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
金應鳴선생은 1593년(선조26년) 慶州府 西 慈仁縣 蔚谷里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취죽당 자는 이원(而遠) 본관은 경주이다. 1647년(인조 25)에 돌아가셨다.
15세에 밀양 영남루에서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시관(試官)이 되어 치른 초시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영탁한 수재이었다. 난후 사마에 뽑히어 생원(生員)에 올랐다.
일찍이 아버지의 명에 따라 성주의 한강 정구의 학사 백매헌(白梅軒)에서 학업을 닦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또한 박식하였고 성실 경건하였으며 항상 행동을 단정히 하고 벼슬에 뜻이 없었으므로 독서에 힘썼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전후 6년을 여막(廬幕)에서 묘를 지켰다.
병자란에 향인 백현룡(白見龍) 및 이광후(李光後) 이창후(李昌後) 형제와 의거하는 도중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하였다는 소식들 듣고 통곡하여 돌아와서 산중에 은거하고 거처에 대를 많이 심어 그의 꼿꼿한 우국충정을 자위하고, 스스로 호를 취죽(翠竹)이라 일컬었다.
1633년(인조 11년)에 자인 복현을 위항 방희국(方熙國)을 우두머리로 하여 최두립, 이시겸, 이창후등 상하 300여인이 대거 상경하여 상소장을 내어 자인이 경주부에 속하여 현민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시정하려 하였고 인조 15년에 실현을 보았다.
나라가 위태할 때는 의병으로 일어났고 향리의 백성이 시달리면 박차서 이를 바로 잡기에 앞장섰다. 1700년 (숙종 26) 자인현민이 이광후(李光後), 이창후(李昌後) 형제와 함께 상덕사(尙德祠)에 모셨다.
출처: 경산지, 1989년, 고향문화사 (펴낸이:金漢重, 편집위원 이원희-경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