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고아
유일표는 저녁밥을 하러 나가는 형을 뒤따라나가 물지게를 걸쳤다.
"나둬라,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동안에 공부나 해."
유일민이 동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내가 물 당번이야. 성은 나를 그리도 못 믿어?"
기분이 상한 어조와 함께 유일표의 눈찌에 곱잖은 성깔이 드러났다.
"화를 내기는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물 길어오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그러지. 지금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니까."
유일민은 방에서 떠가지고 나온 쌀에 물을 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한 말씩 팔아다 먹는
적은 양이었지만 쌀을 부엌에 둘 수가 없었다. 부엌이 워낙 허술한데다가, 밤새 된장이며 간
장까지 퍼가는 좀도둑들이 흔해 말썽이었다.
"나만 시간 낭비고 성은 시간 낭비가 아닌가 뭐. 성 시험공부나 잘허드라고. 원생이도 낭
구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잉께."
유일표는 마지못해 서울말을 써나가다가 끝에 가서 옹이 박힌 고향말을 내지르고는 물통
을 들고 돌아섰다.
...... "허 참, 기는 드세가지고. 그나저나 물이 귀해서 큰일이다. 서울이라는 게 어떻
게......."
유일민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쌀을 씻기 시작했다.
유일표는 빈 물통을 물지게의 양쪽 쇠고리에 걸고는 잠시 서 있었다.
어느 샘으로 가야 물을 쉽게 기를 수 있을지 종잡기 어려웠다. 물 긷는 사람들은 많고 물
은 딸리고, 샘마다 물난리를 치르고 있었다.
"말 마라 물난리는 갈수록 심해질 거다. 두세 사람이 먹던 물에 열 사람, 스무 사람이 덤
벼드니 샘인들 당할 도리가 있겠냐. 우리 장학사 옆의 우물이 개천이 가깝고 해서 재작년까
지만 해도 물이 넘쳐 흐를 정도였다. 그런데 성벽 위아래로 무허가 집들이 계속 불어나면서
물이 줄기 시작하더니 요새는 낮이면 바닥을 드러내기 예사야. 이런 물난리는 여기만 일어나
는 게 아니지. 무허가 집들이 몰리는 변두리는 다 똑같은 형편이야. 가난해서 동회 운영비
대기에도 허덕인다는 시청에서 세금도 안 내는 무허가 집 거주자들을 위해 수도를 놓아줄
리 없고, 참고 견뎌야지 어떡해. 한강이 머니 그 물을 퍼다 먹을 수도 없고."
김선오가 쓰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유일표는 서울에 와서 물지게라는 것을 지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광주에서
도 구경하지 못한 물지게를 처음 지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랐다. 물하고 쌀이 무겁다는 것
은 알고 있었지만, 물이 가득 담긴 물통을 양쪽 쇠고리에 걸고 상체를 일으키는데 그 무게
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고 멋대로 기우뚱거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두 손으로 쇠고리줄을 잡았는데도
양쪽 물통은 제멋대로 흔들리면서 물을 출렁거리게 했다.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더 심하게
출렁거리는 물은 거침없이 물통을 넘쳐났다. 발은 떼어놓아야 하고, 물은 넘쳐나고......,
참 사람이 미칠 일이었다.
"그게 아직 박자가 안 맞어서 그렇다. 지게질이 몸에 익으면 차차 나아질 테니까 처음엔
물을 너무 가득 채우지 마라."
형이 한 말이었다.
