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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5일/ 계초심학인문 제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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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衆療호대 須相讓不爭하며 須互相扶護하며 愼諍論勝負하며
愼聚頭閑話하며 愼誤着他鞋하며 愼坐臥越次하며 對客言談에
不得揚於家醜하고 但讚院門佛事하며
不得詣庫房하야 見聞雜事하고 自生疑惑이어다.
非要事어든 不得遊州獵縣하야 與俗交通하야 令他憎嫉하고
失自道情이어다.
儻有要事出行이어든 告住持人과 及管衆者하야 令知去處하며
若入俗家어든 切須堅持正念하야
愼勿見色聞聲하고 流蕩邪心이어든 又况披襟戲笑하야 亂說雜事하며
非時酒食으로 妄作無碍之行하야 深乖佛戒리오.
又處賢善人의 嫌疑之間이면 豈爲有智慧人也리오.
住社堂호대 愼沙彌同行하며 愼人事往還하며 愼見他好惡하며
愼貪求文字하며 愼睡眠過度하며 愼散亂攀緣이어다.
반갑습니다. 한 주일을 쉬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니까 방송이 애를 먹이네요, 그래도 다행히 연결이 되어서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계초심학인문 다섯 번째 시간으로
거중료居衆僚호대 수상양부쟁須相讓不爭하며, 여기서부터 할 차례인데 내용은 대중생활에 있어서의 주의사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중생활이라 해서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모여 사는 것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현대 사회는 가는 곳마다 모임이 있어 혼자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러 저러한 인연에 의해서 항상 여러 가지 모임이 있기 마련입니다.
계모임도 모임일 수 있지만 기타 등등 얼마나 많은 모임들이 있습니까? 그럴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 남을 위하는 마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사실 생각해야 되는데,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한 예들이 참 많지요.
이런 점들을 스님들의 단체생활을 통해 좀 본받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우리 어릴 때 듣기로, 단체 생활이 아주 엄한 곳이 세상에는 세 곳이 있는데 그 세 곳만 거쳐 나오면 이 사람은 어디를 가도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만치 모가 깎이고 자기의 개성이 둥글어지고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그런 훈련이 된다는 뜻이지요.
승려 생활이 그 하나이고, 군대 생활이 두 번째이고 그 다음 형무소 생활인데 형무소도 생활이 아주 엄하기로 손꼽히는 단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형무소에 가서 그런 단체 생활을 배워오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세 곳의 단체생활이야말로 참으로 엄하기 이를 데 없고 보면 그 나름의 규칙이 있어서 질서를 잡아 갑니다.
왜 그런가 하니 세 곳 모두 각각 다른 사람, 다른 배성, 다른 지방,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승려 생활도 그렇고 군대 생활도 그렇고 형무소 생활도 그래요.
그렇게 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 단체를 잘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 생각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지금
居衆僚호대-대중이 사는 집에 함께 더불어 살되 라는 뜻인데 교재에는 료자가 잘못되어 있지요. 치료할 료療자가 아니고 집료僚자, 동료同僚라고 할 때 쓰는 료 자여야 합니다. 갓머리 밑에 쓰는 것이지요.
대중이 머무는 집에 같이 살되,
수상양부쟁須相讓不爭하며- 반드시 서로 사양해서 다투지 말며
수는 반드시란 뜻이지요. 그렇지요. 서로 사양하여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須互相扶護하라고 그랬어요.
우리가 상호라는 말을 쓰는데 호상이나 상호나 같은 말입니다. 또 모름지기 서로서로 도와서 보호하라고 그랬습니다. 서로서로 지켜주고 보호하고 이렇게 해야지요.
대중생활에 있어서는 자기를 비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 그리고 화합을 우선으로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이고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이고 수행을 위해 모여 사는 스님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옳고 그른 것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람 사이의 관계는 화합이 중요하지 그것이 조금 더 옳거나, 조금 더 옳지 못한들 사실 뭐하겠습니까?
아무리 옳다하더라도 화합이 깨어져 버리면 그 옳은 게 아무 가치가 없고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화합으로서 우선을 삼는 것을 사찰생활과 수행생활의 철칙으로 합니다.
