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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8]
여행기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4)
최만정_아산교구
• 사람 구경이 제일이라
여행은 나와 다른 사람, 우리와 다른 문화를 겪고 느끼면서 나와 우리를 확장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구경이나 경험을 통해서 다름을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고, 스스로 정체성을 높여나가는 유용한 방법 중 하나가 해외여행. 국경을 넘으면 가장 먼저 다른 말과 글자, 그 다음이 사람일 게다. 불구경이나 싸움 구경이 제일이라지만, 다른 인종이나 민족을 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그렇지, 구경 중에는 사람 구경이 으뜸이라 확신하게 됐다.
중국은 소수민족이 많아, 한족과 다른 민족이 어떻게 다른가에 관심이 갔다. 한족은 우리보다 눈이 크고 얼굴이 더 넓적한 느낌이고, 신장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확연히 다른 중앙아시아 계통, 만주족은 우리와 같고, 몽골인은 우리보다 좀 덩치가 큰 이가 많은 느낌이었다.
동남아시아는 우리보다 약간 검고 키가 작은 공통점이 있으나 나라별로 조금씩 다른 면은 표현하기 힘들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는 한족과 현지인들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중국에서 가만히 있으면 외국인 티가 나지 않는지, 길을 물어보는 이도 있었고, 동남아에서는 이방인 티가 나도 불편한 느낌이 없었다. 같은 동양계라고나 할까.
북인도는 약간 검은 피부 말고도 콧날과 눈매 등 얼굴 생 김이 흔히 말하는 서구적 형태라서 우리는 어디가나 확연히 구분이 된다. 두바이는 무슬림이라 수염이 더부룩해서 금방 차이가 나는데 북인도 비슷한 인상이고, 이스탄불 사람들은 대략 북인도 사람들보다 콧날이 뭉뚝하고 얼굴이 약간 넓적한 인상으로 중앙아시아와 많이 닮은꼴이다.
발칸반도로 넘어가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 검은 머리에서 갈색 머리로 바뀌고 얼굴 생김이나 색이 완전히 다른 덩치가 큰 백인들, 처음엔 주눅이 들 정도로 긴장되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우크라이나, 발틱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들 간에도 얼굴 생김새나 키, 머리색 등 차이가 느껴졌지만 특정하기 애매하다. 캅카스 3국은 백인이나 키가 우리와 비슷한 이들이 많았다.
모스크바는 백인들이 대다수여도 동양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긴장이 일부 풀어졌다. 아마 과거 소련연방에 포함된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 동쪽 몽골계 사람들이 정착한 때문이리라. 중앙아시아는 몽골 계통이 다수인 줄 알았는데, 정착한 슬라브계가 많아, 동서양 계통 인종이 더불어 산다.
도시 기준으로 본다면 우주베키스탄 타슈켄트는 백인이 많아 보였고, 카자흐스탄 알마티는 반반 정도, 키르기즈스탄 비슈케크는 몽골계가 더 많게 느껴졌다. 역사나 현실에서 그 내부 갈등을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다녀본 중에서는 중앙아시아 도시들이 다른 인종끼리 더불어 사는 면에서 보기 좋았다.
20년 전 동유럽에 갔을 때는 주로 색안경을 끼고 다녔다. 동양계를 별로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잠깐씩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웠기 때문. 이번에는 다른 사람 눈길 피하는 용도로 색안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우리가 외국인에게 많이 익숙 해졌듯 대부분 나라들도 개방이 확대되면서 이방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인종과 민족에 따른 우열이 어디 있을까. 피부색과 인종이 달라도 같은 인간이기에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었고, 경제수준과 생활방식이 달라도 같은 사람으로서 손을 내밀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국적을 물어보는 사람은 귀찮았다.
“훼어 아 유 프롬(어느 나라)? 차이나? 저팬?”
관광지 상점이나 음식점, 공항이나 터미널에서 자꾸 따라오면 말을 거는 사람들은 너무 친절해서, 그냥 차이나! 하고 지나치거나, 저팬! 하면서 그저 손 흔들고 사양했다. 작은 물건을 사거나 거스름돈을 받지 않을 때는 꼭 코리아!
• 놀라워라 인터넷세상
여행 중 가장 많이 사용한 말 중 하나는, 여기 와이파이 비밀번호는요?, 숙소뿐 아니라 가게를 들어가도 자주 묻기 때문이다. 와이파이가 뜨는 공항이 대부분이고, 유명 관광 지점에 와이파이존을 제공하는 나라가 있고, 시내버스에서 가능한 도시도 있다. 나라간 이동하는 대형버스뿐 아니라 미니버스에서도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다.
