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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작전과 기적의 배
전용진 함경남도중앙도민회 고문(전 함경남도지사)
3. 기적의 배 메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
12월 19일 부산에서 올라온 Meredith Victory호가 흥남항으로 들어왔다. 건조된 지 5년 된 10,658톤급 미국 국적의 화물 수송선이었다. 12월 20일 흥남부두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부두를 살피던 36세의 선장 라루(Leonard P. LaRue)는 깜짝 놀랐다. 군인과 화물만 있어야할 부두에 수십만의 민간인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Meredith Victory호는 아래층 화물칸에 52가론짜리 드럼통 항공유(Jet油) 300톤을 싣고 왔으나 하역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살을 에는 바람찬 부둣가에서 서로 먼저 배를 타려고 아우성치는 장면 울부짖는 소리, 보따리를 이고 메고 든 사람, 애기를 등에 업은 여인들, 부모의 손에 끌려 다니는 병아리 같은 어린이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Meredith Victory호가 닻을 내리자 미 10군단 차일드(John Childs)대령을 포함한 영관장교 4~5명이 승선하여 “우리가 선장에게 피난민을 태우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선장께서 자원하여 저 지친 피난민 몇 천 명만 태울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과 의논하여 결정을 내려줄 것을 부탁하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라루 선장은 누구와 상의도 하지 않고 배를 부두에 댈 것을 명령했다. 임시 사다리를 설치하고 승선 연결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12월 22일 21:00시부터 피난민 승선이 시작되었다. 라루 선장은 일등항해사 러니(J. Robert Lunney 당시 22세)에게 “피난민을 승선 시키시오. 10,000명이 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자정 무렵 5,000명이 승선했는데 갑판위에는 더 이상 태울 공간이 없었다. LaRue 선장은 아래층 화물칸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 사람을 태우라고 지시했다. 승선은 다음날 오전 11: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무려 14시간 동안의 승선이었다. 최종 승선을 마쳤을 때 14,000명이 타고 있었다. 갑판에 빼곡히 타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귀를 때리는 함포 소리 속에 불타는 시가지와 아직도 배를 못타고 부둣가에 운집해 있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Meredith Victory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로스안젤리스(LosAngeles)에서 건조되어 1945년 6월 23일 취역한 무어 맥코맥 회사(Moore-McCormack Liner)의 화물선이다. 길이139m 폭19m 흘수선7.6m포함 높이가 19.1m, 1만6백58톤의 비교적 큰 배에 속하며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작은 대학(College)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 이름 뒤에 “Victory"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화물과 장비를 실어 나르는 화물선에 붙인 명칭이다. 배의 정원은 선원35명 간부12명과 승객12명을 포함해서 모두 59명인데 당시에는 47명의 승무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배에는 화물칸(Cargo)이 다섯 개 있었는데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아래 화물칸으로 내려가 수용되었으나 갑판위에도 피난민으로 꽉꽉 차고 말았다. 상갑판을 포함하여 6개 장소에 14,000명이 탔으니 한 칸에 평균 2,300명이상 탄 셈이다. 배에는 먹을 것도 없었고 물도 없었으며 화장실도 없었고 의료진도 통역관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한군데 바싹 붙어 모여 앉아서 희미하게 비치는 전등불빛만 바라다 볼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 소변 처리와 음료수 해결이었다. 먹는 것은 생쌀이라도 씹어 먹거나 그것도 없으면 굶으면 며칠은 버틸 수 있지만 물은 마시지 않고서는 갈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으며 특히 대변과 소변은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화물칸 한쪽에서 대 소변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상해 보라! 그 악취를! 