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비밀보고(又密啓) (사학징의 p.29~30)
운운. 사학 죄인 유관검, 윤지헌 등의 공초 중에 이국에 서찰을 전한 사람인 이름을 모르는 김가(金哥)를 기한을 정해 체포해야 하는 연유는 앞서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죄인 김가는 유산(有山)이 그의 이름인데, 그를 청주 병영에서 붙잡아 신이 있는 전라감영으로 압송해왔습니다. 이에 신이 참핵관(參覈官)인 전주 판관 정지용(鄭持容)과 부안 현감 송지렴(宋知濂), 해남 현감 홍대연(洪大淵)이 입회한 가운데 심문하였습니다. 조사 일자는 신유년(1801) 4월 26일입니다.
죄인 김유산, 나이 41세. 호패 등 인적사항 확인.(1801년 4월 26일) (사학징의 p.30~34)
“너는 어디에 살며, 어떤 신분인가? 무오년(1798)에 어떤 사람의 지휘를 받았고, 어떤 신분으로 대국에 들어갔는가? 어디에다 서찰을 전하였고, 전한 서찰은 어떤 서찰이었는가? 하나하나 사실대로 고해 바치라고 신문하옵신다.”
“저는 본래 의지할 데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는 사람으로 몇 년간 중 노릇을 하다가 바로 환속하여 홍산(鴻山) 땅에 가서 신을 팔며 먹고 살았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 이존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날 꾀어 끌며 천주교를 배우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뻐하여 이를 따르다가 허물없이 친숙해졌습니다. 그 뒤 또 몇 해가 되자 고산(高山) 적오리(積梧里)로 옮겨 갔으므로, 이존창의 집을 오가면서 전처럼 학습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는 진잠(鎭岑)의 산막동(山莫洞)에서 살았습니다.
대국으로 들어간 일은 제가 늘 한번 대국을 보려는 소원이 있었는데, 무오년(1798)에 이존창이 갑자기 제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라에 편지를 보낼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나를 위해 한 차례 다녀오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금정역졸(金井驛卒)로 이름을 얹고 차례를 건너뛰어서 들어갔습니다. 이듬해인 기미년(1799)에 이존창이 또 제게 저 나라로 들어가라고 하므로 과연 천주당에 서찰을 전하고 답을 받아서 왔습니다.
제가 본래 몹시 무식하고, 또 남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으니, 편지 속의 내용이나 서찰을 왕래한 본 뜻이야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비록 매를 맞아 죽더라도 실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살펴 처리하여 주십시오.”
같은 날(1801년 4월 26일) 죄인 김유산, 나이를 묻고 재신문함.
“너는 사학 괴수 이존창의 심복으로 여러 해 동안 자식이나 하인 같이 그를 섬겼다. 이존창이 갇혀 있을 때는 지극한 정성으로 옥사를 뒷바라지 하며 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삿된 서찰을 받아서 이국과 교통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유관검과 윤지헌 등이 명백하게 공초를 바쳤고, 이국과 교통하는 것은 죽을 죄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그를 믿었다면 네가 이존창에게 죽기를 맹세함과 다를 바 없는 정황을 미루어 알 수가 있겠다. 만약 정의가 심부름꾼과 같음이 있었다면, 편지를 통하려한 곡절과 편지 속에서 가리킨 뜻을 어찌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답장을 받을 때의 절차와 답장 속의 사연에 대해서도 응당 주고 받은 일이 있을 터인데, 완강히 참아 버티면서 끝내 바른대로 진술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대단히 해괴하다.다시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고 신문하랍신다.”
