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장 잘못된 신앙
-- 마음이란 태양처럼,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자에게도, 차별없는 공평무사한 의식이다.
에너지이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마음이야말로 당신 자신이다.---
* 마음과 대자연
뒷산 사면의 잔설도 녹고 검은 흙의 표면에 새 순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봄의 기운이 화창하게 감돌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 친구로부터 받은 큼지막한 정원석을 들여놓을 때, 파내었던 머위의 뿌리가 아직 남아있었다. 우산을 펼친 것 같은 머위의 이파리가, 올해도 정원의 한쪽 구석을 장식해줄까 하고 생각하면 그 생명력의 강인함에 나는 놀랬습니다.
며칠 전까지 서릿발이 내리던 정원입니다. 그 차가운 땅 속에 지금까지 꼼짝 않고 참고 견디어 온 것입니다. 불평도 하지 않고, 묵묵히 때가 오기를 기다려 온 것입니다.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검은 땅에서, 봄의 햇살을 받으려 흔들리고 있는 머위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앞으로 1주일정도 지나면, 작은 꽃봉오리도 파란 이파리를 펼치게 되겠지요. 정원석에 앉아서 대자연의 섭리와 인생에 관해 사색을 하자, 대자연의 섭리와 인생의 사이에는 울타리가 없고,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몸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1968년 3월, 나는 인간은 도대체 뭔가, 그리고 인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태어나, 왜 일을 하고, 괴로움을 짊어지고, 늙어 죽어가는 것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추구(追究)하고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자, 검은 흙이 묘하게 솟아오르면서, 잔디밭이 있는 방향으로 지나갑니다. 두더지의 이동이었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화창한 봄날의 풍경입니다.
하늘에는 종달새가 울고, 참새가 지저귀고 있습니다.
맑은 공기와 녹음과 붉은 태양 아래에 자신을 두자 확실히 대자연에 둘러싸여 살리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떠들썩한 도시에서 맛보기 힘든 감상을 느낍니다.
자연의 이러한 아름다운 환경은 태양의 열*빛의 에너지에 의해 자란다.
태양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육체주(肉體舟)는 환경에 적응해서 보존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추운 겨울은, 그 추위를 견디어 내도록, 피부는 수축하고 체내 온도도 조정되고 반대로 더워지면, 피부는 늘어나고, 모공으로부터 땀을 배출하여, 방열 작용을 합니다.
모든 내장기관은 항상 활동을 계속하여, 인체라고 하는 안정된 소우주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여러 기능을 조용히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신비』라고 할 수 밖에,
표현 방법이 없는 위대한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즉 대자연의 환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전능한 에너지야 말로, 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뭐라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마음의 나타남이야말로, 자비이고 사랑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마음에 관해서 우리들은, 마음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마음은 이런 것이라고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은 것은 아닐까요.
저 사람은 정신상태가 나쁘다든가,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라고 간단히 말하긴 해도, 그러면 정신이란, 마음은, 이라고 하면 설명하기 궁(窮)합니다.
만물이 생명과 동거하고 있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리학에서는 물질이 에너지와 동거하고 있는 사실을 증명하고, 에너지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물질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물질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차이점은, 물질이라고 하는 집중된 차원과, 확산된 에너지의 차원의 차이만이 있고, 그 위에 양자(兩者)는 항상 병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질량은 불변(不變)이고 에너지는 불멸(不滅)이라는 사실도 실증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밀폐된 컵 속에 성냥을 넣어 연소시켜도, 전체 무게는 변하지 않고
성냥은 컵 안의 산소에 의해 불타고 탄소, 탄산가스로 변화되어도 전체의 무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체도 대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대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요.
생로병사라고 하는 틀을 누구도 깨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 자명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태있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져 간다. 그러나 육체도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차원이 다른 무언가와 동거하고 있는 것이 되지요.
이것을 혼(魂), 혹은 의식(意識)이라고 이름 붙여봐도 괜찮겠지요. 꼭, 물질이 에너지와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입니다.
육체주(肉體舟)는 육체 세포 제기관의 생명활동에 의해 안정되어 있으나
배(舟)의 책임자는 오체(五體)를 지배하는 선장인 혼, 의식의 활동에 의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육체주(肉體舟)의 결함은, 오체(五體)의 여러 기관과 선장인 의식의 상호관계가 부조화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억도, 제 저서에서 종종 언급했듯이, 두뇌가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고, 혼*의식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주와 의식*혼이라고 하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것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 생명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영원한 생명이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초월해서, 일체의 기억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혼*의식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생사에 사로잡히면,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지만, 육체를 떠난 자신을 인식하고 체험하면, 거기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에 이러한 체험을 하는 자는, 극히 일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은 할 수 있어도 믿는 것까지는 좀처럼 안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믿는다 믿지 않는다에 상관없이, 인간은 육체가 소멸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은 저 세상에서의 탄생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여행을 할 때, 여러 가지 교통편을 이용합니다. 비행기를 탄다거나, 자동차를 탄다거나, 전차를 이용하기도 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교통편은 각각 다르지만 타고있는 자기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혼의 영원한 생명, 즉 전생 윤회도 이것과 똑같은 것이며, 자신의 과거세는 중국에서, 인도에서, 또는 일본인으로서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세의 기억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대단히 적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현재 생활만이 절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전무(全無)에 가깝습니다. 그때문에 무의미한 인생을 보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세의 기억의 단절은, 하나는 현세는 수행의 장이고 또 한편으로는 차원이 서로 다른 차이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응아'하고 태어나서 바로 알아 버린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의가 작아지게 됩니다.
