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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교회일치위원회
“세례, 성찬, 직무”(신앙직제위원회 문서 111호)에 대한
가톨릭의 응답
I. 서 문
평 가
신앙직제위원회 문서 「세례, 성찬, 직무」(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BEM)는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세계 신앙직제대회에서 시작된 50년 이상의 작업이 집대성되어 나온 것이다. 신앙직제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적한 대로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1항]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에 일치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인 현대 교회 일치 운동의 바탕이 되는 운동으로서,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태동시키게 된다. 이제 세계교회협의회 안에 속한 신앙직제위원회가 신앙직제 운동의 방향을 이끈다. BEM은 이 운동이 시작된 이래 가장 중요한 결실 가운데 하나이다.
BEM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1982년 리마에서 이 문서를 출판한 신앙직제위원회의 성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원회는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정회원이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12명의 대표들을 신앙직제위원회에 파견하여 그들이 개인 자격으로 이 위원회에 참석하여 완전한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는 120명의 회원들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위원회는 개별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폭넓게 대변한다. 그것은 “수많은 언어로 예배를 드리며 온갖 형태의 정치 제도 아래 살아가는”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적 배경과 전통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위원회는 BEM 안에서 온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상당한 수준의 동의”에 도달함으로써 “중요한 신학적 일치점”을 실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 밖에도 “아직 더 연구하고 조정해야 할 쟁점들을”(BEM 서문) 밝히고 있다. 역사적으로 서로 간에 직접적인 신학적 충돌과 불일치를 거듭해 왔던 단체들의 신학자들이 이제는 신앙의 주요 영역들에 대한 동의와 의견 수렴을 한 목소리로 주장하고 나서게 되었다. 이 자체가 괄목할 만한 성과이다.
둘째로, BEM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분열의 역사적인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신앙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 일치 운동의 과정에서 가장 우수한 결실이다. 이 문서는 어느 정도의 동의나 적어도 신학적 의견 수렴의 영역들을 제시함으로써 교회 일치 운동의 목적에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다. 1980년 BEM이 아직 최종 공표되기 이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로마에서 신앙직제위원회의 실무단에게 이 문서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다. “여러분의 꾸준한 노력은 이미 결실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고자 우리에게 오신 그분께 이 모든 결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요한 16,13 참조). 여러분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인일치사무국, Information Service, No. 45, 1981/1).
셋째, BEM은 신앙직제위원회가 교회들과 공동체들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수 십 년 동안 현저한 발전을 거듭해 온 1982년의 리마 문서는 교회들과 공동체들에게서 이 문서를 잘 받아들이게 돕는 몇 가지 제안들과 함께 “최대한 적절한 권위를 지니고 … 공식적인 응답”을 얻으려는 목적에 맞게 충분히 완성되었다고 여겨졌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제6차 총회는 이 초안을 승인하고 각 교회들이 기한 내에 이에 응답해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리하여 새로운 교회 일치 운동의 장이 열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자기 공동체 안에서 일치를 향한 노력에 더욱 깊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와 BEM
가톨릭 교회는 공의회의 ‘일치 교령’이 교회 일치 운동의 중요성에 대하여 심혈을 기울여 지적한 주요 문제들과 관련하여 BEM을 본다. 우선 갈라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치의 시급한 필요성은 바티칸 공의회와 BEM 양쪽에서 모두 나타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관심사는 “일치의 재건을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 촉진하려는 것”이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이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일치 교령, 1항)고 말한다. 공의회는 하느님께서 “최근에는 서로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심과 일치의 열망을 더욱 풍부히 불어넣기 시작하셨다.”고 하며 하느님의 주도권을 언급하였다. ‘일치 교령’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응답할”(일치 교령, 1항) 용기를 북돋우려는 목적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작성한 것이다. BEM 서문에서도 “가시적인 교회 일치라는 목표”를 향하여 세계교회협의회에 소속된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하여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단체 사이의 공통분모는 둘 다 그리스도교 일치의 시급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가 비록 신앙직제 운동의 BEM 작업 과정 초기 단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이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함), 이제는 BEM 안에서 교회 일치 운동의 중대한 결실을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본 문서에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일치 교령’은 교회 일치 대화를 요청했고(4항), 세례의 교회 일치 운동적 중요성을 지적하였으며, “주님의 만찬, 다른 성사들, 예배, 교회의 직무에 관한 교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22항)고 촉구한다. BEM도 이 문제들을 직접 다루고 있다. ‘일치 교령’은 더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민족들 앞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여야 한다.”(12항)고 촉구한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삼위일체적이고 그리스도론적 요소들을 강조한 BEM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문서의 위치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문서에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 다양한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이 이 문서를 받아들일 때 교회 일치 운동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물론 그것이 아직은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 일치를 향한 교회 일치 운동의 전 과정에서 오직 한 단계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BEM에 대한 이러한 응답과 수용 과정을 통하여 BEM이 보고하는 것처럼 수많은 의견 수렴과 심지어 동의까지도 개별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을 통하여 도출되고 있다면 이는 분명 교회 일치 운동에서 획기적 발전이 아닐 수 없다.
BEM은 그 여정의 한 단계, 곧 “가시적 일치라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서” 교회들이 거쳐야 할 “다양한 단계”(서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문서가 주장하는 바는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온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 완전한 합의는 교회들이 일치 가운데 함께 살아가고 함께 활동하는 시점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선포될 수 있다.” 이 문서는 세례, 성찬, 직무를 완전히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치를 향한 상호 인정의 문제에 관련된 측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새로운 사고의 전망을 당연히 포함하는 새로운 신학 용어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문서의 중요한 대목들에서 서로 상반된 발언들과 언어가 등장하여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본문과 연결된 해설들은 아직 더 연구하고 조정해야 할 쟁점들을 밝히고 있다. 또한 몇몇 대목에서 예를 들면 가톨릭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신학과 실천에 대하여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속적인 과정에 기여하며
그러므로 BEM 문서에 응답하며 우리는 BEM의 업적과 발자취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 일치라는 목표를 향한 그 지속적인 과정에 동참하고자 한다. 문서가 지닌 한계에 따라 우리 응답의 범위도 제한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을 지지하고 그 과정이 계속 발전해 나가기를 바란다.
이 응답서에서 우리는 본문 가운데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룬다. 우리가 동조할 수 있는 것들도 다수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비판을 요하는 문제가 있으면 이를 명백하게 지적할 것이다. 그 외에 우리가 보기에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은 무척 중요하며 이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교회 일치 운동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BEM에 언급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논평할 생각이 없다.
가톨릭의 교회론적 자기 이해
더 나아가 이 응답서에서 우리는 가톨릭의 교회론적 자기 이해를 장황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예를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참조].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 발언의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고 실제로 BEM 자체의 제한된 내용과 범위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미리 알리는 일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중요하다. 이 응답서는 가톨릭 교회 자신의 일치와 진리에 대한 온전한 인식으로 또 가톨릭 교회의 자기 이해에 본질적인 요소를 부인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일치 교령’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당신 교회에 주신 일치,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그 일치가 가톨릭 교회 안에 있다고 우리는 믿으며 세상 종말까지 그 일치가 날로 자라나기를 바란다”(4항).
교회론의 연구가 점차 교회 일치 대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확신이다. 아마도 교회 일치 대화에서 교회론에 보다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 다음에야 BEM에 대하여 가장 잘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BEM의 연구는 이미 교회의 본질적인 실재들을 다루는 한 방법이 되어 있다. 여기서 비록 가톨릭의 교회론적 자기 이해의 모든 주요 사항들과 관련시켜 세세한 해설이나 고찰을 표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사실 때문에 해설이 없는 부분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거나 덜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사실은 이 연구의 초점이 교회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가톨릭의 교회론적 자기 이해에 관련된 주요 문제들은 교회론 자체의 연구를 통해서 다루어질 때 보다 깊은 관심과 보다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교회 헌장, 8항)는 가톨릭의 근본 교리는 친교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론의 틀 안에서만 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볼 때 신앙직제 운동은 분명 교회론에 보다 직접적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론의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으면, BEM의 내용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일치 운동의 진전에도 여러 불합리한 점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 일치 운동의 광범위한 맥락
마지막으로 우리는 BEM이 필연적으로 교회 일치 운동의 더욱 광범위한 전망 안에서 다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한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우리가 갈망하는 일치를 “진정으로 하나 된 지역 교회들의 협의체적 공동체”로 묘사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세례와 성찬과 직무는 진정으로 일치된 지역 교회의 몇 가지 근본 요소들이다. 예를 들어 직무는 지역 교회의 일치를 위한 본질적 수단이면서 동시에 지역 교회들을 연결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보아야 한다.
II. ‘신앙직제위원회’의 지속적인 활동
신앙직제위원회의 탄탄한 활동은 BEM 문서에 다각적으로 반영되어 있고 이 응답서에서도 지적하게 될 것이다. 이 활동을 더욱 효과 있게 진작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신앙직제위원회의 지속적인 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이 문서를 성찰한 바에 따르면 여러 가지 비판들이 성사(또는 성사성)의 개념들과 사도 전승의 정확한 성격과 교회 안에서 결정적인 권위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교회 일치 운동 안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교회론에 연관된 문제다. 우리는 이를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한 사안들로 신앙직제위원회에 상정한다. 우리는 일치운동의 차원에서 교회론에 관한 연구가 더욱 깊이 이루어질 때, BEM에서 제시한 저 세 가지 성사의 가치에 대하여 다른 통찰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성사와 성사성
우리는 BEM이 세례와 성찬과 직무의 성사적 차원을 다루면서 말한 많은 것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러 군데에서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는 아직 BEM 안에 성사(그리고 성사성)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리라 본다.
