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源第四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만물의) 근원에 대해 논한다.
道沖而用之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의) 가운데로써 일삼는다.
沖, 中也. 道匿名藏譽, 其用在中.
“충沖”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음의) ‘가운데’를 가리킨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불림을 숨기고, (일부러 일삼아) 기려짐을 감춤으로써, 그 “일삼음”이 (그) ‘가운데’ 자리하게 한다.
或不盈,
(따라서)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가득) 차게 하지 않는데,
或, 常也. 道常謙虛不盈滿.
“혹或”은 늘 그러하다는 말이다. “도道”는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가) 덜어지게 하고 (일부러 일삼는 바爲를) 텅 비움으로써, (그것이 가득) “차게 하거나” (그것을 가득) 채우지 “않는다.”
淵乎似萬物之宗.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깊구나! (마치) 만물의 근원인 듯하다.
道淵深不可知, 似爲萬物知宗祖.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음이) “깊고” 깊어서 (그 “일삼음”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알아차릴 수 없는데, “만물”을 일삼는 바로서, (마치 “만물”의) “근원宗”과 조상으로 알아차려지는 바인 “듯하다.”
挫其銳,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그 (일부러 일삼아) 나아감을 꺾어야 하고,
銳, 進也. 人欲銳精進取功名, 當挫止之, 法道不自見也.
“예銳”는 나아간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또렷함이나 뚜렷함이)면밀한 바에 일부러 일삼아 “나아가고”자 하고, 공功과 (공功에 따르는) 이름을 얻는 바에 일부러 일삼아 “나아가고”자 하지만, 마땅히 그것을 “꺾고” 멈추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도道”를 법칙으로 삼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아 (그것을) 살펴서는 안 되는 바이기 때문이다.
解其紛,
그 (일부러 일삼아) 품은 원망하는 마음을 풀어야 하며,
紛, 結恨也. 當念道無爲以解釋.
“분紛”은 (일부러 일삼아) 원망하는 마음을 품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땅히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도道”를 마음에 품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으로써 (그것을) “풀어” 헤쳐야 한다.
和其光,
그 빛남을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와) 어우러지게 해야 하고,
言雖有獨見之明, 當知闇昧, 不當以擢亂人也.
이른바, 비록 (자신이) 홀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없는 “도道”에 대한) 살핌과 밝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마땅히 (세상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어렴풋해야 함과 어슴푸레해야 함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왜냐하면, 일부러 일삼아) 세상 사람들을 부추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함은 마땅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同其塵.
그 티끌됨과 (더불어) 같이 해야 한다.
當與衆庶同垢塵, 不當自別殊.
마땅히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그) 먼지됨과 “티끌됨”을 “같이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과 더불어) 일부러 일삼아 분별됨과 단절됨은 마땅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湛兮似若存.
맑구나! 마치 (사라지지 않은 채 오래도록) 존재하는 바인 듯하다.
言當湛然安靜, 故能長存不亡.
이른바, (“도道”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나 일부러 일삼는 바爲가 있음에 있어서) 마땅히 “맑고” 맑으며, 평안하고 고요한데, 따라서 (“도道”는) 오래도록 “자리한” 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吾不知誰之子,
나는 (도道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겠는데,
老子言 : 我不知, 道所從生.
노자는 일컫는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도道가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를.”
象帝之先.
상제의 앞인 듯하다.
道自在天帝之前, 此言道乃先天地之生也.
(이것은 이른바) “도道”는 저절로 그러하게 자리하는 바로서 “상제(上帝; 天帝·帝)”의 앞이라는 뜻이자, 이것은 이른바 “도道”는 이내 하늘과 땅의 생겨남에 “앞선다”는 뜻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