박자......?그 말이 알듯도 싶고 아리송하기도 했다. 장난삼아 지게는 가끔 져봤지만, 물
지게는 지게하고는 영 달랐다. 지게는 짐의 무게가 양쪽 어깨에 얹히면서 지게가 등에 착 붙
는 안전감이 생기는데, 물지게는 무거운 물통이 양쪽에 매달려 있어서 그 무게가 어깨로 모
아지지도 않았고 등받이도 이상하게 따로 놀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물지게를 지는 것을 유심히 보며 '박자'라는 말뜻을 깨닫게 되었
다. 사람들은 거의 물이 출렁거리지 않게 걸었고, 어떤 청년은 쇠고리줄을 잡지도 않고 가뿐
가뿐 뛰듯이 하는데도 물 한 방울 흘러넘치는 게 없었다. 물지게 지기는 바로 자전거타기와
마찬가지였다. 초보자가 타는 자전거는 불안하게 비틀거리게 마련이었고, 숙달된 사람은 핸
들을 잡지 않고 팔짱을 끼고도 자전거가 똑바로 달리게 운전을 했다. 결국 물지게를 지는 것
도 기술이었다. 얼마나 물지게를 많이 져야 그 청년처럼 할 수 있는 것인지 엄두가 나지 않
았다. 두어 달 지나보니 물이 출렁거리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 무게는 가벼워질 리가
없어서 물지게 지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물까지 귀해 아까운 시간을 버려야 하
니 겹으로 고역이었다.
"니 성 말 잘 들어야 헌다 이. 니가 헐 일은 눈치 싸게 니가 알아서 허고. 성이 시키는 일
은 무신 일이고 싫어라 말고 잘히야 혀. 성은 부모 맞잽잉께 알아듣겄지야?"
어머니가 몇 번씩 되풀이한 다짐이었다. 부모 맞잡이라는 말이 비위에 거슬렸지만 형이 아
버지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다니며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슬그머니 기가 죽고는 했다.
형은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밥하고 물 긷는 것을 하루씩 번갈아가며 하자고
한 것도 자신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자신에게 한 말을 형에게는 반대로 했는지도 모를 일
이었다. 형이 부모 맞잡이라는 말만 빼고.
유일표는 좀더 먼 곳으로 가기로 했다. 먼 대신 사람이 적어 결국은 빨리 돌아올 수 있다
는 계산이었다. 사람이 많은데다가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형편이니 물 한 지게 긷기에 한
시간이 넘기가 예사였다. 더구나 성북동 골짜기는 비탈 아닌 곳이 없어서 물지게를 지고는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르막은 견디기 어렵게 숨이 가빴고 내리막
은 곧 곤두박힐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르막에서는 무거운 물통이 한사코 몸을 뒤로
잡아당겼고 내리막에서는 제가 먼저 앞으로 나아가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대보름이 지나면서 날씨가 조금씩 풀리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음에 날
이 땡땡 추울 때는 그 고역을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손은 손대로 시리고 발은 발대로 시
린데 얼어붙은 길은 미끄럽기까지 했다. 물을 퍼담고 나서 물 묻은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어
닦기는 했지만 맨손으로 쇠고리줄을 잡으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쏙쏙쏙 아리면서 시리는 고통
은 참으로 견뎌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형에게 먼저 장갑을 사자고 할 수가 없었다. 광주에
서는 겨울에 장갑을 끼지 않아도 별로 손 시려운 것을 몰랐는데 서울 추위는 딴판이었다. 형
도 번갈아가며 물지게를 지고 있으니 손이 안 시려울 리 없었다. 그러나 형은 끝내 장값 사
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은, 미끄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으레 발에 새끼줄을 세 겹으로 동였는데 그만 발을 잘
못 디뎌 쭉 미끄러지고 말았다. 낙엽들 아래 빙판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한 발이 쭉 미끄러
지는 순간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비탈 급한 오르막이라 몸이 뒤로 쏠리면서 여지없
이 넘어지고 말았다. 물통 두 개의 무게가 몸을 잡아끈 것이다. 뒤로 벌렁 넘어지는 순간 물
통 하나가 물을 토해내며 달겨들었다. 얼떨결에 물통을 잡고 보니 온몸에 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다른 물통 하나는 물을 쏟아내며 양철 소리 요란하게 아래로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엄니이......."