예를 들어 세례에 관한 본문에서 12항과 14항의 해설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보여 준다. 세례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중대한 지적에도 세례의 온전한 효력에 대하여 그다지 분명한 언급이 없는 듯하다. 본문은 세례가 왜 반복될 수 없는 행위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다. 세례는 과연 구원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세례와 교회 입문에 대한 질문들이 여기에서 제기된다. 그리스도교 입문은 어떤 차원들을 갖고 있는가? 세례는 과연 그리스도교 입문의 온전한 실재를 성사적으로 합당하게 표현하는가? 우리는 성사로서 견진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세례와 성찬 사이의 관계도 앞으로 더욱 깊은 탐구를 필요로 한다("세례" 14항 해설 참조).
성찬 본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동시에 더욱 명확한 설명과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실재적 현존과 관련하여 성찬례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성찬" 15항)를 다소 모호하게 설명함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희생제사로서 성찬과 관련하여 본문에서 사용된 용어들은 성찬의 이러한 측면을 다루는데 적합한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직무와 관련하여 우리는 중요한 의견 수렴이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서품에 대한 설명이 성사적 이해의 방향으로까지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성품을 명백히 성사로 간주하는 그리스도인들(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하여)의 신앙을 충분히 반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도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성사의 개념에 대해서 BEM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증언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는 사실들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한 단계로서 세례와 성찬과 직무에 대한 합의를 모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밴쿠버 보고서, 「생명을 위한 모임」(Gathered for life), 45면 이하] 우리는 신앙직제위원회의 지속적인 활동이 성사와 성사성의 개념을 교회 일치 운동의 차원에서 더욱 깊고 넓게 탐구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사도 전승
사도 전승의 정확한 성격과 그 함의에도 더욱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교회 일치 운동의 역사 안에서 1963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 신앙직제대회는 분명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대회는 종교개혁 이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성경와 전통에 대한 논쟁을 불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몬트리올 대회는 BEM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몇 대목에서, 특별히 BEM의 해설들 안에서 현재 다양한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이 이해하고 있는 사도 전승의 개념이 문제시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사실 본 문서는 일치운동의 차원에서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전과 성경은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한 성스러운 유산을 형성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7-10항]. 그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문자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전통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하느님의 계시 전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수렴된다. 전통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되고 이들은 진리의 성령께 인도를 받아 그 전통을 충실하게 보전하고 신장시키며 그들의 설교를 통하여 널리 전파한다. 교회는 이 전통에 연결됨으로써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언제나 충실하게 머물러 있다.
따라서 우리 견해로는 계시에 기반을 둔 이유로 우리에게 구속력을 행사하는 사도 전승과, 지역 교회들에서 발전된 다양한 전통들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하여 BEM은 물 없이 세례를 수여하는 어떤 아프리카 교회들의 관습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게 한다("세례" 21항 해설 참조). BEM은 또한 빵과 포도주가 일상적인 것이 아니거나 구하기 힘든 세계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지역의 음식과 음료를 사용함으로써 성찬례를 일상생활에 한층 더 잘 정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성찬" 28항 해설). 아마도 가장 분명한 견해차는 여성들의 서품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직무 본문의 18항 해설은 몇몇 공동체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복음 이해와, 여성들에게 성품 직무를 허가해 본 다년간의 체험으로 얻은 신학적 확신을 바탕으로 여성 서품을 실시하고 있다고 밝힌다. 다른 한편 여성 서품을 하지 않는 공동체들은 ‘19세기 동안의 전통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도 전승에 관한 개념들이 서로 달리 이해된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여성 서품과 같은 문제가 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직제위원회가 자신의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는 동안 사도 전승의 정확한 성격을 보다 깊이 연구하고 규명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 안의 권위
교회 안의 권위에 대한 연구도 보다 활발히 진척되어야 한다. 교회 일치의 맥락 안에서 볼 때 이러한 관심은 1983년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제6차 총회에서 다시 일어났다. 응답과 수용을 요구하는 BEM을 제출한 것 이외에 일치를 위해서 밴쿠버 회의가 시도한 또 다른 제안은 “결정을 내리고 권위있게 가르치는 공통된 방식에 합의하기 위한 교회의 공통된 추구”를 더욱더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밴쿠버 보고서, 「생명을 위한 모임」, 50면).
BEM 문서는 우리에게 권위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을 제기한다. 교회 안에서 권위와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과거의 교회에서 그리고 현재 교회의 요구에 부응해서 직무의 발전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결정적인 권위의 특성은 무엇이며 이 권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관련되는 것은 BEM에 표현된 대로 삼중 직무와 그 기능에 대한 명확한 이해이다. 예를 들어 BEM 본문에서도 제기되었듯이 이 삼중 직무가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근거한 것으로서 교회의 본질적 구성 요소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교회 일치 운동을 위하여 필요한 것인가? 무슨 권위로, 어떻게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인가?
주교직 계승과 관련하여 그것이 교회 안에서 지속성과 일치의 ‘표징’이라고 말할 때(“직무”, 38항), 여기서 ‘표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품을 통한 주교직 계승의 교회론적 의미는 무엇인가? 보편 사제직과 성품 사제직 사이의 명확한 차이와 관계는 무엇인가? 성직자 권위의 교회론적 차원은 무엇인가? 직무 인식의 문제가 지닌 기본적인 교회론 측면들에 대하여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품 직무의 인정과 교회 공동체의 회중적 특성은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교회 안의 보편 직무에 관한 문제도 탐구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들이 무슨 권위에 입각해서 결정되는가?
우리는 신앙직제위원회가 앞서 언급한 밴쿠버 모임의 제안을 수용하여 교회 안의 권위 문제를 연구하도록 당부하고자 한다. 교회 안의 권위의 성격은 교회 일치 운동의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III. BEM과 교회의 신앙
우리는 이제 “여러 시대에 걸친 교회의 신앙”(서문)에 대한 관계 안에서 이 문서를 더 개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서에서 우리는 어려운 점도 지적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긍정하고 있다.
가. 세례
1. 전체 평가
우리는 세례에 대한 본문이 가톨릭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선포한 사도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본문은 세례에 대한 신약성경의 주요 가르침을 균형 있게 묘사한다. 초기 교회의 증언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는 셈이다. 본문은 세례에 관한 모든 주요 교리 문제들을 낱낱이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교리 문제들이 세례성사의 이해를 증진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그리고 서로 다른 해결책들이 어떠한 긍정적인 가치들을 도출시켰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은 몇 가지 형태의 전례 거행이 지닐 수 있는 규범적 효력과 사목적 실천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본문은 일치운동 차원 안에서, 신학의 체계적 방법으로 세례에 대한 그리스도교 이해의 발전상을 설명한다. 세례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다루면서 본문은 그 문체와 내용 둘 다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과 교황 바오로 6세가 반포한 「그리스도교 입문 예식서」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6항; 교회 헌장, 4.10항; 일치 교령, 22항; 그리스도교 입문 총지침, 1-6항; 어른 입교 예식서, 8항; 유아 세례 예식, 2-3항 참조).
교회의 신앙은 다음과 같은 항목에 잘 나타나 있다.
ㄱ. 세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이며 활동으로 고백된다(1.7.10항). 삼위일체 신앙 덕분에 본문은 세례의 그리스도 중심성과 세례 안에서 성령의 역할을 심도있게 다룬다(4.5.7.14항).
ㄴ. 세례의 거행은 교회를 통하여 당신 나라로 모든 이들을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이며 그리스도의 사명은 이 계획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계속된다(1.7.10항).
ㄷ. 세례는 성사적 실재이다. 본문은 세례를 성사라고 부른다(23항; 13항 해설). 그러나 본문은 성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사실 이 용어 자체는 그 사용을 둘러싸고 얽혀 있는 복잡한 역사 때문에 여러 교회 간 대화에서 상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성사라는 용어가 표현해 온 세례의 근본 특성들을 확인함으로써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세례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가 거행하는(12.22.23항), 일정한 예식 절차를 지닌(17.20항), 하나의 표징이다(2.18항).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시작하신 새 생명에 대한(2.3.4항) 교회의 신앙을 표현하는 표징(12항)이다. 또한 그것은 이 생명에 동참하게 해 주시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표현하는 표징이다(5항).
-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과 성령의 은총은 둘 다 세례를 통하여 의미를 얻고 그 효력이 발휘된다(14항).
- 효과적인 표징인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다(1항).
- 세례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응답이다(8항). 세례가 표현하고 제공하는 선물은 죄의 정화와 극복(2.3항), 회개, 용서, 의화(3.4항), 그리스도 안에 동화(6항), 성령께서 그 원천이요 인장인(5항) 윤리적 성화(4항), 남녀 모두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함(5항) 등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 이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자신들이 받은 완전한 상속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5항). 우리의 응답은 신앙(8항), 죄의 고백과 회개(4항), 변화시키는 은총의 힘을 얻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평생의 윤리적 노력(9항), 천상에서처럼 지상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도록 일하는 것(7.10항)이다.
- 세례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로 만들면서 우리 서로를 하나로 만들고 또한 우리를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교회와 결합”되게 한다(6항). 세례는 우리가 이 공동 친교를 누리게 되었다는 표징이며 인장이고(6항) 반복될 수 없는 행위이다(13항).
2. 개별 논평
세례의 제정
이 문서는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제정하셨다고 증언하는 대목에서 근본 진리를 신중하게 밝히고 있다. 세례 예식 가운데 상징화되고 있는 실재는 그리스도 자신의 실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고 새로운 계약을 맺도록 부름 받은 이들은 그분께서 명령하신 방식대로 그분을 받아 모셨다. 세례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것이었다는 사실은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사도의 증언과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드러난다.
세례의 의미
세례는 사람들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교회와”(6항) 일치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시킨다. 이것은 본문에서 잘 설명된다. 그러나 문서는 세례 받는 사람이 갈라진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정한 교회의 친교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더구나 본문이 서로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대상으로 하므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킴으로써 세례는 그들을 분열시킨 어떤 것보다 더 깊은 유대를 그들 사이에 확립시킨다고 올바르게 강조하고 있다. 본문은 하나의 세례와 분열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고, 분열을 극복하고 세례의 친교를 가시적으로 드러낼 것을(6항) 우리에게 권유한다.
