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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사 김달순의 비밀 계청(全羅監司金達淳密啓)
전주부(全州府)에 사는 유항검(柳恒儉, 1756~1801)과 유관검(柳觀儉) 형제는 사학으로 사형 당한 죄인 윤지충(尹持忠, 1759~1791)과 가까운 친척입니다. 신해년(1791)의 옥사 때 전라 감영에 체포되어, 감영 마당에서 그 책을 바치고, 마음을 고쳐 뉘우치겠노라 말하여 석방되었습니다.
신은 금번 옥사가 일어난 뒤로 수령들에게 엄하게 신칙하고 특별히 염탐하여 살피게 하였으나, 아직 그 증거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좌우 포도청의 비밀 공문에 따라 유항검을 체포해올 때 들으니, 사당에는 텅빈 신주 함만 남아있고, 망가진 대바구니에 나무 신주를 넣어 흙먼지 속에 놓아두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사학의 우두머리임을 비로소 깨달아, 한편으로 친밀하게 드나들던 무리를 기찰하여 체포하였습니다. 위 항목의 유관검을 먼저 체포해 온 뒤에, 전주판관 정지용(鄭持容)과 창평현령 정약형(丁若衡), 옥구현감 신귀조(申龜朝), 화순현감 이영석(李永錫), 차정참핵관(差定參覈官)인 신(臣)이 함께 자리하여 심문하였습니다.
1801년 3월 28일 추고(推考) 내용
유관검 나이 34세. 호패 등 확인
“네 형 유항검이 체포될 때, 네 집 사당 안에서 행한 일을 보니, 네가 사학의 우두머리가 됨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신주를 세우는 것은 조상을 추념하여 근본을 보답하고,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이와 같이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을 훼손하여 내버렸으니, 사람의 도리가 없어진 것이다. 네가 사람의 아우가 되어 눈으로 망극한 변고를 보고도 일찍이 바로 잡으려는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똑같은 심보임을 알 수 있겠다. 다만 저 사학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윤리와 상도를 어지럽혀,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귀신과 사람이 함께 벌하고자 하는 바이니, 신해년(1791) 이래로 나라에서 금함이 엄격하였다. 올해 봄에 이르러 내리신 윤음은 또 얼마나 엄정하면서도 간절한 것이었던가? 하지만 너희 형제는 한결같이 깊이 빠져서 바른 길로 돌아올 뜻이 없으니, 이 무슨 심술이란 말인가? 당초에 가르쳐 꾄 사람이 틀림없이 있겠고, 그 후로 함께 배운 것은 과연 또한 어떤 사람이었던가? 이른바 책자는 어디에서 빌려 보았고, 남은 것은 몇 질이나 되는가? 하나하나 감춤 없이 사실대로 고하라고 추문(推問) 하옵신다.”
“저는 친형 유항검과 함께 사학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감히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본래 유업(儒業)에 종사하였는데, 청주(淸州) 노라리(老羅里)에 사는 민도(閔燾)가 글에 능하다는 명망이 있단 말을 익히 들었습니다. 경술년(1790) 봄 사이에 과거를 보려고 상경하다가 여관 가운데서 민도를 만나, 여러 날 상종하다가 정의(情誼)가 자못 깊어진 뒤에 몇 권의 책자를 얻어 보았는데, 그 학문은 천주를 높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종지로 삼아, 배우기가 몹시 쉬웠습니다. 길이 빠르고 잠깐이어서 소매에 넣고 돌아와 자연스레 미혹되었습니다.
뒤에 또 그 경문을 윤지충(尹持忠, 1759~1791)에게서 얻어 보았는데, 윤지충은 사형을 당할 때 책자도 같이 관청에 바쳤습니다. 인하여 그 학문을 버려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조금씩 학습하였지만, 그 책자가 본래 질이 많지가 않고, 두 세 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외워서 익히고 나면 또한 스스로 어렵지가 않아 책자는 다시 빌려보지 않았습니다. 얼마간의 책장(冊張) 중 신해년(1791) 불에 태운 뒤에 남아 있던 것은 물에 씻어 덩어리로 만들었다가 포교에게 압수되었습니다.
나무 신주를 만들어 세우는 것은 천주께서 금하는 바인데, 천주교에서는 반드시 성실하게 주를 위하라고 하여, 사람이 죽은 뒤에 음식을 차려 먹을 것을 바치는 것은 크게 성실의 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형제는 경술년(1790)에 처음 배운 뒤로 신주는 대그릇 안에 넣어두고, 기일과 절일에는 제사를 행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함께 배운 사람은 제가 신해년(1791) 이후로 형벌의 재앙을 두려워하여 차라리 혼자 하고, 무리 지어 지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집안 사람이라 해도 애초에 가르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설혹 한 두 사람 함께 배운 자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하였으니, 제가 이미 이같은 액을 당했는데, 또 어찌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해를 입히겠습니까? 비록 매를 맞다가 죽더라도 다시 고할 것이 없습니다. 살펴서 처리하여 주십사고 말씀드립니다.”
죄인 유관검. 다시 나이 등 확인.
“네가 먼저 번 공초에서 비록 재앙이 두려워 배움을 폐하였으나, 얼마 후에 또 조금씩 학습했다고 말하였다. 무슨 심보로 앞뒤로 나라에서 금지한 것이 대단히 엄했을 뿐 아니라, 너는 윤지충의 가까운 친족으로 눈으로 그가 사형 당해 죽는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오히려 고칠 줄을 모르고 다시금 옛 습속을 찾았더란 말이냐? 이 어찌 참으로 화를 두려워하는 자가 할 바이겠느냐? 이미 외워 익혔다면 몰래 서로 전수하여 암암리에 얽힌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종 사실을 인정치 않고, 감히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횡설수설 진술하는 것은 정상이 더더욱 몹시 교활하고도 간특하다. 석 자의 주둥이를 길다 하지 말고, 반드시 한번에 곧장 토해내도록 하라.”
