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에 설해진 해탈론
(1) 불교의 수행체계와 해탈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인 삶의 수레바퀴 속에 함몰되어 살아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렸을 적에는 꿈과 희망, 이상 속에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 커다란 문명의 이기와 메커니즘(mechanism)의 일부로 전락하는가 하면, 참된 자아를 망각 한 체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인생의 진실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무력함과 고통이라는 무거운 짐을 싣고서 삐걱거리는 인생의 여정을 굴러간다. 이러한 삶의 현실을 부처님은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최초의 녹야원 설법인 四諦法이다.
이상의 내용은 {구사론}에 자세하게 논해져 있다. 하여튼 부처님은 인간의 실상을 진단하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해 준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은 불교의 수행관과 직결된 가르침이다. 즉, 부파불교에서 수행의 단계를 체계화시키면서 보다 세밀하게 사제법을 관하도록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오위의 수행계위이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수행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단계로서 의식주를 만족하고 청정한 계와 三慧를 구족한 資量位, 가일층 수행을 닦아가기 위해 五停心觀과 四念處觀, 四諦의 16行相을 現觀하여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인 加行位, 사제에 대하여 완전한 인식을 위한 단계인 見道位, 본격적으로 경험적 선정을 통해 번뇌를 止滅하는 단계인 修道位, 마지막으로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삼계를 완전히 초월하여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는 無學位이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지면상 자세히 논할 수는 없고 아래의 표를 減緣減行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과 관련된 수행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 괴로운 현실-生·老·病·死·愛別離苦·求不得苦·怨憎會苦·五陰盛苦-------果
┃ [苦諦 : 자각이 없는 고뇌의 현실]-非常·苦·空·非我
四┠ 괴로움의 원인[갈애(欲愛, 有愛, 無有愛=虛無愛)와 執着]--------------因
聖┃ [集諦 : 현실세계에 대한 고통의 원인]-因·集·生·緣
諦┠ 괴로움의 소멸[貪欲, 瞋에, 愚癡가 소멸한 열반의 상태]---------------果
┃ [滅諦 : 행복과 평화가 있는 자각의 세계]-滅·靜·妙·離
┖ 조화로운 삶-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因
[道諦 : 행복과 평화의 원인인 중도의 길]-道·如·行·出
팔리상좌부에서도 실천도의 단계로 戒淸淨·心淸淨·見淸淨·度疑淸淨·道非道知見淸淨·行道知見淸淨·智見淸淨 7가지 淸淨道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인도불교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러한 7청정은 佛音의 {청정도론}에 설해지고 있는데, 먼저 계청정은 계율을 청정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다음에 심청정은 청정한 선정을 갖추는 것으로 8等至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戒와 定이다. 그리고 다음에 견청정부터는 지견청정가지는 혜의 바탕에 해당된다. 이러한 지혜를 세분하여 감각적인 인식을 想이라고 하고, 분석적 인식을 識, 전체적인 이해의 통찰에 해당하는 것을 慧라고 한다. 특히 智見에 합하여 慧가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견청정에서 행도지견청정까지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세속지의 단계이고 지견청정의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깨달음의 단계가 열린 無漏慧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수행에는 첫째로 계의 실천을 통해서 마음을 안정시켜 선정을 이루어 마음이 통일된 상태에서 혜를 증장하고 심화시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견청정에서는 名色과 五蘊 등을 비롯한 제법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고, 도의청정에서는 명색과 오온 등의 생멸변화하는 관정을 관찰하여 모든 잘못된 견해의 의혹을 초월하는 것이며, 도비도지견청정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올바른 길과 잘못된 해탈론이나 수도설의 차이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그리고 행도지견청정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바른 길을 알고, 그것을 수행하여 생멸과 두려움·무너짐·싫어함 등의 隨觀智와 脫欲智·省察隨觀智·行捨智·諦隨順智 등을 얻어서 올바르게 행할 길을 잘 알아서 관찰하여 지견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상의 네 종류는 범부의 단계이고 지견이 청정해졌더라도 아직 진실한 지견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도지견청정에서 제수순지로부터 種性智가 생기고, 다시 그로부터 지견청정에 인도된다. 이 지견청정의 지는 예류도·일래도·불화도·아라한도의 4道智로 나뉜다고 한다. 여기서 종성지는 행도지견청정과 지견청정 사이에 있지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범의 種性을 버리고 성자의 종성을 얻는 지혜이다. 그래서 제수순지에서 종성지로 들어가며, 종성지에서 지견청정에 드는 것이다. 이 지견청정이 聖道이며, 우부의 교리에서는 見道·修道·無學道에 상당하는 셈이다.