자신도 모르게 이 소리가 나왔고,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워지며 눈
물이 솟구쳐 올랐다.
"에이 씨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굴러 내려가고 있는 물통을 쳐다보았다. 물통은 조금 더 굴러 내
려가다가 길 옆 개울로 처박혔다.
물벼락을 맞은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서러운 채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물통이 다 찌
그러지도록 짓밟고 바위에 두들기고 싶었다. 이게 무슨 사람 사는 것인가......, 이렇게 살
아서 뭘 하자는 것인가....... 그런 생각들이 울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몸을 벌떡 일으켰
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헌다는 말이 있니라. 니넌 다 존디 욱 허는 성깔이 걱정이여. 성질
나드라도 이 에미 생각허고 다 참어라 이.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허는 법이여. 고
생 참으면 한시상 볼 때가 있을 것잉께."
그때 어머니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말이 순식간에 울화를 식혔다. 터벅터벅 걸어내려가 물통을 집어 들었다. 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물통은 여기저기가 우그러지고 찌그러져 있었다. 그 모양을 보자 또 울화가
치밀었다. 물통은 턱없이 비쌌었다. 에누리 없는 물건값이 없는데 물통은 한푼도 깎아주지
않았다. 나무방망이로 양철을 다루고 있는 주인은 딴 데로 가보라며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
다. 책상처럼 손수 만들어 쓸 수 없는 그 비싼 물통을......, 어떻게 하다가 발을 헛딛게 되
었는지 자신이 야속하기만 했다.
형한테 면목없고 창피하고......, 그래서 물을 다시 떠갈까 했다. 그러나 몸이 점점 더 심
하게 떨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떨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앙다물고 주먹을 부르쥐어도 전신
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물이 속옷까지 배들었고, 어찌나 추운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
다.
"성, 이 물통이......."
"그까짓 게 무슨 상관 있냐. 너 어디 다친 데는 없냐? 다행이다. 어서 들어가 옷 갈아입
자. 이거 감기 들면 큰일이다."
형은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허둥지둥 내의를 꺼냈고, 이불을 펴서 감싸주었다. 그런 형
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그때 형은 정말 부모 맞잡이 같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물지게질이 이만저만 능숙해진 게 아니었다. 아직 쇠고리줄을 놓고
가뿐가뿐 뛰듯이 할 수는 없지만 물이 출렁거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물이 귀하니 세숫물이며 설거지물도 아껴야 될 지경이었다. 자기네는 두 식구니까 하루에
한 지게면 걸레와 양말 같은 것을 빠는 물까지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식구가 네댓씩 되는 다
른 셋방들은 물 아껴 쓰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세수한 물에 걸레를 빠는 형편이었다.
"가자, 목욕하러. 자면서 몸을 너무 긁어대더라."
얼마 전에 형이 뚜벅 말했다. 그러고 보니 광주를 떠나기 직전에 목욕을 하고 나서 석 달
이 다 되어 있었다.
보성고등학교 옆의 고갯길을 넘어 혜화동으로 목욕을 나갔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탕으
로 들어가려는데 '너 어디 봐' 하며 형이 팔을 붙들었다.
"어거 차암......."
어깨를 쳐다보는 형의 얼굴이 우는 것처럼 찌푸려지고 있었다. 형이 보고 있는 건 물지게
멜빵에 짓눌리고 씻겨 맺힌 피멍줄이었다. 그 불긋불긋한 줄은 형의 양쪽 어깨에도 선명했
다.
"아프지 않냐?"
형의 손이 어깨를 쓰다듬어내렸다.
"아니."
운동회 때 운동장에 그어놓은 하얀줄처럼 어깨에 형의 온기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느
끼며 먼저 탕으로 들어갔다. 그때 또 형이 부모 맞잡이 같았고, 이제 그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는 아버지의 온기가 이럴지도 모른다 싶었다.