형벌을 엄하게 하여 따져서 심문하여야겠기에, 한 차례 형벌로 심문하고, 곤장 30대를 쳤다.
“저는 신해년(1791)의 일을 겪고 나서는 진실로 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한 두 해가 지나 나라의 금령이 차츰 느슨해지자, 예전 있던 곳을 잊기 어려워, 옛날에 물든 것이 더욱 고질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이 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됨을 깨닫지 못한 채, 별 어려움 없이 이를 행하여 이로써 죄를 더하였으니, 만 번 죽더라도 오히려 가볍다 하겠습니다. 근래 나라의 금령이 몹시 엄하고, 윤음(綸音)이 간절하여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시행하여 대역죄에 해당케 하니, 신하된 자로써 어찌 마음을 바꿀 이치가 없겠습니까? 지금은 생각을 딱 끊어 다시는 미혹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저의 지극한 소원은 살아서 감옥 문을 나가는데 있사오니, 감히 마음을 다하여 토로하여, 만에 하나의 바람을 얻기를 바라지 않으리이까?
서책과 사상(邪像)과 마경(魔鏡) 따위의 물건은 과연 보관된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고 미혹한 생각에 처음 증거물이 탄로 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으로 여겨 과연 감추어 꾸미기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제 이미 사학을 버려 정학으로 돌아오니, 이를 남겨둔들 어디에 쓰겠습니까? 묻어둔 여러 가지 물건들은 하나하나 찾아 바치겠습니다. 사학을 가르쳐주고 함께 배운 사람으로, 민도(閔燾)는 저를 가르쳐준 사람이나 이제 막 죽었고,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尹持憲)과 영광(靈光)에 사는 이우집(李宇集)이 모두 서로 좇아 강학한 자들입니다. 살펴서 조처하여 주십시오.”
죄인 유관검.다시 나이 등 확인.
“네가 바친 물건은 지극히 요사하고 지극히 괴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서책의 숫자도 거의 100권에 가깝다. 샀건 빌렸건 간에 모두 어느 곳의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 마족(魔簇)과 마경(魔鏡)은 누가 준 것이냐? 그 중에 보명(報名)이라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영세(領洗) 등의 말은 어떤 명목인가? 보명이라 할 경우 어디에다 알리며, 영세라 할 때 ‘영(領)’이란 것은 어떤 것이냐? 천당과 지옥은 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떳떳한 성품은 같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날마다 쓰는 언제나 행해지는 도리를 버리고, 저 아마득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주장을 배우는 것은 사리로 따져보더라도 끝내 말이 되지 않는다. 네가 이처럼 미혹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죽은 뒤에 복을 구하려는 꾀일 뿐이겠느냐? 틀림없이 생전에 하고자 하는 바의 일이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정황을 다시 하나하나 바르게 고하라고 추문하옵신다.”
“서책은 혹 윤지충과 이존창, 최창현의 집에서 빌려 오고, 혹 윤유일과 권일신, 권상연, 민도 등에게서 베껴왔습니다. 마경과 마족은 을묘년(1795)에 서양 사람 주문모가 우리나라로 나와 신부라 일컬으며 여러 사람을 가리친다는 말을 들었는데, 서울에서 이존창의 집으로 내려왔다가 제가 있는 곳까지 들러서 6,7일을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 뒤 제가 상경해서 또 현계온(玄啓溫)과 강완숙 등의 집에 찾아 가서, 스승의 예로 대접하고, 신부로 높이자 이 물건을 주었습니다.
보명(報名)은 배움이 자못 부지런한 사람을 택하여 주문모에게 보명한 것을 넣으면, 주문모가 서양의 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본떠 이름을 지어 보내는 것입니다. 매년 연말에 공부가 부지런한지 게으른지와 가르친 사람이 많고 적음을 가지고 주문모에게 보고합니다.
영세(領洗)는 주문모가 작은 병에 물을 채워놓고 여러 학도를 늘어세워 앉히고는 무릎을 단정하게 꿇고 정수리를 드러내게 한 뒤에, 그 물로 정수리로 부어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전까지 지은 죄과가 모두 사하여 진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교통한 것은 진실로 그 죄가 용서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다만 어둡고 미혹된 성품이 요망하고 허탄한 주장을 깊이 믿어, 천당은 날짜를 정해 오를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절로 헤아리지 못할 죄과에 빠졌습니다. 이 밖에는 비록 만번 죽더라도 실로 달리 고할만한 일이 없습니다. 살펴서 조처하여 주십시오.”
죄인 유관검, 나이 등 확인.
“너의 공초 안에 매년 연말에 공부가 부지런했는지 태만했는지, 가르친 사람이 많은 지 적은 지를 가지고 주문모에게 보고 한다고 했다. 보명기(報名記)를 살펴보니, 나열하여 쓴 것이 7,8명에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몇 사람을 권하여 입교 시켰는지, 몇 사람을 밖에서 들어오게 했는지 기록한 것도 있다. 이제 허다하게 체포되어온 자를 보니, 너의 사돈과 집안 손님이 아니면, 모두 하인 붙이나 소작인들이다. 그 무리가 번성한 것이 거의 몇 고을의 호적에 걸쳐있다. 네가 말한 것처럼 이 학문을 하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늙은이가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당한 정도(正道)는 일찍이 이렇지 않음이 없었다.