본문이 “온 삶을 포함하고, 모든 나라로 확대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든 언어로 고백할 날을 미리 앞당기는 세례의 역동성”(7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본문은 세례와 온 인류 구원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 문제는 또한 구원을 위한 교회의 필요성과 연관된다. 본문이 세례의 의미만을 언급하고 전체적인 구원 계획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 때문에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본문은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 문제도 명백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보다 깊은 공동 연구가 필요하다.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 문제는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원죄 교리의 발전과 연결된다. 본문은 3항에서(“세례로 그리스도인들은 … 자유롭다”) 원죄 교리에 대한 실재를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본문은 다른 대목들에서처럼 세례가 죄를 없앤다고 분명히 밝히지만 원죄의 교리가 지적하는 것처럼 모든 이가 죄인인지 아닌지 그리고 왜 모두 죄인이 되는지에 대한 문제는 거론하려 하지 않는다.
이 문서처럼 의견을 수렴해 놓은 글에서 신앙직제위원회가 원죄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린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원죄 교리에 담긴 의미는 인간의 보편적 죄, 구원의 보편적 필요성, 보편적 구원자로서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을 신앙 안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그 견고한 뿌리를 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고(예를 들면 로마 5장), 교부 시대에 이미 형태를 갖추었다. 그것은 세례의 교리와 실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표현하는 교회의 신앙이 본문 안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죄 교리가 그 호칭과 내용에서 세례의 의미와 효력에 대한 토의 과정 안에 명백하게 삽입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결합됨’(6항)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본문에서 “세례는 우리가 함께 제자가 되었다는 표징이며 인장”이라고 말한다. 5항에서도 세례 받은 이들이 받는 인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견해로는 여기서 말하는 ‘인장’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인장의 완전한 의미는 무엇인가? 인장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인장’의 표상은 특별히 세례 받는 이에게 십자성호를 그으며 도유하는 전례 관행과 연관되는 것을 볼 때 이미 교부 시대에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관련하여 인용된 부분에서 이 문서가 교부 시대의 이러한 발전에 대하여 시사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교부 시대의 이러한 발전은 세례의 성사성에 대한 교회의 성찰에서, 특히 라틴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왜 세례가 반복될 수 없는지, 세례 받는 이가 합당한 자세를 갖추지 못한 채 성화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때에도 어떻게 참 성사가 될 수 있는지, 세례가 어떻게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모아들이는지, 그리고 교회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공동체 안에서 받은 세례가 어떻게 참 세례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들은 세례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들이다. 그런데도 본문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인장에 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통찰에서 발전한 세례 인호의 신학은 이 문제들을 정식으로 제기하고 그 해답을 시도한다. 이러한 신학이 교부 전승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일치운동의 차원에서 재발견한다면 우리는 세례에 관한 리마 문서가 풍요로워지리라고 믿는다.
세례와 신앙
8-10항에서는 세례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앞에서 우리 인간이 어떤 응답을 드려야 할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 속에는 은총의 심오한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리하여 본문은 심오한 세례의 영성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한편으로 본문은 하느님의 구원의 선물이 세례 안에서 구체화되고(포함되고) 공표된다(표상된다)고 확언한다. 다른 한편으로 본문은 세례 안에서 부여되는 이 은총이 신앙 안에서, 성덕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 대한 배려 안에서 일깨워지고 받아들여진다고 확언한다. 이 은총은 성령의 활동이다. 그것은 베풀어지는 것이고, 믿음과 사랑과 희망 안에서 곧 “하느님의 새 창조가 드러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에 대한 희망 안에서”(9항) 세례 받은 이들 사이에 친교가 생겨나게 한다. 그러나 이 대목들 가운데서 교회에 관한 언급과 특히 교회의 역할을 묘사하고자 사용한 ‘배경’이라는 말은(10항) 세례 은총의 교회론 차원을 표현하는 데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세례와 예식
‘신자 세례와 유아 세례’에 관한 부분에서 우리는 유아 세례의 중요성을 확신하는 사람들과 어른 신자 세례만을 유효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믿음을 동시에 수용하려는 데서 오는 본문 구성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앞에서 원죄, 은총 등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BEM 안에서 이 두 입장 사이에 공통분모를 명확히 밝히고자 한 신앙직제위원회의 노력을 치하한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 이 문제는 여전히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다룰 문제는 예식에 관련된 문제이다. 교회의 성사 생활에서 예식은 신앙을 표현하고 신앙도 예식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심화된다. 교회의 항구한 예식 거행은 유아 세례를 정당화하는 근본 요인이 된다. 동시에 교회의 신앙은 초기부터 유아 세례의 관행에 반대하는 이들이 제기하는 어려운 문제들에 응답하고 그것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왔다.
일차적으로는 어른 신자 세례에서지만 유아 세례에서도 신앙 고백이 세례의 필수 조건이라는 교리는 전례와 사목 관행에 근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본문에 잘 나와 있다. 특별히 세례의 실재가 한편으로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충실하심”(12항)과 “신앙 안의 모든 삶의 토대인 하느님의 충실하심”(12항)을 통하여 보증 받고, 또 다른 한편으로 언제나 공동체의 신앙인(12항)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보증 받는지에 대한 본문의 설명은 매우 훌륭하다. 본문은 세례 때에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하는 이들의 세례에서나 장차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은 다음 신앙 고백을 하게 될 이들의 세례에서나 두 경우 다 이러한 보증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 준다. 후자의 신앙은 그들에게 부여된 “복음의 약속과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12항 해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신자 세례와 유아 세례”라는 표현은 해설이 필요하다.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고 신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따라서 ‘유아’와 ‘신자’를 구별하는 본문의 내용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본문이 세례를 어른 신자 세례와 유아 세례로 불렀더라면 한결 나았을 것이다.
유아 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예식과 믿음은 본문에 이미 언급된 세례에 관한 신앙의 몇 가지 근본적인 확신에서 나온다. 세례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은총이다(1항 참조). 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구원 신비에 동참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새 생활이 시작된다(3항 참조). 유아들은 원죄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에 동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교 교육을 통하여 신앙고백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이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16항에 나오는 “무분별한 세례”에 대한 염려는 유아 세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에서 나온 것 같다. 그들은 유아 세례가 세례 행위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양 마치 ‘주술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거행되어 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에는 유아 세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뿐 아니라 그 다음에 따라오는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해서도 진지한 사목적 책임이 있다. 부모들이나 보호자들에게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그리스도께 성숙하게 투신할 수 있도록 올바로 교육시킬 중대한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은 세례를 통하여 유아를 신자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교회나 공동체, 그리고 어른 신자 세례만을 거행하는 교회나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극복하는 일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세례-도유-견진’에 대하여 논의하는 14항은 수세기에 걸쳐 발전되어 온 그리스도교 입교에서 성령의 선물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잘 서술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우리 교회가 견진에 관한 전례와 신학과 사목 실천을 쇄신하려고 거쳐 온 단계들이 입증하듯이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한 신학적 발전 과정을 내포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유나 견진으로 불리는 분명한 성사 예식은 교회의 신앙 안에서 규범적 발전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다. 성령의 은총은 세례에서 받지만, 그러한 오순절 은총의 일부 측면들은 성유의 도유와 안수 기도를 하는 그리스도교 입교 전례에서 효과적으로 상징화되었다. 이러한 측면들 가운데에는 증언하는 힘과 시련에도 굳건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임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포함된다. 이들 중 몇은 이미 본문의 5항에 언급되었다. 그것들을 여기서 다시 상기해 봄으로써 가톨릭 교회가 도유 또는 견진을 세례와 구별되는 성사라고 믿는 이유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돕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성사 안에서 성령의 특별하고 유일한 은총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교 입교 전례의 과정에 속하는 이 성사는 그 자체로서 뚜렷하게 교회가 거행하는 하나의 성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되는 세례가 그 본성상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 나눔을 지향”(14항 해설 (나); 일치 교령, 22항 참조)한다는 발언에 동의한다. 이 진리는 본문에서 더 많이 다루어졌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세례의 특정 측면들, 특별히 세례의 교회론적 차원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례로 시작되는 그리스도교 입교는 교회의 완전한 실재를 내포하고 나타내는 성사인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완성된다.
우리는 세례가 계속 재확인되어야 한다는 14항 해설 (다)에 동의한다. 우리의 전례서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성찬은 세례를 재확인하면서 또한 세례를 완성한다. 왜냐하면 성찬은 세례가 지향하는 생명의 충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견진을 입교 과정 안에서 세례 다음의 또 다른 단계로, 따라서 성찬 안에서 완전해지는 그 생명을 성장시키는 데에 고유한 역할을 하는 어떤 것으로 여긴다.
세례의 거행
세례의 거행에 대하여 본문이 언급하는 이 부분은 전례적으로 풍부하고, 그 거행과 관련된 모든 전통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들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분명 상호 세례 인정의 과정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례의 거행을 가능한 한 복음화 대상이 되는 이들의 문화에 동화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21항 해설 (가)에 나타난 염려에 동의한다. 21항 해설(다)에 언급된 관행에 관하여 우리는 다만 물의 사용이 세례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믿는 우리의 견해를 피력할 뿐이다. 실제적인 문제로 우리는 21항 해설 (나)의 판단에 대하여 의아해 한다. 무슨 근거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여러 거대한 다수 교회들에서 유아 세례는 흔히 명백하게 무분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가?
결론적으로 세례에 관한 본문 안에서 우리는 많은 부분에 동의하는 반면 신앙직제위원회에서 앞으로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도 지적한다.
나. 성 찬
1. 전체 평가
가톨릭 교회는 성찬에 대한 본문의 발언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도 신앙, 곧 그 문서에서 말하듯이 여러 시대에 걸친 교회의 신앙의 이해와 실천과 부합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특별히 다음 사항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ㄱ. 본문은 성찬의 의미와 그 거행 형태를 해석하기 위한 원전으로 성경과 성전을 채택한다. 또한 제일천년기의 전통적인 전례와 교부 신학을 중요한 준거로 삼는다.
