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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에 체온을 잃은 게 병명이 되어 며칠째 심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 사내가 제시한 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서는 안 된다는 윤리의식과 운명의 매듭이 조여오는 듯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도 한 며칠이었다.
그 사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문제를 떠나, 또 자신의 약혼자가 있고 없음을 떠나 자신이 그 사내를 도시 진실성 있는 사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데 강요된 그와의 키스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가운데 그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에서 풍기는 느낌이 소녀적에 꿈꾸던 백마 탄 왕자의 모습과 일치했고 그 얼굴에 약혼자의 형상과 업혀져 소스라치는 몽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러한 양면성의 자신 내면에 놀라 양심의 가위눌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웬 식은땀을 이리 많이 흘리는 거야?”
땀을 닦아줄 때마다 윤흰 어머니의 시선을 외면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잘 읽는 어머니였기에 그런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들킬 것 같은 염려에서였다.
누운지 사흘이 되던 날 자릴 털고 일어났다. 한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갑갑증이 더 이상 누어있게 하질 않았다.
초겨울의 햇볕은 산중턱에서 다소 쌀쌀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고 추수가 끝난 허허로운 들판에선 아이들이 떼를 지어 북적거리는 풍경이 들어왔고 그 뒤로 앙상하게 나신을 들어내고 있는 포풀러 숲이 노을과 조화를 이루며 완벽한 한 폭의 풍경화로 창틀에 들어찼다.
“미음 좀 들어라. 아플 땐 막 먹고 원기를 잃지 않는 게 최고의 약이다.”
쟁반을 들고 들어서는 어머니. 문득 마흔 다섯이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물론 인근의 농사를 짓는 아낙네들에 비한다면 사십이 채 안 되어 보이는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가 다르게 늘어가는 잔주름의 뒤에 감추어진 우수가 괜히 안스럽다.
사실 어머니의 그러한 과거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마냥 투정만 부리는 철부지에 불과했고 시골 아낙들보다 젊다는 것이 자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과거, 자신 하나만을 위해 여타의 안주를 마다하고 숫한 삶을 가슴앓이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젊음의 뒤에 감추어진 비애를 알았고 자신의 평범한 행복을 신앙처럼 여기고 사는 어머니에게 추후도 누가 될까 봐 차마 자신의 심정변화를 꺼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어머니의 삶과 자신의 삶은 전혀 그 색깔자체가 달라야 하기에.
“웬만해선 아프다는 내색조차 없던 네가 아프다고 누워 있으니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니?”
맞선을 보았을 때 첫 대면한 약혼자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농사에 전념하는 것으로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청사진을 펼쳤을 때 지금까지 그려왔던 이상은 물론이거니와 대화 자체에서도 답답함을 느끼고 전혀 내키는 마음이 없었지만 먼저 어머니가 찬성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반대하지 않았던 거 또한 어머니의 굴절된 생이 한 남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빚어진 과오였음에 윤희는 자신의 의지를 거두고 어머니의 의향에 따랐던 것이다.
어머니가 스스로 당신의 과거를 속 시원히 들려준 것도 아니지만 회고록을 통해 알 수 있었고 지금도 아빠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며칠씩 과거여행을 떠난다는 것 또한 짐작하면서도 혹 아픈 상흔을 헤집지나 않나 하는 염려에 모른 체 할뿐이다.
대학을 막 입학하고 나서 갑작스레 돈이 필요해 연락도 없이 집에 왔었다. 어머니는 출타 중이었고 시간이 촉박했던 윤희는 어머니의 케비넷을 처음 열었고 그곳에서 어머니의 회한록과 찌든 사진 한 장을 볼 수가 있었다.
훤칠한 삼십대의 남자와 두 세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를 보듬고 해맑게 웃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 사진 속의 어린아이가 자신이란 것을 메모식으로 써온 일기장을 읽고서 알았고 또 왜? 란 의문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하나 그런 의문은 쉽게 풀렸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자라 여고를 졸업하자 곧바로 은행에 취직을 하였고 삼 년쯤 되었을 때 은행의 주고객이던 개인사업가 ‘서정훈’이란 사람을 만나자마자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결혼을 약속했고 오래지 않아 자신을 잉태했으며 이 사실을 알리려 했을 때 그는 해외출장에서 사고를 당해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어머니는 시골로 낙향해 자신을 낳았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났을 때 행불되었던 아버지가 결혼을 한 뒤 찾아왔고 이 모든 게 가진 게 없는 어머니를 배척하기 위한 아버지 가족의 음모임이 밝혀지고 어머니의 비극적인 운명은 시작되었다. 이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밀회는 이십여 년이나 이어져 왔고 그 만남 뒤에 남는 슬픔을 어머니는 왜 가슴에만 묻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윤희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치 않는 어머니의 아픔을 괜히 들추어 슬픔만 배가할 뿐, 언젠가는 스스로 알려주리라 믿기에.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게요.”
타는 듯한 노을이 까치봉의 단풍진 골짜기가 검붉게 물들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들해 있던 신작로의 국화들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개여울의 징검다리를 건너 자주 찾았던 포풀러 숲이나 한 번 둘러 보자며 소로길을 올랐다. 포풀러 숲을 지나면 까치봉 발자락에 덩그런 묘지가 있었고 묘지를 지나면 오 백 년이 넘었다는 비목이 신비스런 자태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좁다란 오솔길은 그늘이 져 있었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이 머물고 있어 마치 붉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는 황홀경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골짜기의 바람이 볼을 찌르고 달아나는가 싶자 무수한 낙엽들이 머리 위로 날아 내렸다. 한차례 풀벌레의 구슬픈 울음이 멎자 골짜기는 이내 스산한 정적이 묻혀왔다.
