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린 자의 배부름 (마 5: 6)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말씀이 그렇듯이 이 말씀 역시 너무나 역설적입니다.
주린 자가 배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 3절의 말씀(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과 구성이 같습니다.
가난한 자나 주린 자나 모두 부족한 것에 대한 갈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선 의에 주린 자입니다.
의란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선을 위한 것을 의라고 했습니다. (원리강론 54쪽, 창조원리 4절 창조본연의 가치 3, 3 의와 불의 참조)
의에 주린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떠나서 타인의 문제를 놓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수준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의 가난한 자나 4절의 애통하는 자, 5절의 온유한 자는 모두 자기 자신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주린 자는 이미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서 상대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한 차원 진보한 위치에 서 있는 자입니다.
자기 고민과 염려를 떠나서 주변의 고민과 염려로 영역을 넓힌 자입니다.
본성의 자아를 찾은 자는 자연히 주변의 모습이 염려되고 걱정되는 것입니다.
우린 상대적 관계에 의해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타락한 인간들이 불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염려와 걱정이 가득 찬 사람이 의에 주린 사람입니다.
즉 온유겸손한 심령을 가진 자는 본성의 눈을 뜬 자(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연히 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의에 주린 자는 마치 독에 물이 차서 넘쳐나는 것처럼 자신의 부활된 모습이 주변에 흘러드는 것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신도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아름다워지듯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변이 아름다워진다면 그 이상 배부를 일이 있을까요?
빛이 주변을 밝히듯이 자신(의인)으로 말미암아 주변이 義化(의화)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배부르겠지요.
그럼으로 의에 주린 자는 이미 자신의 고통에서 해방된 주변을 밝히는 빛으로 변신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부활되어 본성이 회복되게 되면 이렇듯 의로운 생활을 통해 심령이 배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의에 굶주린 자가 되었는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이 배부르기를 바라십니다.
의에 주린 자는 심령이 배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