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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아는 것의 중요성
사역하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사람을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 앞에 왔을 때 우리는 그의 영적인 상태를 알아야 하고, 본래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 그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가 입으로 한 말과 마음 속에서 진정하고 싶은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가 입으로 한 말과 그의 마음 속에 품은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하고 그가 우리 앞에서 무엇을 숨겼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의 겸손한 허위성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사역의 효율성은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아는 정도와 큰 관계가 있다. 만일 우리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앞에 온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적절한 말로 답할 수 있게 된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온 각 사람들에게 그분이 적절한 말씀을 해주신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거듭남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니고데모에게는 생수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니고데모에게는 중생의 말씀을,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생수의 말씀을 하신 것은 얼마나 적절한지!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그분은 그들을 부르셨고 그분을 좇고자 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자원하는 자에게는 대가를 계산해 보라고 말씀하셨고 느릿 느릿 따라오는 자에게는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은 다 적절한 것이었다. 주님 앞으로 나온 사람이 그분을 찾으러 온 사람인지, 아니면 그분을 시험하러 온 사람인지를 그분이 다 아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신 주님의 모든 말씀은 다 효과적이고 적절한 것이었다.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있어서 주님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시며 우리는 멀리서 그분을 따르고 있다. 비록 우리가 멀리서 그분을 따라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방향을 바꾸지 말고 한결같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그분처럼 사람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이 있으시기를!
사람을 모르는 형제 앞에 한 영혼이 놓여질 때 그 형제는 어떻게 그를 다룰지를 모를 것이다. 그 형제는 말을 주관적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든지 그날 자기가 느꼈던 것만을 말해낼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는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제목에 대해 말한다. 이런 일에 효능이 있겟는가?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처방을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처방만을 갖고 있다. 그는 사람의 병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있다. 그는 사람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의 복잡한 상태를 알지 못하며,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아는 것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마냥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우리는 결코 한 가지의 영적인 처방을 가지고서 모든 영적인 병을 치료하기를 바랄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우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분별할 줄 모르고 예리한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사람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의 예리함과 감각의 우둔함은 사람을 분별하는 일에 있어서 똑같이 아무런 쓸 데가 없다. 사람는 결코 생각과 감각으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없다. 사람의 생각이 아무리 예리하다 할지라도 사람의 깊은 속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의 깊은 상태를 만질 수 없다. 사역하는 사람이 누구를 만날 때 해야 할 첫번째 기본적인 일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참된 필요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가 대답한 말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그가 머리가 아프다고해서 정말 머리가 아픈 것인가? 머리가 아픈 것은 증세일 뿐 병은 머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당신에게 몸에 열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에게 열이 없을 수도 있다. 그가 당신에게 많은 말을 했을지라도 그가 한 말이 다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아는 환자는 극히 드물다. 그는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신에게서 무슨 병을 앓는지를 진단받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에게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해도 그는 정확하게 자신의 필요를 말해내지 못한다. 병리(病理)를 아는 사람, 영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 있다.
그의 필요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억지로 그가 무슨 병에 걸렸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정확하게 그의 필요를 알아야 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환자에게 그가 상상했었던 병에 걸리도록 강요한다. 주관적인 사람은 어거지로 누가 무슨 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당신은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병에 대해 말해낼 수 없는 사람의 병을 말해줄 필요는 있으나 결코 당신의 주관적인 것으로써 그가 무슨 병에 걸렸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형제 자매들을 도울 수 있는가는 그들의 문제점을 알아내어 그들의 병세에 따라 처방을 내릴 줄 아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의 진단이 정확하다면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다. 혹 당신이 찾아낸 문제점을 당신이 도울 수 없다면 일은 쉬워진다.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의 영적 상태를 도울 수 있고, 또 당신이 도울 수 있는 한계 밖의 사람은 어떤 부류이며, 당신의 능력을 넘어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당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분별이 없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의 최선을 다해서 도우라. 당신이 돕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하라. <주여, 이것은 제 능력의 밖입니다. 저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여, 저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혹 당신이 지체의 기능을 보고서 어떤 일을 어느 형제가 할 수 있고 어떤 일을 어느 자매가 할 수 있다고 느낀다면 그들이 하도록 양보하라. 당신은 당신에게 한계가 있기에 어느 정도까지밖에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영적인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영적인 일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보아야 하는 동시에 다른 지체가 주는 공급을 보아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다른 형제를 찾아가서, <형제님, 이것은 저의 능력 밖의 일이요 당신의 일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동역자의 문제와 몸의 문제를 본다. 우리는 결단코 단독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주님의 일을 하고 섬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아는 것을 주님 앞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사역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의 영성이 공과를 배우지 못한 형제의 손에 의해 짓밟힌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그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주관적인 의지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 뿐 객관적인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가 누구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가 그런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그의 어떠함에 따라 어떻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책임이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도울 수 없다.