탕 안의 뜨끈뜨끈한 물 속에 목까지 몸을 담그니 그 시원함이 말할 수가 없었다.
"탕 안에서는 때들 밀지 말아요."
수영복을 입은 청년이 긴 막대기에 달린 그물로 물 위에 뜬 때를 건져내며 퉁명스럽게 내
쏘았다.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것 같아 찔끔했지만 이내 못들은 척해 버렸다. 목욕을 석 달
에 한 번 하는 건 그리 오래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돈 아까워 넉 달, 다섯 달에 한 번 하는
사람들도 적잖은 세상이었다. 탕 안에 들어앉은 예닐곱 명의 사람들도 누구 하나 청년의 말
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청년의 말대로 사람들이 남몰래 물 속에서 때를 미는 것인지, 아
니면 오래 목욕들을 하지 않아 많이 낀 때가 뜨거운 물에 불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인지, 물
위에는 때가 무리를 짓듯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탕에서 나와 별로 힘도 주지 않고 수건으로 팔부터 문지르자 때는 후둑후둑 떨어질 정도
로 밀려나왔다. 본전을 뽑자는 생각으로 잔뜩 힘을 써가며 박박 문질러댔다. 대충 한 번 때
를 벗기고 탕에 들어가고, 두 번째 벗기고 또 탕에 들어가고, 세 번째 벗기고 나니 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파했다.
"두 시간이나 했구나."
옷을 입으려던 형이 벽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만하면 본전 뽑은 것이제?"
형이, 누가 듣는다는 눈짓을 했다.
"너 얼굴이 왜 이러냐? 아니 목도......."
다음날 아침 잠이 깬 형이 놀랐다.
"뭐가 어째서......?"
"이런......, 어제 때를 너무 세게 밀어댔구나."
형의 얼굴이 울상이 되며 쯧쯧쯧 혀를 찼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고 목이고 벌겋게 피가 돋아 있었다. 그 핏기는 이틀, 사흘이 되어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나흘째부터 무슨 상처가 났을 때처럼 자디잔 딱지가 생기기 시
작했다.
"괜히 본전 뽑으려고 욕심부리다가 때만 벗긴 것이 아니라 살껍질까지 벗겨 피부가 상한
것 아니냐."
형이 마치 의사처럼 내린 진단이었다.
그 핏기가 완전히 가시고 잔 딱지들이 다 떨어지기까지는 1주일이 넘게 걸렸다.
유일표는 땅만 내려다보고 빨리 걷다가 가녀리게 들리는 목탁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높직
하게 자리잡은 반야사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반야사는 여승들만 몇이 있는 자그마한 절
이었다.
유일표는 또 부러운 마음으로 그 절을 올려다보았다. 그 절에는 물 잘 나는 샘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몇 안 되는 여승들이 빨래며 목욕까지 실컷 하고도 남아 그냥 흘러넘친다고 했
다. 그게 틀림없는 것은, 그동안 여승들이 물을 뜨려고 밖으로 나온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유일표는 그냥 흘려보낸다는 물이 몹시도 아까웠다. 그 아까운 물을 어떻게 좀 얻어먹을
수 없을까 절을 볼 때마다 간절해지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절을 찾아들어가 그 말을 할 용기
는 생기지 않았다. 언제나 근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그 거리감 때문만이 아
니었다.
타다 남은 부지깽이 하나라도 절 밖으로 내가면 벌받는다. 절을 끔찍하게 받드는 어머니
의 이 말이 앞을 가로막고는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럴듯한 그 말에 슬그머니
반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럼 절에서는 시주만 받아먹지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 해
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곧 반격이 따랐다. 시주하는 사람들한테는 그들이 원하는 불
공을 들여준다....... 더는 할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물을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은 아깝
기 그지없었다.