ㄴ. 성찬에 대한 설명은 신앙의 내용에 부합된다. 그것은 성찬의 신비를 여러 방식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실제적인 현존과 십자가 위의 희생제사와 동일시하면서 그리스도론 차원을 강하게 반영한다.
ㄷ. 근본 요소들을 서로의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질서 있게 배열한 문서의 구조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성찬의 신비에 대한 설명은 전통적인 성찬 전례의 흐름에 따라 이들 전례의 전통적 기도와 상징적 행위들의 내용을 강조하는 성찬 신학을 포함시킨다. 본문은 성찬의 신비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교부들이 한 말을 끌어들인다.
-본문은 삼위일체 차원을 강하게 강조한다. 성찬의 원천과 목적을 삼위일체와 동일시한다.
-본문은 감사기도 안에서 교회의 행위에 담긴 내용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기본 요소들도 포함시킨다. 성부께 대한 감사, 성찬 제정과 십자가 희생제사에 대한 기념,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세상을 위하여 간구함,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고 공동체의 성화가 이루어지도록 빵과 포도주와 공동체 위에 성령이 내리시기를 청원함, 새 계약의 식사.
ㄹ. 본문에 종말론적 차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성찬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18항)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과 궁극적인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6항)으로 풀이된다. 성찬은 하느님 나라의 전망과(22항) 세상의 쇄신(23항)을 연다.
ㅁ. 성찬례는 교회 예배의 중심적인 행위로 묘사된다(1항). 이 때문에 본문은 성찬례를 자주 거행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30항).
ㅂ. 본문은 중대한 교회론적 차원들(8항)과 선교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제시한다.
2. 개별 논평
성찬의 제정
성찬 제정에 대한 설명은 나자렛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밝히고 이를 부활하신 주님과 연결시킨다. 이 점에서 본문은 성찬이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하신 일을 단순히 주관적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 연결된다는 것을 밝힌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현존(올바로 이해된)과 성찬 제정의 말씀과 성령의 힘을 바탕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교회의 음식이 되신다.
본문은 최후의 만찬과 성찬 사이의 끈을 부각시킨다. 성찬을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자 교회가 ‘당신을 기억하고 만나도록’ 하는 ‘성사적 식사’,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적 표징들로 우리에게 전해 주는 성사적 식사’라고 보는 본문의 견해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성찬의 의미
성찬례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성사이다.”고 한 본문의 정의는 성찬 신비의 두 가지 측면, 곧 성령을 통하여 유효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과 이 현존으로 이루어지는 선물을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선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는 친교를 통하여 받게 되는 ‘구원’의 선물이다. 본문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의 친교를 허락하신다.”고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식탁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선물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선물이 바로 그분 자신이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함을 분명하게 가리키는 성경의 용어(1코린 10,16; 요한 6,52-56 참조)가 여기서 사용되어야 한다.
성찬례와 죄의 용서 사이의 관계는 마태오 복음 26장 28절에 근거한다. 그러나 성찬례를 통한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먼저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이 말은 죄인들이 먼저 화해하여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는 말이다(1코린 11,28 참조).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사전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이해한다.
‘성부께 드리는 감사인 성찬’의 대목에서 우리는 감사기도 안에서 바치는 감사의 폭과 깊이에 대한 설명이 고전 전례 전통의 풍요로움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유다식 기도(berakah)와 감사기도 사이의 역사적 끈이 어떠하든 간에 감사기도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감사제’(Eucharist)라는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곧 이는 그리스도-사건의 기념이며 그 사건에 기초를 둔 구원 경륜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에 감사하는 것을 뜻한다.
교회의 감사는 한 분이신 대사제 안에 기초를 둔다. “이 찬미의 제사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4항). 이 말은 감사기도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감사라고 증언하는 감사기도 제1양식을 상기시킨다. 교회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 사이의 관계는, 하느님의 모든 은혜에 대한 합당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교회가 성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감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신을 그 감사에 연결시킨다고 증언함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이해하는 바로는 감사제로서 성찬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봉헌하시면서 아버지께 감사를 드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감사를 의미한다.
본문 4항에는 성찬례에서 세상이 현존하는 자리, 그리고 “신앙과 감사 안에서 아버지께 봉헌하는” “땅의 산물”로서 빵과 포도주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삶으로 마련하신 그 예물과 교회의 성사적 행위를 동일시하려면 빵과 포도주의 예물들, 곧 지금 이 자리에서 거행되는 것의 가시적 표현이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성사적 표징들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인 성찬례’라고 표현한 본문의 견해는 매우 훌륭하다. 기념에 대한 성경의 개념이 정확하게 적용되고 있다. 성찬은 과거 사건의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오히려 기념은 ‘모든 인간을 위하여’ 성찬례 거행 안에서 그리고 그 거행을 통하여 십자가의 희생제사가 효과적이고 생생하게 현존한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다. 성찬과 구약 전례들 사이에 함축되어 있는 유비는 “하느님 백성이 성찬 전례를 거행할 때 하느님 활동이 바로 그 자리에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념제 거행과 성찬례 사이의 유비를 강조하는 본문의 설명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5-8항에 표현되어 있다.
십자가 희생제사와 성찬례 사이의 관계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한다. 오로지 성찬의 희생제사는 십자가의 희생제사가 자체의 구원의 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발휘하기 위하여 재현되는 자리이다.
성찬례 안에서 드러나는 십자가 희생제사의 현재적 유효성은 당신 자신의 구원 사업과 분리될 수 없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에 그 바탕을 둔다(6항). 그분께서는 당신과 친교를 이루어 주시고자 미래에서 오심으로써 ‘기념’ 안에 현존(기념되는 인격적 현존)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재림과 궁극적인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식탁의 주인인 동시에 식탁의 선물이라는 전통 믿음이 여기에서 드러나고, 동시에 성찬례의 중요한 교회론적 요소들도 언급된다. 성찬과 구원 경륜 사이에 수립된 관계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분 안에 축복된 이들을 통하여 이미 완전하게 실현된다.
성찬의 신비스러운 내용과 교회의 활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간결하게 묘사된다(7항). 그것은 성사 거행의 삼중 차원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상기시킨다. “교회가 기쁘게 거행하는 이 기념 안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활동하시기” 때문에, 성찬은 “지나간 것만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하신 행위”(현재의 실재적인 참여)와 “약속들”(미래의 영광을 앞당김)을 “교회가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찬 교리의 교회론적 차원은 중개에 대한 본문의 신학에 표현된다. “성찬례는 … 살아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중개하시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의 성사이다. … 교회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전구 기도를 바친다”(8항). 여기서 교회는 영적으로 그리고 성사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기념적이고 능동적인 현존과 결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중개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8항 해설 참조).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성찬례에서이다. 성찬 거행은 언제나 전체 교회와 관련되어 있으며, 전체 교회는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성찬 거행에 관련되어 있다”(19항). 이 발언에는 교회와 성찬의 신비에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이해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성찬의 교회론에 부합하는 것이다.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교회를 구현한다. 교회의 감사와 전구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중개 안에 교회의 전구가 포함되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8항). 이는 성찬례가 머리이시며 몸이신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아버지께 바치는 봉헌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가톨릭의 가르침과 연관된다.
그러나 여러 부분(8항; 8항 해설; 9항)에서 전구의 개념은 가톨릭적인 의미에서 성찬의 희생제사 성격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찬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의 성사”(8항)라는 발언은 십자가의 역사적 희생제사와 성찬례 거행 사이의 관계를 지적하는 말이다. 십자가의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의 현재적 유효성을 이어주는 끈은 대사제이며 ‘중개자’로 세워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의 ‘사건들’을 시간의 흐름에 매여 되풀이되거나 ‘연장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대사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므로, 십자가에 바쳐진 그분의 자기 봉헌은 ‘영원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의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은 단 한 번 영원히 봉헌된 주님의 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의 지속성을 단순히 ‘중개’라는 용어로만 표현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실재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성찬례 안에서 교회의 활동을 감사와 전구로 보는 본문의 설명도 성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자기 봉헌을 언급함으로써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자기 봉헌’에 일치하여 참석자들도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본문 ‘II. 성찬의 의미’의 9,10,11항들을 읽어 보면 거기에 자기 봉헌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8항 해설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가 성찬례를 속죄의 희생제사로 언급하는 것을 중개의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8항 해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할을 ‘십자가의 속죄의 효력과 결부시켜’, “중개자”로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전통적인 기념-봉헌의 기도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교회가 드리는 단 하나의 합당한 희생제사의 봉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기도는 우리가 성찬례를 통하여 아버지께 스스로를 봉헌하시는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은 9항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그분과 함께 고통 받을 수 있는 … 힘을 의화된 죄인인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은 성찬에 관하여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영적 예배에 관하여 본문에서 말하는 바(10항)를 보다 명백하고 직선적으로 말하기를 선호한다. 그런데 본문은 또다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권능을 ‘중개’라는 표현으로만 설명한다(9항). 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는 성화시키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더 고려하는 것이 나았으리라고 본다(앞의 8항에 대한 논평 참조).
말씀 선포와 성찬례 거행의 관계에 대한 설명(12항)은 옳다. 이 설명은 말씀의 선포를 성찬례와 혼동시키지 않고, 오히려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단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에 관한 본문의 설명을 받아들인다. 부활하신 주님과 성찬의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대목들은 성경의 증언에 호소할 뿐 아니라(13항 참조: “성찬례 제정 때에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성찬례 거행의 핵심을 이룬다.”), 그 요소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기를 청하는 전례의 성령 청원 기도에도 호소한다(14-15항). 본문의 설명이 교부들의 가르침에 나타난 성령 청원 신학이 담고 있는 의미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으면 이는 가톨릭 교회의 신앙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성찬례 거행 안에서 성찬 제정의 말씀을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밝혀야 하겠다.
