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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1908~1932)
농촌에서 계몽 운동을 펼치다
윤봉길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우리가 이름으로 알고있는 봉길은 이름도, 호도 아닌 별명이라고 하네요.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당시 12세), 재학중이던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전통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민족잡지를 구독하며 독립을 위한 마음을 다져나가기도 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19세가 되던 해,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고 인근의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야학까지 열게 되어 한글 교육을 시키는 등 문맹을 없애고 민족의식을 높이고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운동의 성과가 조금씩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끝이 아니었겠지요. 여전히 일제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계몽을 한다고 해도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한 건 독립이었습니다.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를 만나다.
1930년 3월, 윤봉길 의사는 조국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출가 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중국 망명길에 오릅니다.
다롄을 거쳐 칭다오에서 머물며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로 가야 큰일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 1931년 8월 상하이로 갔습니다.
안공근의 집에 머물며 교포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직공 생활을 하며 활동하다가 그해 겨울 임시 정부 지도자로 한인 애국단을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의 의지를 밝힙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채소 장수를 하면서 때를 기다렸어요.
이때의 상황을 "백범일지"에서 보면,
그러던 어느날, 동포 박진(朴震)의 종품(말총)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는 윤봉길(尹奉吉) 군이 훙커우(홍구)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다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 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 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종전에 공장 구경을 다니며 윤군을 보고, 그가 진실한 청년 노동자로 학식은 있으나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거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니 자신의 몸을 바쳐 큰 뜻을 이룰 의로운 대장부였다. 나는 감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有志者 事竟成)고 했으니 안심하시오. 내가 요사이 연구하는 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 참이었소. 전쟁 중에 연구, 실행코자 한 일이 있었으나 준비 부족으로 실패하였소. 그런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쟁에 이긴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이른바 천황의 천장절(天長節) 경축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며 군사적 위세를 크게 과시할 모양이오. 그러니 군은 일생의 대목적을 이날에 달성해 봄이 어떠하오?”
이에 윤군은 쾌히 응낙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하고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거사 직전 사진과 편지를 남기다.
거사 3일전인 4월 26일 백범과 윤봉길 의사의 기념촬영
일본군은 4월 29일 홍구 공원에서 천장절(일왕 생일) 축하식을 거행한다고 밝히고는 그날 식장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물병' 하나와 점심으로 ‘도시락’, 일본 국기 하나씩을 가지고 입장하라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 당일 ‘도시락 폭탄’을 가지고 행사장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었는데, 거사 당일 윤 의사가 던진 것은 '물통 폭탄'입니다(참고로 도시락 폭탄은 거사 후 '자결용'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기에 거사에 앞서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두 아들에게 편지 한 장, 동포들에게 유서를 남겼습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하였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일본의 축제장, 훙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지다.
거사 전날인 4월 28일, 백범은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金海山)의 집에 가서 “윤봉길 군을 내일 아침 중대 임무를 띠고 동북 3성으로 파견할 터이니, 저녁에 쇠고기를 사다가 내일 아침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거사 당일인 4월 29일, 김구 선생은 새벽에 윤 의사와 함께 김해산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작별’하는 상황을 <백범일지>에서 보면,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를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였다.
나는 그 길로 조상섭(趙尙燮)의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 김영린(金永麟)에게 주어 급히 안창호 형에게 보냈다.
“오늘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발생될 듯합니다.”
편지를 보내고 그 길로 또 석오 이동녕 선생 처소로 가서 그 동안의 진행 경과를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난 뒤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오후 1시쯤 되자 곳곳에서 허다한 중국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하는 말이 달라 정확한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홍구공원에서 중국인이 폭탄을 던져서 다수 일본인이 즉사하였다” “고려 사람의 짓이다”라는 등 소문이 분분하였다.
어저께까지 채소바구니를 메고 날마다 홍구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나 이외에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 몇 명만 이 사실을 짐작하였을 뿐이고, 그날의 거사는 나 혼자만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즉시 석오 선생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나서 자세한 소식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자 오후 두세 시경에 다음과 같은 신문 호외가 터져 나왔다.
홍구공원 일본인의 경축대 위에서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가와바다(河端)는 즉사하고, 시라카와(白川) 대장, 시게미츠(重光) 대사, 우에다(植田) 중장, 노무라(野村) 중장 등 문무대관이 모두 중상 운운.
기념식이 열리는 홍구 공원에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모였습니다. 오전 11시 40분 경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폭탄의 안전핀을 빼고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있는 단상 위로 투척했습니다. 큰 소리와 함께 폭발한 폭탄으로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상하이의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의거 직후의 훙커우 공원 모습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의거 장면(클릭시 동영상 작동)
윤 의사는 의거 후 현장에서 바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이송돼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윤 의사는 그해 12월 19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일본땅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윤 의사는 처형 직전 일본인들에게 한 마디 남겼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소.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소식이 세계에 전해지자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 한국인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했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하였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24세의 나이로 일본땅에서 순국한 윤봉길 의사
광복 후 시신을 조국으로 모셔오다.
광복 후 환국한 김구 선생은 1946년 4월 충남 예산 윤 의사 생가를 방문, 윤 의사 가족들을 만나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946년 3월 일본땅에 묻힌 윤봉길 의사를 비롯해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義士)의 유해를 발굴해 그해 6월에 고국으로 모셔와 용산 효창원에 안장했습니다.
1962년 윤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 양재동에 '매헌 윤봉길 기념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윤 의사 생가를 방문한 백범(왼쪽 끝). 왼쪽 두번째부터 윤 의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서울 용산구 효창원에 모셔져 있는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역: 왼쪽에 비석이 없는 묘는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해 가묘로 모셔져 있는 안중근 의사 묘
해방 후 환국해 3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봉환해 와 효창원에 '3의사 묘역'을 조성한 김구 선생(가운데)이 생전에 3의사 묘역을 참배하는 모습
윤봉길 의거(클릭시 동영상 작동)
친일파를 꼭 청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잊지말아야지요.
감사합니다~
어떤 마음이셨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네요ㅠㅠ 늘 감사합니다
정말 상상도 돼지 않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