“제가 청주 병엥에 있을 적에 여러번 주리를 당한 나머지라 정신이 혼미해서 지난 일을 능히 기억하지 못해 절로 속여 감추는 죄과를 범했습니다. 제가 이존창에게서 이미 십계를 배운지라 정의가 몹시 두텁습니다. 그래서 듣지 않은 말이 없습니다. 앞뒤로 대국에 들어갔던 이유는 무오년(1798)에 이존창이 충청 감역의 감옥에 있으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중국은 천주교를 애초에 금지하거나 배척하지 않아서, 천주당을 세우기에 이르렀는데, 우리나라는 천주 십계가 나라에 유익한 줄도 모르고, 법을 두어 엄히 금하여, 죄 없는 사람들이 형벌을 받아 죽으니, 실로 원통하다. 이제 만약 이같은 이유를 자세히 진술하여 천주당의 신부에게 서찰을 통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금지함을 느슨하게 하는 길을 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모름지기 한 차례 저 나라에 왕래하여, 천주당에 들어가 보고, 그 방향을 안 뒤에 차례로 편지를 전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제가 과연 역마(驛馬)를 보는 마부로 뽑기기를 도모하여, 저들에게 간 뒤에 한 무리의 군졸들과 더불어 관광차 나가서 남천주당과 북천주당 두 곳을 다 보았으나, 여러 사람과 뒤섞여 함께 관광하던 터라 따로 저쪽 사람과 뜻을 통할 일이 없었습니다.
나온 뒤에 감옥으로 이존창을 보러 가서 대강을 얘기해주니, 이존창이 자못 기뻐하였습니다. 기미년(1799)에 이존창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었는데, 또 저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미 한 차례 중국을 왕래해 보았으니, 편지를 전할 방법이 생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이번 사행에 다시 들어가도록 하라.’ 그러고는 돈 15냥을 주어 행장을 꾸리게 하였습니다. 또 희고 가는 명주로 된 겨울 옷 한 벌을 푸른 보자기에 싸서 내주며 말했습니다. ‘이 속에 편지가 있네. 서울 정생원(丁生員: 정약종)의 서찰일세. 틀림없이 중국 천주당 신부에게 잘 전해야 하네.’ 그래서 제가 편지 속의 내용을 묻자, 이존창이 말했습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나온 것이 오래지 않았고, 우리나라 사람이 또 지은 죄가 많아서 그 도리를 널리 펼치기가 어렵다. 이제 만약 정성을 다해 기도하여 구한다면 많은 사람을 건질 수가 있고, 나라에서 금지하는 것 또한 이를 통해 느슨해질 수가 있다. 내가 지금 죽을 땅에 빠져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천주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단지 형벌로 죽여 이를 금지시키니, 이는 진실로 걱정스럽다. 교리를 널리 펴는 방법은 다만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그로 하여금 변통케 하는데 달려 있다.’
제가 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옷속에 꿰매 두었다는데, 문질러도 종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지요?’ 이존창이 말했습니다. ‘명주 비단에다 써서 흉배 사이에 꿰매두었네.’ 제가 또 물었습니다. ‘이 편지를 어째서 직접 만들지 않고, 서울 정생원에게서 오게 되었는지요?’ 이존창이 말했습니다. ‘내가 감옥 속에 있다 보니, 정생원이 편지를 지어서 겨울 옷에 넣어서 온 것이라네.’ 제가 그가 준 돈으로 참빗과 생강 등의 물건으로 바꿔 사서 평안도로 내려가, 다른 역졸과 교체하여 삼방(三房: 서장관)의 태평거를 끄는 마부가 되어 들어가서 저들의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틈을 보아 혼자 가서 남천주당 문 밖에 이르자, 문지기 한 사람이 팔뚝을 밀치며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손으로 가슴 위에 십자가를 긋고, 또 입고 있던 겨울옷을 문지르자, 그가 그제서야 친근하게 대하면서 옷을 잡더군요. 그래서 옷을 벗어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바로 관소로 돌아왔다가, 출발 전 3일이 되어 또 갔더니, 저를 불러들여 교의에 앉히더니, 차를 대접하고 또 소수 한 잔과 대추와 배 같은 물건을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지난 번에 주었던 겨울옷을 꺼내와 제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서가 봉한 가운데 있는 줄을 알아채고, 앞서 처럼 이를 입었습니다.