그래도 피난민들은 불평 한마디 않고 잘도 견뎌 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났으니 사람들은 ”생명의 기운이 전쟁의 참상을 이겨 냈다“고 기뻐했고 미국인 선원들은 Oh! My god!를 외치며 이들에게 김치1, 김치2, 김치3, 김치4, 김치5 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들 중 한명은 Catholic 신부가 되었고 다른 1명 이명철 씨는 거제도 장승포에서 가축병원 원장을 하고 있으며 현재 거제도 흥남철수 작전기념 사업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흥남부두를 떠난 Meredith Victory호는 느린 속도로 항해하여 크리스마스 이브(Christmas Eve)에 부산항에 입항하려고 했으나 이미 많은 배들과 피난민들로 꽉 차 있어서 입항하지 못하고 기수를 다시 남쪽으로 돌려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으나 배가 커서 바로 접안 못하고 LST에 옮겨 탄 후에 12월 26일 밤에 육지에 내렸다. 기뢰와 짙은 안개로 깜깜한 어두움을 뚫고 단 한명의 희생도 없이 다섯 명의 신생아를 탄생 시키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이 배를 일명 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라고 부르며 이배를 타고 온 사람들을 크리스마스 카고의 영웅들이라고 부른다. 피난민들은 장승포 국민학교 운동장에 수용되었는데 남쪽지방이어서 흥남 부두보다는 따뜻한 편이 었다. 아침에는 원주민들이 주먹밥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 후 Meredith Victory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퇴역했다가 월남전에 다시 동원되어 작은 임무를 수행했고 1993년 영국회사에 고철로 팔려 중국의 어느 항구에서 해체되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기적의 배 하나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모형물 보다는 실물을 전시하여 세계전쟁사에 가장 인도적이고 기록적인 역사를 지닌 배를 정부가 구입하여 후계세대에 보여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을 텐데... Meredith Victory호는 1960년 미국 의회로부터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대통령이 서명한 “용감한 배 (Gallant Ship)”상을 받았고 같은 해 한국 정부로 부터도 상을 받은바 있으며 미국 교통부로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실현한 배”로 선포되었다. 2004년 9월 21일에 “한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기록”으로 기네스 북(Guiness Book)에 등재되었다. 이는 월드피스 자유연합의 대표이며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기적의 배’ 번역자인 안재철 씨와 당시 일등항해사 러니 씨의 노력의 결과였다. 라루선장과 일등항해사 러니를 비롯한 모든 선원의 일사불란한 팀웍(Team Work)과 생명, 희망, 자유, 사랑에 대한 열정이 일만 사천 명의 생명을 구해낸 것이다.
4.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당시 현봉학은 28세의 숙련된 청년으로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민사담당 고문관이었다. 구름같이 몰려든 흥남부두의 피난민들을 쳐다보며 고향 함흥에 있는 친척과 친지, 그리고 함께 교회 다니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 하면서 이대로 공산치하에 저 사람들을 두고 가서는 않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는 일 뿐이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그를 알몬드 소장도 무척 좋아했으나 군사작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에는 쉽게 동의 할 리가 없었다. 현봉학은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부참모장 포니대령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그에게 모든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는 철수작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였으며 이해력도 많고 자비심도 풍부했으며 완고한 군단장을 차근차근 잘 이해시켰고 현봉학 자신도 계속해서 군단장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UN군을 환영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던 우호적인 사람들이 공산치하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알몬드 소장도 드디어 마음을 바꿔 처음에는 4,000명만 데리고 철수하려고 했으나 실제상황은 가능한 한 최대로 승선시키는 방향으로 바뀌고 말았다.
