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보고 가신 예수님(2024.3.27.수)
마26:1-5
고난주간 수요일에 예수님께서는 별다른 활동 없이 베다니에 머무르시며 휴식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거룩한 쉼을 갖고 있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룟 유다까지 끌어들며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날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식사모임이 있었는데 식사 도중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화요일에 많은 변론으로 하루를 분주하고 피곤하게 보내시고 베다니에서 하루를 쉬시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예수를 체포할 은밀한 흉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야바의 집에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다시 모여 새로운 논의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를 즉각 체포할 것이 결의되었으나 무엇보다도 질서와 경비를 위해서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되면 많은 군중이 모여 혼잡하고 흥분하게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이 절기에 앞서 일을 치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저들은 소동이 일어날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인 목요일에 예수를 체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알고 있었고 제자장들의 흉계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닥쳐 올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수요일 하루를 베다니에서 쉬셨습니다. 오늘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또 감람산 기슭에서 재림의 징조와 천국의 비유에 대한 말씀을 상세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자신의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씀 하실 때, 대 제사장,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 제사장의 공관에 모여서 예수님을 조용히 잡아서 처형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내막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불안 해 하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자신의 평소의 모습대로 할 일을 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기의 모습이 곧 평소 삶의 자세였습니다.
1.예수님은 항상 앞을 향해 전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오한 영적 진리와 말세의 비결을 설교 하신 후 다음 일을 생각하며 다음을 향해 준비하고 계획하고 앞을 바라보며 전진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성령을 받은 다음 광야로 들어가 40일을 금식 하시고, 금식 후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만 보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다음 부활, 승천, 재림, 천년왕국이 앞에 있을 것을 말씀하시며 미래를 바라보고 전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어떤 경우에도 과거에 매이거나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이루기 위해 나갔습니다. 인생은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경주자는 최후의 승리를 위해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최후의 순간 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어떤 인생의 파도 속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바울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빌3:12-16) 성도도 답답하고 우겨 쌈을 당하기도 합니다. 저주로 인해서 곤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죽지 않고, 망하지 않고 썩지 않는 예수님의 생명의 힘으로 일어납니다. 내 마음이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도우 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 오세요. 시험,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와 사정을 아뢸 때 주님이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십니다. 힘들고 지칠 때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예수님은 악한자들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3-4절에 수많은 군중이 모이는 유월절 전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사람들에게 시달렸습니다. 고향 사람들, 가족들, 바리새인들이 끊임없이 비난 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속을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 속에 무서운 악이 있다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 했습니까?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미움이나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으시고 악하고 괴로운 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일어난 것으로 믿고 수용 했습니다. 끝없는 사랑과 용서, 죄인을 향한 긍휼과 자비,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삶이었습니다. 마음을 잘 지키면 인생이 형통하고 축복이 막힘이 없지만,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고 걸림이 있으면 모든 축복이 차단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내 마음속에 천국도 지옥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 관리를 잘해 마음속의 더러운 감정을 청산해야 합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인간관계 때문에 힘듭니다. 형이 동생을 미워하고,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불화 때문에 서로 미워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처를 입었고 피해를 늘 입는다 하더라도 주님 말씀대로 용서하면 다 해결 됩니다. 용서를 심고 긍휼을 심으면 내가 용서를 받고 화평을 거두게 됩니다. 또한 용서 한 만큼 이해한 만큼 축복의 그릇이 커집니다.
3.예수님은 사명에 집중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주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던지, 언제 어디서나 사명을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의 문제는 사명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인 사명은 예수를 알고, 예수를 알게 하는 것이 사명 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넓게 알고, 더 자세히 아는 것 입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예수님으로 충만해져서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사명, 예수 이름을 전하는 사명, 이 보다 더 시급하고 큰 사명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요5:37). 예수님도 자신을 증거 하였습니다. 성령님도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요5:26) 제자들도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눅24:48). 전도는 어떻게 합니까? ①성령으로 해야 합니다. ②전도는 사랑으로 합니다. ③지금이 사명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명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줄때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 맡은 자의 헌신입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제자 선택과 훈련, 그리고 파송하는 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제자 선택은 신중했습니다. 특별히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주님은 일약 ‘부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에 감동된 무리들은 모든 것을 바쳐 주께 봉사하였으니, 그 실례가 마26:6-13절에 옥합을 깨어 발에 부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입니다.
직분 맡은 자의 넘어짐입니다. 마26:14-16절에 주님께 바쳐진 재물을 가룟 유다가 관리하기 시작하였으니 이 귀한 직책이 그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애당초부터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 너는 스승을 파는 사람이 되라.’하고 운명지어 놓은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귀한 그 직책이 오히려 마귀의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40세에 왕위에 올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나중에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지배하게 된 이유는 그 찬란한 왕위 때문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들의 설교에 감동하여 순종한 것이 시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행5:3-4) 직분 맡은 자의 깨달음입니다. 주를 위해 몸 바쳐 일한 것이 시험이 되기 쉬우며 교회의 선한 직분이 오히려 넘어짐이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청년시절엔 하루는 짧고 한 해는 길다고 합니다. 노년 시절엔 하루는 길고 한해는 짧다고 합니다. 청년은 희망의 그림자를 가졌고 노인은 회상의 그림자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노인은 세월이 빠르다고 말하고 청년은 앞길이 창창하다고 말합니다. 앞길이 창창하고 희망에 찬 오늘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걸어가는 걸음을 보고 내가 행하는 일들을 보면 자연히 그리스도인이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청년같이 희망에 찬 믿음의 씨앗을 심는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