유일표는 그 어린 여승을 생각했다. 그 여승과 친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물을 얻어먹게 될
지도 몰랐다. 머리를 깎아버려 나이를 좀 정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여승은 열대여
섯 되어 보였다. 얼굴이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흰 살결에 볼이 유난히 발그레한 그 여승은
이상하게도 혼자 다니는 일이 없었다. 어린애가 엄마를 따라다니듯 언제나 나이든 여승의
한 발쯤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러지만 않고 혼자 나다녔다면 벌써 말을 붙였을 것
이다. 아무리 여승이라 해도 여자이긴 마찬가지고, 같은 또래의 여자들에게 말을 거는 것쯤
이미 몸에 익은 일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그 여승과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승
은 멈칫 놀라는 눈치더니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앞선 여승에게로 다붙어 걸었다.
유일표는 대웅전 처마 끝에서 흔들리고 있는 먼 풍경에다 아쉬움을 남겨놓은 채 우물로 발
길을 서둘렀다. 우물가에는 여전히 물통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몸을 웅
크려 팔짱을 낀 여자들이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우물가에 여자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지
만, 이상하게도 서울 여자들은 물동이를 이지 않고 물지게를 졌다. 지게가 없어서는 안 되
는 시골에서도 여자들은 지게를 지는 일이 전혀 없었다. 물동이보다 물지게가 두 배 이상 물
을 나를 수 있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여자들이 지게질을 하는 건 그게 물지게라 하더라도
영 눈설어 보였다.
유일표는 맨 뒤에 물통을 갖다붙이고 주머니에서 영어 단어장을 꺼내며 돌아섰다. 영어 단
어장은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났다. 해도 해도 요령이 안 생기는 게 그놈의 영어 단어 외우기
였다. 자꾸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는데, 3년을 진땀 빼며 해보았지만 요령이 생기기는커
녕 머릿골만 더 아파왔다.
"10년은 해야지 이놈들아, 겨우 2년 하고선 무슨 요령 타령이야, 요령이. 미국 국민학생들
도 스펠링 외우느라고 길을 걸으면서도 꽥꽥 소리를 질러대."
중학교 2학년 때 영어선생의 핀잔이었다.
"선생님 미국 갔다 오셨어요?"
한 아이의 입빠른 말에 영어선생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 영어선생은 '콘사이스'를 두 권이나 씹어먹은 것으로 유명했다. 사전을 통째로 외워나
가며 다 외운 페이지는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는 거였다. 그러니 에누리 없는 실력파로 꼽혔
다. 그런데 그 선생이 '공갈 실력파'로 추락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네스콘가 어디서 교육
시찰을 나와 전교생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게 되었다. 통역으로 실력파 영어선생이 나선 것
은 너무 당연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선생은 유창하게 통역을 하지 못하고 되묻
고 어쩌고 하면서 우물쭈물 쩔쩔맸다. 그 이유는 발음이 너무 달라 미국사람과 영어선생은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거였다. 몇 달 동안 시무룩하고 웃는 일이 없던 영어선생
은 다음해에 집을 팔아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영어 단어장만 보면 그 생각이 떠올라 유일표는 빙긋이 웃었다. 그 선생은 지금 밤낮없이
미국사람들을 따라 발음을 고쳐가면서 콘사이스 대신 무엇을 씹어 삼키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내복만 입고 울고 오는 재가 누구야? 홍 씨네 딸 아냐?"
"응, 그렇네. 재가 내복만 입고 왜 저리 서럽게 울어대? 뭘 잘못해 매맞고 내쫓겼나?"
"설마, 홍 씨네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딸이라고."
"그래, 내쫓겼으면 저 위에서 와야지 왜 아래서 올라와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나?"
여자들이 새 이야깃거리를 찾았다 싶었는지 입들을 모으고 있는데 계집아이 하나가 위에
내복만 입은 채 서럽게 울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얘, 너 웃옷은 안 입고 왜 그리 우니? 춥지 않어?"
한 여자가 쫓아가 아이를 붙들며 아는체했다.
"아줌마아......."