와이파이를 제공하지 않는 숙소는 하나도 없었다. 대도시뿐 아니라 선진국뿐 아니라 저개발국 어느 도시나 시골까지도 와이파이가 터졌다. 한나절 이상 좁은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간 라오스 무앙우아이, 100여 채나 될까 말까한 시골마을에서도, 두바이에서 몇십 키로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 캠프에서도 와이파이는 추가비용 없이 무선인터넷에 연결되었다. 물론 전자비자 결제가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그 속도는 나라나 도시마다 몇 배씩 차이가 났지만 어디서나 대부분 한국과 인터넷 전화는 가능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을, 이제 10년이면 세계가 변한다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 무선인터넷이 되는 전화기이자 웬만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마트폰은, 국경과 도시를 이동하는 내내 지도와 여행안내서 역할을 하며 세상과 연결해주었다.
한시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스마트폰, 나만 그렇지 않았다. 중국 운남성 오지 호도협 객잔 주인에서, 적도인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노점상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발칸반도 분쟁지역 국경 초소에 근무하는 군인이나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말을 타는 사람까지도, 세계 대부분 사람들이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에 코를 박는다.
북극성만 바라보며 항해하던 시절, 파르르 떨다 멈추는 나침반은 용감한 이들 심장을 뛰게 했을 테고, 근대에 들어서는 좌표로 축적된 지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곳으로 떠날 용기를 주었을 게다.
지구본을 돌리며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에는 사회과부도라고 하나?, 그런 지도책들이 좋았고, 30년 전 운전을 시작할 때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지도책이 필수였다. 서유럽에 나가 본 20년 전에도 지도와 두꺼운 여행안내서는 동반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떠날 수 있는 시대, 국경을 넘는 일부 터 잠자는 곳까지 스마트폰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처음 가 야하는 지역이라도 걱정이 대폭 줄어드는 시대가 되었다.
역사상 이토록 빠르고 강력하게 세계로 확산된 문물이 있었을까. 불과 10여년 만에 세계 어디서나 연결이 가능한 세계, 경이로움을 넘어 두렵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스마트폰 안에서도 제국은 국경을 뛰어넘어 사람들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운영체제나 주요 어플을 미국기업이 장악한 마당이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운영체제 기술을 가진 나라 또한 몇 개국에 불과하다. 그만큼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제국의 이윤독점은 더욱 가속화되고 간접 지배는 깊이 뿌리내릴 것이다.
여행자라서 겉모습만 지켜본 감이지만, 중국은 폐쇄적인 자국 인터넷망을 중심으로 천문학적인 정보를 축적하고, 인민생활 전반에 도입한 결제시스템과 전 국토에 촘촘하게 설치한 카메라망과 연계하여, 인공지능 시대 빅데이터 처리능력을 고도로 높여가고 있다. 십 수억 명이나 되는 인구를 기반으로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 보다 국가 효율을 중심에 두는 사회이기 때문에 5G장비 선두 기업 화웨이가 나올 수 있었으리라.
또 하나, 무선인터넷은 생활전반을 바꾸고 있었다. 특히 택시나 공유차량, 음식 배달 등이 눈에 확 들어왔다. 큐알 코드를 이용한 전자결재가 노점까지 확대된 중국은 음식 배달 전기오토바이가 어디를 가나 보이고, 디디추싱이라는 걸 이용하면 금방 차가 도착했다.
뉴델리에서도 구글 네비게이션으로 막힌 도로를 우회했다. 동남아에서는 오토바이나 차량을 불러 타는 그랩이라는 회사, 러시아권에서는 얀덱스가 대세였다. 대부분 나라에서 미국기업인 우버는 택시, 공유차량만이 아니라 배달시장까지 진출했다.
미국기업은 무선인터넷 출시 겨우 10여 년 만에, 그와 연동된 페이스북 비롯한 사회소통연계망(SNS), 우버같은 공유차량과 배달 등 다양한 분야까지, 이토록 신속하게 세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단 말인가. 동영상 공유서비스 유튜브에서 부킹닷컴 같은 여행 필수 어플에 이르기까지, 군사력과 금융, 무역만이 아니라 첨단기술을 매개로 세계각지 말단까지 지배하는 제국의 시대, 여러 나라에서 겪을수록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여전히 인터넷 강국인가. 무선데이터나 와이파이를 사용해 본 경험으로, 우리 속도가 가장 빨랐다. 5G상용화는 초기 혼란에도 불구하고 정착된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 처리 속도가 궁금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쪽이 가장 느려서 우리의 5분의 1 정도 속도, 작은 국가라서 그런지 가장 빠르다는 북유럽 에스토니아도 시골인 우리 집보다 낮은 5분의 4 정도 속도. 하지만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이는 속도 자체보다 얼마나 더 생활편의에 적응시키는 방향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인터넷 속도가 우리의 절반에 불과한 캅카스 지역이나 중앙아시아에서는 거리나 가게 곳곳에 페이박스라는 기계가 있어, 공과금이나 전화비, 금융 등 시민 편의에 관련된 온갖 망을 집중시켜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가 지하철 와이파이를 자랑하지만, 시외버스나 심지어 시내버스에서도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나라도 있었다. 시내버스 예상 도착시간 표시 등 우리가 잘하는 영역도 있지만 인터넷은 속도 못지않게 편의증진이라는 방향이 중요하지 않을까. 덧붙여 우리나라는 통신요금이 비쌀 뿐 아니라, 여전히 해외 로밍요금이 너무 비싸다.