네가 일찍이 배워 얻지 않았다면서 도리어 사학의 근거 없는 주장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려 한 것은 참으로 나라를 위하고 이 백성을 위함에 뜻이 있었던 일이겠는가? 농부와 나무꾼,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놈 할 것 없이 다만 많은 것을 욕심내고 얻는데 힘쓰기를 마음으로 삼는 것은 틀림없이 도당을 모으려는 계책이다. 무리를 모아다가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냐? 연말에 반드시 주문모에게 보고한 것은 그 뜻이 또한 몹시 헤아리기가 어렵다. 감히 숨겨 감추지 말고 하나하나 바르게 고하라고 추문하신다.”
“사학의 종지는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권해 도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큰 공이 됩니다.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권유를 다하기에 힘쓰는 것은, 바라는 바가 하늘나라에 오르는 데 있어, 신부에게 통지해서 신부로 하여금 칭찬하거나 나무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학문은 또 임금 섬기기에 정성을 다함을 중히 여겨 이 세상을 태평하게 건너고자 합니다.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어찌 터럭 하나라도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비록 매질 아래 죽더라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살펴 처리하여 주십시오.”
죄인 윤지헌(尹持憲) 나이 38세, 호패 등 확인.(1801년 3월 28일) (사학징의 p.14~16)
“너는 죄인 윤지충의 아우로 신해년(1791)에 법망을 빠져나갔거든, 진실로 마땅히 마음을 고쳐 먹고 뜻을 고쳐, 영원히 스스로 새로워지는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궁벽한 산골에 몰래 숨어 지내며 옛 습속을 고치지 않고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쳐 꾀어, 그 무리를 퍼뜨렸다. 뿐만 아니라 네 형이 이미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폐지하여 참수형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니, 네가 마음으로 놀라 애통함이 남의 1만 배는 되어야 진실로 마땅하다. 폐지했던 제사를 다시 새롭게 진설하였다고는 해도, 네 숙부의 상에 또 신주를 세우지 않은 것은 그 범한 죄를 살피건대 도리어 네 형보다 지나침이 있다. 무슨 마음으로 국법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설에 빠져 미혹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사서(邪書)와 사구(邪具)는 어디에 두었고, 배움을 같이 하고 마음을 함께한 것은 몇 사람이나 되는가? 감히 숨겨 감추지 말고 하나하나 바르게 고하라고 신문하옵신다.”
“제가 신해년(1791) 이후로 어찌 다시 사학을 할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기호를 끊기가 어렵고, 해묵은 병이 이미 깊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번 죽는 것 외에 다시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제례를 다시 진설하지 않은 일은, 제가 신해년 이후로 이미 폐족이 된지라 감히 스스로 보통 사람의 부류에 나란히 서지 못하고 궁벽한 산골에 부쳐 살면서 서민이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미치지 못하거나, 궁한 백성이 제사를 폐한 것이 아니니, 또한 일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제 숙부 윤증(尹憕)이 자식 없이 죽어서, 장례의 처리와 상례와 제사는 예법대로 행하였지만, 사당을 주관할 사람이 이미 없고 보니 사판(祠版)을 모실 수가 없어서, 신주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천당과 지옥은 그 이치가 반드시 끝내 스스로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과에 빠지게 함이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깊은 산골에 궁하게 칩거하니 원래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고, 문서는 한 두 가지 베껴 쓴 것 외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살펴 처리하여 주십시오.”
죄인 윤지헌 나이 등 확인. 재신문
“너는 네 형 윤지충이 사형을 당해 죽은 뒤에, 무릇 사학 하는 자들이 모두 네 형을 절의에 죽었다고 하면서 주교처럼 높이자, 네 집이 사학하는 집의 주인이 되었다. 네 집에서 베껴 쓴 문서가 서울과 지방에 퍼져있을 뿐 아니라, 유항검 형제가 지닌 것의 태반이 네 물건이다. 그러니 사구(邪具)를 많이 지녔을 것을 절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가르쳐 주는 의식이 잦았을 것은 일의 형세가 그러한데, 네가 어찌 감히 꾸며대는 것이냐? 주문모는 외국 사람이다. 너의 한 패거리 중에서 그를 맞이하여 왔으니, 네가 틀림없이 응당 만나보았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정황을 다시 하나하나 사실대로 고하렸다. 또한 엄한 형벌로 캐물으랍신다.”
형벌로 한 차례 신문하여 곤장 30대를 쳤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감히 끝내 감추겠습니까? 서책은 제가 약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은 까닭에 약롱(藥籠) 안에 간직해 두었다가 이번에 하나하나 현물로 바쳤습니다. 주문모는 과연 을묘년(1795) 사이에 유항검의 집에서 만나, 세례 받음을 사랑하고 사호 내림을 얻었습니다. 그 뒤 서울 사람 현계온(玄啓溫)의 집에서 보았고, 작년 겨울에 또 정약종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술을 끊을 수 없자, 주문모가 십계를 범했다면서 엄하게 꾸지람을 더하였습니다. 함께 배운 사람은 유항검 형제의 집에 왕래하는 사람 외에는 실로 아는 이가 없습니다. 살펴서 조처하여 주십시오.”
죄인 이우집(李宇集) 나이 40세, 호패 등 확인 (1801년 3월 28일) (사학징의 p.16~19)
“너는 유관검의 친사돈으로 사학의 주장에 깊이 빠졌음이 이미 유관검의 공초에서 드러났다. 배우고 안 배우고는 이제 다시 물을 것도 없다. 천당과 지옥은 그 주장이 황탄하다. 삶을 즐거워하고 죽음을 미워함은 인정이 모두 똑 같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에 미혹되어, 모두 죽음을 삶과 같이 보는 죄과에 돌아갔으니, 결단코 일상적 정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곤충과 초목은 저마다 그 삶을 완수하고, 사농공상은 모두 경영하는 바가 있다. 네가 배우는 것은 어찌 홀로 죽은 뒤만을 위한단 말인가? 그 즐겨 좋아하는 바는 반드시 생전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간에 미혹된 곡절과 마침내 바라는 참 마음을 감히 숨겨 감추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고 추문하옵신다.”
