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第5章 골치 아픈 천재(天才)들 ① 부용방(芙蓉房). 그 곳은 언제 접어들든 퇴폐와 절망의 몽롱한 아편(阿片) 내음만 가득한 그런 곳이다. 지난밤 내내 비가 왔기에 땅은 질퍽하기 짝이 없다. 다른 곳이라면 사람들이 부산히 오고 가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관제묘(關帝廟) 근처는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관제묘는 아편쟁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목야성은 안으로 접어들며 한쪽 귀퉁이를 바라봤다. 본시 관제성군(關帝聖君 : 관우 장군)의 조각이 서 있어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거미줄이 가득한 흙벽만 보일 뿐이었다. 흙벽 또한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문득 목야성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 들었다. 그 자리는 대거가 늘 머물러 있는 곳이다. 한데 지금 대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를 안 지 어언 칠 년째, 그 사이 그가 자리를 뜬 경우란 거의 없다. 대소변을 가리는 때를 제외하곤! 그런데 오늘 대거의 모습이 관제묘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목야성은 대거가 늘 있던 자리 곁에 있는 꼽추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아부고 내음이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아편 환자인데, 지금은 아편을 피우지 않고 있다. 아니 그는 아편을 못 피우고 있다. 은자가 없는지라 아편을 구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꼽추는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자는 어디로 갔는가?" 목야성이 물었으나 그는 힐끗 목야성의 얼굴만을 살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빠끔히 뚫린 그의 두 눈은 지옥으로 통하는 문(門)을 연상케 했다. 그는 대답 대신에 손을 내밀었다. 술 중독자의 손보다도 더욱 경련을 일으키는 손이다. 목야성은 해골 같은 손바닥이 펼쳐지는 의미를 곧 깨닫고 금원보(金元寶) 하나를 던져 주었다. 그 자는 묵직하고 차가운 금원보를 보자 눈이 번쩍 뜨이는지 목야성을 힐끗 올려다봤다. "대거, 그 미친 천재 놈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죽으러 갔소. 킬킬……!" "죽으러 가다니?" "클클… 놈은 완전히 미쳤소. 게다가 환각 중에 사신(死神)의 유혹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소. 하여간 놈은 녹슨 쇠사슬로 전신을 칭칭 옭아맨 채 무저갱(無抵坑)으로 들어갔소이다." "무저갱이라……?" "한 번 빠져들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곳이오. 클클……!" 이름 모를 마약 중독자는 금원보를 쥐고 엉금엉금 기어 나갔다. 모름지기 그는 관계묘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아부고를 파는 장사치를 찾아가 금원보와 아부고를 바꾸게 되리라. "왜 그 곳에… 게다가 쇠사슬이라니?" ② 무저갱(無抵坑)은 본시 광맥(鑛脈)이었다. 과거 황금(黃金)에 눈이 먼 자들이 암벽을 파 들어가며 금 부스러기를 캐내었던 곳! 연후 아무리 바위를 파고 들어가도 금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굴 파는 작업은 중단되었다. 일설에 의하자면 그 곳에 수백 명이 생매장되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그 곳은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지닌 사람이라 한다면 발을 디딜 이유가 없는 그러한 곳이다. 현재 무저갱의 용도는 오직 하나뿐이다. 무덤을 세워 줄 사람도 없는 부랑자들의 시신이 덧없이 던져지기에 마땅한 곳! 실로 서글픈 용도이다. 그 외에 사람이 무저갱을 찾을 이유가 없다. 꽤 넓은 굴 안이었다. 굴 안엔 가득히 시체 썩는 냄새가 흐른다. 목야성은 화려하고 청결한 곳에서만 생활했기에 사방에서 닥쳐 드는 악취에 헛구역질을 거듭해야만 했다. 간혹 뭉클한 것이 발에 차이곤 한다. 그것은 썩어 문드러지는 시체들이었다. 목야성은 지극히 대범한 성격이었으되 시체를 밟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찡그리며 소리 없는 구토를 해 댈 수밖에 없었다. '실로 아수라 지옥이로군. 대거가 왜 이 곳에……?' 목야성은 무저갱 바닥까지 들어서며 스무 구 이상의 시체를 밟아야 했다. 스스스……! 굴 지하에는 거의 독장(毒 )에 가까워진 지독한 습무(濕霧)가 휘감아 돌고 있다. 목야성은 습무를 헤치며 접어들다가 결국 그를 보게 되었다. 대거! 그는 더럽기 짝이 없는 굴벽에 바짝 붙어 있는데,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전신을 휘어 감고 있는 쇠사슬(鐵索)이었다. 쇠사슬 끝은 큰 바위에 연결되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인상이 날카로워 보이는 흑의장한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자의 가슴에는 도부(屠夫)들이 사용하는 묵직한 칼(刀)이 들리어 있었다. 대거는 몸을 누에처럼 꿈틀거리며 비참한 신음 소리를 거듭 토해 냈다. "으으, 아… 아부고를……!" 그는 사지를 뒤틀며 손가락으로 돌벽을 긁어 댔다. "대거!" 