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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手中)에 든 일
먼저 이 장의 제목을 약간 설명을 하겠다. 가령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어떤 일을 시켰는데도 불구하고(이것은 아버지의 부분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 수중에 일이 남았으므로 수중에 든 일을 다 마치면 아버님의 분부하신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하자. 이것이 내가 말하는 ‘수중에 든 일’ 이다. ‘수중의 일’ 이란 아버지가 아들에게 분부하기 전에 아들이 이미 수중에 쥐고 있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수중에 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일은 제한을 받게 된다. 수중에 일이 없는 사람은 정말 찾기 어려우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 손에는 항상 수중의 일이 있다.겉사람이 아직 파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항상 수중에 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겉사람은 겉사람의 일과 물건과 수고를 갖고 있고 또 각기 다른 작용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 안에서 역사하시려고 할 때 우리 겉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못한다. 바로 이 수중에 든 일이 우리로 하여금 참되게 영적으로 유용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겉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다
우리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다. 가령 몸집이 크지 않고 오십 근밖에 질 수 없는 한 형제에게 열 근을 또 지게 한다면 그는 지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한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 밖의 일을 할 수 없다. 그가 이미 오십 근을 지었다면 열 근을 더 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이미 진 오십 근이 그의 수중에 든 일이다. 이것은 육신의 힘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 육신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 겉사람의 힘도 한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힘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들의 겉사람의 힘도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겉사람의 힘을 낭비해 버린다. 가령 어떤 사람은 그 부모를 사랑하는 데 그의 힘을 다 쏟는다. 그래서 그는 한 형제를 사랑할 힘이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힘이 더이상 없게 된다. 그의 힘은 그 정도뿐이고 또 다 써버렸기 때문에 다른 데 쓸 힘이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각도 한계가 있다. 어느 누구도 무한량한 생각을 가질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어떤 주의를 많이 갖고 그 일에 생각을 많이 두었다면 그에게는 다른 일을 생각할 여력이 없게 된다. 로마서 8장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성경은 영을 좇아 행하는 너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준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영에 속한 사람에게만 효능을 발휘한다. 그러면 누가 영에 속한 사람인가? 신령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영에 속한 사람이다. 신령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육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육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이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한다>는 <유념하다> 또는 <주의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가령 어느 어머니가 외출할 때 아기를 친구에게 위탁하면서 <나를 위하여그를 주의해주려므나>라고 말했다 하자. 그를 주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를 계속 주시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한 가지를 유념할 수 있을 뿐 두 가지를 유념할 수 없다. 누가 당신에게 아기를 맡길 때, 당신은 아기를 주의하면서 산에 있는 소와 양을 동시에 관심할 수 없다. 육신의 일을 유념하지 않는 사람만이
영의 일을 유념할 수 있고 영의 일을 유념하는 사람만이 성령의 법의 효능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의 힘은 한계가 있다. 우리가 육신을 위해 생각의 힘을 다 써버렸다면 영적으로 우리는 우리 생각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따라가지도 못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일에만 유념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영의 일에 유념할 힘이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 겉사람의 힘이 유한(有限)한 두 어깨와 같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수중에 든 일이 있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수중의 일이 있는 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힘도 그만큼 감소된다. 수중의 일은 진실로 하나의 장애요 아주 큰 저해 요소이다.
가령 어떤 사람의 감정에 수중의 일이 있다 하자. 그가 여러 가지 분란한 사모함과 바램이 있어서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하며, 이것과 저것에 대하여 다 느낌이 있을 정도로 수중의 일이 많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요구가 임한다면, 그는 더이상 사용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 감정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하루 이틀간 필요한 감정을 다 써버렸다. 이틀이 지나야만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의 감정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코 무한하게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그 의지가 강하고 그 됨됨이도 매우 강인하다면 그 사람의 의지가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강인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는 의지가 우유부단하여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한다. 겉보기에 그는 강인한 사람 같지만 하나님의 일에서 의지를 사용해야 할 때 보면 참으로 의지를 사용할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자기 주장을 잘 내세운다. 그는 어떤 일에서든지 자기의 주장을 갖고 이랬다가 또 저런다. 그러나 정말 영적인 일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때 그는 우유부단하고 속수무책이며 어떻게 결정해야 할 지를 모른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원인은 그의 겉사람이 수중에 든 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손과 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어서 이것에 의해 온 존재가 소모되고 그의 겉사람의 온 힘이 다 사용되고 소모되었다.