육화경이란 말도 있고 원효스님의 화쟁사상도 있지요. 이것은 단체생활의 큰 과제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것에 다 해당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불화, 이웃과 이웃 사이의 불화, 동네와 동네 사이, 또 지방과 지방 사이, 단체와 단체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그 불화 때문에 슬픔을 겪고 아픔을 겪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에서도 말씀하시길,
서로 사양해서 다투지 말며 서로서로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또 신쟁론승부愼諍論勝負라 그랬지요. 쟁론해서 승부를 다투지 말라고 했습니다.
승과 부를 다투지 말라, 여기의 諍자는 다툴 쟁자이고, 저 앞의 부쟁不爭할 때의 爭자는 우리말로는 같이 다툴 쟁자인데 저기에서는[爭] 행위로서 다투는 것이고, 말씀언이 있는 쟁은[諍] 말로써 다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쟁론승부愼諍論勝負는 쟁론에서 이기고 지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질을 부려가며 한마디를 더 한들 그것이 뭐 그렇게 득 될 게 있으며, 그래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든지 상처를 주게 되면 뭐 그렇게 좋은 일이 되겠습니까?
옳고 그른 것은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가는데 있어 진정 의미 있는 것은 화합입니다.
아주 화기애애한 그러한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지 옳고 그른 것은 정말 의미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우리는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취두한화愼聚頭閑話하며- 또 머리를 모아서 부질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저기 삼류잡지에나 오르내리는 연예인들 이야기, 정치인 이야기 등을 하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찰의 지대방에는 으레 ‘지대방조실’이라고 해서 세상이야기에 아주 밝고 또 세상이야기를 즐겨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신문도 못 보게 되어 있는데 어디 가서 정보를 듣고 오는지 ‘이런 이런 뉴스가 났다’고 하지요, 뭐 맞지도 않는 것을 자기 깜냥대로 자기 감정대로 막 늘어놓습니다.
머리를 모아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처음 발심하고서 수행하러 들어온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런 사람들에겐 더욱 필요한 이야기지요. 머리를 모아서 부질없는 이야기하기를 삼가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신오착타혜愼誤着他鞋하며-또 다른 사람의 신 잘못 신음을 삼가며라는 뜻입니다.
스님들이 사는 대중방엔 보통 십 명, 이십 명, 삼십 명, 많은 경우는 사십 명, 심지어는 한 방에 오십 명도 살거든요.
신에 표시를 잘 안 해놓으면 다 비슷비슷하지요. 옛날에는 거의 똑 같은 고무신을 신었기 때문에 뭐, 문수도 같고 금방 닦아 놓으면 색깔도 똑 같아서 잘못 신기 일쑤입니다. 잘못 신는 경우가 많지요.
이 글이 나온 시절에는 모두 짚신을 신었을테지요. 짚신도 모양이 똑 같지요. 그러니까 잘못 신을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을 잘못 신는 경우가 발단이 되어서 말하자면 언쟁이 벌어질 수가 있고 큰 싸움이 벌어질 수가 있지요.
그래서 신을 신는 곳에 보면 조고각하照考脚下라는 이런 말을 써 놓았어요.
본래는 자신의 주인공을 놓치지 말고 잘 살피라는 이런 뜻인데 그것이 좀 더 부연되고 발전해서 자기 임무를 완수하라, 자기 소임을 충실히 살라는 뜻도 포함되게 된 것이지요.
회사사원이면 회사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고, 또 주부일 것 같으면 살림을 철저히 잘 살아야 되고, 순경은 순경대로, 선생은 선생대로 각자 자기 소임에 충실하라는 의미에서 조고각하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신을 신는 댓돌 위에다가 또 써 붙여놔요, 거기에 딱 맞는 말이기는 하지요. ‘다리 밑을 잘 살펴봐라’, 자기 신인지 남의 신인지를 잘 살펴보고 신으라는 의미로도 씁니다.
또 신좌와월차愼坐臥越次- 앉고 눕는데 순서 넘어감을 삼가라고 했어요.