사람을 아는 도구
환자를 보는 데 있어서 의사에게는 그를 돕는 많은 의료기구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적 상태를 측량하는 데에는
온도계나 엑스선 같은 어떤 의료기구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한 형제에게 병이 있는지 아는가? 무엇으로 그가 걸린 병의 종류를 판단하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측정의 기준으로 삼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질병이 있는지의 여부와 어떤 병에 걸렸는지를 측정할 수 있도록 우리 몸에 역사하신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용하신다. 이 일은 의사의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이 심히 막중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가령 이 세상에 아직 체온계가 발명되지 않았다 하자. 그때의 의사는 환자에게 손을 대기만 해도 그에게 열이 있는가를 알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의사의 손이 곧 체온계였다. 그러기 위하여 의사의 손은 아주 예민해야 하고 또한 아주 정확해야 했다. 영적인 일에서의 원칙은 이런 것이다. 우리들은 일종의 체온계요 일종의 의료기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격한 훈련과 엄한 다룸을 거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몸에 남은 그것이 장래에 다른 사람에게 남게 되고, 우리가 배우지 못한 공과를 결코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적인 문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배우 것이 있는가에 있는가에 달렸다. 우리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배울수록 하나님의 일에서 더 크게 쓰임을 받게 된다. 우리의 배운 것이 적을 수록 즉 우리의 댓가가 적을수록 우리는 자신을 더 보류한다. 우리가 교만하고 마음이 비좁으며 의견이 많을 수록, 자신의 기쁨을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는 주님 앞에서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 몸에 이런 것들이 아직 원래 그대로 남아 있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이런 점들을 처리해줄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을 다룰 수 없고 마음이 비좁은 사람은 마음이 비좁은 사람을 다룰 수 없으며 외식하는 사람을 다룰 수 없다. 또 풀어진 사람은 풀어진 사람을 다룰 수 없는 것이다.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면 그런 종류의 병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고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를 찾아낼 길이 없다. 육신의 의사가 다른 사람을 치료하고 자기는 치료하지 못할 수 있어도 영적인 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역하는 사람 자신이 곧 환자로서 자신의 병이 치료되어야만이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고 당신이 통과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으로 통과하게 할 수 없다. 당신이 배우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배우도록 인도해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곧 사람을 알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구임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믿을 만해야 한다. 우리의 느낌이 믿을 만해야 하고 우리의 진단도 믿을 만해야 한다. 당신의 감정이 믿을 만하게 되도록 주님께, <주여, 나를 풀어 놓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의 느낌이 믿을 만하게 되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몸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역사를 하시게 해야 한다. 또한 당신이 그분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까지 그분으로 하여금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만일 체온계 도수의 높낮음이 정확하지 않다면 의사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체온계는 반드시 정확하고 믿을만해야 한다. 사람의 영적 문제를 만지는 것은 사람의 몸의 질병을 만지는 것보다 훨씬 더 엄중한 것이다. 몇 배나 더 엄중한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고 우리 개개인의 의견과 방법을 갖고 있어서 한 때는 이렇다 하다가도 저렇게 변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룸을 거칠 때에야 비로소 쓰임을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하나님은 직접 사람에게 역사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항상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사람에게 어떤 필요가 있을 때, 물론 한면으로 성령의 통제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안배하지만 다른 면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곧 말씀의 사역자로 말마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말씀의 사역자의 공급이 없다면 결코 형제 자매의 영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없다. 이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이는 곧 나의 유용성이 교회가 공급받을 수 있는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예컨데 어떤 병은 일정한 도수에 이르러 병으로 인정한다. 가령 그것이 화씨 103도라 하자. 당신의 손으로 한번 만져 보고 아마 103도일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체온이 정확히 103도인가를 재어 보아야만 무슨 병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를 측정하신다. 우리가 잘못된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잘못된 의견과 잘못된 영의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배운 공과도 부족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질병을 진단한다는 것은 지나친 모험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하나님이 신뢰하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몸에서 하나님의 영은 출구를 얻으실 수 있게 된다.
