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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을 읽고
먼곳은 마치 쏘낙비가 올려는 양 어둑어둑합니다. 내일이 초복이라는군요
나이만큼 격은 더위가 시작되나 봅니다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더웁기에 정약용도서관에서 피서 겸해서 몇 일째 나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다 대한제국 광무 4년 경운궁에 임어하면서
새로 조성되는 선원전에 봉안할 태조 어진을 모사하기 위해
태조의 탄강지인 함경도 함흥 준원전의 어진을 이봉하기 위해 다녀오면서
살폈던 민심을 황제에게 고했던 내용입니다.
고종실록 고종37(1900 광무 4)년 양력 4월 20일 기록입니다.
시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읽는 순간 나 혼자만 보기에는 아까워서
첨부파일로 보내 드립니다
정약용도서관은 전국에서 6번째의 규모이고 한강 북에서는 제일 크답니다
저의 집에서 1000보도 되지 않는 지근 거리입니다
제작년 가을에 개관했지만 역시 코로나 때문에 금년에 거리 두기로
개관했습니다.
집에 있으면 쇼파에 앉아 TV보다 들어 눕고 그러다 보니 낮잠 자고
건강이 나빠져 가는 것을 몸이 말해 줍니다.
선생님께서는 슬기롭게 코로나를 이기시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건강히 계시다 뵙기를 희망합니다.
고종 37년 4월 20일 양력 3번째기사 1900년 대한 광무(光武) 4년
영정을 모신 후 윤용선 등에게 함흥과 영흥의 사정에 대해 논의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장례원 당상(掌隷院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조병세(趙秉世),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용직(李容稙)이다.】 심순택(沈舜澤)이 문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정(影幀)을 아주 안전하게 받들어 왔고 작헌례(酌獻禮)를 순조롭게 마쳤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
하니,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영정을 모시고 출발한 지 3일 동안은 계속 단비가 내리다가 14일 이후로는 날씨가 화창해져 영정을 안전하게 봉안할 수 있었고 신들 일행의 많은 인원도 무사히 다녀왔으니, 모두가 신령의 도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으니 백성들의 기뻐하는 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능(陵) 위는 모두 태평하고, 두 본궁(本宮)도 안녕하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들고 각릉(各陵)과 두 본궁에 나아가 봉심하니 모두 안녕하였습니다. 위판(位版)을 고쳐 쓴 다음에 작헌례도 잘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초(莎草)가 마른 곳이 좀 있었고 비각(碑閣)에 비가 새며 앞에 늘인 휘장의 색깔이 변색하였으므로 전부 수리하도록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대신과 장례원 당상이 북쪽 능을 봉심한 것은 철종(哲宗) 을묘년(1855)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사체(事體)가 자별한데도 순릉 봉사(純陵奉事) 강홍도(康洪道)는 관원을 파견하였다고 하면서 애당초 대령하지 않았고, 심지어 청명절(淸明節) 제향에도 이유 없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와 같은 거리낌 없는 버릇이 있겠습니까? 참봉(參奉)이 혼자서 번(番)을 선 지가 지금 8개월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의 성명이 민장(民狀)에도 여러 번 올랐으니 그의 행실도 알 만한 것입니다. 조정의 체통으로 보더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순릉 봉사 강홍도를 우선 면직시키고 그 죄상을 도신으로 하여금 사핵(査覈)한 뒤에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원산항 경무관(元山港警務官) 유한원(劉漢源)의 사건을 정부(政府)에 전보(電報)한 것에 대해서 이미 면직하기를 아뢰었습니다. 그가 항구에 있으면서 한 일은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죄인 한 명을 붙잡기만 하면 번번이 칙령(勅令)이라고 핑계하여 온 경내를 소요하게 하고 백성들이 뿔뿔이 달아나게 하였으므로 이번의 변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류는 다만 면직시키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법부(法部)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놀라운 일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연로(沿路) 각군(各郡)의 도로를 수리할 때에 논밭이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3도(道)의 도신에게 분부하여 숙종(肅宗) 무진년(1688)의 규례에 따라 피해당한 면적과 종자 값을 헤아려서 결호전(結戶錢) 중에서 분급(分給)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3도의 고을과 백성들이 겪는 폐단에 대해 보고할 만한 것이 많으나 가장 심한 것은 북쪽 도적에 대한 문제로서 해마다 변방의 우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놀랍고 참혹한 소문이 도는데,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이 더욱 심합니다. 작년 가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아직 송환받지 못하였으니, 변경의 형세를 생각하면 매우 우려됩니다. 