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저우>
12월 18일
꽝저우로 달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서야 '이제야, 예정대로 되는가'하여 조금 안심이 되었다. 기차 안은 상당히 깨끗했다. 중국의 기차는 좌석형태에 따라 경좌(硬座), 연좌(軟座), 경와(硬臥), 연와(軟臥) 등으로 구분되는데 연와라서 그런지 별로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창 밖을 흘깃흘깃 보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12월 19일
아침에 뒤척이는 기운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그렇게 특별나게 보이지 않는 어슴프레한 산과 들이 지나칠 뿐이었다. 꽝저우역에는 6시 48분에 도착했다. 지도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에 가격을 물었더니 5위엔(元)이라고 했어, '비싸다'고 했더니 2위엔(元)에 해주었다. '나도 이제 슬슬 중국사람이 다 되어 가는구나'하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지도대로 확인하며 가도 목적지인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義亭)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버스에 올랐는데 정말 구식이었다. 좌석은 목조의자였고 요금은 1위엔(元)밖에 하지 않았다. 길을 또 어긋나게 가는 것 같아 내려서 잠시 걸었는데 꽝저우라면 상당히 위도가 낮은 데도 쌀쌀한 날씨였다. 조금 걷다보니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이 보였다. 이내 난징의 중산릉이 떠올랐고 손문선생에 대해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일단은 목적지부터 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버스를 타고 광주봉기기념공원(廣州奉起記念公園)으로 향했다. 얼핏보기에 숲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어 들어갔는데 다양한 나이의 여인들이 음악에 맞춰 체조도 하고 춤도 추고 시끌시끌했다. 이렇게 목적지인 중조인민혈의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정은 1927년 12월 11일 꽝조우에서 공산당의 사회주의 혁명 봉기가 있었을 때 우리 한국인 150여명이 여기에 참가하여 함께 싸웠고 대부분 희생되었기에, 이것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광주봉기기념공원에 세워진 정자이다. 내용들을 차근차근 메모하고 능으로 크게 조성된 곳에 가서 참배한 후 동산구 건설국을 찾아나섰다. 동산공원옆에 그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도상에는 동산호공원은 있어도 동산공원은 없었다. 일단 동산호공원으로 가서 공안요원에게 동산구 건설국을 물으니 친절하게 동천로(東川路)옆이라고 지도에 표시해 주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그 부근인 듯한 곳에 내려 그곳을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부딛쳐 보기로 하고 조금 걷다가 슬쩍 문패를 보니 동산구 건설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직접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이쪽, 저쪽 사진을 찍었다. 임정요인들이 꽝저우까지 밀려온 후 처음 여장을 푼 곳이 바로 이곳 동산구 건설국자리이었다. 인근 동산호공원자리에 있었다는 아시아 여관에는 임정요인 가족들이 잠시 머물기도 했다. 지금 동산호공원에는 그런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그때의 일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한가로운 사람들만 가득했다. 임정요인들은 여기에서도 얼마 있지 못하고 1938년 10월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여 푸산을 거쳐 충칭으로 향하게 된다.
동산호공원을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한 후, 중산기념당으로 향했다. 꽝저우를 떠나며 중산에게 감사의 참배를 드리고자 하였으나 마카오(奧門)회귀 기념 행사관계로 일반인에게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문밖에서나마 가볍게 묵념한 후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올라 내려다 뵈는 구름들이 마치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했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충칭으로 갈 수 있지만 당시 임정요인과 그 가족들은 험난한 산길, 물길을 통해 류조우(柳州), 꾸이양(貴陽)을 거쳐 충칭인근의 치쟝(기江)에 이르게 된다. 임정은 치쟝의 임강로, 상승가라는 곳에서 1939년 3월부터 1940년 9월까지 머물면서, 좌우합작, 7당회의 등을 이끌어내게 된다. 필자는 당초 이곳까지는 답사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갈 수 없었는데 기회가 주어지면 우한, 창사, 치쟝등은 꼭 가보고 싶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행기는 부딛칠 것 같은 산사이를 뚫고 충칭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