아이는 아앙 새롭게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내 쉐타......, 내 새 쉐타를......."
아이는 서럽게 울음을 추슬려 올리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쉐타? 쉐타가 어쨌게?"
여자들이 아이 가까이 모여들었다.
"두, 두 남자가 사, 사탕 사준다고......, 꼬셔서 골목에서......."
아이는 또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쉐타를 벗겨갔단 말이지?"
"으응, 가방도......, 가방도......."
아이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울음을 걷잡지 못했다.
"그것들이 어른이든?"
"아니, 학생 오빠들만해."
"그놈들 그거 또 고아원 것들 아닐까?"
한 여자가 다른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고아원? 아유, 잘 모르면서 그런 소리 말아요, 괜히."
한 여자가 어깨를 으시시 떨었고,
"그래요. 고아원에서 이런 말 들으면 가만 있겠어요. 개네들 떼거리로 덤비는 데는 무섭잖
아요."
다른 여자가 재빨리 좌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뭘 해요. 개네들 단체로 독기 부리고 덤비는 데는 경찰도 못 당해요."
"왜 안 그렇겠수. 전쟁통에 부모 다 잃고 저희들끼리 한 덩어리가 안 되고서야 이 세상 어
찌 살겠수."
"그나저나 얘, 그만 울고 빨리 집에 가거라. 이러다가 감기 들겠다."
여자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싫여, 싫여. 나 엄마한테 혼나. 세 번밖에 안 입은 새 쉐타......."
아이는 다시 아앙 울음을 터뜨리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이런,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가자, 아줌마가 가서 말해 줄 테니까. 금방 갔다 올 테니
까 내 자리 새치기하지 말어."
처음의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유일표는 눈은 영어 단어장에 둔 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귀는 그쪽에 빼앗기고 있었다.
"세상 참 망조야. 뻘건 대낮에 눈 번히 띄워놓고 이게 무슨 일이야, 그래."
한 여자가 끌끌끌 혀를 찼다.
"쫄쫄이 배곯는 판에 밤중 대낮 가리게 생겼수. 돈 되는 것이면 뭐든지 훔치고 뺏고 하는
거지. 어린애한테 값나가는 쉐타는 왜 입히고 그래요."
"하긴 그래. 고등학생들이 남산에 놀러갔다가 교복을 다 뺏기는 판에 어린 것 쉐타 벗겨가
는 거야 식은죽 먹기지."
"그건 또 무슨 소리유?"
"아 글쎄 내 아는 사람 집 아들이 얼마 전에 남산에 올라갔다가 깡패들한테 걸려 교복을
홀랑 다 뺏기고 빤스 바람으로 돌아왔다니까 그래."
"세상에나 교복도 돈이 되나?"
"그 무슨 답답한 소리예요? 헌 군화, 헌 담요 쪼가리도 돈이 되는 판인데."
"그나저나 가난이 웬수지, 가난이."
이런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 가운데 물통을 채운 여자는 떠나고 새로 온 여자가 끼여
들고는 했다.
유일표는 단어장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한 시간이 훨씬 지나 물지게를 지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야 일표야, 빨리 일어나 콩나물 좀 사올래?"
다음날 아침 형이 깨워서야 유일표는 눈을 떴다. 벌써 부엌에 나가 있었던지 형의 얼굴에
는 추운 기가 서려 있었다.
"응, 알았어."