우리 겉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수중의 일이 있을 때 우리 겉사람은 제한을 받게 된다.
영은 파쇄된 겉사람을 사용한다
겉사람이 제한받을 때 우리의 영도 제한을 받는다. 왜냐하면 영은 겉사람을 넘어서서 우리 몸에 역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을 넘어서 그분의 영으로 사람의 몸에 역사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겉사람을 넘어서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사람에게 역사하지도 않으신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원칙이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성령은 사람을 넘어서서 사람의 몸에 역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영도 우리 겉사람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의 몸에 역사할 수 없다.우리의 영은 우리 겉사람을 거쳐야 다른 사람에게 역사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우리 겉사람에게 수중에 든 일이 있어 그것에 의해 온 힘이 다 소모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시키신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영이 길을 얻지 못할 때 성령도 길을 얻지 못한다. 속사람을 대항하고 속사람을 저지하며 속사람을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겉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겉사람이 파쇄될 필요성을 거듭 강하게 말한 것이다.
겉사람에게 수중의 일이 있을 때 속사람은 출구를 얻을 길이 없고 하나님의 역사도 제한을 받게 된다. 수중의 일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추진되어온 일이다. 바꾸어 말해서 수중의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수중의 일은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않고 하나님의 정하심이 없어도 진행될 수 있는 일이다. 수중의 일은 하나님의 손 아래 복종하지 않은 일이고 단독적으로 행동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겉사람을 깨뜨린 후에야 당신의 겉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깨뜨린 후에야 당신의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실 수 있으시다. 당신의 겉사람이 깨지지 않을 때 당신은 자기 일만 하고 자기의 길을 가며 자기 사람만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겉사람을 깨뜨린 후에야 파쇄된 당신의 사랑으로써 다른 형제를 사랑하게 하신다. 이럴 때 당신의 사랑은 확충된다.겉사람이 파쇄되어야만 속사람이 흘러나온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속사람이지만 그는 겉사람을 사용하여 남을 사랑한다.겉사람에게 수중의 일이 있다면 속사람은 흘러나오는 통로를 읽게 된다. 우리의 의지도 강하다. 강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팍하다. 속사람이 의지를 필요로 할 때 협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겉사람의 의지가 단독적으로 행동하고 이미 수중에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강하게 우리의 의지를 강타하여 깨뜨리신다. 우리가 잿더미 속에 없드려, <주여, 저 홀로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구하지도 않으며 어디서나 범사에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하기까지 우리를 깨뜨리신다. 우리가 이런 단계에 이르기까지 매를 맞을 때 비로소 우리의 의지는 단독적으로 행동하지 않게 되고 우리 속사람도 이 의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겉사람이 그분께 쓰임받지 못할 때 속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몸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는가? 입이 없다면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는가? 설교할 때 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에는 또한 구변이 필요하다. 입 없이 영만 가지고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오순절날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또한 구변이 주어졌다. 구변이 없다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강론할 수 없다. 사람이 할 말이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도 없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통하여 전파된다. 사람에게 말씀이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 사람의 말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가령 한 형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의 영 안에 말씀이 있고 부담도 있으며 또 그 부담이 상당히 강하다 하자. 만일 그에게 합당한 생각이 없다면 그는 결코 그 부담을 해방하지 못하고 그 부담마저도 잃을 것이다. 우리는 부담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 부담으로 가득찻을 때 그것을 전달할 생각이 없다면 부담이 무익하고 부담이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결코 영 안의 부담만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 영 안의 부담은 반드시 생각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 속에 부담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입과 목소리가 있어야 하고 신체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문제는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담을 얻을 수 있는 상태이나 우리 겉사람의 생각이 온 종일 분주하고 분란하며 계속 방법만을 생각해내려고 하는 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영은 결코 출구를 얻을 수 없다.