“제가 유관검의 종용에 빠지고, 유관검이 베풀어 주는 것에 욕심이 나서 잘못 사학에 들어갔습니다. 졸지에 이 지경을 당하니 어찌 뉘우쳐 깨달아 통렬히 미워하는 마음이 없겠으며, 엄한 신문 아래 숨겨 감추겠습니까? 유관검은 매번 저를 만날 때마다 문득 힘써 배우기를 권하였고 또 베껴 쓴 책자를 가지고 자주 강론하였습니다. 정사년(1797) 동짓달에 마침 유관검의 집에 갔더니, 그가 구석진 곳에 새로 사랑채를 짓고, 오직 함께 배우는 사람만 이곳에서 영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의 조카 두 사람과 함께 그 가운데 같이 앉았습니다. 제가 유관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이 배우기는 좋아도 죽는 것은 두려워할만 합니다.’ 그러자 유관검이 말했습니다. ‘우리 같은 무리야 형벌을 당해 화를 입겠지만, 자네 같은 초학이야 어찌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 하물며 이 학문은 머지 않아 틀림없이 세상에 크게 행해질 것이네. 우리들에게 절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야.’ 제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유관검이 말했습니다. ‘큰 배가 마땅히 서양으로부터 나올텐데, 그 인물과 풍도는 우리나라보다 대단히 뛰어나다. 또 많은 보화(寶貨)를 싣고 와서 조선의 재물은 쓰지도 않고 천주당을 창건하여, 불고악(不鼓樂)과 거중기(擧重機), 천리비거(千里飛車)를 그 속에 놓아둘 것이다. 교우를 크게 모아 설법하고 강학하며 과거를 베풀어서 인재를 취하고 기술을 가려서 의관(醫官)을 뽑을 것이니, 이 어찌 성교를 널리 선양하는 무리가 소원을 이룰 일대 기회가 아니겠는가? 저들의 배에 다혈총(多穴銃)이 있는데, 이를 쏘면 두려워 엎드리지 않음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한바탕 결판을 내고 말 것이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주당은 마땅히 윤지충의 무덤 위에 세워질 것일세.’
또 경신년(1800) 10월에 유관검에게 가서 만나보니 유관검이 말했습니다. ‘거룩한 해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중에 1천 척의 배가 정박한다더니, 여태 소식이 없으니 괴이하고 괴이하다.’ 대개 예수가 경신년에 태어났고, 작년이 경신년이어서 성세(聖歲) 즉 거룩한 해라고 불렀습니다. 또 말했습니다. ‘신부는 천주를 대신하여 가르침을 베푸니, 임금과 아비의 명은 어길 수 있을망정, 신부의 명은 결단코 어겨서는 안 된다.’
올해 3월에 동당(東堂)에 과거를 보러 가다가 유관검에게 들러 보니, 유관검이 말했습니다. ‘서울이 바야흐로 어지러우니, 우리 같은 사람은 실로 두려워할 만 하다. 하지만 자네처럼 실제가 없는 사람은 절대 잘못 걸려들 리가 없다.’ 또 말했습니다. ‘자네는 영광에 사니, 그곳에도 혹 근실하여 믿을 만한 교우가 있는가? 상놈도 괜찮네. 모름지기 나를 위해 찾아봐 주면 좋겠네.’ 그래서 제가 이런 사람은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유관검이 말했습니다. ‘지금 국옥(鞫獄)이 바야흐로 번져서 신부가 몸을 숨길 곳이 없다네. 만약 이런 사람을 얻는다면 신부로 하여금 편안히 지내게 할 수가 있을 것일세.’ 이밖에는 다시 드릴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살펴서 처리하여 주십시오.”
죄인 이우집, 나이 확인, 재신문.
“이제 네 공초를 보니 유관검과 주고받은 이야기는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지극히 패악스러워 모골이 송연하다. 네가 만약 조금이라도 떳떳한 성품을 지녔더라면, 그 말을 듣고 나서 어찌 입을 다문 채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느냐? 이것만으로도 똑같은 심보임을 볼 수가 있다. 진실로 네 말 대로라면 유관검의 흉악한 속내와 반역의 마음은 천지에 용납되기가 어렵다. 만약 터럭 하나라도 다를 경우, 이는 남을 악한 역모에다 무함하는 것이니, 마땅히 반좌(反坐)의 법을 입을 것이다. 또 혹 한마디라도 감추거나 빠뜨린 것이 있다면 죄가 유관검보다 훨씬 더함이 있을 것이다.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 또 엄한 형벌로 살펴 물으랍신다.” 형벌로 1차례 신문하고, 곤장 30대를 쳤다.
“제가 아뢴 것은 이미 앞선 공초에 다 나와있습니다. 제기 바록 사학에 미혹되었지만, 또한 떳떳한 성품을 지녔는데, 입을 다물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흉악하고 패악스런 말인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빼서 기꺼이 스스로 남을 무함하는 죄과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유관검과 한 차례 대질한다면 허실을 절로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살펴서 처리하여 주십시오.”
죄인 유관검(1801년 3월 28일) 나이 확인, 재심문. (사학징의 p.19~22)
“이단이 한 집안과 나라에 재앙이 됨이 또한 다시금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어찌 서양의 학술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윤리를 없애고 상도를 무너뜨려 차츰 금수의 영역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과 같기야 하겠는가? 다만 그 요망하고 허탄한 술법과 속여 미혹시키는 계책은 오히려 사소한 문제이다. 재앙의 빌미를 감추고 음흉한 의도를 몰래 행하는데 이른 것이 바로 이우집이 공초에서 말한 너와 주고 받은 말들이다.