목야성이 그를 향해 다가설 때였다. 슷-! 예리한 도광이 번뜩거리며 도부의 칼이 쳐들려졌다. "다가서지 마시오. 더 이상 다가선다면 베겠소!" "자넨 누군가?" 목야성은 혹의인을 바라봤다. "난 추혼도부(追魂屠夫)라 하오. 시시한 이름인지라 알지 못할 것이오. 어찌 되었든 난 저 자에게 다가서는 자를 막아야만 하오." "누가 시켜서 하는 짓인가?" "내게 돈을 주고 호법(護法)을 당부한 사람은 바로 저 자요." 목야성은 흠칫했다. "대… 대거가?" "클클… 그렇소. 저 자는 닷새 전 내게 와서 부탁했소. 난 바쁜 일이 많았지만 그가 워낙 거금을 주었는지라 응할 수밖에 없었소. 사실 저 자가 청부한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니… 클클… 난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대거가 청탁한 일이 무엇이냐?" "닷새 동안 자신을 지켜 달라는 것이었소. 가장 중요한 부탁은… 크크… 닷새 안에 자신이 쇠사슬을 풀려 한다면 가차없이 채찍으로 후려쳐 달라는 것이었소. 난 닷새 동안 스물다섯 번 정도 채찍을 사용했소. 크크……!" 목야성이 모르는 이름이되 추혼도부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자이다. 그는 소액의 돈을 받고 싸구려 청부(請負)를 맡아 해결하는 그러한 자였다. 그 자는 한 자루의 칼과 채찍, 그리고 건량을 들고 무저갱으로 들어왔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오. 크크… 저 자가 왜 큰 돈을 들여 미친 청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킬킬… 난 시키는 대로 했으니, 돈을 가질 자격이 있지." 추혼도부는 도신(刀身)에 손가락을 대고 문지르며 음침하게 웃었다. "……!" 목야성은 그를 보다가 시선을 대거 쪽으로 옮겼다. 대거의 몰골은 인간 이하였다. 그는 구역질을 거듭한 나머지 옷가슴은 더러운 토물로 뒤덮였다. 그의 손가락은 바위를 후벼파서 피에 물들었고, 등줄기는 추혼도부의 채찍에 의해 뜯겨져 나갔다. 그 곳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다가 말라붙어 보기만 하더라도 끔찍한 형상이었다. "세 시진 후면 이 지겨운 일도 끝이야. 킬킬… 여하튼 주머니를 두둑히 채우게 되었으니, 술을 실컷 마실 수 있겠지." 추혼도부는 흰 이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웃었다. 그는 여러 건의 청부를 맡았고, 그 가운데에는 은밀히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있었다. 그는 강호의 밑바닥 인생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되 대거가 그에게 청탁한 것은 실로 쉽고도 괴이쩍은 것이었다. 여하튼 그는 이미 선금(先金)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다분히 충실하고 신용 있는 청부자였기에 닷새 내내 지옥 같은 무저갱 안에 머물며 대거의 등에 채찍을 후려치는 일을 엄숙히 이행한 것이다. "크크… 세 시진 남았을 뿐이야." 추혼도부는 이 지겨운 호법 일이 끝나게 되었음을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목야성은 대거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과, 그를 옭아매고 있는 녹슨 쇠사슬, 그리고 추혼도부의 발 아래 뒹굴고 있는 연편(軟鞭) 등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렇다. 대거는 죽을 각오를 하고 마약(痲藥) 중독(中毒)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대거는 강호의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그는 너무나도 비겁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편 중독자가 되었다. 하기에 그는 청부자 하나를 사서 호법으로 세워 놓고 아편을 끊고자 하는 것이다. 아편을 끊게 되면 지독한 고통이 따른다. 그러한 통증을 일컬어 금단현상(禁斷現象)이라고 한다. 대거는 아부고를 피우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 되어 쇠사슬을 풀고자 이십 차례 넘게 시도했다. 그 때마다 추혼도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채찍을 후려쳤다. 추혼도부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래시계로써 시간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래가 다 떨어져 내리자, 한순간 환호성을 토했다. "드디어 끝이로군. 이 지겨운 일도… 프핫핫……!" 그는 환호성을 토하며 무저갱 밖으로 달려나갔다. 대거는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는 바, 그의 몸이 흠뻑 젖는 이유는 몸에서 흘러 나온 피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돌벽에 손가락을 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목야성은 천천히 대거 곁으로 다가섰다.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휴식과 섭생(攝生)이겠지? 내가 자네를 업어 객잔에 옮겨다 주겠네." 목야성이 대거를 들쳐업고자 할 때였다. "그럴 필요는 없소." 대거는 업드린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어두웠다. 그리고 전과 달리 지극히 이성적이며 또한 냉철한 느낌을 풍겼다. "사실 귀하를 기다렸소." "왜?" "칠 년 전 거래를 트던 그 날, 묻고 싶은 것이 있었소. 