“성찬례 제정 때에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13항)를 교회가 상기하는 일의 중요성은 진정한 교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성찬례 거행의 핵심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영원히 이루셨던 그 일을 선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 활동에 연결시키신다. 그분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요소들을 당신 자신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 안에 두신다. 이 요소들은 그분의 구원하시는 현존, 곧 ‘그분의 몸과 피의 성사’를 실현시키는 표징들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 자신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신다.
그리스도의 ‘고유한’ 현존 사실과 그 방식이 “개인의 신앙에 의존하지는 않는다.”고 한 본문의 발언은 맞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신앙은 본문에서 한 것보다 더 밀접하게 성찬의 희생제사적 모습을 몸과 피의 성사에 연결시킨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는 내 몸이다. …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분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몸 …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릴 피”라고 덧붙이셨다. 처음에 그리스도께서는 성찬 안에서, 인류 구원을 실현시키는 희생제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성사적으로 봉헌하셨다. 이제 그분께서는 신자들과 맺는 성사적 친교의 수단으로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심으로써, 신자들이 아버지께 바치는 그분의 자기 봉헌에 그들 스스로를 결합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전례의 희생제사적 행위 안에서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한에서만, 성찬의 요소들은 영성체를 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그분의 자기 봉헌의 성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본문이 비록 ‘그리스도의 희생제사’(5항)의 ‘현실적 유효성’(5항)과 이 희생제사의 “살아 있고 효과적인 표징”(5항)과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의 성사”(8항)로서 성찬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성찬례가 그 자체로서 참다운 희생제사, 곧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대한 기념임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13항 해설에는 성찬 요소들의 변화를 ‘믿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빵과 포도주의 표징에 분명히” 연관시키지 않는 교회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문장에서 본문은 ‘믿는다’는 말을 상대화시키는 듯하다. 본문은 “본문 자체에서 표현하고자 한 일치점들 안에서 이러한 차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 여부”를 묻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의견 수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가톨릭 교리에서 그 요소들의 변화는 신앙의 문제이므로 이 본질적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가능한 새로운 신학적 설명만을 기대할 뿐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체 변화’라는 말의 내용은 모호함 없이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신앙의 핵심 신비이고 따라서 그들은 모호한 표현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본문에 설명된 차이들은 본문 자체에서 표현하고자 한 일치점들 안에서 수용될 수 없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앞으로 더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령 청원인 성찬례’(14-18항)의 대목은 성령론의 요소를 보다 더 강조하면서 성찬의 신비와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다. 본문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례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역할을 설명한다. 성찬례의 모든 행위는 성령의 활동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성령 청원’의 특성을 갖는다는 설명(16항)은 합당하다. 이는 성찬이 처음부터 거룩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설명이다.
본문에 따르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적 표징이 된다.”(15항)고 한다. 이는 성사적 표징(sacramentum tantum, 곧 그 성사적 의미에 따라)으로서 빵과 포도주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그러나 여기서 빵과 포도주가 성사적 표징이 된다는 생각은 성찬례 안에서 일어나는 본질적인 변화에 연결되는데 이 변화 안에서 표시하는 실재와 표시되는 실재 사이에 존재의 일치가 실현된다. 성령의 성화 작용에 대한 본문의 언급은 본질적인 변화의 방향에 대한 설명에 비중을 실어준다. 그러나 본문은 성찬례 안에서 그 예물들이 의미 변화를 겪는다는 생각도 받아들인다. 이 의미 변화는 표시하는 실재와 표시되는 실재 사이에 정립되어 있는 외적인 관계를 파괴시키지 않으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생각은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 이 문제는 실재적 현존에 관한 중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신앙의 전망에서 좀 더 확실한 설명이 필요하다.
‘신자들의 친교인 성찬례’의 대목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교회론적 관점을 표현한다. “교회 생활을 풍요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맺는 성찬의 친교는 또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맺는 친교이다”(19항).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성찬례 참여의 윤리적 의미를 끌어내며 교회와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분열상에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와 동시에 해설 19는 “어느 한 교회에서 세례 받은 신자와 그들의 성직자들이 성찬례에 참여하고 그 거행을 집전할 수 있는 권리를 다른 성찬 모임의 집전자나 구성원이 문제 삼을” 때에 “성찬례의 보편성은 그만큼 흐려진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그러나 성찬의 보편성은 교회의 보편성과 다른 것이 아니다. 보편성은 개방성을 포함하지만, 이 개방성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 전체와 그 결과를 받아들임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문제들은(해설 19에서) 결국 교회론 안에서 합당한 답변을 구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식사인 성찬례’의 설명은 세례와 성찬례 사이의 유대에 관한 가치 있는 해설을 제시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의화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며 성찬례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는다(일치 교령, 22항 참조). 성찬례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의 축복받은 자들과 종말론적 잔치를 기쁘게 나누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면서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재현하는 것이다.
본문은 성찬례의 종말론적 차원이 어떻게 교회의 선교 사명에 기초를 이루는지 상기시킨다. 성찬례와 선교의 유대는 성찬례와 생활의 연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설명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성사적 기초를 지닌다. 성찬을 통하여 교회는 자신의 이름(그리스도의 몸, 24항)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세상에 확장시키는 선교 사명까지도 부여 받는다.
성찬례 거행
전통적인 성찬 전례 거행의 구성 요소들에 관한 본문의 설명은 대체로 합당하다. 그 요소들의 목록에는 교회의 ‘신앙의 법’으로 수렴될 수 있는 ‘기도의 법’이 포함된다. 그러나 가톨릭 교리의 관점에서 몇 가지 유보하거나 의문시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첫째, “용서의 선언” 대신 그리스도인들의 삶 안에서 진정한 죄의 용서와 관련된 요소를 더 정확하게 제시하는 구절이 삽입되었으면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봉헌한다는 교회의 지향을 표명하여야 한다. “(교회를 세운 구원과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이라는 위대한 행위들에 대한) 기념” 항목 안에 이것이 암시되어 있는가? 아무튼 이를 좀 더 명확히 밝혀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와 교회 각 구성원과 친교를 이루어 먹고 마심”이라는 표현은 약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성사적 참여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이루는 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일 사이의 구별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성찬 거행의 가변적 요소들과 불변적 요소들에 대한 문제(28항 해설)를 교회의 책임에 일임한 것은 바람직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리라는 보증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 성찬례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은 아주 잘 되어 있다(29항). 그러나 성찬 집전자에 대한 문제는 직무에 관한 본문에서 다루는 것이 더 좋겠다. 성찬례를 주재하는 사람은 사도 계승 안에서 성사적으로 서품된 사제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다.
본문은 “성찬례 거행 후에도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속 현존하신다.”고 주장하는 교회들과, “거행 행위 자체와 영성체 행위 중에 빵과 포도주를 섭취할 것을 주로 강조”하는 교회들을 구별한다(32항). 가톨릭 교회는 전자에 동의하고 후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 본문의 견해에도 동의한다. 다만 가톨릭 교회는 성찬 거행 이후에 실재적 현존의 지속성을 부인하는 교회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만일 성찬 이후에 실재적 현존이 계속되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실재적 현존과 변화의 실재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는지 질문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축성된 요소들을 보존하는 오랜 관행에 대하여 보다 깊은 교회론적이고 성사적이며 종말론적인 근거를 제시했더라면 유익하였을 것이다. 본문은 “요소들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병자 영성체를 위하여 사용할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섭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는, 합당하게 수행되는 성찬 예배의 다양한 형태들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현존을 인정하는 합법적이고 상찬할 만한 방법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찬의 공유와 관련하여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정책들이 다르다. 우리가 볼 때 성찬의 공유에 관한 문제는(33항) 교회적 차원을 지니므로 직무를 비롯한 교회의 신비에 대한 이해와 별도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 고백 안에서의 일치야말로 교회 친교의 핵심이라고 본다. 성찬 거행은 그 본성상 교회의 신앙 고백이므로, 가톨릭 교회가 현재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성찬례를 거행할 수 없다. 우리의 견해로는 어떤 교회의 신앙에 온전히 동참하지 않으면서 그 교회의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찬에 관한 본문 안에서 우리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신앙직제위원회의 지속적인 과정에서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는 분야들도 지적하였다.
다. 직 무
1. 전체 평가
직무는 교회 일치 대화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복잡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앙직제위원회에 참여하는 교회들이나 교회 공동체들의 신앙과 관행 어디에서도 이 문서에서 성찰하고 언급한 그대로 직무에 대하여 이해하고 경험하지 못해 보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문서의 직무에 관한 본문은 당연히 신앙직제위원회 안에 현존하는 다양한 견해들과 실천들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다. 더 나아가 교회들과 공동체들의 서로 다른 직무 구조들은 상이한 신학들 때문에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각 교회들 나름대로의 다양한 역사적 내지 사회적 발전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아 왔다. 직무에 대한 교회 일치 대화가 복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신앙직제위원회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룩한 업적에 감사하고, 또 특별히 위원회의 발언이 “여러 시대에 걸친 교회의 신앙”으로 우리가 인정하는 그 큰 줄기와 같은 방향이라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특별히 다음 사항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ㄱ. 보다 폭넓은 교회 일치 운동의 전망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을 반영하는 용어의 사용.
ㄴ. 본문의 중요한 삼위일체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이며 교회론적인 측면.
ㄷ.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더욱 광범위한 신학적이고 교회론적 전망 안에 성품 직무를 포함시킴. 이 구원 사업 안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공동체와 개별 구성원들은 다양하고 보완적인 은총들을 받는 것이다(I. 하느님의 온 백성이 지닌 소명).
ㄹ. 성품 직무를 열두 사도의 사명과 교회의 근본적인 사도성에 끊임없이 연결시킴.
ㅁ. 성품 직무를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의 결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교회의 위임의 결과로 조리 있게 설명함.
ㅂ. 여러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성사적 이해도 빼놓지 않으며 성품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설명함.
ㅅ. 비록 구체적으로 다른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는 기능상 임무들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주교, 신부, 부제의 삼중 직무에 대하여 사려 깊게 설명함(22항).