정사년(1797) 동짓달에 너는 이우집과 함께 새로 지은 사랑채에 앉아서 이우집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이 오래잖아 크게 행해질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좋은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장차 큰 배가 마땅히 서양으로부터 와서, 천주당을 창립하고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를 뽑을 것이다. 또 다혈총이 있어서 이를 쏘면 사람들이 반드시 두려워 복종할 테니, 마땅히 한바탕 결판을 낼 것이다.’ 또 경신년(1800) 10월에는 이우집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가 경신년에 태어났으니 올해가 거룩한 해가 된다. 거룩한 해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중에 1천 척의 배가 정박한다고 했는데, 여태 아무 소식이 없으니 괴이하다 할만하다.’ 또 올해(1801) 3월에는 이우집에게 ‘정말 믿을만한 사람을 부지런히 찾아 구해서 신부를 감춰두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나라에서 금함이 지극히 엄한데 사학이 어떻게 크게 행해진단 말인가? 일삼는 것이 요망하고 흉악한데 대체 무엇이 좋은 일이란 것인가? 큰 배는 어떤 물건이고, 서양에서 온다는 보화는 어디다 쓰며, 정말 이렇게 많이 싣고 오는가? 과거를 설치해서 인재를 뽑는다니, 나라에 정해진 제도가 있거늘 너희가 어떻게 천주당을 세우고 과거로 인재를 뽑겠다는 것인가? 총으로 사람을 쏘는 것은 군대에서나 쓰는 것인데, 너희가 어찌하여 흉악한 기물을 훔쳐 농단한단 말인가? 한바탕 결판을 낸다함은 어떤 거조(擧措)이기에 이처럼 망칙한가? 너의 신부는 어떤 흉악한 놈이기에 반드시 깊이 감춰두려 하는가? 너 또한 우리나라의 신하된 자로 어찌 감히 이같은 말을 마음에 품고 입으로 발설하여 다른 사람과 주고 받는단 말인가? 임금과 아비의 말은 차라리 어길 수 있다는 얘기와, 윤지충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울 것이라는 등의 말은 더더욱 지극히 흉측하고 패악스럽다. 그 어지러움을 불러들이는 계책과 화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분명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으니, 지시하고 시키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겠고, 경영하고 배포함 또한 근거함이 있을 것이다. 질문한 항목 안의 사연을 모두 하나하나 사실대로 고할 때까지 또한 엄한 형벌로 따져 물으랍신다.” 형벌로 1차례 신문하고 곤장 30대를 쳤다.
“저는 신해년(1791) 이후로 다시금 사학을 익혀서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는 이미 앞선 공초에 자세합니다. 이우집이 공초한 것은 모두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뉘우쳐 깨달아 살기를 비는 마음에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다 진술하여 숨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우집과 주고받은 말만 속에 감춤이 있겠습니까?
정사년(1797) 동짓달에 이우집이 제 집에 온 것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말을 주고받을 때 우리가 비록 형벌을 받는 화를 당하더라도 그대처럼 이름 없는 사람이 어찌 죽을 이치가 있겠느냐는 말은 실제로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잖아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한 것은 대개 천주의 가르침이 크게 행해지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이었고,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사실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이처럼 엄하게 금지하는 명령을 펴는 때를 당하여 어찌 오래지 않아 크게 행해질 가망이 있다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큰 배가 서양으로부터 온다고 한 일은, 서양의 주교는 반드시 그 학문을 널리 펼치려고 큰 배를 타고서 천하를 두루 다니는데, 이마두(利瑪竇) 같은 부류가 이것입니다. 제가 실로 큰 배가 만약 와서 조정에서 접촉을 허락할 경우, 절로 마땅히 천주당을 세워두고 법을 세워 가르침을 베풀게 되어, 우리들이 다시 박해를 당하는 근심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물과 풍도(風度)에 대해 말했는 말하지 않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혈포와 불고악(不鼓樂) 등을 말했던 것은 그들의 책 속에 실제로 이러한 말이 있었습니다. 한바탕 결판을 낸다는 말은 제가 애초에 입도 뗀 적이 없습니다. 그가 비록 스스로 벗어나기에 다급했다고는 하나, 어찌 감히 이런 말로 사람을 모함한단 말입니까?
보화를 실었다는 말은, 서양 사람이 그 가르침을 퍼뜨려 전할 때는 다른 나라의 재물을 쓰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천주당을 세우고 과거를 설치해서 인재를 뽑는 일은 주일날 첨례를 지키는 규정이 있고, 일찍이 『서학범(西學汎)』이란 책을 보니, 그 속에 문과(文科)와 도과(道科), 의과(醫科)와 이과(理科)의 주장이 있고, 매 과마다 각각 스승이 있어서 인재를 교육하여 공학(公學)에 올리고, 그 재주의 여부를 시험쳐서 조정에 올리면, 재주에 따라 벼슬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경신년(1800) 10월에 큰 배가 오지 않아 괴이하다고 말했던 것은 더더욱 지극히 허무맹랑하고, 거룩한 해에 인천과 부평 운운한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요망하고 지극히 사악한,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어리석게 만드는 요사스런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학의 경문(經文)에는 요망한 참언 등의 일을 절대로 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생 그런 말은 한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습니다.