비목에 비스듬히 기대자니 뱀이 기어가는 듯한 오솔길의 작은 언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전엔 뛰어 올라도 상쾌한 바람에 숨이 차는 줄도 모르던 길인데 걸어 오르는 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으로 보아 며칠 동안 얼마나 몸이 축났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잔디가 알맞게 다듬어진 묘지에 꽃과 과일이 시들어 있었고 묘역을 경계로 떡갈나무, 잣나무가 곧게 자라 반드시 누어 하늘을 보면 타원형 초록호수를 연상케 했고 성긴 가지사이로 개여울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버스와 트럭이 마을 어귀에서 빗겨가고 있는 게 보였다.
팔베개를 하고 눕자니 타원형의 하늘엔 솜털구름이 붉게 물들어 서쪽을 향해 흘러가 마치 자신이 구름을 보고 떠가는 기분이 들었다.
문학도들은 어떻게 저런 구름을 일컬어 ‘지조 없는 여인의 나들이’ 란 표현을 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소녀의 연정’이라든가 이상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에 젖어 있자니 문득 거칠게 풀잎 부서지는 소리에 시상이 달아나 버리고 만다.
주위의 새떼가 날아가고 휘파람 소리가 어럼풋이 들려올 때 퍼뜩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에 묘비 뒤로 몸을 숨겼다. 왜 하필 이때 그 사내의 영상이 떠오르는지, 왜 자신이 몸을 숨겨야 하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이러한 불길한 생각이 기우이기만을 바랬다.
풀잎 밟는 소리가 묘비 근처에서 멎었고 나지막하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 질 때 윤흰 허겁지겁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포풀러 숲으로 내달렸다.
어떻게 이가 날 따라왔을까?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언덕에 올랐건만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 따라온 것일까? 날 붙잡아 뭘 어쩌자는 것일까?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윤희는 저만큼 개여울이 보였을 때 뒤돌아보며 다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개여울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어 내리고자 웅크렸을 때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새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름길이 있다는 걸 알아야지?”
그는 안은 듯이 윤희를 포풀러 숲으로 끌어 올렸고 윤희는 단지 왜 이러냐며 발버둥치며 끌려갔다.
“내가 윤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아? 그런데 윤흰 왜 자꾸 날 피하는 거야? 난 윤흴 저승이라도 따라 갈 거야!”
그는 윤희를 마른 낙엽 위에 뉘이자 얼굴을 가슴에 묻고 마치 열에 들뜬 환자처럼 중얼거렸다.
“이러지 마세요. 난 약혼한 사람이 있단 말예요!”
그를 밀치려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옥죄어 오는 힘만 가중되었다. 연약한 환자의 몸으로 육중한 사내를 떨구기란 불가항력이었다.
“알아. 하지만 윤흰 누가 뭐래도 내거야! 꼭 내걸로 만들겠어.”
“이런 건 구애도 사랑도 아니예요. 그러니 제발 날 놔줘요. 예?”
여자의 서투른 반항은 남자의 욕구만을 부채질하는 꼴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이내 윤희 옷을 찢다 싶이 벗겨 내렸다.
“날 미친놈 취급해도 좋아. 아니 미친놈이라고 여겨도 좋아. 난 윤희에게만은 미치고 말 거야!”
“알아요. 오빠가 날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저도 오빨 좋아해요. 그러니 오늘은 보내주세요 제가 나으면 오빠 말대로 할께요. 제발....”
윤흰 자신의 말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 빈 외침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여자란 존재가 무력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굶주린 한 마리의 이리처럼 번들거렸고 윤흰 먼 창공으로 시선을 돌린 채 필사의 저항을 했다. 그 순간 하늘은 붉게 물든 노을 속에서 연꽃 같은 조각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어떻게 이 순간에 저렇게 평화로운 조화를 보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해. 난 윤희만을 사랑하는 바보가 될 거야!”
뼈 속까지 녹여버릴 것 같은 속삭임이 귓부리를 간지럽히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윤희의 성으로 한 발 한 발 침입해 들어갔다.
어느 순간 자신의 항거가 이미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이성은 체념으로 또렷해지고 있었는 데 이와는 반대로 저항의 몸놀림이 그의 행동에 보조를 맞추는 꼴이 되어 안 된다는 의지와 달리 두 팔로 그의 목덜미를 감아갔다.
아아, 윤희는 욕구에 끌려가는 자신의 육체가 미웠다.
“왜 이랬어요? 왜 이랬어요? 다른 방법도 있는 데......”
일이 이미 끝난지 오래지만 윤흰 그 자세 그대로 넋을 잃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한 올 스쳐갔을 때 자신이 인식하지 못 했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려서야 현실을 직시했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에게 자신에 하는 말처럼 허허로이 중얼거렸다.
“사랑한다. 윤희. 난 지금까지 내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게 남자라고 배웠고 누가 뭐래도 내 신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믿질 못 하겠지만 중요한 건 윤흴 사랑하는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임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야.”
윤흰 그의 감미로운 고백을 더 이상 감내하지 못 하고 돌아서 옷을 챙겼다.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 어깨를 들썩이다 개여울의 돌다리를 건너려 했다. 하나 파과의 고통으로 그의 부축을 받았고 그를 뿌리치려는 저항 속에서 이율배반적으로 그의 품이 따뜻하다는 것을 처음 느끼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그냥 함께 바람을 쐬었을 뿐 이예요.”
윤흰 어둠이 감기는 노을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긴 머리를 흔들며 도리질을 했다.
“안 돼! 윤흰 내 여자야.”
뺨으로 얼굴을 가져오는 그를 개여울에 밀어뜨리며 신작로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 뜀박질은 허우적거림에 불과했다. 그런 윤희의 등뒤로부터 사랑한다는 목소리가 노을 속으로 메아리처럼 번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