ㅇ. 직무의 책임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성사를 집전하고 예배와 선교와 사목을 통하여 공동체 생활을 인도하는 것”으로 적절하게 설명함(13항).
ㅈ. 직무에 대한 본문은 신학적 설명 그 이상임. 직무 수행에서 목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공동체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절이며 대사”(11항)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사목적 전망도 담고 있음.
우리는 본문에서 성품 직무가 고립된 채로 다루어지지 않고 더욱 넓은 교회론적 맥락 안에서, 곧 하느님 백성인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 교회의 단일성과 사도성과 보편성 그리고 한 지역 공동체로서 교회 실존과의 관계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신앙직제위원회가 성품 직무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교회론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 한 예로서 교회의 한 본질적인 차원이 불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차원은 성품 직무의 권위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차원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온 교회의 성사적 측면으로서 특별히 직무 안에서, 그 가르치는 임무, 성사 집전의 임무, 다스리는 임무 안에서 활발히 드러난다. 교회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또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약속에 언제나 끊임없이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직무 구조들이 그러한 성사적 차원에 참여한다. 나아가 교회 일치 대화에서는 교회와 교회 직무의 영적이고 성사적인 차원을 더욱 완전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전승의 권위
본문은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을 논거로 사용하여 그리스도 권위의 고유성과 사도들의 특별한 역할, 그리고 직무 수행에 필요한 정신을 드러낸다.
교회에는 언제나 특정한 권위나 책임을 맡은 이들이 있어왔다고 말하면서(9항), 본문은 그 기원이 되는 실질적인 형태를 성경에서 찾으려 할 때에 발생하는 어려움을 간과할 수 없었고(17항 해설; 19항; 22항; 40항 해설 참조) 역사적 근본주의를 피해야만 했다.
본문은 필연적으로 초기 교회 안에서 직무의 변천사를 다루어야 했다. 예를 들면, 성품 직무의 형태들의 변천(19-21항), 사도 직무의 계승(35-36항과 36항 해설), 사제직에 대한 이해 등이다. 본문은 자주 고증에 특별한 비중을 둔다. 이러한 접근의 목적은 주교직을 갖고 있지 않은 공동체들이 주교직을 교회의 연속성과 일치의 징표로 인정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고(38항) 또 아마도 그 징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53항 (나)). 후대에 역사의 어떤 위기 순간에 이루어진 교회 구조의 발전들은 이 문서에서는 초세기의 발전만큼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듯하다(19.22항). 사도 시대와 초세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역사적이고 비평적인 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신학적 무게도 지닌 것이다. 그러한 발전은 성령의 이끄심과 관련이 있다(19항).
기원과 ‘고증’에 주의를 기울인 것은 물론 많은 교회들의 관심에 부응하는 일이다. 그러나 문서의 이러한 접근은 사실의 진술에만 치우쳐 있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그러한 고증의 규범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아직 불완전하다. 다시 말해서, 이 문서는 현대 교회의 시대적 요구와 오늘날 교회 일치 상황과 관련하여서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러한 발전 과정을 식별하는 일에서 결정적인 권위가 하는 역할도 고려함으로써 더 완전한 문서가 되어야 한다.
2. 개별 논평
하느님의 온 백성이 지닌 소명
양자 간 대화들에서 나온 많은 문헌들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에도 일치하여 본문에서 성품 직무의 문제를 보다 폭넓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바람직하다. 본문은 하느님의 온 백성이 지닌 소명에 대한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인 짧은 성찰로 시작된다. 본문은 어떻게 인류 전체에 대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심의 전망 안에 이 소명이 자리하여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곧 이 소명은 하느님의 부르심,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 자유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힘 안에 자리하여야 한다. 바로 이러한 전망으로 이 문서는 특히 증언하고 봉사하여야 할 교회의 사명을 말하면서 교회 소명의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소명의 일부로서 공동체에 다양하고 상호 보완적인 은총과 은사들을 주시고(5항), 이러한 성령의 은사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직무의 배경이 된다. 우리는 직제 본문의 첫 부분에 언급된 하느님 백성의 소명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동의한다.
“하느님 뜻에 따라, 또 성령의 인도 아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려면 교회 생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여야 하는가?”(6항) 하는 질문은 정당하다. 하느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에 대한 언급은 교회 질서가 적어도 그 근본 구성에서만큼은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나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는 정확한 인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질문은, 다양하게 전개되는 하느님의 뜻을 누가 무슨 권위로 결정하고 식별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미결인 채로 남아 있는 한 결정적으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그러한 결정권을 행사할 직무로 위임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존재하는 권위의 문제는 직무와 관계 안에서 고찰하여야 한다.
교회와 성품 직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의 인도 아래 교회가 질서를 갖추는 수단 가운데 하나는 성품 직무의 존재를 통하여 하는 것이다. 13항에 나타난 성품 직무의 주요 책임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는 성품 직무의 사명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이해의 틀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직무가 이미 열두 사도의 사명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사명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은 사명 자체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우리는 이 문서가 성직자들을 두 가지 형태의 상호 보완적인 ‘대표’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 흐뭇하다. 곧 문서는 사절, 대사, 지도자, 교사, 목자인(11항) 그들을 하느님 백성의 대표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소개한다. 13항 해설에서 이러한 임무 수행에 대한 공동체의 참여와 관련하여 성품 직무의 특수성을 언급하며, “성품 직무는 공동체의 생활과 증언의 일치를 위한 중심을 마련하면서 이러한 기능을 대표적으로 수행한다.”(13항 해설)고 선언한다. ‘대표’의 개념은 교회들에 대한 신학적 이해 안에 뿌리를 둔 가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성품 직무가 원형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위하여 효과적이고 성사적인 실재가 되려면 일치된 견해를 표명하는 본문 안에서 이 개념이 좀 더 명확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 이 효과적이고 성사적인 실재를 통하여 사목자는 ‘그리스도의 자격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가톨릭 교회의 신앙에 따라 왜 그리스도를 인격적이고 성사적으로 대리하는 성직자가 성찬례를 주재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더욱 충실히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14항). 이러한 방식으로 “이 일치의 중심”으로서 성품 직무의 모습도 더욱 심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성찬례와 관련하여 8항; 13항 해설; 14항 해설).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서 한 사람에게 인장을 찍는 이러한 성사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성직자를 공동체에서 분리시키거나 그를 공동체보다 드높이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문서가 성품 직무와 공동체를 강하게 연결시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12항 참조). 성품 직무를 위한 특별한 역할은 아직 더 있다. 우리는 전통에 비추어 성직자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실재적이고 성사적인 현존을 어느 정도 인식하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현존이 다른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표지가 되는 것이다.
‘성품 직무와 권위’에 관한 부분은 두 항을 할애하여 성직자들이 권위를 행사할 때에 반드시 필요한 자세와 정신에 대하여 말한다. 성직자들은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에 따라 그분께서 하느님의 권위를 세상에 보여 주신 그대로 그들의 권위를 공동체 전체와 협력하여 행사하여야 한다고 한다(16항).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에는 이 권위의 교회론적 차원과 특성에 대하여 성찰하여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이 문서가 서품과 그 기능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교회 전승에 일치하여 합당하게 말하듯이 성직자의 권위는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받으시고, 서품 행위를 통하여 성령으로 이를 부여하시는”(15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
‘성품 직무와 사제직’을 고찰하며, 17항 해설은 신약성경과 교회 안에서 ‘사제’나 ‘사제직’이라는 말이 다르게 사용된다고 올바로 지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문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 모든 세례 받은 이의 왕답고 예언자다운 사제직, 그리고 성직자들의 사제직의 개념에 혼돈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 개념들은 ‘사제직/사제’의 용어들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오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본문은 이렇게 이 개념들을 비교하는 동시에 그 본질적인 차이점들도 지적한다.
이러한 본문의 발언은 중요하지만 더욱 명확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은 비록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각기 고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지만,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다(교회 헌장, 10항 참조).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신앙직제위원회가 더욱 깊은 연구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본문 17항에서 “성직자들을 ‘사제’라고 부르는” 적절한 이유들을 말하면서, ‘희생제사’의 실재가 본래 성품 사제직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세례 받은 이의 사제직과 명백한 관련이 있는 ‘희생제사’의 실재를 다루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어떤 성직자들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절이며 대사”로서 성찬례 거행을 집전하는 그 특수한 역할 때문에 사제로 불린다. 17항 해설에 나와 있는 성찬에 대한 언급은 그 항의 본문에 실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직무’가 미묘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한다(II. 다). 우리는 여성 서품을 실행하는 교회들의 체험이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 불가피한 도전이 된다는 것을 잘 안다. 동시에, 우리는 여성에게 성품 직무를 허용하는 문제에서 우리의 확신과 이해의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여러 신학 논쟁들이 전승의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 해석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는다(18항 해설). 여성 서품 허용의 문제에 대하여 본문은 “많은 교회들은 이와 관련한 교회의 전통들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8항)고 진술한다. 우리 견해로는 우리는 그것이 교회의 사도 전승에 속한다고 생각하므로 이를 바꿀 권위가 우리에게 없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어조의 차이는 또한 BEM에서 말하는 사도 전승에 대한 개념이 가톨릭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차이들이 특정 직무들을 인정하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차이가 교회 일치 운동의 맥락에서 성품 직무에 관하여 더욱 깊은 성찰을 하는 데에 편견으로 작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면 성령께서 한 교회의 통찰을 통하여 다른 교회에 말씀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게 된다”(54항).