현봉학은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玄垣國)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申愛均)여사 사이에 5남1여 중 2남으로 태어나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평양 기독병원 인턴을 끝낼 즈음 광복을 맞이하여 의사생활을 위해 함흥으로 갔으나 소련군과 공산당의 박해로 의업활동이 불가함을 깨닫고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1947년부터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근무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미국인 윌리암스(Williams)부인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Richmond) 버지니아(Virginia) 주립대에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Fellowship을 획득한 후 1950년 3월에 귀국하여 세브란스병원 근무 중 6⦁25전쟁을 맞았다. 공산군의 서울 점령으로 집에도 못 들리고 친구 2명과 함께 한강을 조각배를 타고 건너서 대구에 피난 갔던 현봉학은 그곳에서 지인인 2대 국회의원 황성수 목사를 만났는데 황의원이 국방장관 신성모 씨에게 영어 잘하는 현봉학을 소개,며칠 후 미 25사단장 킨(William B. Kean)소장의 통역관 명령을 받아들고 미 25사단으로 가던 길에 부산에서 손원일 제독을 인사차 방문했더니 인사 끝난 후 해병대 백남표 소령 지프차를 탔는데 미 25사단을 지나 마산남쪽 진동리에 있는 한국 해병 김성은 중령 부대로 가서는 “당신 같은 사람은 한국 해병대에서 일해야 한다.”며 그날부터 해병대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김성은 중령은 영어 잘하는 현봉학을 데리고 인근 미25사단에 가서 무기와 탄약을 잔뜩 얻어오기도 했다. 김성은 중령은 한국전쟁 당시 통영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며 후에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그 후 김중령과 현봉학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북진 중 강원도 고성지구 해병부대에서 미 10군단장주재 전술 회의 중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현봉학을 보고 알몬드 소장은 “고향이 어디냐?”라고 묻길래 함흥이라고 대답했더니 며칠 후 함흥에서 이승만대통령을 모시고 행사를 개최하는데 함께 가자고 하면서 그곳으로 초청했다. 행사 끝난 후 알몬드 군단장 전속부관 헤이그(Alexander Haig)대위가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임명한다는 영문 명령서를 내 밀었다. 헤이그는 그 후 대장으로 전역 후 미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날부터 현봉학은 미 10군단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흥남철수작전에서 한국의 쉰들러가 되었다.
오스카 쉰들러(Oskar Shindler)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Poland)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이자 학살장소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을 돈과 뇌물 기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대인 한사람 한사람을 돈으로 사서 자신이 경영하던 군납 그릇공장 일꾼으로 고용하여 1,100명의 유대인을 구출해 낸 인간애와 휴머니즘을 몸소 실현한 독일인 실존 인물로 스필버그(Steven A. Spielberg) 감독의 Shindler‘s List 제목의 영화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현봉학은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펜실버니아 장로교대학 메디칼센터 에서 레지던트를 마쳤고 펜실버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에서 62년까지 뉴저지주 플레인필드(Plain Field)의 뮐렌버그(Mylenberg) 메디칼센터의 병리학자로 근무했으며 1967년까지는 센터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그 후 버지니아의대 컬럼비아의대 토마스제퍼슨대 펜실버니아의대 등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다. 연세대의대 객원교수였으며 미국 임상심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및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이었으며 말년에는 아주대 의과대학 임상병리학 과장으로 근무했다. 2007년 11월 25일 미국 뮐렌버그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향년 만 85세였다. 형제들이 모두 곱게 성장하여 형 현영학씨는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바로 밑에 동생 현시학은 6.25전쟁 때 해군장교로 전공을 많이 세워 전쟁영웅으로 전쟁기념관에 그의 사진이 전시돼 있으며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966년에 소장으로 예편하여 이란 멕시코대사를 지냈고 1989년에 타계했다. 2010년 7월 28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유도탄고속함 진수식이 있었다. 넷째 동생 현웅은 피터 현(Peter Hyun)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 겸 저널리스트로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일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이다.
5. 라루 선장과 러니 일등항해사(간부장)
라루(Leonard P. LaRue) 선장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14년에 태어났으며 흥남철수작전 이후 미국 씨애틀로 돌아가 1952년 Meredith Victory호가 임무 종료시까지 그 배를 지휘하다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1954년 22년간의 바다생활을 마감하고 미국 뉴저지주 뉴톤(Newton)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가 베네딕도 수사가 되었으며 마리너스(Brother Marinus)라는 영세명으로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성모 마리아의 Mary에서 따온 것이며 영문자 marine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는 1960년 미국 상선협회에서 수여한 공로훈장(The Merchant Marine Meritorious Service Medal)을 받기 위하여 워싱톤에 한번 나왔을 뿐 평생을 수도원 안에서 지내다가 2001년에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일등항해사 러니씨가 아들과 함께 라루 선장을 찿아가 어떻게해서 무슨 동기로 그 많은 위험 속에 피난민들을 구출 할 것을 결심했는지 아들에게 말해줄 것을 부탁했더니 "특별한 일이 아니다. 바른 일을 했을 뿐이다. 신의 손이 우리 배를 인도했음이 틀림없다. 답은 성스러운 성경 속에 있도다.” (“Not extraordinary, right thing only. God's own hand was at the helm of my ship. Answer is in the Holy Bible.”)라고 말하면서 그가 만족한 것은 철수작전이 성공하고 피난민들이 공산치하를 벗어나 자유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47년 동안 오직 수도원 안에서 기도생활을 하면서 수사로 봉직한 거룩한 그의 일생에 머리 숙인다.