그걸 지금 묻겠소." "……!" "누굴 죽이기 위해 날 원하는 것인지……?" 목야성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을 때까지 대거는 기다렸다. 이윽고 목야성의 음성이 다시 흘러 나왔을 때, 그의 음성은 무겁고 낮았다. "죽여야 할 자가 많아!" "어느 정도……?" "어쩌면 오천(五千)이 넘을지도……." "생각대로군. 후후… 오백 정도를 죽이는 일이라면 아마도 귀하가 단독으로 실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소. 또한 죽어야 할 자들의 괴수(魁首)는 강호에서 가장 강한 자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오." "그렇다. 그는 막강하며 또한 무적(無敵)이다." "이름은……?" "장사꾼은 비밀을 쉽게 누설하지 않아. 훗훗……!" "좋소." 대거는 엷게 웃었다. 그것은 목야성이 지금까지 대거를 본 이래 처음으로 보는 인간적인 웃음이었다. 그러나 얼굴마저 피로 뒤덮여 있기에 흡사 야차의 웃음과 같았다. 대거를 바라보며 목야성은 무심히 말을 이어 갔다. "그 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 그 자에 대한 것은 서책으로 정리되어 있으니, 필요하다면 보게." "언제부터 시작할 작정이오?" 대거는 고개를 돌려 목야성을 바라봤다. 늘 희끄무레하기만 하던 눈빛인데, 지금은 혜성처럼 반짝거린다. "지금 이 순간부터!" 목야성의 입가에는 메마른 웃음꽃이 나풀거렸다. 진정한 대거의 진면목을 본 희열 때문일까? "하여간 좋소. 기왕에 시작된 거래이니 한시빨리 마무리짓기로 합시다. 어차피 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오. 귀하가 바라는 일을 한시빨리 마친 다음 자유롭게 떠나겠소. 귀하가 바라는 것은 나의 사악한 지혜(智慧). 좋소. 그걸 귀하를 위해 쓰겠소. 일단 이것을 마련해 주시오." 대거는 손을 품에 넣어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가죽 주머니는 목야성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주머니를 펼치자 첩지 한 장이 보인다. 목야성이 첩지를 쥘 때였다. "그 안에 백 가지 물품의 목록(目錄)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오. 내가 귀하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을 빠짐없이 구해 달라는 것이오." "……." 목야성은 첩지 표면을 살펴봤다. 거기 적힌 글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축융화첩(祝融火帖)> 목야성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축융화첩이라는 문구를 본 바 있다. 그렇다. 축융화첩이라는 문구는 강호비록(江湖秘錄)이라는 책에 기록된 축융마교(祝融魔敎)의 멸망 부분에 기록되어진…….' 목야성의 눈빛이 강렬해질 때였다. 약간 으스스한 대거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댄… 무서운 사람이오!" "내가?" "후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아 왔소. 그 가운데에는 경천동지할 무공을 지닌 사람도 있으며, 기문둔갑진을 펼쳐 백만 대군을 포박해 버릴 지혜의 소유자도 있었소. 하되, 누구도 귀하만은 못했소. 왠지 아시오? 그들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천하를 두려워했는데 비해 귀하는 무엇도, 그 누구도 겁내지 않소." "……." "귀하의 그런 자신감은 가히 공포에 가깝소. 누가 귀하를 키웠는지… 후후… 전설로만 들었던 대협거상(大俠巨商) 목비룡, 그분은 역시 위대한 분이오. 칠 년 전 비참히 쓰러지셨으되, 강호의 하늘을 받칠 기둥 하나를 은밀히 만들어 놓으셨으니……!" 대거는 목야성을 올려다보며 말하다가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얼굴은 땀에 흥건히 젖은 상태다. 그는 어지간히도 깡마른 자이다. 살은 거의 없고 뼈와 가죽뿐인 추악한 외모의 병자(病者)였다. 귀곡(鬼谷)의 마지막 후예이되, 칠 년 내내 폐인으로 지낸 비겁의 천재 진대거. 강호(江湖)는 이미 그를 잊은 지 오래이다. 그러나 목야성은 알고 있다. 오직 대거만이 자신을 능가하는 병법(兵法)과 기문진학(奇門陣學)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을! "언제까지 구해 주면 되는가, 대거?" "빠를수록 좋소. 어차피 귀하를 위해 만드는 것이니까!" "알겠네." "그럼 어서 나가시오. 이 곳 공기는 귀하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오." "자네는……?" "난 며칠 더 있다 나가겠소. 생각할 것도 있고……." 대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목야성마저 감히 건드리지 못할 신비한 구석을 가진 자였다. 목야성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대거, 미안하네. 나로 인해 맹세를 깨고 말았으니…….' ③ 수륙대상행의 총본산인 목씨세가는 강호계에 잠룡보(潛龍堡)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냉월소축(冷月小築)이라 함은 잠룡보의 내원을 뜻한다. 잠룡보로 접어드는 길은 한 시진 전부터 흩뿌리기 시작한 세우(細雨)발에 흠뻑 적셔지고 있었다. 목야성은 암도(暗道)를 통해 외부로 나갔지만 접어들 때에는 정문을 통해 접어들었다. 그의 몰골은 실로 가관이었다. 전신에서 악취가 풍기고, 머리카락은 봉두난발로 흐트러지고, 더욱이 어디에서 술을 마셨는지 딸꾹질을 거듭하고……. "끄윽! 실로 유쾌한 날이로다." 목야성이 애마(愛馬) 비천아(飛天兒)의 안장 위에서 곧 떨어질 듯 상체를 흔들흔들거릴 때였다. "소가주님, 대체 어디에 가 계시다가 이제야 오십니까요?"