성품 직무의 형태들
이 문서가 주교, 사제, 부제의 삼중 직무의 독특한 의미에 대하여 그토록 분명하게 동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교회 일치 운동의 미래를 위하여 중요한 일이다. 이 문서는 교회 직무 형태의 역사적 변천을 충분히 인식한 다음, 삼중 직무가 “초세기 교회 안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형태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22항)고 한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발전은 단순히 우연한 사건들의 결과 그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성령의 인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19.22항). 그리고 우리는 “삼중 직무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일치의 표현이며 일치에 이르는 수단이 된다.”(22항)고 표현된 그 희망에 확실히 동의한다. 이러한 언급은 여러 시대에 걸친 교회의 신앙과 직제의 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교회론적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곧 본문이 그러한 직무를 교회의 일치운동을 위하여 좋은 것으로만 보는지 아니면 교회의 권위가 식별해 온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뜻에 뿌리내린 교회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메시지 안에 포함된 제도적 표현으로서 삼중 직무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핵심과, 삼중 직무가 불가피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취하게 될 그 역사적인 형태와 형식과 조직을 구분해 보아야 한다. 교회 일치적 분별은 교회의 본질적인 구조에 속하는 것이 무엇이고 우연적인 사회 조직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에 필요하다. 상호 개방 안에서 그리고 상황이 요구하는 데에 따라 삼중 형태의 많은 공식적 측면들을 개선해야 한다(24항)는 권유는 받아들여야 한다.
성품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지침 원리들(26-27항), 주교, 사제, 부제의 기능(28-31항), 다양한 은사들(32-33항)에 대한 설명은 교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 안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갖가지 요소들과 결합된다. 이 요소들 안에서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교회의 관행을 인식할 수 있다.
본문은 주교직에 대하여 바르게 설명한다. 주교직은 “일치의 중심”(20항)이고, 몸의 일치를 표현하고 수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며(23항), 지역 차원에서 일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27항). 주교는 “교회 안에서 감독과 연속성과 일치의 대표 사목자들이다”(29항). 본문에서 “주교들은 자기 지역의 공동체를 더욱 넓은 교회에, 또한 보편 교회를 자기 공동체에 연결시켜 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주교직의 매우 전통적이고 본질적인 단체성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른 성품 직무들과 비교해 볼 때 독특한 방식으로, 주교들은 자신들의 인격 안에서 지역 교회를 대표하고 상징하며, 다른 교회들과 친교 안에서 자기 공동체를 보편 교회에 연결시킨다. 따라서 보편 공의회는 보편 교회의 대표적인 표상이 된다. 그 모임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주교단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에 따르면 로마 주교가 이 단체의 수장이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주교들의 가르치는 임무, 곧 교도권에 대한 명백한 표현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교도권은 이 문서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신앙직제위원회의 활동에서도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측면이다.
우리는 보편 교회에서 “일치의 중심”이라는 개별적인 표현에 관하여 숙고하는 일이 신앙직제위원회의 당면 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교회 안의 감독과 연속성과 일치를 위한 대표적인 봉사직에 대해서 성찰한다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숙고로 귀결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사도 전승의 계승
교회의 관행들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이 문서는 한편으로 교회의 사도성과 사도 전승을, 다른 한편으로 성품 직무의 합당한 계승(35항)과 더욱 특별하게는 그 한 형태인 주교직 계승(36항)을 다룬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문서는 이 문제를 더욱 폭넓은 교회론과 연결하고, 따로 고찰할 때에는 수용하기 힘들어 보이는 그 관행들에 대하여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사도 계승과 사도 전승의 연결은 합당한 일이다. 사도 전승은, 사도 신앙에 대한 증언, 복음 선포, 거행, 예식 등 안에 있는 “사도들의 교회의 항구한 특징들의 연속성”(34항)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36항에서처럼 “주교들의 계승은 복음과 공동체 생활의 전달과 더불어 교회의 사도 전승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에서 사도 전승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전체성 안에서 각자의 역할과 상호 연관에 대하여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하고 그저 나열하는 데에 만족한 것이 아닌가?
본문에 따르면, 주교 계승은 초세기 동안 “사도 신앙과 친교의 연속성에 이바지하고 이를 상징하며 수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36항 해설에 로마의 클레멘스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 대하여 언급). 오늘날, 심지어 주교직을 갖고 있지 않은 교회들이 “주교직 계승을 교회의 연속성과 일치의 보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징표로는 인정할”(38항) 수 있다. 오늘날 교회들이 “전체 교회 생활의 사도성의 징표로 주교 계승을 받아들일 의사를”(38항) 기꺼이 표현한다고 한다. 나아가 본문은 사도 교회와 연속성을 강화하고 심화하는 “주교직 계승의 징표를 회복할 필요”(53항 (나))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주교직 계승”이 표징의 차원에 속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곧 이 표징은 역사적으로 전달되는 모습을 통하여, 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도 교회에 뿌리를 두고 따라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도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의미심장하게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나 ‘표징/표현’의 의미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 초안의 ‘한 세례, 한 성찬, 상호 인정하는 직무’(34항)에서는 ‘효과적인 표징’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 말이 세세대대로 교회 건설을 위하여 이바지한 주교직 계승의 고유한 중요성을 더 잘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이 말은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 안에서 주교의 직무가 지닌 의미와 직결된다. 주교직은 다른 임무와 직무들에서 볼 수 있는 감독하는 임무 그 이상의 것이다. 주교는 바로 자신의 인격적 직무 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 교회를 대표한다. 그는 교회들의 친교 안에서 자기 지역 교회의 정당한 대변인이다. 동시에 주교는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대리자이다. 주교 서품을 통하여 그는 공동체 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며 판단하는 일을 위임받는다. 모든 다른 직무들은 주교직에 연결되고 그 관계 안에서만 기능을 발휘한다. 따라서 주교직은 일치의 성사적 표징이며 친교의 중심이다. 주교직 계승을 통하여, 주교는 시대적인 보편성 곧 세대를 가로지르는 교회의 지속성뿐만 아니라 각 세대 안의 생생한 친교를 구체화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현실적인 공동체는 주교의 인격적 표징을 통하여 사도적 기원, 그리고 그 가르침과 생활 방식과 연결된다.
그러한 전망에서 주교직 계승은, 우리가 그 안에서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보여 주시는 성실성의 표지를 읽을 수만 있다면, 마땅히 교회의 연속성과 일치의 보장(38항 참조)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각 개별 직무 소유자에게 충실하고 근면한 보증인이 될 책임을 부여한다.
서품
“교회는 구성원 가운데 일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청원과 안수를 통하여 직무로 서품한다.”(39항. 또한 7항 나); 41항; 52항 참조)고 언급할 때, 이 문서는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실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서품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이 문서는 서품의 세 가지 본질적인 차원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1. 서품은 “새 성직자가 성령의 권능을 받을 수 있게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이다”(42항). 2. 서품은 “성품 직무의 선물을 주시는 주님께서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징표이다”(43항). 그리고 3. 서품은 “서품된 사람이 받은 성령을 교회가 인정하는 것이며, 교회와 서품된 사람 모두 새로운 관계로 투신하는 것이다”(44항).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서품을 하나의 성사로 보는 가톨릭 교회의 개념에 여러 모로 부합한다. 곧 서품으로 받는 실재는 성령의 권능이고(42항), 성품 직무는 주님께 받은 선물이며, 서품은 영적 관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이니(43항), “새 성직자와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관계”(42.44항)를 드러낸다. 또한 이것은 어떤 표징인 서품 행위를 통하여 인정되고 수여된다(42항). “서품은 영적 관계가 말과 몸짓과 형식으로, 또 그것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믿음으로 행하는 하나의 징표이다”(43항). 역사적이고 영적인 측면도 감안한 포괄적인 의미에서, 서품 행위의 제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증언”(39항)과 관련된다. “안수는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징표로서 직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시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가시화하고, 교회가 교회 사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의지하도록 상기시킨다”(39항). 방금 인용된 구절에도 함축되어 있는 듯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서품이 단지 하나의 표징이 아니라 효과적인 표징임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서품에 대한 설명에서, 본문은 서품을 성사로 부르지 않지만 이 성사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나열하고 있다. 본문은 서품과 연관시켜 성사라는 말을 두 번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한 번은 형용사로(41항), 다른 한 번은 부사로(43항) 사용한다. 두 번 다 성사적 이해의 방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신앙직제위원회에 참여하는 교회들과 공동체들 사이에 일부는 서품을 성사로 보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다. 아마 그러한 연유로 서품과 관련하여 성사라는 말이 본문에 사용되지 않은 듯하다. 동시에, 이 글에서는 이 말을 보다 폭넓게 다룸으로써 신앙의 차원에서 성사적 이해의 본질적인 것들이 인정되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관심을 사로잡는 세 요소들을 잠시 언급한다. 1) 서품의 특정한 지향(39항), 2) 서품에 대한 성찬의 맥락(41항), 3) 하느님께서 주신 직무의 은사라는 인식에서 서품은 결코 되풀이될 수 없다는 설명. 이 모든 요소는 BEM 문서 안에서 이룩된 서품에 대한 중요한 의견 수렴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전히 이 문서는 서품이 참으로 성사라는 가톨릭 교회의 확신을 분명히 표현하지는 않고 있다.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한 가지 문제가 충분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곧 서품의 합법적인 집전자에 대한 문제이다. 실제로 합법적인 집전자가 드리는 성령 청원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은총이 서품된 사람에게 수여되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다(43항 참조). 우리는 합법적인 교역자에 대하여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서로 다른 관점들을 표현하는 설명 때문에 그러한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서품은 언제나 직무상 임무를 전수할 권위를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37항)는 사실에서 주교직을 갖고 있지 않은 교회들도 사도 신앙과 예배와 선교의 연속성을 표현하기를 바란다는 설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 서품은 하나의 성사다. 이 성사의 합법적인 집전자는 진정한 사도 계승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행동하는 주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직제위원회에게 서품에 대한 주교직 계승의 교회론적 의미에 대하여 성찰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주교직 계승을 통하여 직무의 성사적 유대, 무엇보다도 주교직 그 자체가 그 사도적 기원과 갖는 성사적 유대가 의미를 지니게 되고 실현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교회의 성사적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품 집전자에 대한 문제가 적절히 정립될 때에야 비로소 성품 직무의 인정을 향한 진지한 행보가 가능해질 것이다.