앉는 데도 앉는 순서가 있고 눕는 데도 눕는 순서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거야 한 자리에 몇 십 명이 누워 잔다면 거기는 분명히 순서를 정해놓고 눕는 것이지, 따뜻한 자리라고 해서 아무나 차지해서 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름에 시원한 자리라고 해서 아무나 먼저 가서 눕는 사람이 임자인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 자리가 뜨겁든 춥든 정해진 자기 자리에 항상 가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해야 한다는 거지요.
어린 사미들이 순서를 넘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차지해서 앉고 눕는 일이 가끔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대객언담에對客言談에 부득양어가추不得揚於家醜하고-객을 대해서 말할 때 집안의 추한 것을 드날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지요.
자기 도반이 오거나, 친구 혹은 속가의 인연 있는 사람, 또 아는 신도가 오는 경우가 많지요. 그럴 때는 분명히 선을 긋고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객을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집안의 추한 것을 드날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뭐, 주지스님이 얼마나 잘 하고, 잘못하고 또 소임 사는 스님들이 어떻고, 강원이 어떻고, 선방이 어떻고...
이런 데 대해서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는 서로 경책도 할 수 있고 충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바깥 사람들을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 보기에 속빈 사람 같아 보이더라도 집안의 좋은 점을 이야기 해야지, 안 좋은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드날려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행위이지요.
혹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집안의 속상한 일들을 밖에 나가 한 번씩 이야기를 해 버리는 그런 예도 있긴 합니다만 그렇더라도 역시 집안의 안 좋은 점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단찬원문불사但讚院門佛事하라고 되어 있어요. 다만 원문의 불사만을 찬탄하라고 했어요.
아, 우리절에는 말이야, 기도도 이렇게 이렇게 열심히 하고, 어느 법당을 맡은 스님은 또 이렇게 이렇게 열심히 잘 하고, 어떤 소임자는 이러한 일을 이렇게 잘 하고, 우리절은 불사를 이렇게 잘 하고, 또 교화는 이렇게 잘한다는 등 사찰의 불사를 다만 찬탄하며,
부不
득지고방得詣庫房하야-고방에 나아가서,
견문잡사見聞雜事하고-잡된 일을 보고 듣고
자생의혹自生疑惑-스스로 의혹을 내지 말지어다.
그러니까 사무실이나 원주실이나 후원 같은 곳에를 나아가지 말라는 거지요. 물론 후임자는 가서 살펴야 하고 감독도 해야 되고 잔소리도 해야 되겠지만, 그 외의 대중들은, 특히 어린 사미는 그런 곳에 소임을 주지 않거든요.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어린 사미들은 그저 큰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되어 있는데 공연히 그런 곳을 기웃거리면서 이런 저런 사중寺中 돌아가는 것들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스스로 의혹을 내는 거예요.
‘아니, 저렇게 좋은 음식이 있는데 우리한테는 왜 안돌아 오는가? 보니까 원주실에는 돈도 아주 많이 들어오는 것 같은데 대중생활은 왜 이런가? 저걸 혹시 소임자들이 사취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곳에는 아예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방에 나아가서 이런 저런 잡된 일을 보거나 듣고 스스로 의혹을 내지 말지어다.
그렇습니다. 대중생활에 있어서 또 어린 사미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요.
또 집안을 예를 들어보면, 초등학생이나 중. 고등학생의 신분이라면 부모들의 회사 사정이나 이런 데 대해서 너무 알려고 하고, 부모님의 일에 대해서 제대로 하는지 못하는지를 생각하는 것도 이런데 해당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학생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우리가 잘 생각하면 사회에서라도 충분히 적용이 되는 그런 생활지침이고 교훈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대중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출입의 문제로 넘어 갑니다.
비요사非要事어든 부득유주엽현不得遊州獵縣하야- 요긴한 일이 아니어든 주에 놀고 현에 놀아서
라는 뜻인데 지금으로 보면 시내에 가거나 아니면 서울을 가거나 면 소재지, 군 소재지에 내려가는 경우가 됩니다.
