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바위
최이안(영어영문학과 79학번)
명계로 잡혀간 시지프스는 사흘 동안만 이승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서는 꾀로 저승사자의 체포를 피하며 이승에서 덤으로 얼마간을 더 살았다. 그동안 그는 초목과 동물, 바다와 강물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자연을 들여다보며 그는 그 속에 숨겨진 진리를 엿본 것일까. 동, 식물의 순응적 태도는 어떻게 보면 무지함이 아닌 초월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삶 자체를 사랑했던 시지프스의 정열은 명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침 6시, 자명종 시계가 자지러지듯 몸을 떨며 고음의 쇳소리를 지른다. 따뜻한 곳에서 얼음장 위로 내몰린 것처럼 소스라치며 손을 내밀어 시계 뒷부분에 달린 스위치를 끈다. 미지근한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시지프스는 신의 노여움을 사 명계에서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일을 거듭한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매번 혼신의 힘을 기울여 비탈길에서 돌덩이와 씨름을 한다. 시지프스가 신이 내린 벌을 감당해야 하듯, 주부는 가족에 대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아침상을 차리고, 나갈 준비를 하는 식구들을 거드느라 부산을 떤다. 모두 나간 뒤에도 갖가지 일거리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싱크대에는 그릇들이 쌓여있고, 방마다 침구와 옷가지, 물건들이 흉측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다. 세탁통은 네 식구의 일상 활동의 증거물인 땀 냄새가 밴 옷들로 가득하다.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휘저어졌던 공기 중의 먼지들은 이제야 안정을 찾았다는 듯 사뿐히 가구와 방바닥 위에 내려앉는다.
시지프스는 경련이 이는 얼굴로 바위에 뺨을 비벼대며 진흙으로 덮인 바위를 어깨로 떠받쳐 무게를 지탱하느라 애를 쓴다. 버틴 다리는 후들거리고 온 몸은 흙투성이다. 노동에 몰입되어 오로지 돌을 산꼭대기로 올리는 것에만 전념하는 시간이다.
이 방 저 방 오가며 잠시라도 쉬면 바위에 밀리기라도 할 듯 숨 가쁘게 집안일을 한다. 정리가 끝나고 주위를 둘러보면 분위기가 숙연하다. 한숨 돌리는 안도감 끝자락에 기분이 약간 침체된다. 이제부터 다음 일과까지의 짧은 빈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한다. 친구와 약속을 하기에는 시간이 늦었고, 운동을 하기에는 몸이 지쳤다. 신문을 대충 읽고 나서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다. 간단히 차린 끼니를 먹으며 오전 내내를 소모한 일과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힌다.
카뮈는 시지프스가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을 휴식이자 의식의 시간으로 규정한다. 바람의 신과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고, 오디세우스의 아버지이며,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볼 것이다. 이승에서의 행동의 결과인 이 지루하고 고된 작업이 원망스러워 후회할 지도 모른다. 인간 중에서 가장 신중했다는 시지프스는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일까.
일찍 나가야 하거나 피곤할 때는 아침의 일과를 미뤄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후가 되어도 일거리들은 그때까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미룰 수 있지만 피할 수는 없는 하루하루의 일과가 때로는 돌덩이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공적인 일은 가시적 결과물과 보상이 있지만, 집안일은 아무리 잘해 놓아도 원점으로 되돌아간 상태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집안일은 공적인 업무보다 더 시지프스의 노역과 비슷하다.
시지프스는 신 앞에서 무력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반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을 잘 알고, 행위의 연속을 똑바로 주시한다. 아무 의미 없는 노동은 그리스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었다. 시지프스는 행복하게 일을 함으로써 신을 비웃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시지프스가 비탈을 내려오는 시간은 부조리를 인식하는 비극의 시간이지만, 자신의 처지에 수긍하는 시지프스를 상상해야 한다고 카뮈는 말한다.
나는 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답을 구하려면 현재 상황에서 떨어져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객관적 시점에도 두 가지 --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영원 또는 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있다. 이러한 자기 의식과 자기 초월은 인간 능력의 한계라는 공통된 결론에 이르게 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절망감은 인간을 자살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할 것도 아니고, 영원을 초월하여 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인간은 자신의 생에 최대한 충실할 도리밖에 없다.
시지프스는 오직 성실성으로 고통을 감당할 행복을 얻는다고 카뮈는 해석한다.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며, 반복적 일과든 느릿한 걸음걸이든 그 모든 움직임의 필연성을 긍정함으로써 고통은 의미를 잃는다. 신의 의도는 다시 한 번 멸시되어지고, 시지프스는 주인의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간다.
장을 보러 슈퍼마켓으로 가니 주부들의 부산한 움직임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가족들에게 일상을 감당할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먹을 것을 고르는 그녀들의 눈빛은 암사자를 닮았다. 경쟁하듯 이것저것을 골라 카트에 가득 담았다. 터질 듯한 봉지들을 양 손에 들고 시지프스처럼 끙끙대며 집안으로 올려다 놓았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 한잔을 마셨다.
강신 아소포스에게 제우스가 납치해 간 딸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가로 시지프스는 산에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물이 귀해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진노한 제우스가 보낸 저승사자를 시지프스는 사슬로 묶어 감옥에 가두었다. 제우스는 이번에는 전쟁신 아레스를 보냈다. 코린토스 전체가 멸망할 것을 걱정한 시지프스는 스스로 항복을 했다. 신의 입장에서는 얄밉고 교활한 인간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희생적이고 현명한 사람이 시지프스였다. 당시 만들어진 샘에서는 지금도 시원한 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화초에 물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베란다로 나가 물을 뿌리며 화초들을 들여다본다. 난 꽃은 핀 지 세 달이 넘도록 지지 않고 있다. 아이비도 보드라운 새 잎을 계속 만들어낸다. 토마토 줄기를 만졌더니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번진다. 아이가 학교에서 얻어 온 장수풍뎅이 애벌레는 얼마 전까지 꽤 꿈틀대더니 지금은 번데기가 되기 위해서인지 꼼짝도 않고 있다. 인간은 때로 본능적으로 삶에 충실한 동, 식물을 부러워한다.
명계로 잡혀간 시지프스는 사흘 동안만 이승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서는 꾀로 저승사자의 체포를 피하며 이승에서 덤으로 얼마간을 더 살았다. 그동안 그는 초목과 동물, 바다와 강물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자연을 들여다보며 그는 그 속에 숨겨진 진리를 엿본 것일까. 동, 식물의 순응적 태도는 어떻게 보면 무지함이 아닌 초월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삶 자체를 사랑했던 시지프스의 정열은 명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기 전에 물 컵을 씻으려는데 빨간 수세미가 눈에 들어온다. 이것으로 컵을 닦으면 빛이 난다며 친정어머니가 손수 짜 준 것이다. 사용해보니 어떠냐고 재차 묻던 어머니에게 건성으로 답한 터였다. 사소한 재미를 만들어가며 살림살이에 대한 관심이 일흔이 되도록 여전한 어머니가 경이롭기만 하다. 컵을 닦은 뒤 들어 올려 살펴본다. 아주 반짝반짝하다.
최이안
.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79학번
.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어국문학 박사과정 수료
. 1998년 <현대수필>로 등단
. 수필집 『바람은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각트의 가벼움』 『공놀이 하듯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