어쩌면 인터넷 연결사회는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더 정확히는 언제나 끊기거나 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심카드를 바꾸면서, 브이피엔을 통해 한국 인터넷을 접속해야 하는 중국에서, 인터넷 통제와 감시는 언제든 가능하다는 걸 실감했다.
• 그래도 한국, 한국인
외국에 나가면 대부분 애국자가 된다고 그랬나. 대형 광고판에 우리 기업 이름이 많은 도시에 가거나 한국 상표 모니터나 에어컨이 있는 숙소에 묵으면 왠지 기분이 나아진다. 평소 삼성에 비판적이고, 여전히 나는 선택하지 않고 있어도, 도시마다 나붙은 핸드폰 광고를 보며, 잘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 승용차가 많은 베트남이 고마웠고, 일본경제 보복 이후에는 옛 소련연방 나라들을 질주하는 일본차들이 괜히 거슬렸다. 현금인출기로 돈을 빼서 쓰는 입장이라, 환율에 대한 관심까지 생기면서, 한국경제가 흔들림 없이 전진하기를 원했다.
힘들 때는 가끔 한국인 숙소를 찾는다. 웬만한 대도시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숙소가 있기 때문에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대개 현지인 숙소보다 비싸지만 한국말로 이야기 하고 간단한 한국식 음식까지 먹을 수 있어 긴장이 풀리고 편안하다. 젊은 운영자도 여럿 보았는데, 현지 이야기도 잘 해주고 친절하다. 외국에서 고생하지만, 그들이 대단하게 보이고 부럽기도 해서, 조금 더 젊었으면 나도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쿠알라룸푸르 어느 숙소는 나이 먹은 이들이 진상을 부렸는지 45세인가, 50세 이상은 받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어 살짝 마음이 상하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한글학교나 코이카 사업, 사회사업을 하는 이들과 가끔 교류할 시간도 있었다. 하나같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다만, 종교 목적으로 진출한 이들에게 감동은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실제 도움을 받은 이들은 한국인 여행 블로거들. 어느 지역에 갈 때마다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한다. 사실 영어 검색을 하면 시간도 걸리고 느낌이 확 와닿지 않는다. 일부 나라를 빼고는 대다수 지역 명소나 이동한 방법을 기록한, 다녀온 사람들 후기가 있어 고마웠다. 누군가 경험한 시기와 올린 날짜가 현실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르비아 국경을 넘는 열차가 있다고 해서 몇 시간 버스를 타고 갔더니 2년 전에 없어진 노선이어서 당황하기도 했으니까.
습관처럼, 다른 나라에 가면 땅과 인구를 우리와 비교한다. 한국(남)은 작은 나라?, 면적은 세계 여러 나라 중 90위 권으로 작아도, 인구로는 세계 30위 이내에 든다. 북(조선)까지 합하면 20위 안에 든다는 걸 실감했다. 중국, 인도, 미국, 러시아 등 면적과 인구가 워낙 큰 나라들과 비교해서 작게 느껴질 뿐, 우리보다 작은 나라들이 훨씬 많다. 어릴 때부터 결혼 즈음까지, 심지어 하나만 낳아도 금수강산 넘친다더니, 요새는 세계 최저 출산율 때문에 온 나라가 걱정 이다. 사회전체가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제도를 시급히 완비해야겠지만 너무 호들갑 떨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십 몇 년 전까지, 일부 한국 사람들이 사업아이템을 찾기 위해 일본에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벼룩시장이나 교차로가 나올 때쯤까지로 기억한다. 나야 사업이나 교역에 문외한이라 관심사 밖이었지만, 내게 핸드폰 등 한국 물품을 싸게 수입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현지인을 만나며, 우리나라 위상이 높다는 걸 체감하기도 했다. 반면, 현지 관광루트를 재개척하거나 사업거리를 찾아 여행하는 한국인들을 보기도 했는데,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벌이려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은 여전히 역동적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와이파이를 연결하면 여행 정보를 먼저 검색하고 습관적으로 한국 뉴스를 본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흥분해서 생방송을 보다, 결렬이라는 황당한 결말에 낙담해서 술을 꽤나 마셨다. 하노이 중심에 있는 호치민 묘와 집무실 주변 관광안내판은 김정은 위원장이 방문, 참배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계속 틀어놓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작년 북미회담였던 산토스 섬을 배회하며, 방송에서 본 흔적을 찾아보기도 했다.
