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고교동창회의 ‘친구의 날’ 행사는 1박2일 안동여행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3대의 버스는 정시보다 늦게 출발해야 했다. 친구들이 간만에 만났다고 인사하느라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출발한 버스 안에서는 잠시 조용했으나, 곧 다시 수학여행 가는 것처럼 장난치고 떠들며 왁자그르르했다.
나도 40여 년 전의 스포츠형 머리의 학생으로 되돌아간 듯 마음이 달떠졌다.
안동에서 지방친구들과 합류하니 참가인원은 150여명이나 되었다. 작년에 광양을 다녀온 친구들이 좋았다는 입소문으로 인원이 는 것 같았다.
나는 명찰을 봐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친구와 인사했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 부부도 만났다.
세월은 친구들의 새까만 머리를 허옇게 만들고, 풋풋하던 아내들의 얼굴에는 원숙미가 흐르게 만들었다.
나는 안동이 처음이라서, 출발하기 전 안동 시청의 홈피에서 명소를 알아보았었다.
하회마을, 병산서원, 임청각, 도산서원, 월영교 등 생각보다 많았다.
안동은 1999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갔다고는 하나, 작은 도시라서 별 게 있겠냐 싶었으나, 막상 가보니 산과 강이 어우러진 멋진 도시였다.
낙동강이 용틀임 하듯, 산을 끼고 이리저리 굽이쳐 흘러 많은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천하제일의 길지’라 일컬어지던 하회마을과 부용대, 서애 류성룡의 병산서원, ‘광야, 청포도’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와 그의 문학관,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도 그런 절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고 월영교를 걸으며, 몇 년 전 뉴스에 크게 보도된 ‘원이 엄마’를 떠올렸다.
언론에서는 그녀의 ‘애절한 사랑’이 미국 영화 ‘사랑과 영혼’의 한국판이라고 소개했었다.
430여 년 전, 원이 엄마는 병든 남편을 살리고자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서 미투리(신발)를 만들었으나, 야속한 남편은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그녀는 부랴부랴 한글로 편지를 썼다. 한지에 빼곡히 넋두리를 썼다. 시신의 머리맡에는 미투리를 놓고, 가슴은 그 편지로 덮어주었다고 했다.
그 묘가 온전히 발굴되어, 그녀의 애절한 사연이 대대적으로 알려졌었다. 안동시는 그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영원히 기리고자 월영교를 미투리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수백 년이 지난 부부간의 사랑이 전해져 오는 거구나...
요즘에도 그런 부인이 있을까?
만약, 죽은 남편이 나였다면, 내 아내는 어찌 했을까...?’
당시, 원이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 볼수록 마음은 안타깝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스피커에서 ‘안동역에서’란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첫눈 오는 날, 안동역 앞에서 꼭 만나자고 그녀와 철석같이 약속했건만, 첫눈은 펑펑 내리고 있는데 그녀는 오지 않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애틋한 곡조에다 절절한 가사가, 옛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도 학창시절 단발머리 그 소녀와의 만남이 어그러졌을 때, 왜 그랬는지 무척 안타깝고 못내 아쉬워했었다. 지금, 몸은 돌아 갈 수는 없지만, 마음은 그때로 돌아가 속절없이 서성대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중간쯤에 정자가 있었다. 월영정이었다. 달빛 어린 정자는 원이 엄마의 한이 느껴져, 운치가 있다기보다는 처연한 분위기였다. 정자에서는 우뚝 솟은 전망대처럼 사방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미투리모양의 다리와 출렁이는 강물, 거기에 비친 달은, 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랑을 더 애처롭게 하고, ‘안동역에서’의 노래는 내가 그 남자가 된 듯, 예전의 애틋한 풋사랑을 더 안타깝게 만들고 있었다.
“인증 샷 찍어요!” 아내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꿈을 깬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원한 강바람이 휙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자바닥에는 친구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한 친구는 자작시를 읊고, 다른 친구들은 가곡과 팝송을 불렀다.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내의 옆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내 마음을 탓하지 않는 아내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우리 부부의 사랑도 먼 훗날까지 전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심스럽고 무거워지기도 했다.
또 다른 친구가 하모니카를 꺼내 동요를 신나게 불기 시작했다. 나는 무거운 감상을 떨쳐버리고 열심히 노래를 같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