비록 파견하여 주둔시킨 부대가 있으나 그 수가 백을 넘지 않으니,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대적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북청(北靑)까지의 거리가 400리(里)나 되므로 급한 상황에 부딪쳐 구원을 청한다 해도 걸핏하면 여러 날이 걸리므로 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적들은 벌써 강을 건너가니, 이것이 이른바 긴 채찍도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변경의 변란을 엄격히 막고자 한다면 토병(土兵)들을 단결시키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두 고을에 현재 포수들이 만든 계(契)의 인원이 5, 6백 명(名) 이하를 밑돌지 않으니, 주민들이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포상금 비용에 보탠다고 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도적들의 소요를 겪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주둔시킨 부대를 속히 철수하여 돌아오게 하고 해당 양군(兩軍)에서 각각 300명의 포계(砲契)를 설치하게 다음 우선 신포(身布)를 면제하여 해마다 네 등급으로 나누어 재주 등을 평가하게 하되, 석 달을 기한으로 하여 군(郡)에서 합격자 100명을 뽑아 월급을 3원(元)씩 지급하고 윤번(輪番)으로 지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원수를 고정시키지 말고 재주를 연마하다가 연말에 가서 각각 우수한 사람 10명씩을 뽑아 위에 보고하거든 지방 부대에서 다시 합시(合試)를 보여 수석(首席) 1명을 뽑아 원수부(元帥府)에 보고하면 위관(尉官)으로 차하(差下)하고 그로 하여금 해당 군의 포사(砲士)들을 거느리게 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이되, 지난날 호위청 시사(扈衛廳試射)에서 우수한 사람들에게 요미(料米)를 주고 몰기(沒技)한 사람은 출신(出身)시키던 규례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고장을 편안히 여겨 있는 힘을 다하고 상(賞)을 기대하면서 무술을 닦게 될 것입니다. 만약 긴급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600명의 포사들이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와서 그대로 상비군(常備軍)과 예비군(豫備軍)의 규모가 갖추어질 것이니 변방을 굳건히 지키는 방도로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1년간의 군량을 대략 계산해 보면 7,000여 원(圓)을 넘지 않을 것 같으니 본도(本道)의 역전(驛田)에 대한 도조(賭租) 중에서 그 원납(元納)을 제하고 늘어난 수량만 취해도 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니, 본도 도신으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군사에 관한 일이라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상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경의 근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걱정된다. 한창 변방을 지킬 대책을 강구하는 중이었는데,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처분하겠다. 도신도 서계(書啓)하였으니, 경의 말처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에는 5성씨(姓氏)의 충의(忠義)와 24성씨의 충의가 300여 인(人)이 있는데 일제히 신에게 하소연하여 영정을 모셔올 때 배종(陪從)할 것을 자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차도(班次圖)에 올라 있지 않았으므로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더니 계속 호소하여 그치질 않았는데 실은 간절한 정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지금 배종하는 사람이 14인이나 되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뜻을 보여주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분참봉(分參奉)으로 차정(差定)하여 첩문(牒文)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함흥(咸興)의 토관(土官)은 태조(太祖)께서 그곳에 주필(駐蹕)하셨을 때에 창설한 것입니다. 이번에 어진(御眞)을 모셔올 때에 토관들이 일제히 배종할 것을 자원한다고 호소하였는데 충의와 의리상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극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준원전의 영(令)과 참봉(參奉)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영정을 모시고 올라왔는데 여러 달 동안에 병이나 사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충의와 토관들을 모두 분참봉으로 차하하여 흥덕전(興德殿)에 윤번으로 숙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좋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임신년(1872)에 경기전(慶基殿)의 수복(守僕) 중에 글을 좀 아는 사람을 불러 올려다가 의식(儀式)을 배워 익히게 한 전례가 있었는데, 이번에 배종하여 온 수복 중에서 글을 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의식을 익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준원전의 제반 의절(儀節)이 매우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예식 순서를 쓴 홀기(笏記)도 없으니, 참으로 황송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보과(官報課)로 하여금 예식(禮式)을 인쇄해서 1책(冊)으로 편성하여 준원전과 북도(北道)의 여러 능침의 수복에게 나누어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은 죄를 지었는데도 아직 처벌을 받지 않아 더욱 황송하고 위축되어서 시골집에 칩복하고 있은 지 3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폐하를 한 번 만나보는 것이 큰 소원이 아니었겠습니까마는, 사정이 이와 같아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내의원(內醫院)의 새로운 직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분수와 도리를 돌아볼 때 또다시 폐하의 명에 태만할 수 없어서 명을 받들고 올라와서 폐하를 우러러 보게 되어 지극한 소원을 이루었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의하고 조치를 취하는 사이에 설사 일시적인 이견(異見)이 있다 해도 어찌 이런 일 때문에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은 능역(陵役)의 일로 엄한 견책을 받기까지 하였고 또 나이가 많아지면서 병이 점차 심해져 인정으로나 병으로나 실로 폐하의 보살핌에 만 분의 일도 보답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역의 일은 그 책임이 사실 감동(監董)에게 있는 것이고 대신(大臣)에 대해서는 원칙을 차리느라고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혐의쩍게 여길 것은 없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어진의 옥축(玉軸)은 너무 무겁고 초본(綃本)은 너무 넓어서 봉안하는 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 못할 듯하다. 