그래서 여속교통與俗交通이라- 속인들과 더불어 사귀고 알고 오고가고 하는 그런 행동을 해 가지고는
영타증질令他憎嫉하고 실자도정失自道情이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미워하고 질투하게 하고, 그리고 또 스스로 도에 대한 마음을 잃지 말지어다. 아니 불不 자를 이제 여기다 씁니다.
그러니까 출가 수행하는 스님이 자꾸 마을이나 시내에 가서 마을사람들이나 시민들과 연관을 맺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관여도 하고 또 의논도 하고 그러다보면 같이 사는 동료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거예요.
자기 위치에 충실해야지요. 말하자면 조고각하라고 했듯이 다리 밑을 잘 살펴야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처해있는 그 신분에 알맞은 생활을 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못하면 동료들이 미워하는 거지요.
실컷 마을에 왔다 갔다 하고는 때 되면 와서 제자리에 앉아 있어 보세요, 그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도를 닦는 자신의 마음도 저절로 자꾸 해이해지겠지요. 사람의 마음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세속 일에 마음을 많이 쓰면 도 닦는 일, 출세간 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아무래도 없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미움을 사고 자신의 도에 대한 관심은 차츰차츰 잃어가게 되니 절대로 그렇게는 하지 말라는 거지요.
꼭 가서 봐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가야지요. 그래서 비요사非要事라고 했어요, 요긴한 일이 아니거든 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유요사출행?有要事出行이어든- 만일 요긴한 일이 있어서 출행하거든
고주지인告住持人과- 주지를 하는 사람과
급관중자及管衆者- 대중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고하라는 말이지요.
“내가 오늘 시내에 이러이러한 볼일로 몇 시부터 나가는데 볼일을 보고 몇 시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알리라는 거예요.
그래야 누가 갑자기 찾더라도 “아, 그 스님은 지금 이러이러한 일로 면 사무소에 갔다.”라고 말할 수가 있거든요.
주지에게도 알리고 대중을 관리하는 사람에게도 알리라고 했습니다. 일일이 주지에게 못 알리면 대중을 관리하는 분에게 알리면 되지요. 입승도 입고 찰중도 있는데 그 분들께 알리고 허가를 맡아서 가게 됩니다.
시내에 나가도 옛날에는 출입증이 있어서 허가를 맡아서 나갑니다. 또 하루종일을 다녀오는 것 같으면 더 높은 데까지 허가를 맡고, 그리고 하룻밤을 자고 오게 되는 일은 정말 허가가 잘 안 나거든요, 그때는 출행증을 써 가지고 다녀오고 그렇게 합니다.
어디 나가서 다른 사찰에 들리잖아요? 그럼 출행증이 있느냐고 물어서 그것을 보고 어느 사찰 소속이며, 불명은 누구이며 은사는 누구인지를 전부 확인하고 나서 객실에 재워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그렇게 했었는데 근래에는 그게 없어져 버렸지요.
그래서 영지거처令知去處- 가는 곳을 알게 하라.
약입속가若入俗家어든- 만약 속가에 들거든
다니다 보면 신도집에도 갈 수 있고, 자기 속가에도 갈 수 있겠지요.
그러거든 절수견지정념切須堅持正念하야- 간절히 모름지기 바른 생각을 굳게 가져서
똑바른 수행자로서의 어떤 정신을 잃지 말고 그대로 지켜서
신물견색문성愼勿見色聞聲하고-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세상의 온갖 안 보던 것을 본다든지 또 그렇게 안 듣던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그런 것을 삼가 사물을 보거나 소리를 듣지 말고
유탕사심流蕩邪心이어든- 삿된 마음을 흘려서 방탕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황피금희소又?披襟?笑하야-그런데도 또한 하물며
피금희소라- 옷깃을 헤치고 히히덕 거리고 웃는다는 거지요.
농담하고 웃기는 소리 막 하고, 허허거리고 웃는다는 거지요.
아, 스님들하고 수행자가 잠깐 짬을 내서 그렇게 웃고 떠드는 것도 삼가야 하거늘, 세속에 가서 속인俗人들하고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웃기는 소리를 하고 옷을 벗어 제껴놓고 웃는 다고 하면 그게 참 모양이 그렇지요. 수행자로서의 모양이 그렇고 더구나 사미라면 더욱더 모양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난설잡사亂說雜事하며- 잡된 일을 어지럽게 말하며
그러다보면 또
비시주식非時酒食으로- 때 아닌 때에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때도 아닌데 음식을 먹게 되거나 또 술을 마시는 경우가 생기는 수도 있겠지요.