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한 자의소녀가 다가서서 말고삐를 쥔다. 공손예월이었다. "하핫… 그것 참 재미있더군. 예월아, 넌 혹시 마작(麻雀)이라는 놀이를 해 본 바 있느냐?" "마… 마작이오? 그럼 이제까지 마작을 하셨단 말입니까?" 공손예월의 얼굴빛이 하얘졌다. "하하하… 세상에 그렇게 흥미진진한 것이 있을 줄이야?" "소가주님, 그분이 오시어 정오부터 지금까지 학의 목이 되어 소가주님을 기다리셨거늘… 마작 타령이시라니……." 공손예월은 아예 울상이 되었다. 이 때 목야성이 공손예월을 바라보다 눈을 반개했다. "호오, 이제 보니 예월이 네가 실로 아름답구나. 그래, 어디 손이나 한 번 만져 볼까?" 목야성은 손을 덥석 내밀어 공손예월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공손예월의 오른손은 죽간에 끌려 나오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르르 떨렸다. "흐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끊었다. "희고 곱군. 비단결이고… 또한 첫 눈발 같구나. 끄윽!" 목야성은 취해 지껄이다가 그만 낙마(落馬)하고 말았다. 공손예월은 화급히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런데 누구일까? 한 쌍의 눈길. 아까부터 목야성을 살펴보던 후리후리한 키의 황의미녀(黃衣美女) 하나! 그녀의 눈가에 분노에 겨운 파문이 일어났다. '저 무례하고 경박스러운 자가 내 일생을 떠맡을 자란 말인가?' 하늘에 먹구름이 낮게 깔린다. 우르르르릉-! 하늘이 천둥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오, 신이여! 어이해 저런 자를……!' 여인의 목은 유독 희고 가냘퍼 보였다. 목야성은 다음 날 정오가 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뒷골이 빠개지는 듯하군." 목야성이 오만상을 찡그릴 때였다. 그가 깨어나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공손예월의 입술이 뾰로통해졌다. "무사들이 악양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어제 대단하셨더군요. 월선루(月仙樓)라는 곳에서 여아홍(女兒紅) 일곱 주담자를 쉬지 않고 마신 이후, 도박장에 가시어 보기 좋게 칠천 냥을 잃으셨다더군요?" "하핫… 내가 그랬던가?" 목야성은 넉살 좋게 대답하며 손을 내밀어 흰 도자기잔을 쥐었다. 그 안에 차게 식힌 오미자차(五味子茶)가 담겨져 있다. 공손예월은 목야성이 오미자차를 벌컥 들이키는 것을 바라보며 연민에 가득 찬 눈빛을 흘렸다. '늘 단정하고 치밀하기만 하시던 소가주님께도 이런 허점이 있으시다니… 어찌 여긴다면 이렇듯 숙취를 못 이기시고 누워 계신 모습이야말로 인간다운 모습일지도… 너무 완벽한 남자의 가슴에는 여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여백이 없지.' 문득 공손예월은 자신이 진심으로 목야성을 흠모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그러나 오랜 습관대로 그러한 마음을 곧 감추었다. "그나저나 가모님의 진노가 대단하십니다." "그러하실 테지. 하되 난 목가의 소가주가 아니냐. 하늘 아래 날 억누를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도 할 수 있지. 프핫핫……!" 목야성의 오만함은 여전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자신의 허물을 자책하지 않는다.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그는 타인과 깊이 사귀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야말로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소녀가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으니, 어서 목욕을 하세요. 오늘 저녁은 주령 소저와 더불어 하셔야 합니다. 저녁을 드실 때에는 청삼을 걸치십시오. 소가주님은 청삼을 걸치실 때가 가장 돋보이십니다." 공손예월은 발랄하게 말한 다음에 밖으로 나갔다. 목야성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예월아, 넌 나를 하늘로 여기되 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졸장부에 불과하다. 난 존경할 가치가 없는 위선자(僞善者)다. 아, 그나저나 넌 강호의 어떤 여인보다 아름답다. 넌 나의 시비로 머물기에는 너무 아까운 여인이다. 조속히 널 자유롭게 만들어 주마.' 가끔 느끼는 감정이지만, 목야성은 누구도 공손예월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생각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참가하게 된 망선대(望仙臺)의 저녁 연회 때 일거에 박살나고 말았다. ④ 그녀는 위의(褘衣)를 걸치고 있다. 반비(半臂)에다가 백봉(白鳳)의 배자(背子)가 붙어 있는 위의의 빛깔은 심청색(深靑色)이었다. 그녀는 넓은 등나무 탁자의 끝 부분에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에 옥봉잠(玉鳳簪)이 꿰어져 있다.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장신구는 통천서각(通天犀角)으로 만든 옥봉잠 하나에 불과하다. 사실 그것만 하더라도 어제 낮에 능운고가 그녀에게 예물로 하사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녀는 철저하게 장신구를 소지하지 않았다. "……." 