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인문학 강좌의 일환으로 현대의전연구소와 한국문명학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제1차 역사문화기행이 3월 16일(토) 10시부터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진행되었다.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정동(貞洞)과 덕수궁 돌담길 이야기
- 문명 전환의 길목에서 -
주최: 현대의전연구소, 한국문명학회
일시: 2024.3.16(토) 10:00-15:00
대상: 덕수궁과 정동 일대
해설사: 이민원(문학박사, 한국사)
1. 정동과 덕수궁에 관한 열 가지 질문
▷정동의 유래는?
▷근대의 정동에 등장한 각종 신문물은?
▷근대의 정동은 왜 정치 외교의 1번지가 되었나?
▷아관파천에 대한 일부 당대인과 현대 사학자 언론인의 인식과 그의 모순은?
▷아관파천 기간 중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고종은 왜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왕(황)궁으로 택하였나?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국호 ‘대한’의 의미는?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독립문, 환구단의 등장과 그 의미는?
▷덕수궁과 헤이그 특사, 3.1운동의 관계는?
▷한국을 위해 살다간 서양인들, 정동에서 배출된 한국의 주요 인물들
2. 덕수궁과 정동을 통해 본 문명 전환기 한국의 모습을 어떻게 보는가?
3. 역사를 보는 눈 -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허상에서 벗어나기.
<시공간을 통해 본 정동(貞洞)의 역사적 의미> : 이민원 박사
서울 중구에 위치한 정동(貞洞)은 근대 한국의 어두움과 시련, 그리고 그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함축해 볼 수 있는 ‘한국 제1의 문물 전시장’이자 21세기 한류(韓流)의 원류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정동을 ‘한국 제1의 문물 전시장’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외정세가 격동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정동에는 황제 고종의 국무수행 공간인 경운궁(慶運宮)과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각국의 외교 대표부인 공사관과 영사관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로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서양의 종교기관으로서 정동제일교회와 영국의 성공회, 러시아정교회, 그리고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사의 사옥, 국내외 인사들의 사교 단체인 정동클럽, 서양식 숙박 시설인 손탁호텔 등이 경운궁 주변에 두루 위치하고 있었다.
자연히 정동은 근대 한국 정치와 외교의 각축장이었고, 서양식 건축과 문화, 서양의 신학문, 개신교 등이 태동하던 주요 무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국의 외교관, 건축가, 선교사, 교사, 상인, 기술자 등은 물론 정부 관료와 궁녀, 환관, 일꾼, 도시민, 학생 등이 오가는 가운데 각종 서양 요리와 커피의 향기 등이 거리에 넘치는 국내 제일의 번화가이자 동서 문물의 교류장이될 수 밖에 없었다.
흔히 ‘가장 어두운 시기는 오히려 광명과 가장 가까운 시기’라고도 한다. 근대의 한국은 암흑의 어두움 속에 다가올 광명을 고통스럽게 기다리던 시련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단기적으로는 국권을 잃는 고통과 시련을 맞았지만, 그런 고통과 어두움이 미래의 꿈을 다지고 잉태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21세기 현재의 한국은 바야흐로 한류의 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의 영화, 드라마, 대중음악, 스포츠, 음식, 한복 등은 아시아 무대를 넘어 세계 각 처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한류는 언제부터 토대를 구축했고 어떻게 가능했을까 묻는다면, 아마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시련과 역경이 그 토대가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인류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추구해 왔다. 그러다 보니 고대 국가 형성 이래 고군분투하며 노력해 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국가의 주권 확립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다. 이런 조건을 구비 하기 위해 동서양 각국이 지나온 길은 멀고도 험난하였다. 이미 상당 수준의 조건을 갖춘 서구의 선진국이 있는가 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아직 요원한 나라들도 세계 도처에 있다. 한국은 어느 수준에 와 있을까.
근대의 한국은 동양 전래의 제국인 중국과 근대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변형인 일본으로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미래의 꿈과 노력은 지속되었고, 그 결과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었다. 이제는 세계의 초(超)선진국 진입도 그리 멀지 않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근대 혹은 대한제국기는 어둡고 절망적인 면도 많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전근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속의 조선 왕조와 현대 유엔 체제하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사이에 위치한 문명 전환의 시기였다. 말하자면 국내외의 격동 속에 서양의 신문물 수용과 그에 대한 거부가 충돌하면서도 미래를 향한 꿈이 싹텄던 때이다.
서울의 정동과 덕수궁은 바로 그런 격동의 시대에 개항 이래 유입된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압축 경험’하여 오늘의 한국에 전해주던 모습을 잘 담아 보여주고 있다. 끝
<답사 이모저모>
▲ 중화전의 어도, 품계석 등에 관해 설명하는 모습
▲ 근정전 앞 계단에는 봉황문양이 있는데 비해 중화전 앞에는 용문양이 장식되어 있음을 설명하는 모습
▲ 중화전 내부 구조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중화전 천정에는 용문양이 중국 황제와 동일하게 그 발톱이 5개(五爪龍)로 되어 있다.
과거 명나라 시대에 천자국인 중국을 섬기고 주변 나라들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 강조되었는데, 그 위계로서 용의 발톱이 중국은 5개, 조선과 베트남은 4개, 일본과 오키나와는 3개로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종황제가 머물던 덕수궁의 정궁인 중화전이 1904년 화재가 난후 1906년 중건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황제국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과 동일하게 발톱을 5개로 새긴 것으로 보인다.
▲ 중화전 앞 계단에서 단체 사진
▲ 중화전 뒷전에서 가이드인 이민원 박사와 질의답변이 진행되고 있다.
▲ 중명전 앞에서 해설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
▲ 구한말 시대의 옛 러시아 공사관 터 앞에서 아관파천의 배경 등을 설명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