오늘 하나님의 영은 사람을 통하여야 나올 수 있다. 즉 사람의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사람의 생각이 있어야 하나님의 생각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결정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문제는 겉사람이 자기 일을 하고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있다. 겉사람이 겉사람의 일로 분주할 때 속사람은 나아갈 길이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겉사람을 깨뜨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의지를 없애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의지 안에 있는 수중의 일을 없에 버림으로써 의지가 단독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생각을 쓰지 않고 방법을 쓰지 말라는 말도 아니라 방랑하는 자기 생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감정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속박받고 속사람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속사람은 쓸만한 의지와 생각과 감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영에는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한 감정이 필요하고,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한 생각과 의지도 필요하다. 영은 죽어 있는 겉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겉사람을 필요로 한다. 영은 원래 그대로의 겉사람이 아닌 매맞고 상처나고 파쇄된 겉사람을 필요로 한다. 오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몸에서 출구를 얻지 못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 겉사람이 이미 다른 것으로 채워졌고 수중의 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시고 속사람이 나오는 출구를 얻을 수 있으시기를!
하나님은 우리 겉사람을 소멸하지 않으신다. 그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 겉사람이 원래 그대로 완벽하고 파쇄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겉사람을 통과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이 우리 겉사람을 통하여 남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고 겉사람을 통하여 생각하며 결정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파쇄된 우리 겉사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이 기본적인 다룸을 받아야 한다.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았다면 주님은 우리에게서 출구를 얻지 못하신다. 주님은 우리 겉사람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미치신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을 때 속사람과 겉사람은 대립 관계에 있게 된다. 속사람과 겉사람은 각각 완전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겉사람은 완전하고 독립된 겉사람의 상태로 있다. 그 결과 겉사람은 자유롭고 그 안에 수중의 일이 가득하지만 속사람은 감금되어 버린다. 그러나 겉사람이 실지로 파쇄된 후 겉사람은 더이상 단독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된다. 겉사람이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겉사람은 더이상 속사람과 대립된 관계에 있지 않고 속사람의 통제를 받는다. 이렇게 될 때 우리 몸에는 오직 한 인격이 남게 된다. 겉사람은 속사람이 사용하기 위한 통로같은 것이 된다.
겉사람이 파쇄된 사람은 안팎이 일치되며 겉사람이 속사람의 통제를 받는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일치됨이 있지만 그 순서를 뒤바꿔서 속사람이 겉사람의 통제를 받는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영이 존재하지만그의 겉사람은 속사람을 넘어 뜨릴 정도로 힘이 강하다. 그의 속사람에는 약간의 양심의 항의만이 남아 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속사람은 겉사람에 의해 완전히 넘어뜨림을 당하고 겉사람에게 복종한다.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는 방향을 바꾸어서 겉사람이 완전히 파쇄되어 속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겉사람이 속사람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이제 우리들은 방향을 바꿔서 속사람으로 겉사람을 완전히 다스리게 해야 한다. 자전거를 타는 것에 비유한다면, 두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바퀴가 길 위를 굴러 가는 것이고 다른 경우는 길이 바퀴를 굴러 가게 하는 것이다. 평지를 다닐 때에는 페달을 밟으면 바퀴가 돌기 때문에 이것은 바퀴가 길위를 굴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내리막길에서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바퀴가 돌아가기 때문에 이것은 길이 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속사람이 강건하고 겉사람이 파쇄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비퀴로 길 위를 굴러가는 것이므로 굴러 갈 것인가 굴러가지 말 것인가의 권한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빨리 가려면 빨리 갈 수 있고 느리게 가려면 느리게 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겉사람이 강하고 파쇄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같이 길이 우리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일단 그 길이 우리를 굴러가게 하면 우리는 자전거를 멈출 길이 없다. 이것이 겉사람이 속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유용한가의 여부는 그의 영이 겉사람 안에서 나올 수 있는가를 보면 된다. 우리의 속사람이 나오지 못할 때가 바로 겉사람이 역사할 때이다. 그 때가 바로 겉사람이 단독적으로 행동하고 밖의 길이 바퀴를 굴리고 있을 때이다. 만일 주님의 은혜로 우리 밖의 내리막길이 완전하게 평탄하게 된다면, 곧 겉사람이 파쇄되고 겉사람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어떤 것의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면 속사람은 능히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 때 속사람은 겉사람의 저지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나올 수 있게 된다. 만일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 겉사람이 파쇄된다면 우리는 영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우리 영은 나와야 할 때 즉시 나올 수 있게 된다.