이러한 {청정도론}에서는 성도에 들어가는 데에는 믿음과 선정과 지혜라는 세 입구가 있다고 한다. 첫째로 믿음으로써 예류도에 들어가는 자는 隨信行이라고 부르고, 지혜로써 예류도에 들어가는 자는 隨法行이다. 信行하는 사람은 예류과로부터 아라한관에 이르기까지 信解脫이라고 불린다. 隨法行을 하는 사람은 예류과에 들어 見到라고 불리며, 아라한향가지의 이름이다. 다음에 定根으로써 예류도에 든 사람은 身證이라고 불린다. 이 수행자가 無色定을 얻어 해탈했을 때에는 俱解脫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信聞 慧門 定門 四向四果
↓ ↓ ↓ ↓
隨信行 隨法行 身證 ---預流向-----見道
↓ ↓ ↓ 預流果
↓ ↓ ↓ 一來向
信解脫 見到 身證 一來果
↓ ↓ ↓ 不還向
↓ ↓ ↓ 不還果
↓ ↓ ↓ 阿羅漢향 修道
信解脫 慧解脫 俱解脫 阿羅漢果---無學道
이상의 팔리불교에서 설하는 성도에 드는 데에 信·慧·定의 3門이 있다는 것이다. 예류도에 각각 수신행·수법행·신증이란 것이 있고, 다음에 예류과 이후에 있어서는 신해탈·견도·신증이 되며, 아라한위에 이르러서는 신해탈·혜해탈·구해탈이 된다. 이상의 수신행·수법행·신증·신해탈·견도·혜해탈·구해탈 등을 7聖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류방식은 수신행과 수법행의 2門만을 설하는 유부와는 교리가 다른 부분이 주목된다. 특히 隨信行에 의해서 아라한과까지 이른 다는 것이 주목된다. 즉, 믿음에 의해서 구경의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류향에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번뇌를 끊는가에 대해서 {청정도론}에서는 아함경에 의거하여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지면상 생략하고 덧붙여 말하자면 도종지는 행도지견청정에서 지견청정으로 들어갈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예류도에서 일래도, 일래도에서 불환도·아라한도의 각각의 단계로 나아갈 때에도 생긴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류와 일래는 그 종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래와 불환, 불환과 아라한도 종성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2) 수행의 果德인 18有學과 9無學
위의 수행체계에 의해서 해탈에 이른 상태의 성자를 종합하면 18有學과 9無學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행의 과덕을 간략히 살펴보면, 십팔유학은 존경과 공양을 받을만한 열 여덟의 성인으로서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성인을 말한다. 信行·法行·信解·見倒·身證·家家·一種·向須陀洹·得須陀洹·向斯陀含·得斯陀含·向阿那含·得阿那含·中般涅槃·生般涅槃·行般涅槃·無行般涅槃·上流色究竟 등의 유학의 성인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소승 三果의 성자는 아직도 배울 道法이 남았으므로 有學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예류향·예류과·일래향·일래과·불환향·불환과·아라한향·수신행·수법행·신해·見至·家家·一間·中般·生般·有行般·無行般·上流般 등이다.
여기서 예류의 向果에서 向은 처음으로 성류에 들어가서 88使(번뇌)를 끊어 가는 상태를 말하고 果는 수행위로서 極七返流라고 하는데, 이는 최대한 7번을 반복하여 욕계에 태어났다가 색계에서 또는 그 반대로 나고 죽고 한 후에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一來의 向果는 한 번씩 욕계와 색계를 오가면서 태어나 열반에 들어간다. 그리고 不還의 向果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다음 생에서 열반에 들어간다. 그리고 아라한향은 그 상태가 그대로의 생이 열반의 상태이다. 그러나 아직 조금은 끊어야할 번뇌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隨信行은 근기가 둔한 자가 다른 이가 설해주는 설법이나 四不壞淨을 수행하여 얻어서 열반에 든다는 것이고, 隨法行은 근기가 예리한 자가 직접 경전이나 四諦 등을 듣고 사유하여 따라서 現觀하여 열반을 얻는 것인데, 이는 見道에서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信解와 見至는 修道에서의 隨信이 信解이고, 隨法이 見至라고 한다. 家家는 천상에 태어난 것을 天家家, 人趣에 태어난 것을 人家家라고 한다. 一間이란 다시는 다음 생을 받지 않고 간격이 없이 열반에 든다는 의미로 不還向과 不還果의 사이에서 열반한다는 것이다.