성품 직무의 상호 인정을 향하여
BEM 문서가 성품 직무의 상호 인정 문제를 만족스럽지 못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 일치를 향한 노력에서 우리가 지금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역사상 주교직 계승이라는 이 문제와 연결되는 성사적 서품의 매우 구체적인 문제가 자리한다. 그러나 많은 개별 문제들은 구체적인 공동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다. 해결을 위한 한 가지 길은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이 상호 존중을 증진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주교직 형태를 유지해 오지 않은 공동체들 안에서 사도 신앙과 예배와 사명의 연속성을 보존해 온 여러 방식들을 인정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듯, “이러한 형제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자라나고, 세례의 은총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길러진다. 이러한 삶은 개인 기도, 성서 묵상, 그리스도인 가정 생활, 하느님을 찬양하려고 모인 공동체의 예배에서 드러난다”(일치 교령 23항. 교회 헌장 15항 참조). 그러나 우리는 성품 직무가 사도직 계승 안에 있는 주교의 성사적 서품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 사이에 협력과 공동 성찰, 기도와 봉사의 형제적 연대가 증가함으로써 모든 이가 인정하는 성품 직무가 가능한지 아닌지, 또는 어떠한 형태로 가능한지를 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한편 우리는 교회와 그 직무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주교직 계승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심화하여야 한다고 다시금 제안한다. 이러한 성찰이 ‘주교직 계승의 표징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어 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질서의 구성 요소들, 곧 주교직 계승과 서품을 통한 주교직 수행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에 대하여 새로운 확신을 갖게 해 줄 것이다.
성품 직무의 인정은 그 교회론적 배경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성품 직무의 인정과 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교회적 특성에 대한 인정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제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 사이에 불완전하게나마 그러한 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이는 어느 정도 상대방의 교회적 실재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물음은, 이러한 친교가 다른 교회의 직무를 이해하는 방식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이다. 이는 아마도 성품 직무를 인정하는 문제의 근본적인 교회론적 차원에 주의를 기울일 때 해야 할 물음일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성품 직무는 사도직 계승을 통한 성사적 서품을 요구하므로 그교회들과 그들의 직무에 대한 상호 인정에 대한 어떤 형태를 공적인 행위로 선포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55항). 오히려 지금은 이 핵심적인 교회론의 문제를 바탕으로 신앙의 일치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IV. 교회 일치 관계와 대화를 위하여 BEM이 이룩한 결실들
1. 교회 일치 운동에 관한 전반적인 결실들
BEM 문서는 전반적으로 교회 일치 운동 관계들에 대한 소중한 제안을 하고 있다.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
이 문서의 한 가지 제안은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총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BEM은 여러 방식으로 이를 제안한다. 첫째, 신앙직제위원회가 교회들에게 제시한 네 가지 분야의 질문들은 교회들이 교회 일치 운동이 지닌 여러 측면들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성찰해 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신학적 대화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다른 교회 일치 노력과 별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 일치 운동의 각 측면은 다른 측면들을 발전시키고 또 그 측면들을 통하여 발전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신학적인 대화가 지속되어야 하듯이 교회의 고위층을 포함하는 모든 계층에서 인격적 만남을 증진하도록 돕는 사랑의 대화도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만남이 이해를 가져온다. 또한 우리 교회들과 공동체들 사이에 복음화와 사랑과 정의의 문제들에서 공동 협력을 통하여 공동 증언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갈라놓는 장애물들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 대한 봉사 안에서 서로를 잇는 유대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BEM은 우리에게 다자 간 교회 일치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양자 간 대화뿐만 아니라 다자 간 대화는 교회 일치 운동의 소중한 수단이다. 세례와 성찬과 직무에 관한 교회 일치 문서들의 발전이 있기까지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룬 BEM 문서와 양자 간 대화들의 상호 영향 그리고 신학적 방법론적 의견 수렴의 있어왔다(「양자 간 대화들에 관한 제4차 포럼 보고서」, 신앙직제위원회 문서 125호 참조). 나아가 그러한 다각적인 상황은 폭넓고 다양한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지속적인 토대 위에서 서로 만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해 준다. 어떤 교회들은 다각적인 틀 안에서만 다른 교회들을 만난다. 그들이 양자 간 대화에서든 다자 간 대화에서든 서로를 만날 때 다각적인 틀은 양자 간 대화로 증진된 상대방에 대한 이해로 또 다른 교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가시적 일치의 목표
BEM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이나 결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가시적인 일치라는 이 목표를 그들 앞에 계속해서 상기시켜 준다는 것이다. 문서는 이 목표를 서두에 언급한다. 세 분야의 각 본문은 일치로 이끄는 상호 인정의 문제들과 어느 정도 관련된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상호 세례 인정”(세례 15항)을 위하여, “성찬 거행과 성찬의 친교를 통하여 일치”(성찬 28항)를 향하여, “성품 직무의 상호 인정”(직무 51항 이하)을 위하여 협력할 필요성으로 전개되어 나아간다. 가시적 일치의 개념은 여전히 교회 일치 운동의 관점에서 명확히 정의되어야 하지만, BEM 문서는 교회 일치 운동의 목표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의 쇄신뿐만 아니라 갈라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재고찰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다음 단계를 위하여
우리는 BEM 문서가 이 문제들에 대한 의견 수렴의 중요한 단계를 시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문제들과 아직 다루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도 있다. 그러나 BEM 문서의 성찰을 통하여 이룬 성과는 우리가 의견 수렴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와 교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이들과도 유사점이 증대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는 그 자체로 신앙의 일치,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 일치로 나아가는 길에서 또 다른 진보를 이루기 위하여 더 나은 대화를 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된다.
2. 각 본문의 개별 결실들
세례와 관련하여, BEM 문서는 그리스도인 일치의 기초로서 세례에 대하여 다시 성찰해 보도록 우리를 돕는다. 가톨릭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세례를 진정으로 거행하는 공동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삶의 실재적 유대를 더욱 깊이 인식하여야 하고, 이 인식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BEM 문서는 유아 세례를 거행하는 공동체들과 어른 신자 세례만을 거행하는 공동체들 사이에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중요한 방법을 제시한다. 비록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본문은 세례와 관련된 일부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않지만, 교회 일치 운동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우리의 지속적인 분열에도 갈라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참된 친교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세례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BEM 문서는 이미 존재하는 이 친교가 세례를 바탕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성찬과 관련하여, 한 교회가 「리마 문서」의 성찬에 대한 본문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곧바로 상호 성찬 나눔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게 성찬 나눔의 개념은 그 교회의 신앙에 온전히 일치하고 특히 교회와 그 직무와 관련하여 일치하는 다른 근본 요소들과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성찬에 관한 BEM 문서의 모든 측면에 전적으로 만족하지는 못한다. 어떤 중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본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이 제시하는 성찬에 대한 견해에 많은 부분에서 의견 수렴과 의견의 일치까지도 이루었다는 점을 중요한 결실로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이 적어도 BEM에서 설명하듯이 성찬례 거행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를 그들의 일상생활의 일부로 실천할 수 있다면, 이것은 중대한 발전이며 이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성찬에 대한 공동 신앙을 도달하기 위하여 새로운 단계에 서게 되었다고 믿는다.
직무와 관련하여, 비록 우리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들을 지적했다 하더라도, BEM 문서가 말한 것은 중요하다. 직무의 인정과 관련하여 우리가 보기에는 사도직 계승의 문제에 대한 합의뿐만 아니라 그 실천까지도 서품의 인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BEM 문서의 직무에 관한 일부 제안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그리스도교 일치를 향한 중요한 진전을 이루는 것이다. 예를 들면, BEM에서 설명한 주교, 사제, 부제의 삼중 직무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한다면, 비록 그 삼중 직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개념 정립이 더 필요하기는 하지만,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은 새로운 수준의 관계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BEM 문서는 직무들에 대한 상호 존중이 증진될 수 있는 토대를 언급한다. 본문은 “주교직을 통한 계승을 실천하는 교회들 안에서, 역사적으로 주교직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교회들에서도 사도 신앙과 예배와 선교의 연속성이 보존되고 있다는 인식이 증대되고 있다.”(37항)고 말한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생각이 주교직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38항)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전체 교회 생활의 사도성의 징표로 주교 계승을 기꺼이 받아들일 의사를 표현한다.”고 문서는 지적한다. 이러한 고찰에서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적지 않은 거룩한 행위들도 우리와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각각의 교회나 공동체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는 이 행위들은 의심 없이 은총의 생명을 실제로 낳아 줄 수 있으며, 또한 이 행위들이 구원의 친교로 들어서는 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비록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일치 교령 3항).
현재 존재하는 친교의 수준을 성찰해 보면, 상호 존중이 증진되기 시작하고 우리 공동체들 사이에 친교의 차원이 이룩될 수 있는 터전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완전한 친교를 향하여 나아가려면 우리는 다른 문제들뿐만 아니라 직무와 관련하여 신앙의 일치를 위한 대화를 계속하여야 한다.
V. 결 론
BEM 연구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풍요로운 체험이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BEM 문서 안에서 그들이 동의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동시에 이 문서는 신앙직제위원회가 마련하는 교회 일치 운동의 맥락 안에서 분명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세례와 성찬과 직무에 관한 주요 부분들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문서를 통하여 이루어진 의견 수렴에 기뻐하고 일치를 향한 더 많은 성장을 기대한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신앙의 진리들은 서로 나뉘지 않는다. 이 진리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사들에 대한 완전한 합의는 교회의 본성에 대한 합의와 연결된다. 세례를 포함하여 성사들은 포괄적인 교회적 실재에서 그 완전한 의미와 효력을 얻는다. 성사들은 포괄적인 교회적 실재에 딸려 있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라는 목표 역시 교회의 본성에 대한 합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BEM 문서는 교회 일치 운동의 중요한 결실이며 공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가시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그 진지한 과정을 여실히 입증해 주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 응답으로 신앙직제위원회가 가시적 일치의 바탕인 신앙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그 소중한 활동을 계속해 나가도록 격려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신 이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과 더불어 새롭게 투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