일찍이 ‘우리들이 매번 이 학문 때문에 세상에서 비방을 받았는데, 올해는 예수가 세상에 태어난 해로, 이러한 때에 큰 배가 만약 오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틀림없이 거룩한 해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어쩌구저쩌구 하는 요망한 말을 가지고 여기에다 날조하여 맞추려 들테니, 어찌 욕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큰 배가 어찌 쉽게 올 수 있겠는가? 헛된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적은 있습니다. 근실한 사람을 구해 얻는다는 일은 진실로 정말 근거 없는 얘기입니다. 신부를 깊은 곳에 두려한다는 것은 더욱이 대단히 맹랑합니다. 신부는 아마도 주문모를 가리킬텐데, 신부란 두 글자를 그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거늘, 그가 대체 어디에서 이를 들었다는 말입니까? 윤지충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우는 일은 근거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은 반드시 이 학문을 하다가 죽은 사람의 시신을 천주당 안에 장사 지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앞뒤로 한 말은 한 차례 대질하게 해주시면 절로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살펴서 조처하여 주십시오.”
죄인 이우집과 유관검의 대질 심문(1801년 3월 28일)(사학징의 p.22~23)
“이우집 너는, 네가 앞선 공초에서 말한 것을 유관검에게 물어보니, 하는 말마다 모순되고, 단락 단락이 상반되어, 지극히 허황되다. 흉악한 말과 패악스런 주장은 얼굴을 맞대고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면 쉽게 말할 수가 없다. 게다가 조사받는 심문장에서 살펴 따지는 중에 네가 이미 정녕코 고하여 한 터럭의 차이도 없어야 마땅하거늘, 지금 그 공초한 것이 이처럼 서로 맞지가 않는다. 저가 만약 실정을 감추고 말하지 않았다면, 네가 틀림없이 날조하여 남을 무함 잡은 것이다. 유관검 네가 수작한 것이 지극히 흉악하고 너무도 참람함은 이미 이우집의 공초에서 탄로 났다. 그런데도 네가 어찌 발뺌하면서 감히 기만하여 감추려는 꾀를 낼 수가 있단 말이냐? 알맹이 없는 말로 얼버무려 계속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 정상을 살피건대 더더욱 흉악하고 완악하다. 각각 대질하여 공초를 올리고, 또한 심문하랍신다.”
이우집이 유관검을 향해 말했다.
“큰 배가 나온다는 말을 네가 하지 않았더냐?”
유관검이 말했다.
“큰 배가 나온다는 말은 내가 한 것 같다.”
이우집이 말했다.
“한바탕 결판을 낸다는 말도 네가 하지 않았느냐?”
유관검이 말했다.
“결판을 낸다는 말은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
이우집이 말했다.
“인천과 부평에 밤에 배가 정박한다는 얘기를 네가 하지 않았느냐?”
유관검이 말했다.
“경신년(1800)은 예수가 태어난 해라서, 큰 배가 만약 이 때에 온다면 인천과 부평에 밤에 배가 정박한다는 요망한 말과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므로 화를 입을까 염려할만해 과연 이런 말을 했었다.”
이우집이 말했다.
“한바탕 결판을 낸다는 말을 네가 모른다는 것은 지극히 흉악하고 완악하다. ‘저들이 이미 험한 바다를 건너 멀리서 왔는데 우리가 이치에 따라 받지 않는 이런 경우에 전장(戰場)의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결판을 내서 운운’한 것이 바로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다혈총(多穴銃)과 천리비거(千里飛車) 이것들이 병기(兵器)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유관검이 말했다.
“큰 배가 나왔는데 우리나라가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서교를 행할 수가 있고, 만약 쫓아 보낸다면 다만 마땅히 도로 돌아갈 것이니, 이 학문이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을 이것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내가 언제 결판을 낸다고 했단 말이냐?”
이우집이 말했다.
“천주당을 세우고 과거를 설치해 인재를 뽑는다는 말을 네가 하지 않았느냐?”
유관검이 말했다.
“내가 이미 앞선 공초에서 바른대로 고하였다.”
각각 대질하였다.
죄인 유관검 나이 등 확인, 재신문(1801년 3월 28일) (사학징의 p.23~26)
“너의 이전 공초와, 대질했을 때 대답한 내용을 반복해서 서로 살펴보니, 이미 말의 단서가 나왔으나 그 말을 다 마치지 않았거나, 거의 단서가 드러났지만 그 실마리를 살피지 못해, 머뭇대면서 실토한 정황이 흉악하고 간특하다. 다시금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고 추문하옵신다.”
“제가 이 지경에 이르러, 실낱같은 목숨을 실리려고, 앞뒤로 제사를 폐한 이야기와 설법하고 경문을 설명한 일, 그리고 그 밖에 숨겨진 정황이 죄가 사형에 합당한 일인데도 하나하나 바른대로 고하였으니, 이제 큰 선박에 대한 한 가지 일을 어찌 숨겨 감출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제가 주장한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고 보니, 또한 어찌 바르게 진술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주문모를 맞이하여 오려는 계획은 이가환과 홍낙민, 이승훈, 지홍 등의 주장에서 나왔습니다. 이때 여러 가지 의논이 혹 신부가 아니고는 성사(聖事)의 일곱 가지 자취를 행할 수가 없고, 성사를 행하지 못할 경우 가르치는 일도 세워지지 않을 것이므로 반드시 주교 한 사람을 맞아 온 뒤라야 이 가르침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에서 금지함이 비록 이와 같다 해도 만약 큰 선박이 나오는 것을 도모한다면 금지하는 명령은 절로 느슨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서양까지의 길이 9만리나 되므로 큰 선박이 나오려면 마땅히 4,5년의 계획이라야 하니, 이는 너무도 아득한 일이라서, 중국에서 한 사람의 신부를 맞이하여 오는 것이 방법이 됨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윤유일에게 행장을 꾸려 보내, 과연 주문모를 얻었습니다. 주문모가 나온 뒤로는 감춰 숨겨두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인지라장차 탄로가 나게 생겼으므로, 여러 사람이 의론해서 또 신부 한 사람만으로는 그 형세가 너무나 고단하니, 서양의 큰 선박을 맞이하여 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제가 사실 참석하여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을묘년(1795)에 주문모가 제 집에 내려 왔을 때, 3백냥의 돈을 꾸어 달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집을 사려고 하는데, 지홍에게 맡겨둔 은자를 잠시 꺼내오지 못하고 있소. 거두어 오기를 기다려 마땅히 바로 갚아 드리겠소.’ 그래서 제 형이 그 말에 따라 돈을 꾸어 주었습니다. 또 병진년(1796) 겨울에 주문모가 중국과 통신하려 하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자, 저희 형제와 윤지헌이 상의하여, 윤지헌의 추천으로 이름이 황심이고 자를 신거(信巨)라고 하는 사람을 사행 편에 들여 보냈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성유(聖油)와 은화를 가지고 오는 것 뿐 달리 따로 들은 것이 없습니다.