中般은 욕계에서 죽어 색계에 난 중유 중에서 열반에 드는 것이고, 生般은 색계에 태어나 오래지 않아 그 생에서 열반에 드는 것이며, 有行般은 색계에 태어나 오랜 기간에 걸쳐서 가행을 수행하여 시간이 흐른 뒤에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고, 無行般은 오랜 기간 加行에 게으름을 피워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열반에 드는 것이다. 上流般은 색계에 태어나서 다시 상계에 태어나 열반에 드는 것인데 짧게는 2生 길게는 16生 지난 후에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上流에는 因果의 2가지 차별이 있는데, 因차별에는 수행에 여러 가지를 섞어서 수행하느냐 않느냐로 나눈다. 果차별은 色究竟天과 有頂天에 궁극의 거처를 두느냐로 차별한다. 섞어서 닦는 것은 有漏定과 無漏定을 겸하여 닦는 것이고, 섞이지 않고 닦는 것은 유정천을 궁극의 처소로 하여 열반에 드는 것이다.
아홉 가지 無學이란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Arhat)은 人天의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로써 응할 자격이 있다는 應供이고, 모든 번뇌를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물리친다고 해서 殺賊이라고 하며,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無生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아라한은 6가지, 7가지, 9가지이 있다. 먼저 6종의 아라한은 退法·思法·護法·安住·堪達·不動 등을 말하고, 7종 아라한은 퇴법·사법·호법·안주·감달·부동·불퇴 등이다. 9종 아라한은 7종에 慧解脫과 俱解脫을 더한 것을 말한다.
{구사론}에서는 이에 대해서 퇴법·사법·호법·안주·감달·부동·불퇴··혜해탈·구해탈 등이라 하였고, {성실론}에서는 退相·守相·思相·住相·可進相(앞의 감달)·不壞相·不退(앞의 부동)·혜해탈·구해탈 등을 말하고 있으며, 중아함경의 {복전경}에서는 思法·昇進法(위의 감달)·부동법·퇴법·불퇴법·호법·住法·혜해탈·구해탈 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구사론}에 입각해서 그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먼저 退法은 질병 등에 의해서 修惑이 다시 일어나 후퇴하여 불환·일래·예류 등에 떨어지는 아라한이다. 다음에 思法은 증득한 수행의 과보에 대해서 후퇴할까봐 두려워하여 자해를 해서라도 無餘涅槃에 들어가는 아라한이다. 셋째로 護法은 얻은 수행의 과보에서 후퇴하지 않으려고 방어하고 보호하는 아라한이다. 넷째로 安住는 수행하여 얻은 경지를 가행을 하지 않더라도 물러나지는 않지만 加行精進을 하지 않고서는 보다 더 수승한 경지로 나아갈 수 없는 아라한이다. 다섯째로 堪達은 그 능력이 감당할 만한 자질이 있어서 五根을 단련하고 수행하여 不動의 경지에 이른 아라한이다. 여섯째로 不動은 물러남이 없는 자질을 갖춘 자로서 盡智를 이룬 후에 無生智를 일으키는 아라한이다.
일곱째로 不退는 앞의 不動法 가운데 根機가 예리한 자가 부동한 性에 안주한 자를 不退의 아라한이라 하고, 근기가 둔한 자가 수행하여 얻은 경지를 不動法의 아라한이라고 한다. 여기에 또 근기가 둔하여 때를 기다려 해탈하는 時解脫者와 근기가 예리한 자가 얻는 경지인 不時解脫者가 있다.
여덟째로 慧解脫은 지혜의 힘으로 煩腦障을 멀리 여읜 아라한이다. 아홉째로 俱解脫은 心解脫이라고도 하는데 滅盡定을 얻어 解脫障까지도 멀리 여읜 아라한이다. 여기서 煩腦障이란 染汚로 無知하여 見惑과 修惑이 삼계에 얽어매어 번거롭고 요란하며 어지럽고 산란한 것으로 반드시 끊어야할 번뇌의 장애이다. 그리고 解脫障이란 선정상의 장애로서 오염되지 않는 無知의 한 부분이다. 이것이 열반을 장애하지는 않기 때문에 아라한은 반드시 끊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장애는 6아라한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 현재의 몸으로써 不還의 성자가 멸진정인 無心定 또는 金剛喩定이라고 하는 선정을 닦아 얻은 성자인 신증과 신행·법행·신해·견도, 그리고 혜해탈·구해탈 등을 7聖者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