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청도 역사‧문화 개요
소청도는 대청도와 함께 백령도의 부속도서로 지명의 발생 과정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령도, 대청도와 거의 같은 역사를 가진다. 고려시대 송나라 문신 서긍(1091 ~ 1155년)이 송나라에서 고려로 오는 노정을 적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소청도는 “대청도와 모양이 같은데 다만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이 많을 뿐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 소암도(小岩島)라고 하였다가, 그 후 대청도와 가까운 작은 섬이라는 뜻으로 소청도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대청도와 가까이 위치하여 일찍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 대청도와 함께 좋은 어장을 형성하여 다양한 어류가 잡힌다.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고, 굴과 전복 그리고 돌미역 등의 해조류 양식이 활발하다. 1406년(태종 6년) 대청도와 함께 옹진현에 편입되었다가 16세기 경 다시 장연현에 소속되었다. 이후 1799년(정조 26년) 수원부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1894년 황해도 장연군에 속하였고, 1928년 옹진군 백령면에 예속되었다. 1977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경기도 부천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 인천광역 시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소청도의 남서단에 위치한 소청등대는 1908년 설치된 것으로 팔미도 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설치되었다. 100여 년 동안 인천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등의 섬을 오가는 배의 눈이 되었고 중국을 오가는 배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2005년에 현대적으로 개축하여 방문객을 위한 안내소와 전망대를 마련하였는데, 전망대에서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북한의 옹진반도까지 볼 수 있다. 예동 포구에서 소청동로를 따라 2km 떨어진 남동 해안 끝에는 백색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분바위가 있다. 달빛이 분바위에 반사되어 등대가 없었을 당시 뱃길을 안내하는 역할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일명 월띠 라고도 한다. 분바위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세자 때 대청도로 귀양 와서 생활하던 중 이곳에 놀러와 방향의 한을 달래기도 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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