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읍(錦山邑) 상옥리(上玉里)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오는 금천 남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하옥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양지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아인리와 남쪽으로는 계진리와 접하고 있는 지역에 상옥리는 자리한다.
금산에서 전라북도 진안으로 통하는 도로가 동쪽을 지나가고 남서쪽으로는 진악산의 준령에서 차츰 낮아진 야산지대가 정경을 이룬 가운데 비교적 들이 많아서 차츰 금산시가지로 번지며 도시화하는 지역이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시대 전후로 보며 백제 때는 진내군의 지역이었다. 신라 때는 진례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금주에 속했었다.
원래 냇물이 좋아서 금천 부근에서도 유달리 피서객이 많았던 지역이다. 금산을 찾은 옛 선비들의 글을 보면 사창 근처의 냇물에는 나무도 우거져서 길손들이 쉬어감은 물론이고 주막이 있어 진안으로 가는 선비들의 안식처처럼 느껴왔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1413)에 금산군이 되고 상옥리는 그리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만 하여도 개간하여 농토가 된 지역은 드물었으며 조선시대 중기 이후 즉 임진왜란 후에 개발이 따르고 금산군의 관아가 있었던 남쪽으로 차츰 농가가 들어서서 부락이 넓어진 지역으로 사료된다.
하옥리 샛골에서는 계진리 족실로 넘어가는 족실고개가 있다. 이 고개 바깥쪽으로는 명문의 후예들이 사화를 피해서 낙향한 곳으로 금산에서는 이름있는 선비들이 많이 기거했던 곳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군이면의 지역으로서 옥당거리 위쪽이 되므로 웃옥당거리, 웃독담거리, 웃옥골 또는 상옥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군일면의 상관리, 중관리, 하관리, 신학리를 병합하여 상옥리라 하고 금산군 금산읍에 편입되었으며 1940년 10월에는 금산면이 금산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금산읍 상옥리가 되고 1963년 1월 1일에는 금산군이 충청남도에 편입됨에 따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가 되었다. 리의 면적은 1.162㎢에 1907년 4월 1일에 설립된 금산중앙초등학교가 있다.
상옥리는 과거 옥담이 있던 거리(옥당거리, 옥담거리) 위쪽에 있던 마을이라 하여 웃옥당거리, 웃옥골, 상옥 등으로 불리던 지역이다. 이곳에 있는 현 금산중앙초등학교 교정은 과거 금산읍치의 상징적 중심이었던 금산객사(금계관)과 소산(비호산)을 바라보며 북향을 하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자연부락(自然部落)
<방천, 밭가운데, 상옥, 새창물, 샛골(新鶴洞), 객사거리, 비선거리>
방천
밭가운데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을 방천이라고 부른다. 서쪽 양지리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는 금천(錦川)이 반듯하게 흐르므로 간혹 수해를 입기도 하곤하여 금천에 뚝을 쌓고 그 가에 마을이 자리해 있으므로 방천(防川)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상옥
웃옥당거리, 웃옥담거리, 웃옥골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옛날에 죄인을 가두는 옥담의 위쪽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그리 부른다.
새창물
조선시대에 조곡미를 쌓아놓았던 창고가 있었던 사창이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는데 그 자리에 마을이 생김에 따라 마을을 새창물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물이 차고 수량이 많은 우물이 있는 마을이다. 처음에는 사창물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새창물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밭가운데
방천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 즉 상옥리 5구를 밭가운데 마을이라고 부른다. 옛날 조선시대에 군수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이 있었을 때 밭가운데에 집이 한 채 있어서 그 집을 군수가 말하기를 밭가운데 집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 집 근처에 그 후 마을이 생김에 따라 밭가운데마을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는 조선시대에 조곡미를 쌓았던 사창(社倉)이 있었던 자리라 사창터라고 부른다.
샛골
밭가운데마을 서남쪽으로 새로 된 마을을 샛골 또는 신학동(新鶴洞)이라고 부른다. 마을 서쪽으로는 성재가 있고 마을에서 계진리 족실로 넘어가는 족실재가 또한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성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전쟁터이고 진악산의 상봉과 봉화로 서로 교신을 하였다는 봉화대가 있었다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지금의 마을 부근에 원줄이라고 부르는 길이 있었다 한다. 금산고을의 원님이 다니는 길이었는데 그 길을 가로 지르는 길이 또한 동서쪽에 있었다 한다. 그 주변에 학이 자주 날아와 앉으므로 신학동이라고 부르고 원골 사이로 가로 지르는 길 주변에 마을이 생김에 따라 샛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는 마을이다.
객사거리
지금의 행정구역 상옥리 5구라고 부르는 지역에 객사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현재 금산의 주택지로서 찾기가 힘든 작은 마을이었다.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주막이 있었으며 금산객사(錦山客舍)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던 마을이라 객사거리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비선거리
지금의 상옥리 1구에서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 즉 진안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 사거리에 비선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한씨(韓氏)의 비각이 세워지면서 비각거리라고 부르고 후에 비선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