교리가 아닌 사람의 문제이다
우리가 교리를 배웠다고 해서 사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문제는 사람의 어떠함에 있다. 사역은 우리 사람의 어떠함이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다룸을 받았는가에 있다. 옳은 교리를 사람들에게 준들 교회에 생명을 공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배울 공과는 여러분이 쓸만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쓸만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는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끊임 없이 우리 몸에 역사하신다. 바로 우리가 그 역사에 대해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매일 우리를 깨뜨리고 계신다. 수년간의 고통과 어려움과 수차 하나님의 저지하는 역사가 우리 몸에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가로막으셨고 저렇게 하려고 할 때에도 가로막으셨을 것이다. 이 모든 환경에서 만일 당신이 아직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는지를 모른다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이여! 내 눈을 열으사 당신의 손을 보게 하소서> 많은 경우에 나귀의 눈이 자칭 선지지라하는 사람의 눈보다 훨씬 밝다. 나귀의 눈은 이미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건만 자칭 선지자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나귀는 하나님의 저지함을 알았건만 자칭 선지자라는 사람은 저지함을 몰랐다. 우리는 파쇄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
수 년 동안 하나님은 한 단계 한 단계 우리 겉사람을 깨뜨리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한 자로 남아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파쇄하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그에게 부족한 것이 교리라고 생각하고, 교리를 좀더 들을 수 있고 설교 자료가 더 많고 성경 해석을 좀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길이다. 하나님의 손이 당신의 몸에서 하시는 한 가지 일은 바로 당신을 깨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기 뜻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좇으며 자기 결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결정을 좇을 정도로 당신을 완전히 깨뜨리고자 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한 차례 한 차례 우리를 가로막으시는데도 이것 저것을 원망하는 데 있다. 또 그 선지자같이 자기는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하면서도 나귀에게 달리지 않는다고 나무란다.
우리의 모든 환경은 다 의미가 있다. 모든 환경에는 다 하나님의 안배하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안배하시지 않고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이라고는 없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안배하심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안배하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목적을 갖고 계시고 범사에 우리를 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가 환경 안에서의 하나님의 안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영이 나올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영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기도가 아닌 법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고 겉사람을 파쇄하시며 영을 나오게 함으로써 우리의 영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의한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우리 속사람이 파쇄된 겉사람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온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기도로 이 법더러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법은 기도로 바꿔질 수 없다. 당신이 기도하면서 손을 불속에 넣는다 할지라도 당신의 손은 여전히 타고 아프다. (이것은 기적이 아닌 자연적인 것이다). 당신의 기도는 결코 그 법을 개변(改變)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기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손을 태우지 않으려면 손을 불에 넣지 말아야 한다. 한 면으로 기도하면서 또 한 면으로 손을 불에 넣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법대로 우리를 다루신다. 속사람이 겉사람을 거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법이다. 당신의 겉사람이 깨져서 가루가 되지 않는 한, 속사람은 나올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은 주님의 길이기 때문에 당신의 겉사람이 깨져야 주님은 출구를 얻으실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이 법을 거스리면서 이런 저런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기도는 하나님의 법을 고칠 수 없다.
영적 사역의 길은 하나님으로 우리에게서 나오시게 하는 것이다. 오직 이 길만이 하나님의 합당한 길이다. 복음은 파쇄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출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도 그런 사람에게서 출구를 얻지 못한다. 그 사람 자신도 갈 길이 없다. 우리 자신은 정말 주님 앞에서 엎드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법에 순복하는 것이 많은 기도보다 훨씬 낫다. 무지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고 이런 저런 일을 이루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한순간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보다 훨씬 못하다. 이런 기도는 무익하다. 더 좋은 것은 이런 기도를 멈추고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 앞에 자신을 부복시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축복을 사모하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그분의 빛 비춤을 구하고 그분의 수하에 순복하기를 배워야 하며 이 법에 순복해야 한다. 이 순복이 곧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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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은 기도로 바꾸어질 수 없다. 아멘. 겉 사람이 깨어져야만 주님의 생명이 해방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의 길을 갈 수가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