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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達 始祖 祖孫의 行蹟
大邱 金氏는 朝鮮 開國 時 兵曹 參議를 지내신 諱 金達 始祖로부터 시작한다.諱 金達 始祖는 新羅 金氏의 太始祖이신 鷄林의 大輔公 金閼智 聖祖의 48世 後孫이시며 新羅末 後百濟 甄萱의 大軍을 相對로 臨戰無退 決死 抗戰을 하신 마지막 花郞 孝宗郞의 아드님이신 敬順王의 後孫이시며 敬順王의 넷째 아드님 諱 殷說公의 후손으로 日本을 征伐하려 出征하신 諱 金方慶 將軍의 넷째 아드님 諱 金惀(김론) 할아버지의 曾孫으로 新羅 鷄林 金氏에서 慶州 金氏를 이어 舊安東 金氏가 그 先代 來歷이시다.
諱 達 始祖께서는 朝鮮 開國初 兵曹參議를 지내셨다. 朝鮮 開國 直後 王權 繼承을 두고 벌어진 骨肉相爭인 一次, 二次 王子의 亂까지 無難히 넘기셨지만, 太宗 二年, 太祖 李成桂를 다시 모시자는 “趙思義의 亂”을 막지 않고 傍觀 하셨다고 하여 吉州로 流配 되신다.
“趙思義의 亂”은 異腹동생 둘, 親동생 하나를 죽이고, 아버지를 太上王 둘째 형을 上王으로 만들며 王의 자리에 오른 太宗 李芳遠이 執權한 二年째 가을, 太宗 李芳遠의 悖倫的 行步에 民心이 흉흉하던 차. 明나라 使臣들과 임진강에서 잔치를 하던 父王인 太上王 李成桂는 임진강 상류인 咸鏡道 故鄕 永興 東北面을 向하게 된다. 東北面을 가고자 安邊을 지나게 되던 李成桂는 사랑하는 繼妃 神德王后의 一家가 되는 安邊府使 趙思義를 만나게 되고 抑鬱하게 죽은 神德王后의 所生 두 王子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趙思義에게 謀叛의 빌미를 만들어준다.
여기에 數많은 民心이 呼應하니 그 勢力이 적지 않았다. 忿怒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懲罰에 많은 사람이 同參한다. 그러나 軍略家인 太宗 李芳遠은 心理戰으로 謀叛을 鎭壓하게 되고, 結局 이 事態에 대하여 太上王 李成桂를 同情하거나 傍觀한 數많은 人士가 應分의 懲罰을 받아야 했다.
太宗三年 正月 十六日 臺諫은 趙思義에 同調한 朴蔓 等 三人에게는 極刑을 奏請하였고, 謀叛에 대한 微溫的 態度를 보인 金達 等 十四人에게는 職牒追奪, 家産籍沒에 處하고 그 子孫을 禁錮하시라고 奏請 하지만 太宗 李芳遠은 懲罰을 縮小하여 家産沒收 眷屬禁錮 없이 流配로 끝맺어 達 할아버지는 吉州로 流配 되신다.
流配는 東北面 鏡城에 充軍으로 이어지다가 太宗11年 10월15日 鏡城의 金達 等 五名의 赦免으로 流配가 끝나시니 流配가 시작된 太宗3年부터 滿 八年 만이시다. 赦免이 되신 후 達 할아버지는 紅塵 歲月 漢陽에 모든 情이 떨어지신 듯 平生 咸鏡道 邊境에 情을 붙이신 듯하다.
大邱의 眷屬 가운데 長子 麗淵公은 父親이신 達 始祖를 따라 故鄕 大邱 道化村을 떠나 咸鏡道 吉州에 定着하셨고, 次子 佐郞公 富亨公은 그대로 大邱에 居하시더니, 富亨公의 두 아들 浩然公, 浩堅公에 이르러 長子 浩然公은 北遷하시여 達 始祖의 터전인 咸興으로, 次子 浩堅公은 西遷하시여 龍灣(龍川,義州)에 定着하시니 大邱 金氏는 그 始初에 達 始祖의 咸鏡道 吉州派, 浩然 始祖 의 咸鏡道 西浦派, 浩堅始祖의 平安道 龍灣派(後日 七宗中: 光化, 黃州, 舘里, 月華, 古城, 古寧朔麟山公, 古寧朔麟山公)를 이루어 각기 世譜를 保存하여 왔다.
