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첫눈 오는 날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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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새해 새 아침 -신동엽
새해
새 아침은
산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 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신동엽·시인, 1930-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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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정호승
해뜨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갑니다
누님같은 소나무가 빙그레 웃는
새해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맑은 연꽃대에 앉은 햇살 하나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사랑하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다시 길을 가게 합니다
어두운 골목
무서운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제 더 이상 당신 혼자 떨지 않게 합니다
쓸쓸히 세상을 산책하고 돌아와 신발을 벗고
이제 더 이상 당신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합니다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과
편안함의 괴로움을 스스로 알게 합니다
때로는 마음의 장독대 위에 함박눈으로 내려
당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낮아지게 하고
당신을 낮아지게 함으로써 더욱 고요하게 합니다
당신이 아직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지 못하고
바람과 바람소리를 구분하지 못할지라도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천개의 차가운 강물에 물결지며 속삭입니다
돈을 낙엽처럼 보라고
밥을 적게 먹고 잠을 적게 자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살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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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설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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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새해 새날은 오세영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
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밫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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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희망의 주소 정채봉
외딴 두메 산자락에 바위가 한 덩이 있었고, 그 바위 곁에는 진달래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바위는 아무도 오가는 사람이 없는 산모퉁이에서 진달래로부터 계절을 알아내곤 하였다.
봄은 뽀얀 안개가 숨겨 오곤 하였다. 안개가 며칠 산자락을 휘감았다가 사라진 뒤에 보면
진달래 꽃봉오리가 불긋불긋 벙글어 있곤 하였다. 그러나 이내 진달래꽃이 지고
푸른 잎이 피어나면 여름이었다. 가을은 푸른 잎새에 노을이 설핏설핏 묻어나면서 왔고,
겨울은 나무들이 모두들 바위처럼 맨몸이 되면서부터 시작되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 바위는 진달래 빈 가지에 매달린 이상한 것, 고치를 보았다.
고치는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가볍게 흔들리거나 할 뿐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바위가 물었다.
"거기 그 속에 누가 있니?"
"네, 있어요"
"누구니?"
"애벌레예요."
바위는 후후 웃었다
"그럼 너도 나처럼 갇혀 있구나."
"아네요, 나는 갇히지 않았어요."
"갇히지 않 았 다 구?"
"네, 나는 지금 이 고치 속에서 꿈을 꾸는 걸요.
나비가 되어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 꿈을요."
바위는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저렇게 하잘것없는 고치 속에도 꿈이 있는데, 나는 뭐람."
생각할수록 바위는 자기가 저주스럽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치가 물어 왔다
"아저씨는 무슨 꿈을 꾸나요?"
"꿈? 나같이 닫힌 가슴속에 무슨 꿈이 있을 수 있겠니?"
그러자 고치가 말했다
"에이. 아저씨는 크니까 나보다도 더 큰 꿈이 있을 텐데요, 뭘."
"뭐라고? 더 큰 꿈이 있다고?"
"그럼요, 뜻 깊은 비석이 된다거나 아름다운 시비가 된다거나
조각품이 된다거나요."
비로소 바위의 가슴은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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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설일(雪日) -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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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첫댓글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두 참 좋으네요. 옮겨갑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고 희망찬 시편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