그녀는 다소곳이 눈길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쪽으로는 산광(山光)이 추색(秋色)으로 흥건하다. 목야성의 외부 출입이 적다고 하되, 어찌 되었든 그는 수륙대상행의 작은 주인으로 수없이 많은 강호미인들을 본 바 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눈이 높은 사내였다. 그는 어떠한 미녀라 하더라도 두 번에 걸쳐 거듭 눈길을 준 바는 없었다. 하되 그녀는 모든 점에서 목야성의 상상을 초월했다. 빙기옥골(氷肌玉骨)이니,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廢月睡花)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랄까? 산 속 고요하고 맑은 심연 가에 외롭게 피어난 수선화(水仙花) 한 떨기! 실로 가공할 청초(淸楚)가 그녀의 검은 눈망울에 고스란히 담기어져 있다. 그녀의 입술은 선홍색으로 짙붉었는 바, 살짝 누르기만 하더라도 핏물이 흠뻑 배어 나오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정녕 탐스럽고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다. 오똑한 콧날은 냉정하면서도 지혜로워 보이고, 유독 긴 속눈썹으로 인해 얼굴 한가운데 암영(暗影)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에 여러 겹 신비의 장막(帳幕)을 드리는 듯했다. 그 탓에 희디흰 상아질의 치아가 문득 드러나 보인다. 비천옥봉(飛天玉鳳) 주령(珠玲)!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거기 앉아 있었다. '가히 인간 보물……!' 목야성은 문득 숨이 막힘을 느꼈다. 비록 내공 수련을 하지 않아 내가고수(內家高手)들 특유의 정력(定力)이 부족하다 하되, 그는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폐관독서(廢關讀書)의 수련을 장기간에 걸친 처지이다. 그는 어떠한 대상 앞에서도 속마음을 감출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주령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느낌만은 감출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오만방자한 녀석! 어제 낮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능운고의 싸늘하고 정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추흥(秋興)이 너무 좋아 나들이를 나갔었지요." 목야성은 넉살 좋게 대답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주령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한순간 허공에서 엉켰다. "……!" 차갑고 맑은 눈빛이다. 심해의 고요한 물결 같은……! 강호군협(江湖群俠)이 영혼을 바쳐 사모하는 백도제일미인(白道第一美人)의 눈빛이다. 그것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히 상대를 압살시킬 지경이었다. 능운고의 사나운 목소리가 거듭 귓전을 때린다. "너의 언행이 최근 들어 품격을 상실하고 있어 걱정이다. 네 어깨에 수륙대표행의 장래가 짊어지워져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라." 능운고는 목야성이 어제 낮에 장원을 비운 사실에 대해 엄중히 꾸짖은 연후에야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사실 능운고에게 소원이 있다면 크고도 작은 것이다. 내년 이맘 때쯤 잘생긴 손자를 가슴에 안아 보는 것이 그것이었다. '아암, 영(玲)아라면 나의 며느리가 될 만하지!' 능운고는 주령에 대해 약간의 불만도 갖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 주령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다. 하기에 그녀는 주령을 대표행의 여주인으로 만듦으로서 그 빚을 갚고자 하는 것이다. '영아는 성아에게 과분하다. 성아는 부족한 게 하나도 없이 자라 세상의 어려운 점을 알지 못한다!' 능운고의 눈에 목야성은 삼척동자에 불과하다. 그는 나약하며 무기력한 부호집 외아들인 것이다. 눈앞에는 유례 없이 진귀하고 맛깔스런 음식들이 가득 차리어져 있다. 여하튼 뜰의 연희(宴會)는 정숙하고도 풍요로운 분위기 가운데 치루어졌다. 이 날 저녁의 요리를 담당한 사람은 연경(燕京) 요리의 전문가로서, 그가 가장 잘하는 요리는 연경식 오리구이이다. "오리구이의 백미(白眉)는 머리 가죽이지." 목야성은 다분히 경박스럽게 말하며 오리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능운고는 다분히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목야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없는 녀석! 하긴 네가 강호의 음침하고 어두운 구석을 알지 못한 채 평화롭게 사는 게 나은 일일지도…….' 능운고는 소채 요리 몇 젓가락만으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얼마 후에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먼저 자리를 물러났다. 애써 두 남녀가 독대하는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야천(夜天). 밤하늘에는 가득히 유성우(流星雨)가 떨어져 내린다. 이 곳 망정대(望庭臺)는 꽤 높은 지대이기에, 장강(長江)이 덧없이 동정호로 흘러드는 모습이 아련하게 보였다. 이미 식사를 마친 이후이다. 