영적인 일의 기점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계속적인 교정을 받는데 있다. 온도계는 일정한 표준에 의해 제작되고 정밀 검사를 통하여 규정에 맞아야만이 사용할 때 정확하고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체온계와 같이 우리가 정확하지 않을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가 정확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아주 철저한 다룸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의사이자 의사가 사용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공과를 잘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을 아는 길 - 환자 방면
우리는 환자의 상태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두 방면 곧 환자의 측면과 우리 자신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환자의 방면에서 본다면 사람의 병을 발견하는 길은 무엇인가? 사람의 병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돌출된 부분을 찾아내면 된다. 돌출된 부분은 가장 노출된 부분이다. 그 부분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을 노출시킨다. 그가 겸손을 나타내고 있을 때에도 그의 겸손은 교만한 것이다. 이것을 가장할 방법은 없다. 슬픈 사람은 그의 웃음까지도 슬픈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종류의 상태를 노출시키기 마련이다. 사람이 어떠하면 당연히 그런 인상을 상대방에게 주기 마련이다.
성경은 수차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말했다. 사람은 난폭한 영과 강팍한 영과 슬픔의 영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우리는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경솔한 영을, 어떤 사람이 침체된 영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영의 상태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영의 강팍함을 예로 들겠다. 이 강팍함을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영이 교만하다고 할 때 이 교만은 어디서 온 것인가? 영의 방탕을 말할 때 어디서 온 것인가? 정상적인 영은 본래 색깔이 없다. 본래 영 자체는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런 색깔이 없다. 그런데 왜 강팍한 영이 있고 나타나는 것 외에 아무런 색깔이 없다. 그런데 왜 강팍한 영이 있고 교만한 영, 방탄한 영, 용서하지 않는 영, 미워하는 영 등이 있는가? 이것은 겉사람과 속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요 겉사람의 상태가 속사람의 상태로 변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서 강팍한 영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영이 겉사람의 강팍함으로 옷입었기 때문이다. 교만한 영은 속사람 위에 겉사람의 교만이 입혀진 것이다. 미워하는 영은 속사람의 위에 겉사람의 미움이 덮여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겉사람과 속 사람의 불일치인 것이다. 영 자체는 색깔이 없지만 겉사람의 색깔이 영의 색깔의 영의 색깔이 될 수 있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사람은 겉의 색깔의 색깔의 그의 영이 색깔이 된다.
본래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색깔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겉사람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영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영이 교만하고 강팍한 이유는 전적으로 겉사람이 아직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이요 겉사람의 상태가 영에 섞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올 때 겉사람의 상태가 그 영 위에 덮여져 영과 함께 나온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이 영에 씌여져 영과 함께 나오고 강팍한 사람은 그의 영에 씌워져 영과 함께 나온다. 질투하는 사람은 질투가 영 위에 씌워져 영과 함께 나온다. 그러므로 체험에 있어서 우리에게 교만한 영과 강팍한 영과 질투하는 영 등이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영 자체의 색깔이 아닌 겉사람의 색깔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을 깨끗게 하려면 그 사람의 영을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의 겉사람을 처리해 주어야 한다. 문제는 영에 있지 않고 겉사람에 있다. 사람의 영이 무슨 색깔을 가지고 나오는가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에서 파쇄하지 않는가를 알 수 있다.사람의 영이 어떤 영인지를 만졌을 때 당신은 그의 겉사람의 상태가 어떤가를 알 수 있고 그 일에서 그가 파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겉사람의 이런 것들을 자신의 영에 섞으며 자신의 영 위에 씌우며 영에 이것들을 걸어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은 자유하지 못하고 겉사람의 이런 상태들을 옷입게 된다.
