로 활동하며 1926년경 부흥원을 설립하고 월진회 활동을 하는 윤봉길 시인님을 19세쯤 되셨을 때부터 교류합니다.
이흑룡 선생님을 통해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가 썼던 '조선혁명선언'의 배경과 단재 신채호 선생님과 운암 김성숙 선생님 등의 의열단 활동과 1924년 북경에서 발행된 문예지 " 황야 "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1929년 겨울 윤봉길 시인님께서는 1927년 2000만 조선동포의 개인당 평균 빚이 150원이란 것 등에 이어 1929년 광주학생반제항일의거 소식을 접하고 보다 확고한 반제대일항쟁를 계획하던 중 다시 찾아 온 이흑룡 선생님과 함께 1930년 3월경에 " 丈夫出家生不還 "의 글을 남기시고 김좌진 장군님을 만나러 떠납니다.
하지만 윤봉길 시인님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셨다는 말을 듣고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 의군과 함께 큰 슬픔에 빠집니다. 하지만 만일 고려공산청년회에 의해 김좌진 대장군님께서 순국당하지 않으시고 윤봉길 시인님을 만나셨다면 만주국을 우리의 영토로 수복하고 스탈린 군대의 진주를 막아 우리 대한겨레는 지금과 같은 분단에 놓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윤봉길 시인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윤봉길 시인님을 임강서원 선현분들의 가르침을 이은 인문학자이며 시인이며 예술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상하이 의거가 있기 전까지 이처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이흑룡(군명) 의군 등과 관련한 연구가 없었습니다.
더더욱 상하이 의거 직전에 남기신 윤봉길 시인님의 마지막 시, ' 誓詩 서시 ' 연구도 없었고 낭독과 낭송도 보기 힘들었습니다.
妻妻(처처)한 芳草(방초)여/
明年(명년)에 春色(춘색)이 이르거던/
王孫(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靑靑(청청)한 芳草여/
明年에 春色이 이르거던/
高麗江山(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多情(다정)한 芳草여/
今年(금년) 四月二十九日(4월29일)에/
放砲一聲(방포일성)으로 盟誓(맹서)하세
윤봉길 시인님의 誓詩서시(필자가 ' 誓詩 서시 '라 칭했습니다)
윤봉길 시인님의 월진회 95주년과 상하이의거 92주년을 맞아 백제문학과 백제문화예술협회 등과 함께 BOOK 경기 평화로 동두천 윤봉길문화마을 시회전 및 유투브 낭송대회 "를 함께 운영하며 시상의 뜻이 있는 단체와 기업 등의 참여를 바랍니다.
또한 시민과 함께 만들어 가는 " BOOK 경기 평화로 동두천 윤봉길문화마을 "과 " 대한민국의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BOOK경기도의 희망! <윤봉길 & 이형관 예술學橋> 등에 의로운 뜻을 가진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윤봉길 문화마을 가는 길
김창호
윤봉길 시인님을
올 곧게 안다면
비싼 혈세로
어설픈 지식과
잘난 글 재주로
자신만의 탐욕을 채우며
스스로를 뽐내는
어쭙지 않은 이들을
기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충일배족한이들 까지도
또 먼 이국 땅 시인을
기리며 알리겠다 법석떨며
XX마을이나 XX박물관 같은 것도
만들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8호선 구리역
별내 삼밭골 지나
의정부역사박물관에 안창호역
양주시 고읍동에 안중근역 만들고
동두천시 보산역으로 이어
윤봉길 문화마을
윤봉길 시인님은
대한겨레를 살리고
대한민국을 찾기 위해
총과 폭탄으로 싸웠지만
우리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향한 진일보를 이끄는
윤봉길 독서와 윤봉길 예술로
투사가 되자
광동 민우 김창호
군산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밴쳐비지니스 연구과정 수료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 및 이사 역임
백제문학 부회장 및 마홀문학회 회장 역임
현 광릉21포럼 대표, e고려신문 대표
저서로는 2인시집 “너랑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내겐 천국이었어” 학영사
소설집 "광릉숲" 등이 있음
첫댓글 24호 접수합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의롭게 건승하시길 기원드립니다. 함께 하는 의롭고 좋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