유일표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형은 이상하게도 구멍가게에 가는 것
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다른 일은 거의 시키지 않으면서도 구멍가게 가야 할 일은 어물어물
시키고는 했다. 아마도 콩나물이나 두부 같은 것을 사들고 다니기가 창피스러운 모양이었
다. 그런 것을 봉지에 담아주기는 했다. 그러나 신문지나 헌책 같은 것으로 만든 봉지는 그
저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봉지의 한쪽 옆구리를 북 터서 담아주는 콩나물은 아무리 봉
지를 여미려 해도 대가리와 꼬리들이 삐죽삐죽 드러났고, 물기 머금은 두부는 질 나쁜 봉지
를 금방 축축하게 적셔 속에 든 것이 두부라는 표를 확연하게 드러냈다. 그런 것을 들고 가
다가 여학생이 킥 웃기라도 해버리면......, 형의 성격에 어지간히 창피할 거였다.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해보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생각보다 훨씬 창피했었다. 언젠가 두부와 꽁치
두 마리를 사들고 구멍가게에서 나오다가 마주오는 여학생 둘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입
을 가리고 킥킥대며 뛰어갔다. 그건 서울에 와서 처음 느낀 창피스러움이었다.
"구찮허다 생각 말고 국은 끄니마동 꼭 낄에 묵어라. 찬도 부실헌디 국할라 안 묵어서는
밥이 살로 안 간다. 국은 사람 기도 보허고, 해독도 허니라. 명념해라."
어머니가 당부한 말이었다.
끼니때마다 국을 끓이기는 했는데, 국거리가 마땅찮았다. 결국 콩나물국과 두부찌개가 가
장 많아졌다.
"응, 왔어?"
유일표가 구멍가게 유리창문을 옆으로 미는데 주인여자가 먼저 알은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유일표는 꾸벅 인사를 하며 20환을 내밀었다.
돈을 받아든 여자는 묻지도 않고 봉지 옆구리에 익숙한 손칼질을 해대더니 콩나물을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손놀림이 콩나물장수들이 으레 하는 손놀림과는 아주 달랐다. 콩나물장
수들은 누구나 재빠른 손놀림으로 콩나물을 털어가며 엉성하게 담아 많게 보이려고 했다. 그
리고 한 줌을 더 올려 인심 좋게 덤을 주는 척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콩나물을 털기는커녕
꾹꾹 눌러담듯 하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걸 알면서도 못 본 척 하고 있었다.
구멍가게는 또 한 군데가 있었다. 집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워 유일표는 처음에 그 가
게의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여자가 고향이 어디냐고 불쑥 물었다. 자신의 말투
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라는 눈치를 챈 유일표는 그냥 광주가 아니라 '전라도 광주'라고 대
답했다.
"어머, 학생이 하와이야?"
여자는 콩나물을 팔기 싫다는 듯 콩나물 담던 손을 멈추고 유일표를 뻔히 쳐다보았다.
다음날부터 유일표는 그 가게에 발길을 끊었다.
가게를 바꾼 어느 날 오후 주인여자는 국민학생인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야단을 치고
있었다. 징징 우는 아이 앞에는 56점짜리 산수 시험지가 놓여 있었다.
"틀린 걸 가르쳐줘야지 때리기만 하면 어떡해요."
유일표는 맞고 있는 아이가 딱해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했다.
그러자 주인여자가 유일표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여자의 얼굴이 점점 난감하게 변하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 여자가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괜찮다면 제가 잠깐 가르쳐줄게요."
그 다음부터 주인여자는 콩나물을 꼭꼭 눌러담기 시작했다.
유일표는 구멍가게를 나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줄잡아 서른 명이 넘을 것 같은 크고 작
은 아이들이 새끼줄에 연탄을 꿰어 양쪽 손에 하나씩 들고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유일
표는 그들이 고아원 아이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한 달쯤 전에도 그들이 그렇게
연탄을 운반하는 것을 보았었다.
"한 장에 2환 하는 배달비 아끼자고 이 추운데 어린것들한테 저 짓을 시키니 원. 제놈 자
식들은 돈암동 양옥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키우면서. 쯧쯧쯧......."
그때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한 말이었다.
유일표는 슬픈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어머니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의 남루한 모습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전쟁이 끝나
고 6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돌아올 줄 모르고 있으니 자신은 반고아인 셈이었다.
카페 게시글
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1부 격랑시대 (1권)ㅡㅡㅡ 4. 반고아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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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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