사람을 아는 길 - 우리 방면
우리 방면에서는 사람의 영의 상태를 어떻게 알수 있는가? 이 점을 우리는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우리 몸에 성령께서 주신 통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로 배우게 하신 공과이다. 성령의 통제가 한 번 있을 때 우리는 한 번 더 파쇄하고 성령의 통제를 받는 정도로 파쇄된다. 성령의 통제를 받은 그 일에서 우리 자신이 파쇄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의 통제와 한 번의 파쇄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몸의 많은 문제들이 여러 번의 통제와 파쇄를 거쳐야만 우리가 쓰임받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영으로써 형제를 만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영으로써 모든 형제를 만질 수 있다거나 영으로서 한 형제의 모든 영적 상태를 다 만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이것은, 우리 자신이 성령의 통제를 받고 주님에 의한 파쇄된 일에서만 다른 형제의 동일한 일은 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이 주님에 의해 파쇄하지 않는 일이나 우리 영에 느낌이 없는 일이나 우리들이 영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에서 우리는 결코 형제 자매들의 필요를 공급할 수없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받은 성령의 통제만큼, 우리가 영 안에서 느끼는 만큼, 우리가 받은 파쇄만큼 우리의 영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파쇄된 일에서만이 우리의 영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인정할 수 없는 영적인 원칙이다. 당신에게 이것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통제와 성령의 파쇄를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연단을 많이 거친 사람만이 많은 봉사를 할 수 있다. 오직 많이 파쇄된 사람만이 많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오직 손실을 많이 본 사람만이 사람들에게 줄 것이 많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에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그 일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용도를 잃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보류하고 자신을 용서한 일에서 우리는 영적 감각을 가질 수 없고 또한 영적 공급도 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 원칙이다.
오직 배운 사람만이 섬길 수 있다. 사람은 십 년에 걸쳐 배울 공과를 일 년 내에 다룰 수 있는가 하면 일 년에 배울 공과를
이삼십 년의 시간으로 배울 수도 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배움을 지연한다면 곧 자신의 봉사를 지연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섬길 뜻을 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 파쇄의 길이요 성령의 통제를 받는 길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성령의 통제를 받지 않고 파쇄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 성령의 통제를 받은 정도에 따라, 당신의 파쇄된 정도에 따라 당신의 봉사가 정해진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이것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의 감정이 쓸데 없고 사람의 총명도 쓸데 없다. 당신 몸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정도를 결코 속일 수 없다. 처리를 받은 사람일수록 사람을 알 수 있고 성령의 통제를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영으로써 다른 사람을 만질 수 있다.
한 가지 우리가 아주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많은 형제 자매들이 영적인 일에서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 감각이 없고 천연적인 것들에 대하여도 감각이 없다. 그들은 누가 머리로 사역하는지 감정으로 사역하는지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이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너무 적게 배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분이 단번에 주셨지만 우리 영의 훈련은 일생의 문제이다. 우리가 한 번 더 배울수록 한 번 더 볼 수 있다. 어떤 일에서 당신이 주님의 엄한 다룸을 받았다면 다음에 그런 일이 다른 형제에게서 움틀 때 당신은 즉시 그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많이 자라지 않고 조금 싹이 날지라도 그것을 안다. 주님이 우리 몸에서 역사한 만큼 사람의 상태를 아는 것이다. 영적인 감각은 하나씩 얻는 것이고 한 번씩 얻는 것이다. 사람이 몇 번의 느낌을 가질 수 있는가는 그가 몇 번의 다룸을 받았느냐에 달렸다. 가령 어떤 사람이 머리 속으로는 교만의 죄를 정죄하고 그 교리를 강론할 수 있으나 그의 영안에서는 교만을 그릇된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교만이 나올 때 그의 영은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동정심으로 가득 찰 수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나님의 영이 그의 위에 역사하여 그가 그의 교만을 보고 하나님의 다룸을 받았다면 그의 교만은 불태워질 것이다.' 결과적으로야 그가 변함없이 교만을 정죄되어야 한다는 교리를 하지만 한 가지 기본적인 차이가 있게 된다. 즉 어떤 형제에게서 교만의 영이 흘러나올 때 그가 잘못된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형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거부하고 미워한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배우고 본 것이 그의 느낌을 주고 그로 그것을 거부하고 미워하게 한 것이다. 거부하고 미워한다는 말은 그런 느낌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말인 것 같다. 이 때부터 그는 그 병을 알기 때문에 그 형제를 도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그 병을 앓았었고 치료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완치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약간은 치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영적 지식의 근원이다.