망작무애지행妄作無碍之行하야-망령되이 걸림이 없는 행을 지어서
심괴불계 深乖佛戒리오-깊이 부처님의 계행을 어기겠는가!
어겨서는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이지요.
저 앞에서 그랬지요? 속가에 가거든 바른 생각을 굳게 지켜서 절대 사물을 보거나 다른 소리를 듣지 말고, 삿된 마음을 흘려서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옷깃을 헤치고 웃고 잡된 일들을 그냥 어지러이 말하고, 아무렇게나 막 먹고 마시고 해 가지고 함부로 행동을 해 가면서 부처님이 내리신 계율을 어길 수가 있겠는가, 그런 말이지요.
그리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찰에 있는 어른스님들이 걱정을 하고 염려하지요. 그리고 의심을 하게 되지요.
‘아, 저사람 말이야, 중이 된지도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저렇게 속가에 왔다 갔다 하면서 속인俗人들 하고나 사귀고 참 이상하다’고 여기지요.
그래서 이제 우처현선인又處賢善人의 혐의지간嫌疑之間이면- 또 어질고 착한 사람들의 혐의하는 사이에 처하면,
미워하고 의심하게 되겠지요.
단체 생활을 하면서, 또 스님이라고 하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항상 똑같이 생활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 자꾸 빠져 나가 그렇게 속가에나 갔다 오고 그러면 싫어하고 의심하지요.
‘저 사람, 저러다 속가에 갈려고 하는 게 아닌가? 사업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것 같으면,
기위유지혜인야豈爲有智慧人也리오-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을에서도 그렇지요.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동네 어른들이 ‘아, 저놈 말이야, 이상해 몹쓸 놈이야’ 이렇게 염려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 젊은이는 앞날이 뻔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여기서 이제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 되겠는가!’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지혜를 갈고 닦는 수행단체에서 지혜를 닦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역시 연결되는 말인데
주사당住社堂호대-사당에 머물되
이 사 社자는 회사라는 社자인데 모일 社자이지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또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인다는 뜻의 社자입니다.
회사會社 할 때의 社자여도 좋은 일을 하기 위한 그런 단체, 모임,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송광사 같은 데는 수선사修禪社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때 이 社자를 써요, 또 결사結社 할 때의 사 자도 이 社자를 씁니다. 모일 社자입니다.
원래 세속적인 뜻으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모인다는 이런 뜻이니 제사를 지내는 그런 정신과 마음이라면 더 이상 비할 데가 없는 그런 경건한 자세 아니겠습니까?
이 社자가 회사라는 社자로도 쓰지만 뜻이 깊습니다.
수행하기 위한 모임, 이런 뜻이 되겠지요. 그런 집과 당에 머물되,
신사미동행愼沙彌同行하며-사미와 동행함을 삼가며
계초심학인문의 첫 문장이 부초심지인은~ 그랬어요. 처음 마음을 낸 사람에게, 어린 사미에게 또는 행자에게 일러주는 그런 가르침인데 이 문장에서는 사미와 동행함을 삼가라 했는데 이것에 무슨 뜻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속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미와 동행함을 삼가라 했습니다.
또 신인사왕환愼人事往還하라- 인사한다고 가고오고 하지 말라 고 그랬습니다.
사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설이 됐으면 대개 큰 법당에 모여서 함께 인사 한 번 하면 그걸로 끝이 나야 되는데, 또 각 방마다 다 찾아다닙니다.
무슨 목적으로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 찾아 다녀요. 서로가 시간 낭비이고 번거롭거든요.
쓸데없는 이런 말, 저런 말이 나오고 말 많으면 오해가 있게 마련이고, 남의 감정 건들게 마련이고, 뭐 못난 중생들이 하는 짓이란 안 하는 것만 못한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설에 모이면 덕담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인사하기 위해서 가고 오는 것을 삼가라 했습니다.