조선으로 나와보니 이존창은 감옥 속에 있었으므로 제가 옥중으로 가져다가 전해주었습니다. 이존창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마땅히 이 옷과 함께 정생원의 집에 보내게.’ 하루 뒤에 다시 이존창을 만나보고 그 답서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마두(利瑪竇)가 중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했을 때 아무도 그것이 좋은 도리인 줄을 알지 못해, 엄하게 금함이 우리나라와 같았다. 그 뒤 서양국 사람이 큰 선백을 타고서 보화를 싣고 중원으로 나와, 높직하게 천주당을 짓고 그 학문을 가르치고 그 도를 행하여 이제껏 흠숭하고 있다. 큰 선박이 만약 우리나라로 나온다면 일이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물길은 얕고 좁아서 큰 선박을 띄우기가 어려워, 나오기가 쉽지 않다. 중국의 천주당으로부터 특별한 변통의 도리가 있을 것이다. 이미 나온 신부가 만약 가르침을 세우다가 죽더라도 또 마땅히 나올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사람 숫자의 많고 적고는 분명하게 알기가 어렵다.’
작년(1800) 봄에 이존창이 천안의 행수군관(行首軍官)을 수행할 때 제가 또 가서 보았더니, 이존창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안도 선천 땅에 이름을 모르는 의원 노릇하는 옥가(玉哥: 옥천희)가 대략 문자를 알고 저들의 말을 잘 하는데, 게다가 서교를 익혀서 가장 열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무리들이 그 사람을 중국에 들여 보내려는 의논이 있다네, 그 사람이 만약 들어간다면 우리 학문이 틀림없이 성행할 수 있는 가망이 있게 되네.’ 이 옥가를 지금 만약 붙잡는다면 틀림없이 알 수 있습니다. 살펴 처리해주십사는 뜻으로 공초를 올립니다.”
이제 이 김유산은 거처가 일정치 않고, 승속(僧俗)을 들락거려 행동거지가 절로 수상합니다. 사학의 수괴인 이존창에게 깊이 미혹되었고, 또 여러 해 감옥을 왕래하면서 죽음으로 맺은 무리가 되어, 역졸의 부치로 가탁하여 앞서 응모하였다. 나라에서 금지함이 지극히 엄함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이국과 교통하여 사학 괴수의 지휘를 기꺼이 들었고, 추악한 부류와 왕복하며 자취를 비밀로 감춰, 요망한 서찰을 전달한 정황은 지극히 흉악하고 간사하였고, 일 처리는 갈수록 더욱 교묘해졌다. 그가 자백한 것이 두 죄수의 공초와 딱 맞아 떨어지니, 자세히 신문한 것이 실정을 얻어 조금의 느슨함도 용납지 않는다. 인하여 포청의 공문에 의거하여 동 죄인 김유산 한 몸을 붙잡아 보내고, 옥가는 포청에 공문을 보내 그로 하여금 기찰하여 붙잡게 하시라는 뜻으로 삼가 계를 갖추어 올립니다.
3차 비밀 보고(又密啓)(사학징의 p.35)
운운. 방금 도착한 좌우 포도청의 공문 안에, 비변사에서 계(啓) 하기를, “전라감사의 장계(狀啓)는 묘당(廟堂)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장계의 원본을 가져다 보니, 사학 죄인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은 모두 의금부에서 잡아와 엄하게 조사케 할 것을 아울러 요청하였습니다. 유관검의 형 유항검은 국청으로부터 이미 포청에 분부하여 잡아 가둔채 자세히 신문하였으니, 이제 다시 의금부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의 세 죄인들 또한 포청으로 하여금 즉각 압송해 오게 해서, 유항검과 함께 신문하고 자세하게 조사하여 법을 적용함이 어떻겠습니까?”고 하자, “윤허한다”고 전교하셨기에, 이에 별도로 포교와 나졸을 정해 밤에 몰래 내려보낼 것이니, 동 죄인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세 사람은 내려간 군관에게 바로 내주고, 도중에 있는 각 고을에서는 따로 포교와 나줄을 정해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압송하는 일은 본영에서 글을 만들어 공문으로 보내 알아서 거행케 함이 마땅하겠기에 지난 번 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위 항목의 죄인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을 지금 온 포청 군관 박동순(朴東淳), 박시성(朴是性) 등에게 압송케하여 올려 보냅니다. 유관검과 윤지헌 등이 공초 중에서 이국과 서찰을 주고 받을 때 왕래한 사람이라고 한 김유산(金有山) 또한 붙잡아 와서 공초를 받은 뒤에 한 몫으로 포청에 이송하는 이유는 따로 장계를 갖추어 그 연유와 함께 삼가 보고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