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포리즘 ④-홍일표

[사이펀]

시인의 아포리즘 ④

홍일표(시인)

바퀴벌레

바퀴벌레는 평생 숨어 사는 은둔 처사다. 그에게는 사실 죄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슨 원죄가 있기라도 한 듯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를 볼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파리채를 휘둘러 때려잡으려고 달려든다. 늘 어둡고 컴컴한 곳에 사는 그는 할 말이 많다. 빛과는 거리가 먼 지하 단칸셋방에 몰래 숨어 살면서 그가 겪는 애환이 한둘이 아닌데 사람들은 무조건 그를 몰아내려고 한다. 퇴치와 박멸의 대상일 뿐인 그는 도시 빈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에 나타나 잠깐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이 그의 유일한 행복인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사나운 주인의 눈에 띄어 비명횡사한 동족이 한둘이 아니다. 목숨을 보전하려면 최대한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극빈자답게 변두리 외진 곳, 햇볕도 들지 않고 눅눅한 습기와 곰팡내 가득한 곳에 삶의 거처를 마련한다. 가끔 주변에 달콤한 유혹도 있다. 몇 차례 몰살의 위기를 경험한 그들은 이제 유혹은 곧 죽음의 미소라는 걸 잘 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지하 갱도의 광부처럼 평생 어둠을 파먹고 살아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어둠의 산 증인이고, 밑바닥 인생의 당사자들인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멸족시키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들은 ‘바퀴벌레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눈부신 빛의 공화국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준수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멸문의 화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 그들 편에 서서 한두 마디 발언하는 자들도 있으나 대부분 제 호주머니 채우기에 바쁜 족속들이라 기대를 접은 지 오래 되었다.

민불

혜범 스님의 ‘민불(民佛)’에 대한 글 덕분에 새롭게 불상을 만난다. 민불은 권위적이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가부좌하고 있는 부처님이 아니다. 평범한 중생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불상이다. 예수의 모습을 그린 성화(聖畵)는 한결같이 거룩한 형상이다. 견문이 좁은 탓에 성경 속의 예수처럼 웃고 때로는 분노하는 모습의 성화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를 높고 거룩한 곳에 홀로 외롭게 두지 말고 인간들 곁에서 파안대소하는 모습으로 형상화하면 어떨까 싶다. 협량한 잣대로 신성모독이라고 시비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인 바람이 그렇다. 혜범 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민불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롭게 창조된 얼굴이다. 다감하고 정감이 넘쳐서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미술의 역사는 항상 국면전환의 역사였는데 민불에서 백성들의 창조적 염원의 일단을 보는 것 같다. 네덜란드 한스 홀바인(1479-1543)이 그린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죽음’(1521년)이 떠오른다. 이 그림에서 예수는 거룩한 순교자의 모습이 아닌 겁에 질린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상파괴적인 홀바인의 그림은 다소 충격적인데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을 민불과 연결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으나 기존의 정형성을 탈피한 점에서 민불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민불은 사람이 곧 부처라는 불교의 핵심 교지를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기층민중들 곁에는 항상 자신들을 그대로 닮은 ‘웃는 부처님, 애꾸 부처님, 귀가 잘린 부처님’ 등이 있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경전 밖에서 살아 움직이는 부처, 생불이었다.

회초리

‘상식’의 대부는 회초리다. 대부에도 등급이 있다. 회초리, 채찍, 몽둥이, 칼, 총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대부분 회초리와 채찍의 단계에서 상식은 결정된다. 한때 상식의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가정과 학교에서도 회초리는 기본이었으나 요즈음은 형식이 바뀌어 문자와 말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상식은 풍속을 교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통상적 규칙을 강요하고 온갖 금기로 행동의 반경을 축소시킨다. 사람들은 상식의 울타리에 갇혀 서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양순하게 길들여진다. 다른 목소리, 다른 색깔은 이단시되고, 배척된다. ‘비상식’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체제 안의 암적 요소로 타격의 과녁이 된다. 나와 다른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상식이 집단 담론을 생산하는 의붓어미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해진 길을 버리고 샛길로 걸어가는 ‘비상식’은 고유한 견해를 박탈당하지 않는 방법이고, 노예의 삶에서 주인의 삶으로 도약하는 것인데 어릴 적부터 회초리와 채찍으로 사육된 탓에 ‘상식’은 하나의 족쇄가 되었다. 남들이 했던 것은 안 했던 감독으로 기억되면 좋겠다고 했던 봉준호 감독의 말을 다시 소환하는 날이다.

선풍기

구시대의 유물처럼 구석으로 밀려난 선풍기는 머잖아 실직자가 될 것 같다. 여름 한철 그를 고용하는 곳이 있지만 그나마 비정규직이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무실에서 에어컨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면서 선풍기는 발 디딜 곳을 잃었다. 찾는 사람이 없어 이력서조차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에어컨에게 밀려난 선풍기는 고용의 기회를 잃고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용도 폐기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크게 한번 날아보기 위해서 평생 날갯짓을 했지만 그의 노고는 허사가 되었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선풍기는 퇴출되어 다시 일터를 떠나야 한다. 사람들에게 헌신과 봉사로 일생을 보낸 선풍기를 눈여겨 본 김영승 시인은 「반성743」이라는 시를 썼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이 정도라도 선풍기에 대한 예를 갖춘 시인이 있으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겠다.

비누

비누는 목련과이며 수생식물이다. 그에게 필요한 양식은 약간의 물이다. 물만 있으면 비누는 끝없이 꽃을 피운다. 비누는 생산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매 순간 소멸의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한다.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존재에 대한 미련도 집착도 없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신을 벗어 몸 밖으로 훌훌 날려버린다. 비누는 언제나 물 가까이에 거처를 마련한다. 물은 비누가 가장 좋아하는 상선(上善)이요 마음이 서로 통하는 지음(知音)이다. 부단한 탈각을 통해 존재를 지워나가는 비누는 한 순간 존재의 동작을 멈춘다. 전격적으로 소멸의 장으로 진입한 것이다. 눈앞에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던 비누는 어디에도 없다. 유산도, 유언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모자’를 보고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비누를 호명하면 그는 오늘도 곱고 유려한 목련의 어조로 답을 할 것이다.

섬

바다는 섬을 점령하지 못한다. 섬은 바다 한가운데 박혀 있는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바다의 욕망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끝없이 좌절을 반복하며 다시 일어서는 바다는 섬을 삼킬 가능성이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섬을 잡고 퍼덕이며 애걸복걸하지만 섬은 완강하다. 어떻게 해서든 섬을 딛고 일어서려는 바다의 의지는 가상하나 바다의 운명은 거기까지다. 섬은 강골의 고독으로 무장한 철의 장벽이다. 오직 바다와 맞서 혼자 싸우는 무사다. 사면의 적들이 떼 지어 몰려와 섬을 노리고 있지만 고독의 전사를 대적할 상대는 없다. 백전백패다. 바다는 수시로 전략을 바꾸어 부드럽게 다가와 간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나운 태풍을 앞세워 포효하며 겁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섬은 우뚝 선 암벽으로 번번이 바다를 무릎 꿇게 한다. 섬의 유일한 무기는 어디에도 기웃거리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단독자로서의 힘센 ‘고독’이다. 시 역시 출구도 위안도 없이 지상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된 외딴 섬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