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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치팔 | 볼프람 폰 에셴바흐| 허창운 역| 한길사| 726p
페르스발 (Perceval), 파르치팔 (Parzival), 파르지팔 (Parsifal)....
볼프람 폰 에셴바흐 (Wolfram von Eschenbach)가 파르치팔에 차용했던, 당시 유행했던 여러 소재 (matiere)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배 (성석), 아서 왕, 가웨인, 파르치팔, 불구의 어부왕......
중세작가들은 동일한 소재들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개성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고, 역량에 따라 그 작품이 본류가 되기도, 지류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간의 선후에 따라 상류, 하류로도 나누어질 수 있겠지요.
당대의 작품들과 볼프람의 작품은 소재들을 어떤 식으로 블렌딩하느냐에 따라 주제와 인물 역할 등이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훗날의 바그너 역시 매우 자유롭게 소재들을 변형하여 사용했습니다.
볼프람은 자신의 주인공 파르치팔 (Parzival)을 Perce a Val, "중간을 가르는 자" 라고 풀이했으며, 부계로 세속적 권력인 아서 왕의 혈통과 모계로 성배왕 프리무텔의 혈통을 이은 그의 신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름을 통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설명합니다.
바그너도 그렇게 했지요.
안포르타스의 상처
안포르타스는 (성배왕의 미덕과는 동떨어진) 아모르를 위해 모험을 즐기던 중, 티그리스 강 하류 (에덴을 암시하는)에서 성배를 찾아 여행해 온 한 이방인 기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창시합 끝에 상대를 죽이지만 자신도 큰 부상을 당하게 되어 성배의 힘을 통해 근근히 목숨을 유지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불행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세계 전체의 파탄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부터 조셉 켐벨의 설명이 따릅니다.
"지상낙원 근처에서 태어난, 자연의 이방인 자식은 영의 최고 상징을 찾아서 말을 타고 달린다. 그러나 권한을 가진 그 상징의 수호자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예언은 말을 탄 두 사람이 충돌하였을 때 이루어지며, 그 결과 둘 모두 파멸을 맞이한다. 자연은 처치되고, 영의 상징의 수호자는 덕이 텅 비어있음에도 그의 슬퍼하는 백성들에 의하여 영적인 역할을 유지한다. 그는 늘 치료를 바라지만 바라던 결과는 얻지 못한다.
서로 건드리기만 해도 파멸을 가져오게 되는 이러한 자연 (지상낙원)의 지배와 영 (성배의 성)의 지배의 분리는 삶을 황폐하게 하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기독교화된 서구 세계의 본질적인 심리적 문제로 남아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과 우주, 창조주와 피조물, 영과 물질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라는 성서의 기본적 교리의 결과이기 때문에, 중세의 절정기에 처음 분명히 드러난 이후 거의 바뀌지 않은 문제이다." (신의 가면 4부 "창작 신화" P 465)
" (바그너) 그는 중세 고지 독일어로 쓰여진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을 참조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부상 자체와 왕이 부상을 당하는 상황의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의미를 깊이 있게 인식하고 있다." (신의 가면 4부 "창작 신화" P 463)
주제 의식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이미 수 천년 전에 문학의 기법 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도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는 감탄을 하게 되는데,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경우에도 동일한 찬사를 보낼 수 있습니다. 중세의 절정기에 쓰여진 기사 문학을 통해 신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노래한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포르타스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어디가 아프신가요?" 간단한 질문 한 마디를 하지 못했던 파르치팔은 성배의 성에서 쫓겨나온 후 그것이 큰 잘못이었으며 스스로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다는 질책을 받게 됩니다.
수치를 당한 파르치팔은 이제 막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었던 영광스런 아서의 원탁을 스스로 박차고 나오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받은 과도한 비난은 파르치팔이 신을 부정하는 계기가 됩니다.
(중세 기독교 신학자 : 인용자) "아벨라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救主)가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견해가 바로 불치의 상처로 고통을 당한다는, 중세의 성배왕 (성배왕) 관념에 반영됩니다. 여기에서 상처받은 자는 다시 구주가 됩니다. 성배왕의 고통은 인류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성의 잠을 깨우는 것이지요." 신화의 힘 (조셉 켐벨 저, "신화의 힘" - 이윤기 譯)
즉, 기사도라는 세속의 가치관 때문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을 외면한 파르치팔은 저주를 받고 황무지를 헤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배의 성으로 돌아가 몇 년 전에 하지 못했던 질문, 오랫동안 수없이 입속에서 반복했을 "숙부님, 어디가 아프신가요?" 를 눈물을 흘리며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드디어 안포르타스를 구원할 수 있었고, 그 상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됩니다.
바그너의 주인공은 전임자와 완전히 같은 상황에 처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니라 난데없는 신성의 개입(계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며, 그로 인해 볼프람이 뚜렷이 보여주었던 주제 의식을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성창을 되찾아 암포르타스를 구원할 수 있었지만 결국 한 사람에 대한 구원에 지나지 않으며, 더군다나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알고 있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어필할 수 없는 해결인 것입니다.
<다야드 밤(공감하라)>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기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그에 비해 단 한 마디 "어디가 아프신가요?"라는 질문은 진정으로 구세주의 구원에 필적할만큼 포괄적입니다.
파르치팔 전편에 걸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역시 파르치팔이 우연히 눈 위에 떨어진 피 세 방울을 보고 아름다운 아내 콘드비라무르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넋을 읽는 장면일 것입니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는 자신의 성배왕이 수도사가 되길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르치팔이 성배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내와 아이들을 맞이하러 나간 것입니다.
파르치팔은 허위의식 없이 순수히 남의 고통을 걱정하는 마음, 아내를 순수히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성배의 선택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