약간 변통하여도 별 문제가 없겠으나 중대한 문제이므로 재상들과 의논하여 정하고자 한다. 지난 임신년에 영희전(永禧殿), 경기전의 어진도 이 문제 때문에 문의한 바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의견이 분분한 것을 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합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의견을 묻는 것이니 경들의 의견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냉천정(冷泉亭)에 모신 영조(英祖)의 어진은 아래 위의 축(軸)을 침향목(沈香木)으로 하였고 양 끝에 붉은 칠을 하였으며 초본도 비교적 작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축이 무겁고 초가 넓으면 손상을 입기 쉬우므로 약간 줄여도 사체에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문제는 대신들로 하여금 품정(稟定)하도록 해도 되겠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금 대신들이 한자리에 앉아 상주하고 있으니, 품정이 없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에 있는 수령의 치적은 응당 우열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일시에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파견된 관원들이 일을 행하는 데서 매우 많은 폐단을 끼친 탓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습니다. 신이 도중에서 이틀 동안이나 체류한 것도 하소연하는 백성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조병세가 아뢰기를,
"함경도(咸鏡道)만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신이 살던 가평(加平)도 파견된 관원과 보부상(褓負商)의 폐단이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하고, 심순택이 아뢰기를,
"청양(靑陽) 등지에는 이른바 파견된 관원들이 없는 면(面)이 거의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친 것이 컸다는 것은 일전에 신이 이미 연석에서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이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죄 없는 백성들만 그 피해를 입게 되며 앞날의 근심을 형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파견된 관원들은 황제의 명령이라 핑계대고 강제로 마구 거두어들이며 못하는 짓이 없이 자기 잇속만 채우니, 어찌 남들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을 돌아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10명, 100명이 떼를 지어 화란을 빚어낼까 두려우니 어찌 심각한 근심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또 보부상이 세력을 믿고 기세를 부려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부로 감행해도 여러 수령이 막아내지 못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번에 신련(神輦)을 배봉할 때에 보부상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험한 길과 가파른 비탈길을 모두 보부상들이 메고 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신련을 메고 갈 때에 보부상의 복색(服色)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모두 누런 옷에 누런 두건 차림이었는데 전부 자비로 갖추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의 여러 군에서는 새 법을 많이 쓰던가 아니면 옛 법을 그대로 따르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새 법과 옛 법 두 가지를 절반씩 섞어서 쓰고 있는데, 백성들은 새 법을 매우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혁 이후의 새 법은 백성들을 보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새 법이건 옛 법이건 막론하고 굳게 지키고 힘써 실행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지금 새 법은 유명무실하고 옛 법은 이미 모두 없어졌으므로 공과 사가 모호해지고 모든 일마다 문란해졌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곤궁한 백성들은 호소할 데가 없어서 절반이나 예수교를 믿고 외국인을 의지하니, 어찌 우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나라가 아무리 강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까닭 없이 침략 당하지는 않으며 국내의 정사를 잘 다스린다면 딴 나라의 침략도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나라를 위하여 진념(軫念)하시고 정사에 유념하소서. 독쇄 위원(督刷委員)이 조세를 지나치게 받아들이고 여러 모로 주구(誅求)하고 있는데 만약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민란(民亂)이 일어날까 걱정됩니다. 또 내장원(內藏院)은 과연 어떤 부서입니까? 여러 가지 조세를 맡아 독촉하는 판에 백성들은 그 명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속히 폐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둔다면 또한 적임자를 골라서 임무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도(各道)에 파견된 관원들에 대해서는 이미 내부(內部)로 하여금 훈령(訓令)을 내려 철수하게 하였는데 아직도 많이 있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조정의 명령은 사흘을 못 간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형편이 과연 그렇습니다. 