성유라는 것은 서양 나라의 파이살말(巴耳撒末: 발삼) 나무의 과즙인데 세례를 받고 견진(堅振)을 할 때 쓰는 물건입니다. 주교가 아니면 이 기름을 축성할 수가 없고, 1년이 지나면 이 기름을 더 쓰지 못하기 때문에, 병진년 이후로 작년까지 매번 사행 때마다 왕래가 끊이지 않고 반드시 가져 왔습니다. 병진년과 정사년(1797)에 황심이 두 차례 오간 뒤에, 무오년(1798)에는 고산(高山) 대판리(大判里)에 사는 이름을 모르는 김가(金哥: 김유산)가 한 차례 갔다 왔습니다. 그 밖에 들어갔던 사람은 누구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주문모가 아직 오기 전에는 무릇 꾀하는 바가 모두 이가환과 지홍 등에게서 말미암았고, 주문모가 나온 뒤로는 매사를 주문모가 반드시 주장하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다시 이전에 의논한 것을 가지고 주문모에게 의논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의 자취를 끝내 가리워 숨기기가 어려우니, 실로 성교를 널리 펼 가망이 없습니다. 큰 선박을 반드시 청해오는 일을 하면 해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름지기 우리나라 교우의 성명을 줄지어 기록하여 편지를 써서 중국 천주당의 주교에게 들여 보내, 그로 하여금 그 나라 임금에게 전달케 해서 큰 선백을 마련해서 보내게 하시지요.’ 편지 글은 주문모가 대신 지었는데, 대개 조선에서 서학을 배우는 사람이 한미한데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고, 조정 위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제 만약 큰 선박을 맞이하여 온다면 나라의 금지도 틀림없이 풀리지 않을 수 없어서 우리의 도를 널리 펼 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말하기를, 중국과 서양에서 문학하는 자가 있을 경우 큰 선박에 같이 싣고 온다면 말을 통할 수가 있고, 또 큰 선박을 준비해 보낼 때 서양 나라의 임금이 반드시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 ‘비록 수만리 밖에 있지만, 항상 귀국의 소품을 사모하였소. 귀국에는 성교가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문학에 독실한 사람을 내보내 반드시 모름지기 그 가르침을 크게 행하게 하려 하니, 먼 곳의 소망을 외롭게 하시 마십시오.’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서찰 안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제가 비록 다 알 수는 없지만, 서울에는 아마도 최창현과 황사영 등일 듯 하고, 호남으로 말한다면 저희 형제 등이 마땅히 들어가 있을 듯 합니다. 오고 간 서찰은 주문모가 하는 말이 보고는 바로 불에 태워서 누설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지금은 남겨둔 것이 없습니다. 저쪽 나라로 왕래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주교라는 사람이 그 서찰을 보더니, ‘내 마땅히 우리나라 임금에게 전달을 하겠지만, 큰 선박을 마련해 보내는 것은 그 비용이 몹시 엄청나다. 우리나라에서 만약 너희나라의 금지하는 명령을 알 경우, 틀림없이 무익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너무 깊이 믿지는 말라.’고 하였답니다. 저희들이 그것이 오기를 요행으로 바랐던 것은 실로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살펴서 조처하여 주십시오.”
죄인 윤지헌 나이 확인, 재신문 (사학징의 p.26~27)
“네가 황신거를 주문모에게 지목하여 보내, 중국으로 들여보낸 정황은 이미 유관검의 공초에서 발각되었다. 이국과 교통하는 것이 어떤 큰 범죄인가? 은밀하고 참람한 계획을 세워 큰 선박이 오도록 청한 것 또한 어떠한 행동이란 말인가? 흉악하고 간사한 일을 꾸민 것은, 말로 하자니 너무도 한탄스럽고, 생각해 보아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너는 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같은 법도에 벗어난 행동을 하였는가? 하나하나 바르게 고하라는 뜻으로, 엄한 형벌로 신문하랍신다.” 형벌로 한 차례 신문하고 곤장 30대를 쳤다.
“저는 이미 만번 죽을 죄를 범하였고, 실낱같은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터라, 어찌 감히 속여 감춰 다시 죄를 더하겠습니까? 황신거에게 지시하여 중국으로 보낸 일은, 병진년(1796)에 유관검 형제가 제게 근실하게 일을 처리할 사람을 얻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에 쓰려느냐고 묻자, 주문모에게 보내 그의 서찰을 받아 중국 천주당에 들여보내, 사상(邪像)과 세례를 받을 때 쓰는 성유(聖油)를 가져오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황신거가 감당할만 하다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큰 선박에 관한 일은 실로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찍이 들으니 서양 사람이 천하를 두루 다닐 때는 반드시 큰 선박을 타고서 성교를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편지를 보내 주교를 청해와서 천주당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성교를 널리 펼치려는 뜻이었는데, 을묘년(1795)에 주문모를 맞이하여 온 것은 최인길과 윤유일, 지홍 등이었습니다. 황신거를 들여보내, 큰 선박을 청하는 일을 주장한 것은 유관검 형제와 서울 사람으로 이름은 모르고 자를 운서(雲瑞)라고 하는 송가(宋哥)와 저입니다. 이밖에 달리 고할만한 것이 없으니 살펴 처리하여 주십시오.”
