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내려오는 전설
구술 이찬식 (전도유사)
기록 이낙식 (애향회장)
우리 광산이씨가 터를 잡은 후 번창하게 일가를 이루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어느 날 풍수가 와서 김씨에게는 밥이 많은 백석지기 묘터를 작연골에 잡아주고, 우리 광산이씨에게는 손(孫)이 많고 벼슬할 사람이 많이 나올 묘터로 외아등을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후백(厚白) 선조를 모셨다. 그 후 풍수의 예언대로 허씨와 김씨는 쇠락하여 떠났는데 우리 광산이씨는 자손이 번성하고 양반의 손으로 인정받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우리 죽청리 터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명당으로 풍수지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관심 지역이 되고 있다. 비봉포란형이란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으로 제일의 명당이라 한다. 죽청리 터는 봉황이 비봉산에서 오도실 오동나무 밑으로 놀러 왔다가 죽순을 먹으러 죽청리로 들어왔는데 매봉재의 매가 무서워 날아가지 못하고 알을 낳아 품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이 번창할 것을 예지하는 꿈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돌아가신 병희씨 증조부께서 꿈을 꾸었는데 종괘산에서 뻗어 내려온 박넝쿨이 죽청리를 덮었는데 탐스러운 박 열다섯 덩이가 열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한 덩이는 타성의 것이고 열네 덩이는 우리 것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꿈은 우리 마을에 큰 인재가 나올 길몽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마을에 살고 있던 타성인 양씨문중에서 80년대에 양회경 대법관이 나왔다.
또한 승환씨 조부께서 죽청리에 있는 아홉 개의 바위(九巖)을 잘 보존해야 마을이 흥할 것이라고 꿈을 꾼 후 보수를 한 적이 있다. 아홉바위는 뒷가끔으로부터 현 봉기씨 집 뒤뜰까지 산재해 있다.
<출처 : 1996년 11월 15일 죽성(竹惺)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