신이 듣건대, 의정(議政)이 일찍이 보고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나열한 것은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합니다. 이에 의거하여 조치를 취한다면 실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받아들이소서. 소인배가 연줄을 놓아 대궐에 드나들면서 몰래 농간질하여 폐해가 적지 않으니 일체 숙청해 주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우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자에 의정은 실제상 권력이 없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나라에서 대광(大匡)을 설치한 것이 어찌 그 지위와 권한을 보국 대부(輔國大夫)의 아래에 두려고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지난날 세도(勢道)가 있는 자는 지위가 보국에 그쳤어도 운운할 것이 있으면 도리어 대광으로 하여금 대신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의정에게 권한 없기가 이와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부(府)와 부(部)의 대신들이 모두 권한이 있어서 각자가 자기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의정에게 권한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또 내가 들으니, 각국(各國)의 대신들은 총리(總理)를 각별히 존경하고 속관(屬官)들도 대신에 대하여 예를 극진히 갖추어 존경하며,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서도 대체로 그러하여 대신이 문서를 점검할 때에는 속관들은 공손히 서서 감히 물러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혁 이후로 위아래의 등급이 매우 그렇지 못하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분의(分義)로 볼 때 진실로 그러합니다. 폐하께서는 의정을 신임하여 그의 말과 논의를 듣고는 그대로 따라 주고 그 권리를 전적으로 맡겨 성공하기를 요구하소서. 또 신이 듣건대, 미관말직도 폐하의 처분을 받지 못하면 차임(差任)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것이 폐하의 마음을 피로하게 하여 잘 선발하지 못할 것은 뻔합니다. 부세(賦稅)에 대해서도 탁지부(度支部)의 관할 하에 전적으로 넘겨 물자를 조달하게 해야 할 것이니 속히 내장원을 철폐함으로써 나라의 재부(財賦)가 두 갈래로 갈라지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에는 황실과 국가의 구분이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부와 부에서 각각 권리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서로 침범하지 않으므로 의정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참정(參政) 한 사람으로도 충분한데 의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소용이 없다면 폐지하는 것도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어찌 정승의 직책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의정을 그대로 두려고 한다면 전적으로 맡겨 그 직책을 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의식이나 맡기어 의장과 기물을 다루는데 분주하여 한갓 수고스런 일만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품계와 지위가 낮은 감역(監役) 같은 자리도 사람들이 반드시 청환(淸宦)이라고 하면서 모두 귀중히 여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의정이 권위가 없어서 지난날 일개 감역만도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정부에 녹사(錄事)가 2인 있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인을 더 두어야 하겠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서 올라오자 녹사도 신을 만나보러 왔기에 신이 시험 삼아 물었더니, 백관(百官)들을 호령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길가에서 무례한 자들을 만나도 벌 줄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녹사는 바로 의정부에 소속된 관원인데 신과 같은 사람이 또 어떻게 이런 사람을 쓰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경무청(警務廳)과 법부는 범죄 사건을 심리하는 곳인데 도리어 재물을 늘리는 곳이 되어, 시비가 뒤바뀌고 뇌물 수수가 풍습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끔 이러한 폐습이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개탄하였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방 수령들이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으니, 도리어 개혁 이전보다도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고 보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서로 왕래하는 것이 그전과는 다릅니다. 만약 정사를 잘못하였다가는 이웃 나라에게 수모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곁에 있는 신하들을 신중히 간택하여 속이는 폐단이 없게 하고, 수령을 잘 뽑아서 모든 백성들의 목숨을 보존하게 하고, 의정에게 전임하여 책임지고 성취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며, 정사에 마음을 두어 나라가 귀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적에 대한 우려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고 나라도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원본】 44책 4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52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교통-육운(陸運)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