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행복
김종국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토아올람 전담사제, 토마스의 집 원장
주님의 세례로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은 우리 자신 존재를 위한 탁월한 기초이며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특별한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믿음 없이는 희망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사랑 안에서 하느님 뜻에 대한 실천과 헌신적인 나눔도 없습니다.
믿음은 구원사의 완성에서 예수님을 친구로, 성령의 협력자로 주어지는 여정의 삶을 힘 있게 알려 주는 표시가 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인정을, 하느님 앞에서 곧 의인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은 기다림과 여정과 갈망이며 이 땅을 넘어 본향을 찾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 주례 사제가 예비 신자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묻습니다. 그러면 예비자는 “신앙을 청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신앙이 당신에게 무엇을 줍니까?” 물으면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하고 응답합니다. 이어서 주례사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합니다. 세례 받을 땐 정신이 없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랜 믿음의 삶을 지켜온 우리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거룩하여졌으며”(1코린 6,11 참조), 성도로 부름을 받은(1코린 1,2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성전”(1코린 6,19 참조)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기도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길을 열어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사랑을 실천하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죄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시어 우리의 영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깨어 준비하고 있다가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위해 문을 열어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을 받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실 때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사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가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한다는 것은 웬만한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이해가 힘듭니다.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경각심도 들고, 언제 부르심을 받을 것인지 은근히 걱정도 됩니다.
우리 일상생활 안에서는 맺고 끊지 못한 일들이 수두룩하지요. 마음먹었는데 정작 시작하지도 못한 일도 있고, 계획한 것을 반도 끝내지 못한 일, 결실 없이 이것저것 어지럽게 벌려만 놓은 일들이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일을 다 마친 다음에 하느님을 뵙는다면 이 얼마나 한 생을 보람 있게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일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손쉬운 유혹이 있다면 ‘다음에 하지 뭐’라며 뒤로 미루는 일입니다. 또 게으름에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끝내지 못하고 덮어 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늘 허리에 띠를 두르고 하느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자선 활동은 육체적으로나 영신적으로 궁핍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행위(이사 58,6-7)라고 합니다. 용서해 주고 참을성 있게 견디어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자선 활동은 가르치고, 충고하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행위는 영적인 자선 활동입니다. 육체적인 자선 활동은 특히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잃은 사람을 묵게 해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자와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고 죽은 이들을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은(토비4,5-11; 집회17,18 참조) 형제애의 주요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마태6,2-4)(가톨릭 교리서)
저는 오래전에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산을 거의 다 정리하여 땅 4만여 평을 서울 대교구에 기증하였습니다. 부족한 인간이라 마음으로부터 많은 갈등을 느껴 두세 달 고민을 했습니다. 아깝기도 하고 괜스레 섣불리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과 갖가지 걱정으로 주변 사람들의 말이 솔깃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요. 상의할 곳 없는 무녀 독남 외아들이니 더 힘겨운 기도의 시간이었고 참 어려웠습니다. 포기하고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모두가 주님 것이오니 주님 도로 가져가십시오.’ 하는 말씀이 묵상이 되어 그래 내 것은 사실 하나도 없고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기에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라는 마음이 기도가 되어 기증하였습니다. 지금 그곳에 100여 개국의 성모상을 모실 곳으로 ‘토아올람’이라는 성전을 짓고자 토목공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렵지만 주님이 함께 시작하고 끝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 성령의 탄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