이제 또 설이라고 은사스님께 가서 인사를 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것도 해제나 하고 가면 모를까 결제 중에 다니는 것은 안 맞는 일이지요.
그래서 인사하러 가고 오고하는 것을 삼가며
신견타호오愼見他好惡하며- 다른 사람의 호오好惡 오는 것을 삼가며
호오라고 읽습니다. 좋은 일과 미운 일, 나쁜 일이지요. 호악이라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옛날부터 호오라고 읽어 왔습니다. 좋은 일과 미워할만한 그런 일 보는 것을 삼가라.
그러니까 뭐 남의 좋은 것도 보지 말고, 남의 안 좋은 것은 더욱 보지 말라는 거지요. 괜히 보고나면 인상 찌푸리게 되고 무슨 경책을 하게 되고 꾸중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누가 받아들입니까? 결코 받아들이지 않거든요, 남의 말 듣고 고치려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말이 있어요. ‘모두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르쳐서 그것을 고쳐주려고 하는 사람은 더 잘못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있어 남의 말을 듣고 자기의 행동을 고치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타내는 그런 말이지요.
그러니까 남의 좋고 나쁜 것을 보고 따지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 잘 하기도 어려운데 남 잘잘못을 보면 으레 말하게 되지요.
그것도 자기 기준이지, 꼭 틀림없이 좋고, 틀림없이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기준으로 그냥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고 좋다, 나쁘다 하는 것입니다.
괜히 자기 기준으로 틀리게 말해 놓고는 다른 사람을 두고 옳다 그르다 지적하면 그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맞지요.
신탐구문자愼貪求文字하며- 문자 탐구함을 삼가라 그랬어요. 이 참 중요한 말인데 시를 좋아한다든지 문학 하는 것을 좋아 하는 일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거든요.
이 글은 고려 때의 보조스님 글인데 조선시대에 와서 서산스님도 그런 경책을 했습니다.
출가한 중들이 경전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세속의 시나 세속의 아주 미려하고 아름다운 많은 글들을 보고는 그것을 베끼고 써 가지고는 비단 책갈피를 해서 애지중지한 그런 예들이 간혹 있었나 봅니다.
뭐 경전이나 어록을 그렇게 하는 것은 모르겠으나 세속의 어떤 시문을 가지고 숭상을 하고 거기에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출가스님으로서 시를 쓰고 문학을 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피리를 부는 등 예술 쪽으로 심취해 가지고 그 일에 오랜 시간 종사하는 것은 사실 바람직하지 못하거든요.
수행자의 할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가 그쪽으로 소질이 있다손 치더라도 경을 읽거나 조사스님의 어록을 공부하거나 아니면 참선을 하거나 연구를 하는 것이 본업이지요.
‘상사는 참선하고 중사는 간경하며 경과 어록을 공부하고, 하사는 사중寺中 일을 하면서 복을 짓는다’라고 딱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일 외에는 하면 안 되는 거지요. 하다못해 원주를 살든지 별좌別座를 살든지 공양주나 채공菜供을 살든지 사무실에 가서 사무를 봐서 대중들의 생활을 돕든지 그렇게 해야지, 무슨 시나 문학이나 또 글씨나 그림, 다도 등을 너무 즐기는 것은 스님으로써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에요. 수행자의 생활이 아닙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지요.
여기에 신탐구문자愼貪求文字하라 했는데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문필을 좋아하고 시나 문학적인 것을 숭상하는 스님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지적해서 꾸중을 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서예나 글쓰기, 그림, 조각, 도자기, 다도 등 온갖 세속적인 것, 심지어 무슨 선무도, 운동(운동은 더 하지요.)이나 기타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버젓이 하면서도 무슨 자랑을 하고, 또 그것으로써 불교를 전한다고 말은 그렇게 갖다 붙이지요.
그림을 통해서 불법을 전한다, 사진을 통해서 무슨 부처님 사상을 전한다 하는데 다 되도 않은 소리이지요.
그게 안 맞는 말입니다.
