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
12월 19일
충칭, 드디어 충칭이었다. 가릉강(嘉陵江)과 양자강을 끼고 있는 산악도시 충칭은 양자강 상류의 경제중심지로 중일전쟁당시 국민당정권이 일본군에 밀려 이곳을 임시 수도로 정한 후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1997년이래 베이징, 상하이, 천진과 더불어 중국 4대 직할도시중의 하나이다.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중구(中區) 연화지(蓮花池) 38호에 있는 임정청사부터 찾았다. 중산일로(中山一路)와 화평로(和平路)가 만나는 지점에서 비탈길을 약간 내려가면 큰 빌딩사이로 임정청사(이하, 연화지 청사)를 알리는 청색표지판이 보인다. 이 표지판이 있는 골목길에서 바라보면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 사이로 약간 퇴락해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면 입구 벽면에 "부정시림국민한대"라고 쓰여있다.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으로 만든 대지에 건물이 서너 동 세워져 있는데 맨 앞쪽 건물에 들어서면 정면에 상하이 임정청사처럼 김구선생 흉상과 태극기가 모셔져 있다. 좌우 벽면으로 임정활동의 기본자료들이 깨끗하게 전시되어 있고 좌우로 통하는 각각의 방에는 외교활동과 군사활동에 관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각 건물과 방에는 내무부, 재무부, 주석실 등이 상당히 규모있게 꾸며져 있었으나 어떤 방은 창고처럼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창문틀사이로 깨어진 유리조각도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관계자에 따르면 '가까운 시일 내에 독립기념관측과 협조하여 새로 개조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임정은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임정이 충칭에 자리를 잡은 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항일투쟁을 굳건하게 전개하게 되는데 1940년 9월 17일 가릉강가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숙원사업이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총사령부를 시안에 두게 된다. 이로써 임정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항일전쟁의 기반인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아울러,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또 내부적으로 당시 최대 좌파조직인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정에 참가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위해 양대 진영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해방될 때까지 한국광복군은 일본군과 본토에 대한 선전 공작으로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중국군과 협조하여 전쟁포로를 관리하는 동시에 한국인 포로를 계도시켜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1945년 초, 광복군과 미군의 합동작전이 계획되었으나 일본이 너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실질적인 전과를 올리지 못하게 된다. 김구선생은 이 일을 두고 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12월 20일. AM 7:00
밖은 아직 어두웠다. 창문밖에는 비가 살포시 내리고 안개는 짙게 깔려 충칭은 역시 안개의 도시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천천히 걸어 나와 버스를 타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고 그냥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 하는 수 없이 함께 시내쪽으로 걸어가는데 장강대교에 이르러서야 뭔가 행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마카오(奧門)회귀 기념행사였다. 다리를 거의 다 건너자 건너편 강변도로에서 차량들이 번쩍번쩍 헤드라이트을 켜대며 행진하고 있었다. 약간 부럽기도 하고 또 얄미웠다. 우리도 남북통일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찾을 때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중국인은 마카오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왜 그네들은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티벳인에게 티벳을 돌려주지 않는 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나라가 티벳인을 민간차원에서라도 많이 도와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그네들처럼 똑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가?
자동차을 통제시켜 걷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중흥로(中興路) 비탈길을 한참만에 올라가니 교구장이 나타났다. 교구장로타리 안쪽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있어 노친네들이 삼삼오오 쉬고 있었다. 이곳 어느 부근이 충칭으로 온 임정이 처음 집무를 본 곳이다. 임정은 여기에서 화평로 2항(오사야항)쪽으로 옮긴 후 다시 연화지로 옮겨 번듯한 정부청사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교구장에서 연화지 청사까지 다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간 후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추용로(鄒容路) 37호에 '味元'이라고 쓰여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곳은 시내 중심가의 꽤 유명한 해방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여 한참 시내구경를 한 후 쾌이찬(快餐, 길거리에서 서서 먹는 중국식 간이식사)을 걸인처럼 쩝쩝 먹고 난 후 토교(土橋)로 향했다.
토교는 임정이 치쟝으로부터 충칭으로 옮겼을 때 국민당정부가 충칭교외에 서너 채의 집을 짓고 임정요인과 항일지사의 가족들을 거주하도록 배려해 준 곳으로 교육기간까지 두고 공동체 생활을 한 유서깊은 곳이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을 수 없어 역 근처로 가서 택시에 올랐다. 운전수에게 '토교를 아는냐'고 했더니 무조건 '안다'고 했다. 미심쩍었다. 하지만 별 뽀쪽한 수도 없고 해서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역시 잘 알지 못하는 지 계속 무선 연락한 후 계속 달려 양자강을 건너려하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운전수에게 버럭 화를 내며 '어디로 가는지 지도상에 가르켜 보라'고 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土橋'라고 분명히 쓰여져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보자'고 했다. 쓱 지나쳐 가는데, 폭포가 하나 보였다. '혹시나'하는 생각에 내려달라고 하였다. 정말 이곳일까? 몇 군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토교가 어디냐'고 물으니 '이곳에서 더 가야한다'고 하였다. 한참 더 나아가 살펴보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폭포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되돌아 걸어나오는데 아까 그 사람들이 오고 있어서 '폭포가 또 있는지'물으니 '없다'고 하였다. 멀리 보이는 폭포를 아쉬움에 다시 한번 바라보다가 돌아 나왔다. 벌써 오후 3시. 비행기 이륙시간은 7시 35분.
마지막으로 연화지 청사에 하직이라도 하고 싶어 급히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장강대교까지 나오는데, 왜 그리 먼지. 덜커덕 덜커덕, 꼬불꼬불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상하이, 난징, 꽝저우, 그리고 충칭. 이 넓은 대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족에게, 아니 그때 모든 대한민국인에게 허용된 땅이라곤 웅벽한 중경의 먼 골짜기, 손바닥만한 땅밖에 없었던 것이다. 온갖 상념들이 오고 갔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였다. 약간의 진정된 마음과 숙연한 자세로 연화지 임정청사를 찾았다. 청사에 모셔져 있는 태극기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태극기 앞에 서자 저절로 오른손이 가슴에 올라갔다. 김구선생을 비롯한 모든 독립투사에 대한 감사의 묵념을 하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어제하고는 사뭇 다르게 그곳이 고향만큼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조선족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연간 5,000명 정도의 한국인이 관람한다고 하니 상하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주변의 신식 건물들 사이로 서 있는 불안한 이 곳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한국인이 방문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맨 위층을 관람하는데 한 중국 관리인이 뜰을 쓰는 것이 보였다.
문득,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소원했던 김구 선생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