죄인 유관검 나이 확인, 윤지헌 나이 확인, 재신문. (사학징의 p.27~29)
“너희가 주문모와 배짱이 맞아 큰 선박을 청해 오려 한 정황은 이미 모두 자백하였으니, 다시 물을 것도 없다. 너희가 앞서 보낸 황신거와 나중에 보낸 김유산을 이미 앞장서서 지시하였으니, 매번 인편마다 편지를 주어 청해오게 했는지를 사실대로 고하라고 신문하옵신다.”
“저희가 병진년(1796) 겨울에 황신거를 들여보낼 때 유관검 형제와 저 윤지헌 등이 같이 이름을 나열하여 편지를 써서 주문모에게 바로 보냈더니, 주문모가 표현이 좋지 않다면서 직접 고쳐 써서 보냈습니다. 큰 선박을 한 차례 요청한 뒤에는 마땅히 단지 그것이 나오기만을 기다릴 뿐, 경솔하게 여러 번 번거롭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무오년에 김유산을 들여보낼 때는 저희가 다시 편지를 부치지는 않았습니다. 살펴서 조처해 주시라는 뜻으로 각자 공초를 올립니다.”
유관검은 유항검을 형으로 삼고, 윤지충과는 의리로 친척이 됩니다. 윤지헌은 윤지충을 형으로 삼고, 유항검과는 가까운 집안이 됩니다. 번갈아 교주가 되어 각처의 소굴에서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이 스스로 윤리를 끊어 버려 제사를 폐하고 사당을 없애는 것을 예사 일로 여겼습니다. 요망하고 괴이하며, 황당하고 허탄한 물건을 갖춰두지 않음이 없었고, 점차 물들어 그르치고 잘못되게 한 추악함이 그 무리를 번성케 하여 호남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유관검 형제는 만금의 부유함을 갖추어 재물을 베풀어서 불러 꾀니, 지혜롭지 않거나 어리석지 않은 자들 할 것 없이 점점 빠져 들어 몇 개 고을이 반넘어 교화되어 이적금수가 되었습니다. 흉악한 무리와 창자가 서로 맞통해서 호흡이 곧장 서울과 교통하였고, 이에 이국 사람과 더불어 큰 재물을 정성으로 바치며 온 집안이 법을 받은 것은 그 죄 됨이 이미 석 자 칼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가환과 홍낙민의 음모를 본받아서 해마다 사람을 모집해 이국과 편지를 교통하였고, 큰 선박을 보내 줄 것을 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안으로는 위협하려는 계획을 품고, 밖으로는 황탄하고 괴이한 주장을 선동하였으니, 그 뜻이 헤아리기 어렵고, 정황이 요망하고 간특합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모골이 온통 송연합니다.
유관검과 윤지헌은 몸은 달라도 뜻은 같아서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범한 죄가 지극히 무겁고, 관계된 것이 가볍지 않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옥사의 본질이 여느 사학도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그가 끌어댄 자들이 서울에 많이 있다 보니, 신의 전라감영에서 혼자 가볍게 논단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급히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해서 엄중히 조사하여 해당하는 벌을 시행하십시오.
이우집은 사학에 물든 것이 비록 유관괌이나 윤지헌 두 죄수에는 못 미치나, 두 죄수의 긴요한 증거가 이 자를 벗어남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흉악한 말과 패악스런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들은 것은 결단코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놈을 데려다가 국청에서 더욱 자세히 조사하여 주십시오.
황심과 현계온(玄啓溫) 등은 지금 서울에 있는데, 유관검과 윤지헌 등의 앞선 공초에 이미 나왔습니다. 그래서 전라감영에서 포청으로 공문을 보내니 기찰하여 붙잡아 주십시오. 송운서(宋雲瑞)는 본래 서울 사람인대 이미 막 죽었습니다. 고산(高山)에 사는 이름을 모르는 김가(김유산)는 연전에 충청도 진잠(鎭岑)으로 이사 갔습니다. 인하여 전라감영에서 장교를 보내서 그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 덮쳐 잡아 줄 것을 충청 감영에 공문을 보내, 붙잡아 오게 했습니다.
이제 이들 여러 죄인들은 하나하나 흉악하고 완악하여, 한 차례 조사할 때마다 며칠씩 낭비하였고, 마음을 쏟아 조사해야만 그제서야 단서가 나옵니다. 그들의 앞뒤 공초 중에 옥사의 내용과 관련 있는 것을 요첨만 추려서 먼저 보고를 올립니다. 이밖에 두 죄수의 공초에 나온 것으로 서로 증거를 끌어댄 자 또한 그 숫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하나 붙잡아 가두고 엄한 신문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 조사가 실로 경중에 따라 논리로 구별되기를 기다려, 추가로 계를 올릴 계획입니다.
이제 이들 죄인이 한 뿌리로 얽힌 채로 이미 굳게 도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풍속을 살피는 직임에 있으면서 능히 더 일찍 적발하지 못하여, 이들 흉악하고 추한 무리로 하여금 오래도록 살아 숨쉬게 한 것은 진실로 너무나 황송하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같은 연유로 함께 삼가 갖추어 계를 올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