목야성은 다과(茶果)를 취하며 주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특유한 오만이 번지고 있다. 주령은 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애써 노여움을 감추고 정숙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목야성은 한동안 침묵했고, 그가 던진 첫 마디는 이러한 것이었다.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오." "……!" 주령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목야성은 쌍정차(雙井茶) 한 모금을 더 마신 다음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모든 방면에서 욕심이 많소. 강호인들이 상인(商人)들을 배부른 돼지라고 욕을 해 대든 말든, 난 만사에 과욕을 갖고 사는 자요." "그 말뜻은……?" "기왕 혼례(婚禮)를 치른다면… 여자에 대해 욕심을 부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일가(一家)를 이루고 산다면 자식에도 욕심을 부리겠다는 것이오." 목야성은 거만한 상인의 모습을 철저히 엿보였다. '무례하고 천박한 상인 나부랭이 같으니라고!' 주령은 헛구역질이 토해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럼 소녀와 성혼하신다 하더라도 다른 여자를 취하시겠다는 뜻인가요?" "이를테면……!" 목야성은 거만히 대답했다. 놀라운 것은 주령이 그러한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실 그녀는 지난밤의 목격 이후, 목야성을 인간 이하의 하등 동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첩(妾)을 두신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지요." "호오, 보통 여자들과는 다른 배포시로군?" "솔직히 말하자면 소녀는 목 공자와 혼례를 치룰 생각이 없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왜 이 곳에……?" 목야성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전 실로 바쁜 처지입니다. 전 강호방파(江湖 派)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허튼 짓을 골라 하시는군." "허튼 짓이라고요?" 순간 주령의 뺨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등쪽으로 갖고 갔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동작이었기에 곧 중단되었다. 평상시였다면 그녀의 등에 늘 걸려 있던 송문고검(松紋古劍)이 강철음을 내며 뽑혔을 것이다. "허튼 짓이 아니고 뭐겠소? 대체 강호의 방파라는 것은 의(義)와 인(仁)을 가장한 이권 집단에 불과하지 않소? 정녕 이권을 위해 뭉치는 것이라면 아예 표행이나 은장을 차리는 게 낫지 않겠소?" "……!" 주령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말없이 눈썹만 파르르 떨었다. "게다가 당금강호는 정사(正邪) 중간 세력이 장악하는 실정이니, 백도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새벽에 목이 잘릴지 모르는 위험한 선택이 아니겠소? 그러니 이 기회에 섣부른 장난은 그만하고 요조숙녀 본연의 길로 돌아오시오." "그대는 정녕 한 마리의 연작(燕雀)에 불과하군요?" 주령은 참다 못해 비아냥거리고 말았다. 연작이란 참새를 말한다. 그러나 그 말에도 목야성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프핫핫… 괜히 붕(鵬)이 되어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날아오르려 하다가 덧없이 추락해 버리느니, 연작이 되어서 평화롭고 부유하게 사는 게 보다 현명한 짓이 아니겠소?" 목야성이 넉살 좋게 웃자, 주령은 눈에서 노광을 뿜으며 꾸짖 듯이 말했다. "목비룡 대의협은 사도세력이 파견한 암살자에 의해 폐인이 되시었습니다. 그로 인해 능씨 아주머니는 매년 백도에 은자 백만 냥씩을 희사하시며 복수를 당부하실 지경이고……." "흥, 어머니는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분이오. 내가 상행의 대권을 완전 장악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백도에 보내는 은자 백만 냥을 중단시킬 것이오." "어찌하여 의협의 열사(烈士)들을 모독하십니까?" "그들은 대세(大勢)에서 물러났소. 강호의 대세는 정사 중간의 무사들에게 장악되고 있소. 지원을 한다면 차라리 그들에게 하겠소." 목야성은 날카롭게 말하다가 갑자기 주령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주령은 그에게 사나운 반박의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실로 강렬한 사내의 시선! 타는 듯한 시선이랄까? 그 시선에 응시를 받자, 주령은 문득 야릇한 감정에 휘감기고 말았다. 목야성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주령이 늘 보아 오던 경박한 남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으음, 내 육체(肉體)를 노리는군!' 주령은 다시 한 번 분노에 휘말렸다. 그녀는 큰 기대를 하고 목가에 왔다. 목야성이 뛰어난 인품과 지혜의 소유자라고 판단된다면 그녀는 공손히 절을 하며 이런 부탁의 말을 할 작정이었다. - 이 년 간 강호에 머물며 가문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그 후 목가에 외로운 일신을 맡기겠으니, 부디 거두어 주시길……! 