판문점에서 간이 북미회담과 남북미 정상이 만나는 날은, 키르기즈스탄 작은 숙소에서 자꾸 끊기는 와이파이 때문에 힘들었지만 보람찬 하루였다. 하지만 이후 진척이 없고 반목하는 과정이 이어져 안타까웠다. 일본 경제보복에 맞서는 시민들 불매운동이 궁금해서, 저녁마다 유투브를 검색하고 어떤 때는 밤을 새기도 했다.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선언이나 북미 싱가포르 회담을 한지도 벌써 1년 반이 훌쩍 넘고 있음에도 전혀 진척이 없는 한반도, 그저 북미회담이나 쳐다보고, 미국이 그은 선 안에 서만 움직이면서 촛불정권이라니! 일제 불매운동처럼 나라가 하지 못하면 남북문제도 뭔가 시민들이 나서서 돌파구 를 열 방안은 없을까.
발칸반도나 소비에트연방이었던 나라들 사람은 코리아라고 하면, 대개 남인지 북인지 되묻는다. 예약사이트에는 ROK나 DPRK로 구별하거나 SOUTH, NORTH KOREA로 표시되기도 한다. 입국카드를 쓰게 되는 경우에 그냥 KOREA라고 써도 시비를 건 나라는 없었지만, 사실 틀린 국적 아닌가. 중국은 한자 표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가정책이라 그런지, 신문 방송에서 조선과 한국을 구별해서 쓰고, 일반 사람들도 한국인, 조선인이라 부른다. 그런 중국인들은 남과 북 양쪽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사업한다. 우리 발길은 두만강, 압록강을 넘지 못하고 휴전선에 갇혀 있다. 참으로 한심한 상황이다.
아무리 대북제재라는 올가미가 있어도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을 유지하고 확대할 방법을, 정부든 지자체든, 사회단체든 개인이든 다방면으로 찾을 때 아닌가. 언제나 외국에 나가 코리아라 소개하면, 남이냐 북이냐고 다시 되묻지 않는 시대가 올까.
• 생존 중국말이라도
중국에서 영어가 안 통한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다. 중국도 젊은 사람이나 웬만한 호텔은 영어가 되니까 다 맞는 말은 아니나 사실이긴 하다. 러시아도 그런 편이다. 미국은 어떨까. 가보지 않았지만 비슷하지 않을까.
큰 나라들이야 자기네 나랏말만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그렇다 치고, 우리는 또 어떤가. 여행자 입장에서 입장으로 한국에 와서 살펴보니, 도로 표지판이나 영어로 병기되었을 뿐 영어투인 상호까지 거의 다 한글이라서, 외국인들이 여행하기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네거리나 시장에서도, 중국이나 마찬가지로 영어로 간단한 안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나.
어쨌든 손짓 발짓 생존영어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중국말로는 ‘헬프 미’도 모르니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중국 글자가 한자를 간소화시킨 간체자라서, 간판이나 표지판 뜻은 대략이라도 알 수 있어, 러시아 보다는 편했다고나 할까.
만주벌판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중국인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웠을까, 연길에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 땅에 건너가 어떤 형태로 든 일제에 맞서 싸우려면, 중국말을 신속하게 배우며 적응했을 터, 다시 한번 독립투사들이 대단한 분들임을 깨달았다.
중국 신문에서 베트남과 조선, 한국이 2차 대전 후 독립하면서 한자를 버린 배경을 다룬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자를 주로 쓴 역사를 소개하고, 한자를 버린 이유가 자주국가를 표방했기 때문이라면서도, 지금 세대가 옛날과 단절된 점을 결론 비스무리하게 짚어냈다. 부아가 나긴 했 만,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열하일기’에는 중국인들과 글씨를 써서 이야기하는 필답 대화 장면이 나온다. 조선 전기 최부라는 사람이 제주도에 서 중국으로 배가 표류되었다가 돌아온 과정을 쓴 ‘표해록’을 보면, 필답은 기본이고 한시도 주고받는다. 이들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어느 정도 한문을 습득한 이들은 가능했을 게다.
조선시대에 양반행세를 하려면 한문을 알아야 큰기침을 했고, 일제강점기에 출세하려는 자들은 일본어가 필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국에 유학을 하고 영어를 잘해야 한 자리 꿰찰 수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만 잘해서는 대접받기 어려운 처지인가, 이런 반감도 든다. 그래도 남북에 영향력이 큰 중국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면, 생존 중국어 수준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