러니(J. Robert Lunney) 일등항해사는 22살의 나이에 Meredith Victory호의 간부장으로 활약했고 2010년 현재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이다. 그는 해군에 입대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미국 코넬(Connel)대 로스쿨을 거쳐 현재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비역으로 복무하여 해군 소장까지 진급했다. 2006년 2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대휘장’을 받았고 우석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2006년 5월 27일에 거제도에서 열린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제막식에 직접 참석했고.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취임식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1997년과 98년에는 미국무부 요청을 받아 ‘미군실종자 유해발굴작업’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안재철 씨와 함께 Meredith Victory호의 기네스북 등재를 실현시켰으며 등재직후 소감에서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 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말했다.
6. 흥남 철수작전 기념비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읍에는 6. 25 전쟁 때 아군에게 붙잡혔던 인민군과 중공군을 수용했던 포로수용소가 있다. 거제시 당국에서는 이 포로수용소를 유적공원으로 개발하여 일반국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는데 공원 입구 왼쪽 능선 밑에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Meredith Victory호와 당시 피난민들의 승선모습을 조각한 조형물과 함께 웅장하게 세워져 있으며 그 어려운 시절에 함경도 피난민들을 따뜻한 동포애로 감싸준 거제시민에게 바치는 은덕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2006년 5월 27일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제막식이 조형물개막과 함께 현장에서 열렸다. 국가보훈처장 거제시장 미국정부대표 현봉학 박사 Meredith Victory호의 일등항해사였던 러니부부 알몬드 장군 외손자 토마스퍼거슨(Thomas Ferguson) 예비역대령 백선엽 장군 이상훈 재향군인회장 백성학 회장 및 이북5도 함경남도 관계자 및 도민 200여 명이 참석 했다.
2003년 백성학 회장(주 영안구릅)의 제안으로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을 전개할 것을 합의하여 백회장과 함남중앙도민회장을 포함한 공동위원장 몇 분과 사무총장으로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건립 장소와 기념탑의 규모 및 개략적인 예산을 산정하기로 하고 수차례의 회의 결과 장소는 속초와 파주경모공원 및 거제도가 거론되었으나 피난의 첫발을 디딘 거제도로 결정했고 예산은 최초 5억에서 10억 그 후에 공사를 진척시키다보니 16억 원으로 불어났다. 부지는 거제시에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내의 임야를 제공하고 사업회는 토목공사와 기념조형물을 완공하여 거제시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로부터 함경도민의 불같은 호응이 이어지고 관계기관에 대한 지원활동도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1,400여명의 도민이 모금에 참여했으나 3억 일천만원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행자부에서 5억 국가보훈처 6억 거제시 2억 원등 도합 16억 1천만원을 마련하여 드디어 흥남철수작전기념탑은 웅장한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 기념탑과 함께 각인된 얼굴
○ Edward M. Almond 장군
○ 현봉학 교수
○ Edward Forney 대령
○ Douglas MacArthur 장군
○ Leonard P. LaRue 선장
○ J, Robert Lunney 간부장
○ Raymond G. Davis 중령
○ Alexander Haig 대위
○ 김백일 장군
○ 박시창 대령
○ 유원식 소령
그 외에 巨濟市民에 대한 恩德碑와 기념비 건립에 특별히 공적이 많았던 분들을 기리는 공적비 그리고 기념탑을 둘러싼 까만 대리석 벽면에 1,400명의 기부자명단이 새겨져 있고 모형물 앞 연못안의 한반도 모형에는 동전을 던져 넣으면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나오는 장치가 되어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