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떠난 농촌 / 나정례
토요일, 남편은 쉬는 날이니 바람이나 쏘이자고 한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고향 가는 배를 탔다. 푸른 물결을 가르며 출발하는 뱃머리에서 비둘기들이 구구구하며 날아든다. 목포대교 지나 10분 거리 고향에 도착했다. 선창가에는<사에이치 클럽 청년회>라고 돌에 새겨져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그때는 동네 처녀 총각들도 많았다. 스마트폰이 무엇인지 모르고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는다. 집배원이 전달해 주는 시대였다. 부모님들 몰래 안개 자욱한 봄날 돛단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해남 등대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썰물이라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동네 앞까지 배는 들어갈 수 없었다.
배에 앉아 손뼉 치며 노래도 불렀다. <맑은 하늘 푸른 물은 우리들의 마음인가 새파랗게 젊은 가슴은 슬기롭고 정다워라. 가죽배낭 들쳐 메고 손에 손을 마주 잡고 노래 불러 꿈을 불러 꽃을 피우자 앞산 메아리도 산울림이 야호야호 야호 산울림이 첫사랑에 꿈을 싫은 산 메아리가 들려만 온다.> 사에이치 클럽 청년들과 그 또래 여자 회원들이 야유회를 가는 날이다. 나도 회원은 아니지만 초대 받고 같이 갔다. 바닷물이 들어오려면 밤 12시까지 배에서 기다려야 한다. 집에 가면 부모님들한테 야단맞을 줄 알면서도 청춘은 즐거웠다. 청년들은 나이가 나보다는 세 살 위 언니, 오빠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 거기에서 우리 사랑은 싹트고 그날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노부부는 옛날을 추억하며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청년들은 일자리 찾아 도시로 나가고 처녀와 총각은 한 명도 없었다. 백발이 된 노인들만 집집마다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옛날 같으면 한집에 아들딸이 여덟 명도 있어 아이들 소리가 왁자지껄하였다. 그러나 이제 문전옥답은 잡초에 묻혀 산이 되었다. 노인들이 살다 돌아가시면 빈집으로 남아 있어서 쓸쓸함을 더한다. 허리 무릎이 아파서 전동차를 타고 밭일을 겨우 일을 한다. 손 구루마를 밀고 어렵게 다니는 노인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아들 집에 보내려고 일을 한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죽고 나면 동네는 누가 지킬 것인가. 청년들은 모두 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이대로 없어져야 하나, 착잡하다.
오후 다섯 시 반배를 타려고 2킬로를 걸어서 뱃머리에 나왔다. 외국인 청년들이 작업복을 입고 여러 사람이 나와 있었다. 한국말을 조금씩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하는 사람들이냐고 옆에 가서 물어보았다. 감독은 목포 사람이다. 저수지 보수공사 하고 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청년들은 농촌을 싫어한다. 고급 직업이나, 카페, 식당에서 ‘일당’을 받고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고비를 달로 받으면 장사가 안 되면 못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농어촌이 살아야 인류가 사는데 어떻게 해야 농촌을 살릴 수 있는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꾼을 구하려고 용역에 연락하면 우리나라 청년들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불편하지만 외국 사람들 하고 일을 할ㅡ 수밖에 없다.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일을 하는 외국인이 주인이 되어 떵떵거리며 살 것 같다.
문제는 또 있다. 아가씨들도 신랑감을 만나려면 “직장 좋고 돈 잘 벌어들인 청년이나, 시부모라도 경제 적 여유가 있으면 그 아들을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뭣 하러 결혼해서 개고생 하냐고, 하는 아가씨도 있다. 노력해서 살아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