또 하나는, 어떤 일정한 연령에 도달해도, 아직 그러한 기억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차원의 차이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원의 차이란, 단절이라고 하는 벽이고, 스모그입니다.
그 스모그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의 한쪽으로 치우친 생활 행위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생명의 신비에 의문을 갖고, 자연과학을 통해서, 정신상태에 대해서 추구(追究)해 왔습니다. 추구(追究)할 때마다 여러 가지 체험이 쌓여, 체험을 통해서, 생명의 수수께끼가 밝혀져 같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졸저 『마음의 발견』 신리 편, 과학 편, 현증편과
『마음의 원점』을 참고하시면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나는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인간은 혼이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한정되고 짧은 육체인생에 주어진 자신의 역할을 전력을 다해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혼에 대해서 더욱 밝혀진 점은 혼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은 의식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생활의 장에서 여러 가지 행위를 지시하는 것은, 의식의 중심인 마음이고 마음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육체주는, 식물성 신경의 작용으로 심장, 내장기관이 움직이고 있고, 육체주 전체의 행동은, 혼의 중심인 마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장, 내장은 마음과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나, 마음의 움직임은 모든 내장기관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식물성 신경, 즉 자율신경은 신(神)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또한 마음의 파동을 강하게 받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졸저 『마음의 원점』을 참고하면 한층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질병의 80%는 심인성(心因性)인 것입니다.
화내고 슬퍼하고 한탄하고 그러한 자기 보존이 반복되면 육체에 여러 가지 장해가 나타나 병이 되어 갑니다.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자신만의 문제라면 병으로 되어 나타나지만, 대외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사업 부진, 가정불화, 공해, 재해 등으로 발전해 갑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보편적인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잃고, 물질문명의 포로가 되어 버립니다.
물질문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문명을 위한 것인가 인간을 위한 것인가...
인간은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문명에 봉사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리석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인가.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추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온통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밑바닥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혼란은 언제가 되어도 가라않지 않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대자연을 보면 우리들의 눈앞에 펼처져 있는 모습은, 법의 규칙에 따라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서로 조화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바른 순환의 법, 규칙을 나타내고 만족할 줄 아는 중도의 신리(神理)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물은 산소를 흡수해서 탄산가스를 배출하고, 식물은 탄산가스를 흡수해서 산소를 배출합니다. 동물은 식물을 필요로 하고 식물은 동물의 배설물을 영양원으로 해서 성장한다. 양자의 상호공존, 이것은 하늘의 섭리입니다.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습니다. 배가 부르면 눈 앞의 먹잇감도 지나치고 맙니다. 그들은 만족할 줄 알고 자연의 순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인간이 들어가서 황폐시키지 않는 한, 반영구적으로 유지되어 갑니다.
인간은 그러한 법칙을 잊고 욕망충족에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기는 오염되고 하천과 대양까지 공장폐수에 더러워져 동식물의 생존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조차도 불안할 정도의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결같이 만족하는 것을 잊은 이익추구의 인간의 자세에 문제가 있고, 지금의 인류는 커다란 벽에 맞부딪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원인이 없이는 있을 수 없고, 현실의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컨대 행위를 만드는 마음의 자세를 바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졸저 『마음의 원점』에는 이러한 현상들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자세, 살아가는 목적, 괴로움의 원인 등에 대해서 자세히 할 예정입니다. 본서를 한번 읽으면,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한눈에 바라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먼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기의 마음에 충실하게 될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보존, 자아아욕이라는 마음의 공해를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의 공해는 타인이 제거해주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의 육체주의 지배자는 타인이 아니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왕국의 지배자는 자기라는 자각을 가질 필요가 있겠지요.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현상의 원인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의 혼란과 공해문제에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도, 원인으로 말하면 개개인의 마음의 공해로부터 단서를 잡을 수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무너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법칙을 알고 조화롭고 밝은 세상,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 법칙의 위대함을 깨닫고 인생의 목적을 예기치 않게 달성될 것입니다.
1968년 7월.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나의 마음의 창이 열렸을 때,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냈던 여러 가지 마음의 구름을 제거해서,
평화로운 인생을 보내는 것이 가능해지면, 사람들은 인생의 위대한 가치를 스스로 깨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정원의 돌에 앉아서 인생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던 자기 자신을, 머위를 보면서 나는 진정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음의 지침 원본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