하되 그녀는 그러한 말을 목구멍 깊숙이 삼켜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자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했지, 속은 철저히 부패해 있는 건방진 장사꾼에 불과했다. 그러한 자는 주령이 가장 경멸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자신이 노력해 이룩한 부도 아니었고, 조상 대대로 이룩되어진 부를 손쉽게 상속받아 그것으로 제왕연하며 사는 자. 그러한 자들의 탐욕을 위해 강호계에 얼마나 많은 혈루(血淚)가 뿌려졌던가? '이 자는 목가의 종사(宗師)가 되어선 아니 될 자다.' 주령이 역겨움을 보다 강하게 느낄 때였다. "밤공기가 좋군. 어떻소? 나와 더불어 호젓이 갈대밭을 한 번 걷는 게?" 목야성은 음침히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주령의 손목을 움켜쥐기 직전이었다. 슷-! 주령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비서무영(飛絮無影)으로 흔들리며 날아들었다. 직후 철썩! 하는 격타음이 울려 퍼졌다. "천하고 경박한 돼지!" 주령은 화가 나서 소리치며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봉황재천(鳳凰在天)의 경공을 발휘해 날아올랐고, 등나무를 타넘어 호선(弧線)을 끌며 사라져 갔다. 목야성은 뺨에 선명한 장인(掌印) 하나를 찍은 채 벌렁 나뒹굴었다. 코와 입술에서는 핏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만에 하나, 주령이 삼(三) 성(成) 이상의 공력을 사용했더라면 목야성의 어금니 다섯 개가 턱뼈와 더불어 으스러졌을 것이다. "주령, 보기보다 매콤한 요리로군." 목야성은 안면에 통증이 심한 데도 불구하고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남에게 매를 맞아 보기는 인생에서 두 번째였다. 인생 최초의 매는 아버지에게 맞은 매이다. 일곱 살 때던가? 그는 장난 삼아 화살을 쏘았고, 그것은 화원지기 노인의 눈알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 목비룡은 목야성의 종아리가 피에 흠뻑 젖도록 때린 바 있다. 목야성은 오래도록 주령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봤다. "하여간 유감이오. 잘 대해 주지 못하는 현실이……." 목야성의 눈빛은 고독해졌다. 그는 경박함을 위장하고 있었으나, 강호의 누구보다 고독하고 진지한 위인이다. 그는 그러한 자화상(自畵像)을 강호인이 알기 바라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표피(表皮)만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싸울 수 있다. '적은 가공하다. 나의 싸움은 승산(勝算)과 패산(敗算)이 각기 반반이다. 패배할 경우, 희생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만 한다.' ⑤ 자시 즈음. 목야성은 느릿하게 냉월소축 어귀로 접어들었다. 그는 망정대(望庭臺) 연회장에 홀로 남아 말술을 들이마셨기에 얼굴이 잘 익은 대추처럼 붉어졌다. 그는 취해 등왕각(騰王閣)의 시를 읊으며 휘청휘청 소축의 국화원으로 접어들었다. 그가 막 서재에 접어들려 할 때였다. "공자님! 그 자가 와서 버티고 있습니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그 추악한 짐승이 이 고결한 곳에 와서 술을 요구하다니요?" 울상을 짓고서 누군가가 입구에 서 있다. 공손예월, 그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목야성을 보자마자 하소연하듯 울분을 토해 냈다. 그러다 말고 문득 기겁했다. 목야성의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찍힌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상처입니까요?" "거미에 물렸다. 하하하……!" "거… 거미요? 이런 손바닥 자국을 남기는 거미도 있습니까? 설마…그분이……?" 순간 공손예월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 떠올랐다. 그녀가 분연히 사정을 캐묻고자 할 때였다. "네가 추악한 짐승이라 할 자는 한 사람뿐인데… 설마 그가 왔단 말이냐?" 목야성은 어느 틈엔가 취기를 잃고 있었다. 공손예월은 치를 떨며 도리질을 했다. "말도 마십시오. 그 자는 저녁 무렵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소녀는 과거 그를 두 차례 본 바 있기에 그를 즉시 알아봤습지요. 그 잔 어처구니없게도 석빙고(石氷庫)에 틀어박혔습니다. 오늘부터 그 곳이 자신의 거처라며! 그리고는 나가라고 말하는 소녀를 보며 히죽 웃고는 술 세 주담자를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안주는 필요하지 않다고도 하고……!" "후후… 그 잔 정말 멋진 미남자가 아니더냐, 예월아!" "그… 그렇기는 하지만, 어울려선 아니 되는 음마(淫魔)입니다요." "하하하… 어쨌든 한상에게 술을 가져다 주었느냐?"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하하… 한상, 그 녀석의 슬픈 눈빛에 녹은 게로군? 천하의 깍쟁이 예월이 귀하디귀한 국화주를 세 담자나 썼으니……!" "치잇!" 석빙고(石氷庫)는 지하에 자리잡고 있다. 석빙고 안에는 거대한 빙괴(氷塊)가 수십 개 들어앉아 있었다. 석빙고의 구조 자체가 얼음이 녹는 것을 방지하는 데다가, 천하의 기진이보로 불리우는 빙극신주(氷極神珠) 다섯 개가 천장에 박혀 있다. 하기에 그 곳은 얼음이 녹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물이 결빙(結氷)이 될 지경으로 추운 장소였다. 한상(寒霜)! 