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졸당선조의 후손 박원연입니다.
주소를 알려주셔서 물언재와 아당선조의 단비를 잘 참배하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 앨범의 표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전자책으로 된 탐방앨범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 : 진주 금산면 아당공 재실 물언재(勿言齋) , 아당박선생 시향지단(啞堂朴先生時享之壇)
물언재(勿言齋) 중건기(重建記)
이 물언재(勿言齋)는 아당(啞堂) 박공(朴公) 조(調)의 제각이다. 장차 단지 제사를 모시는 데만 쓸 것인가?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일가들을 모아 조상을 높이고 일가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도리를 강구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손님들을 대접하여 지난달 조상들끼리 오고가던 정의를 회복할 것이다. 또 집안 자제들이 글을 읽거나 예의를 익히는 장소로도 제공할 것이다.
아당공(啞堂公)은 고려(高麗) 말기 충절(忠節)의 신하인 충숙공(忠肅公) 송은선생(松隱先生) 휘(諱) 익(翊)의 셋째 아들로서 우당(憂堂) 인당(忍堂)의 아우면서 졸당(拙堂)의 형님이다. 야은(冶隱:吉再) 춘정(春亭:卞季良) 독곡(獨谷:成石璘)의 도움을 줄 만한 벗이었다. 부친의 명을 받들어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夢周)에게 배워 이학(理學)의 참된 도리를 얻어 듣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조예가 깊어 스승의 칭찬을 크게 받았다. 조선 초기에 진사에 올랐고 그 뒤 효성으로 추천되어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공(公)은 평소에 명예나 이익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산수 자연속에서 숨어지냈다. 오늘날 그 시문(詩文)을 보면 그 바른 학문과 엄격한 처신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문이 전하는 것이 20여편도 되지않아 그 아름다운 말씀과 훌륭한 행실이 세상에 많이 남아 전하지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 재실의 이름을 물언재로 한 것은 공의 아호인 "아"자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성인 공자가 제자 안연이 인을 실천할 수 있는 항목에 대해서 물은 것에 사물(四物)로써 답하셨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라"라는 사물(四物) 가운데서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공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면 나머지 세가지 하지 말라는 것을 따라서 할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여 그치지 않으면 인(仁)의 경지에 가까이 갈 수 있다. 나중에 공(公)의 학행(學行)으로 신계서원(新溪書院) 향사(享祀)되어 있으니, 그 성취가 어떠한지는 알 수 있다. 불행이도 공의 묘소를 알 수가 없다. 그 자손된 사람들의 개탄스러움은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조선 말기 임오년 1882년에 여러 후손들이 진주 관아의 동쪽 월아산(月牙山) 금선봉(琴仙峯) 아래에다 제단을 설치해서 해마다 묘사(墓祀)를 지내왔다. 자손들이 그 주변에 모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려면 재계(齋戒)하면서 자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광복 3년전 임오(壬午:1942)년에 재실을 지어 물언(勿言)이라는 이름을 걸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묘(丁卯:1987)년에 이르러 국가에서 군부대를 설치하기 때문에 재실을 운당산(雲堂山)아래 죽전곡(竹田谷)으로 이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재실이 본디 좁아 재계하며 잠자는는데 애로가 많았고 또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낡고 기울어 더 이상 보수할 수도 없었다. 이에 "뜯어 내고 확장해서 다시 짓는 것이 낫겠다"는 종친들의 주장이 세차게 나왔다. 이에 의견이 일치되자 정성을 모아 대목을 부르고 목재를 구입하여 무자(戊子:2008)년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기축(己丑:2009)년 9월에 마쳤다. 다섯칸의 우뚝한 건물이 골짜기에 그득하였다. 이에 여러 후손들의 오랜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재실은 단순한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고 여러 후손들의 피와 정성이 응집된 것이니, "아당(啞堂) 여러 후손들의 정신적 고향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후손들이 어디에 살던 이 재실을 어머니 품과 같이 생각하면 가히 안온한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거의 끝나갈 무렵에 물언재 고문인 상진, 영복, 성용과 이사인 해원 경상 어른들이 말하기를 "사실을 기록하는 글이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자 이에 대종회장 용권과 총무 응상이 재주없는 나를 찾아와 글을 요청하였다. 내가 여러 후손들의 조상을 높이는 정성에 감동하여 굳이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지었다. 이일에 있어 시종 가장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은 응권이다.
기축년(2009년) 입추절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허권수는 삼가 짓는다.
啞堂朴先生時享 之壇(아당박선생시향 지단)
壇碣銘竝序
墓祭之有壇義起也勝國之季圃隱鄭先生倡道東邦時則有若忠肅公朴松隱先生與之
相尚命其子曰融憂堂曰昭忍堂曰調啞堂曰聰拙堂往學焉大被師門奬詡麗杜屋松隱
野自献使四者出仕啞堂繩勉擧進士被薦爲禮曹郞尋復浩然南下卜居于宜春朴嶺覃
義理寄意湖山以天年終配靈山辛氏司直喜女配光山金氏之澤女生二男興文進士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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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ㅁ洋洋悽愴來歆格此是扵禮之權而得中庻無斁我作銘詩表羡道千秋萬歲石不
宗後學 致馥撰
二十二世孫 漢相 謹書
檀紀 四千二百三年 (己巳) 月 日 移建
비가 온후에 급히 촬영하다보니, 단비의 뒷면 윗쪽과 오른쪽면 윗부분의 판독이 않됩니다.
혹시 가까이 계시는 분이 뒷면의 윗부분, 오른쪽 윗부분을 촬영하셔서
이곳 카페나 졸당공파 홈페이지(www.joldang.co.kr) 혹은 제게 카톡, 메시지로 사진을 알려주시면 추가입력토록 하겠습니다.
혹시 잘못된 사실이나 오자가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또 단비의 내용이나 추가할 내용이 있으시면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원연 010-3795-4727
첫댓글 서울 박원연 후손이 이번 추석 명절에 귀향하면서 물언재 재실을 방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마중하여 안내해 드리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물언재 유래와 단비까지 보시고 설명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자주 연락 주시기 바라면서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당, 졸당 파이팅!!!..... 카페지기 박내진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