하나님이 성령의 주신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영적 느낌을 얻는 것은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배운 회수만큼 다양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한 번의 공과를 덜 배울 때 한 가지를 느낌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구원해서 무슨 소용이 있고 자신을 보존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기 생명을 구원코자 라는 자는 생명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자신을 보존하고 고통을 적게 받는 일에서 주님이 주고자 하시는 것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몸에서 그분의 손을 멈추시 않으시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 몸에서 역사하시고 더욱 깊이 역사하시기를 바란다. 안타까운 것은 주님이 우리 몸에서 한 번을 역사해도 결과가 없고 두 번을 역사를 하여도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거듭된 일에서 우리는 주님의 손이 무엇을 하고자 하시고 주님의 하시는 역사가 무엇인줄을 모르고 심지어 그런 역사에 대항한다. 사람에게 영적인 비결과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이유는 바로 영적인 배움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다룸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아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아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공급하는 사람도 많아진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알기 바란다. 우리가 봉사의 범위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처리받는 범위를 확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봉사의 범위만을 확충하고 우리의 처리받는 범위를 확충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행하는 방법
이런 다룸과 기본적인 배움을 가진 이후에야 우리의 영이 비로소 흘러나오게 되고 다른 형제를 만질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상태를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사람의 영을 만지려면 입으로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영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에 이른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일반적으로는 항상 사람이 입을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마음에 충만한 것을 입으로 말해낸다고 하였다. 사람의 의도가 어떠하든, 그의 수완이 어떠하든, 그가 입으로 한 말은 다 그의 마음 속에 충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입으로 말하고 있을 때 자연히 그 사람의 영이 흘러나온다. 만일 그가 오만함 사람이라면 오만한 영이 나올 것이고 만일 그가 가식하는 사람이라면 가식의 영이 나오게 된다. 만일 그가 시기하는 사람이라면 시기의 영이 나오기 마련이다. 당신은 그의 말에서 그의 영을 만질 수 있다. 사람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그의 한 말뿐 아니라 그의 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말로가 아니라 사람의 영으로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
한번은 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인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은 것을 보고 두 제자가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으로 그들의 영을 드러냈다. 주님은 <너희는 무슨 영으로 말하는지를 모르는구나> (원문에 의해 <정신>은 <영>으로 번역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의 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말을 할 때 영은 함께 따라 나온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당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하다면 당신의 말 속에 그것이 표현된다.
또 한 가지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그가 말한 일 자체보다는 그 사람의 영을 더 주의해야 한다. 가령 오늘 두 형제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갑은 을이 틀렸다고 말하고 을은 갑이 틀렸다고 말했다 하자. 이 일이 우리 앞에 놓여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일이 발생할 때 그들 둘만 있었고 아무도 그 때의 상태를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입을 열 때 우리는 그들의 영이 어떤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의 옳고 그름은 일 자체의 옳고 그름에 있지 않고 영이 옳으냐 그르냐에 있다. 한 형제가 입을 열 때 비록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영이 잘못된 것은 알 수 있는 법이다. 당신은 상대편이 당신을 욕했다고 말하지만 당신의 영이 틀릴 수 있다. 모든 문제는 영에 있다. 영이 틀린 사람은 그 일 자체가 틀렸을 뿐 아니라 더우기 그 사람 자체도 틀린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옳으냐 그르냐는 영으로 판단하는 것이지 다만 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그의 영을 만질 줄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은 그 일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영이 틀린 것이다. 만일 일 자체에 의해서만 판단한다면 교회를 다른 영역 안으로 이끌게 된다. 우리는 영의 영역 안에 머물러야 하며 일 자체의 영역 안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일 자체 안으로 끌려갈 수 없다.
우리의 영이 나올 때 비로소 사람의 각종 영의 상태를 만질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상대방의 영이 닫혀 있고 나오지 않은 것까지도 알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우리 영으로써 일을 판단하고 사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6)고 말할 수 있기를! 우리는 육체로 사람을 알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사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공과를 배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에서 갈 길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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