강호제일의 비겁자에다 음마인 그는 석빙고 가운데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세 주담자의 국화주를 모두 마셨다. 하되 얼굴빛이 붉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하얘졌다. 그는 역시 천하제일의 미남자였다. 얼음 창고 가운데 머물며 어깨 위에 희디흰 서릿발을 한 치 정도 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신비롭기 짝이 없다. 그는 목야성이 안으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주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목야성에게는 철저한 패배자인 것이다. 그의 일(一) 검(劍)으로 목야성의 사지를 절단할 수 있을 고수이다. 그러나 정신력의 싸움에 있어서 한상은 목야성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절정검도(絶頂劍道)를 걷는 무사에게 있어 정신적으로나마 꺾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녕 참기 힘든 일이다. 한상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나는 언제고 귀하를 죽일지도 모르오. 귀하는 내가 꺾고 말아야 할 추억을 만들었소. 난 그러한 추억에 영원히 지배당할 수 없는 자요. 하기에 언제고 난 귀하의 목젖에 구멍을 뚫을지도 모르오." "늘 기대하겠네. 한상, 자네의 일 검을!" "크크… 그 배포는 여전하군." 한상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떴다. 그리도 죽어 있던 회색(灰色)의 칙칙한 눈이 아니었던가? 하되 지금 그의 눈은 암청색(暗靑色)으로 은은히 반짝이고 있다. "내가 어이해 석빙고로 들어온지 아시오?" "글쎄……!" "그건 태양을 피하기 위함이오. 오직 일 검으로 승부를 내는 쾌검사(快劍士)에게는 초식 구사보다 예감이 중요하오. 그리고 햇살은 예감을 어지럽히오. 하기에 난 햇살이 들지 않는 석빙고에 들어온 것이오." "훗훗… 좋은 말이로군 그래? 쾌검사의 예감과 얼음 창고, 그리고 술이라……!" "죽이고 싶은 자를 말한다면 그가 누구든 죽이겠소. 기왕이면 강한 자를 거론해 주기 바라오. 악랄한 젊은 장사꾼을 위해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보다, 상대가 날 죽이는 쪽이 나을 테니까!" "후후……!" "난 귀하가 누굴 죽이고자 하는지 알고 있소. 귀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으며, 귀하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되지 못할 가장 막강한 무림세력을 분해하고자 날 선택한 것이오." "……." "솔직히 말하건대, 난 귀하를 위해 최후의 승부를 하기엔 능력이 부족한 자요. 난 아직 녹슨 철검 한 자루 마음대로 제압치 못한 패배자에 불과하오." 한상이 말을 할 때마다 흰 김이 토해졌다. 기루에 머물며 기녀의 젖가슴을 떡 주무르듯 하던 희대의 풍류객 한상! 그의 뺨에 떠오르는 빛은 오랫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하다가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 노선승(老禪僧)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충고하건대, 지금 단념하는 게 최상책이오." "알 텐데, 내가 단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오. 그리고 여기 온 나는 귀하만큼이나 미친 자일 것이오. 본시 승부사는 지는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야 하오. 하되 난 진다는 예감을 품고도 귀하를 위해 검을 쓸 작정을 하고 여기 왔으니……!" 한상은 그렇게 말하다가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는 한 가닥 신광(神光)도 흘러 나오지 않는다. 차갑고 어둡다. 오직 그뿐이다. 어떠한 빛도 흘러 나오지 않는다. '한상은 감정을 철저히 절제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것이야말로 한상의 절대적인 풍도이다. 한상의 검은 침묵과 타락 가운데 드디어 탄생되었다. 드디어……!' 목야성은 한상의 눈빛이 칠 년의 고행 가운데 완성된 눈빛임을 알아보았다. 무언지언(無言至言). 두 남자는 언어로 품을 수 있는 것 이상 가는 내용의 느낌을 침묵 가운데 교감(交感)하는 일각을 흘려 보냈다. 이윽고 목야성은 석빙고를 벗어나며 첩지 한 장을 꺼냈다. "이 안에 물품이 적히어 있으니 한시빨리 구해 주게. 필요한 대금은 전표로 치르게. 자네에게 전표 한 다발을 주겠네. 바라는 금액을 마음대로 적을 수 있는… 그리고 천하 어디에서도 통용이 되는……!" 목야성은 첩지와 더불어 전표 다발을 꺼내 한상에게 전했다. 한상은 축융화첩(祝融火帖)이라는 네 자 글씨를 확인한 다음에 볼에 경련을 일으켰다. "대거, 그 자의 사악한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구려." "후후… 역시 용은 호를 알아보는군." "빌어먹을! 대거만은 이 미친 도박판에 참가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서둘러야 해. 난 이미 칠 년을 기다려 왔으니까!" 목야성이 문 밖으로 나갈 때였다. "서두른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서두른다는 것이오, 나으리!" "프핫핫……!" 목야성이 남긴 것은 맑고 강한 웃음소리뿐이다. 미친 도박(賭博), 세 명의 광인(狂人)에 의해 시작되는 조용하고 거대한 음모(陰謀)이다. 드디어 도박은 시작되는 것이다. 드디어……!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