--太宗 實錄과 戊午譜에 의함--
二千八年 戊子年 開天節
第2 戊子譜 編輯 委員
達 始祖
一八世孫 永錫
一八世孫 永夏
二一世孫 祥坤
二一世孫 炳浩
二四世孫 胤洪
二四世孫 延洪
二四世孫 敦洪 謹述
휘 달 시조 조손의 행적
대구 김씨는 조선 개국 시 병조참의를 지내신 달 시조로부터 시작한다. 달 시조는 신라 김씨의 태시조이신 계림의 대보공 김알지 성조의 48세 후손이시며 신라말 후백제 견훤의 대군을 상대로 임전무퇴 결사 항전 하신 마지막 화랑 효종랑의 아드님이신 경순왕의 후손이시며, 경순왕의 넷째 아드님 은열공의 후손으로 일본을 정벌하려 출정하신 김방경 장군의 넷째 아드님 김론 할아버지의 증손으로 신라계림김씨에서 경주김씨를 이어 구안동 김씨가 그 선대 내력이시다.
달 시조께서는 조선 개국초 병조참의를 지내셨다. 조선 개국 직후 왕권 계승을 두고 벌어진 골육상쟁인 1차, 2차 왕자의 난까지 무난히 넘기셨지만, 태종 2년, 태조 이성계를 다시 모시자는 “조사의의 난(趙思義의 亂)"을 막지 않고 방관 하셨다고 하여 길주로 유배 되신다.
“趙思義의 亂”은 이복동생 둘, 친동생 하나를 죽이고, 아버지를 태상왕 둘째 형을 상왕으로 밀어내 뒤 왕의 자리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집권한 2년 째 가을, 태종 이방원의 패륜적 행보에 민심이 흉흉하던 차. 명나라 사신들과 임진강에서 송별 잔치를 하던 태종이방원의 아버지 태상왕 이성계는 임진강 상류인 함경도 고향 영흥 동북면을 향하게 된다. 동북면을 가고자 안변을 지나게 되던 이성계는 사랑하는 계비 신덕왕후의 일가가 되는 안변부사 조사의를 만나게 되고 억울하게 죽은 신덕왕후의 소생 두 왕자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조사의에게 모반의 빌미를 만들어준다.
여기에 수많은 민심이 호응하니 그 세력이 적지 않았다. 분노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징벌에 많은 사람이 동참한다. 그러나 군략가인 태종 이방원은 심리전으로 모반을 진압하게 되고, 결국 이 사태에 대하여 태상왕 이성계를 동정하거나 방관한 수많은 인사가 응분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태종3년 정월 16일 대간(후일 대사간)은 조사의에게 동조한 박만 등 3인에게는 극형을 주청하였고, 모반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보인 김달 등 14인에게는 직첩추탈, 가산적몰에 처하고 그 자손을 금고하시라고 주청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징벌을 축소하여 가산몰수 권속금고 없이 유배로 끝맺어 달 할아버지는 길주로 유배 되신다.
유배는 동북면 경성에 충군으로 이어지다가 태종11년 10월15일 경성의 김달 등 5명의 사면으로 유배가 끝나시니 유배가 시작된 태종3년부터 만 8년 만이시다. 사면이 되신 후 달 할아버지는 홍진 세월의 한양에 모든 정이 떨어지신 듯 평생 함경도에 정을 붙이신 듯하다.
대구의 권속 가운데 맏아들 여연공은 부친이신 달 시조를 따라 고향 대구 도화촌을 떠나 함경도 길주에 정착하셨고, 차자 좌랑공 부형공은 그대로 대구에 거하시더니, 부형공의 두 아들 호연공, 호견공에 이르러 장자 호연은 함경도로 가시어 달 시조의 터전인 함흥으로, 차자 호견공은 평안도로 가시어 용만(용천,의주)에 정착하시니 대구 김씨는 그 시초에 달 시조의 함경도 길주파, 호연 시조 의 함경도 서포파, 호견 시조의 평안도 용만파(후일 7종중으로 : 광화, 황주, 관리, 월화, 고성, 고령삭인산공, 고령삭박천공)를 이루어 각기 족보를 보존하여 왔다.
--태종 실록과 무오보에 의함--
2008년 무자년 개천절
제2 무자보 편집위원
참의공 달 시조
18세손 영석
18세손 영하
21세손 상곤
21세손 병호
24세손 윤홍
24세손 연홍
24세손 돈홍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