신탐구문자愼貪求文字란 말 속에는 그런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신수면과도愼睡眠過度하며- 도에 지나치게 잠자는 것을 삼가며
신산란반연愼散亂攀緣이어다- 산란하게 반연함을 삼가라.
산란하게 반연한단 소리는 자꾸 세속적인 것, 문자를 탐구한다든지 무슨 세상일에 관심을 쓴다든지 하면 자꾸 산란해지고 거기에 또 끄달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그린다든지 사진을 찍는다든지 글씨를 쓴다든지 하면 그것에 관계된 사람들과 또 필요한 도구와 인연을 맺어야 되니 얼마나 산란하고 쓸데없는 반연이 늘어나겠습니까?
올곧게 수행일변도로 나가는, 말하자면 수도승이라면 그런 것을 반드시 삼가야겠지요.
그런 뜻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출가수행자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렇지요. 자기가 목표로 세운 한 가지 일을 성취하려면 결코 다른 일에 눈을 돌리거나 기웃거리거나 관심을 많이 갖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외곬으로 나가야 뭐 하나를 이룰까 말까이지요.
그러니까 모르는 게 없다는 사람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하고 똑 같듯이 이게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그렇습니다. 특히 출가수행자는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을 보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취미 없고 그것이 영 소질이 없다는 사람은 절 살림이라도 살라는 것입니다.
사찰도 지키고 공부하는 대중들의 시봉이라도 잘 하고 건물이라도 잘 지키고, 거두고, 수리하고, 청소하는 그런 일이라도 하라고 딱 못을 박아 놨습니다.
이런 것들은 스님들께도 그렇습니다만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참고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계초심학인문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계초심학인문 제 5강 강의녹취: 은우
첫댓글 큰스님 법문 갑사드림니다...미륵골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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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합니다. 잘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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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골님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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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감사합니다._()()()_. 미륵골님 감사합니다._()()()_
대중이 머무는 집에 같이 살되 반드시 서로 사양해서 다투지 말며 또 모름지기 서로 서로 붙들어 보호하며 쟁론해서 승부를 하지 말라. 머리를 모아 부질없는 이야기를 삼가하며 다른 사람의 신 잘못신는것을 삼가하라.照顧脚下(화두를 잘 챙겨라,자신의 소임을 잘 살펴라.자신의 주인공을 놓치지 말라.).客을 대해서 말을 할때 집안의 추한것을 드날리지 말며 다만 원문의 佛事만을 찬탄하라.육화경이나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은 지금 우리시대에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생활실천 사항이다.
고방에 나아가서 잡된일을 보고 듣고 스스로 의혹을 내지 말지어다.요긴한 일이 아니거든 속인들과 더불어 소통해서 다른 사람의로 하여금 미워하고 질투해서 스스로 道의마음을 잃지 말지어다. 만약 요긴한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가게 되거든 주지하는 사람과 관중자(입승)에게 가는 곳을 알려야 하며 만약 속가에 들어가거든 간절히 바른 생각을 굳게 지켜서 사물을 보거나 소리를 듣지 말며 삿된 마음을 흘려서 방탕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옷깃을 헤치고 농담하며 웃어야 하겠는가.잡된일을 어지럽게 말하며 때아닌 때에 음식과 술을 마시는 것으로 망령되이 걸림없는 행을 지어서부처님의 계행을 어겨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의심을 하는데 처하게 된다면 어찌 지혜있는 사람이라 할수 있겠는가? 사당(좋은일,제사)에 머물되 사미와 동행함을 삼가며? 인사를 위해 오고 가고 하지 말며(결제 중에) 다른 사람의 좋은 일과 미운일,문자 탐구하는 일을 삼가하며 道에 지나치게 잠자는 것을 삼가하며 산란하게 반연(그림,사진,문학,도자기,서예등등)하는 것을 삼가하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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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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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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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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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_()()()_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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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견타호오(愼見他好惡)하며- 인사한다고 가고오고 하지 말라. 수행자는 다만 시간을 아껴 수행할 뿐...
신탐구문자(愼貪求文字)하며- 문자 탐구함을 삼가라. 외골수로 나가야 한 가지라도 이룬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각합장()()()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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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거중료僚 → 寮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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