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회 교수의 <화성법 연구> 추억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회장)
필자가 대학생이던 시절이다. 구두회 교수라면 음악회나 가면 얼굴을 뵈는 어른이기에 당시에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2018년 [한국음악 선구자들의 삶과 음악]이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여러 사람을 조사하면서 그의 생애에 대한 편린을 접할 수 있었다. 이제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를 조명하는 책자와 행사가 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서울대 음대 국악과 작곡 전공이었다. 1959년 서울음대에 국악과를 창설한 이혜구 교수는 학생들에게 틈만 나면 누누이 말씀하셨다.
“자네들은 기존의 국악인과는 달라야 하네.”
“새로운 국악을 만들어 내야 하네.”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신국악을 만들어야 하네.”
“졸업생들이 구심점이 없으면 흐트러지니 단체를 만들도록 하게. 여러분들은 앞으로 신국악을 만들어야 하니 ‘신국악예술인회’라고 부르면 좋겠네”
이렇게 하여 초창기 학생들에게 새로운 국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국악 작곡을 가르칠 교수가 없으니 정회갑 교수, 박중후 교수, 김흥교 교수 등 서양음악 작곡 교수들에게 보내어 공부를 하도록 하였다. 이분들은 서양음악을 전공하였기에 국악 작곡 전공 학생을 가르치면서 별 수 없이 서양음악 작곡 기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국악과를 줄업하고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나타난 ‘창작국악’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창조 작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 전에 필자는 충남 서산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당시는 제대로 된 한글 화성법 책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 사람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郞)가 쓴 가능화성법을 어렵게 구했는데, 일본어 책이라서 쩔쩔매고 있었다. 이때 같은 초등학교에 근무하던 40대 중반의 심종학 선생님이라는 분이 일본어를 아는 세대라서 이 분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심선생님은 저녁이면 나의 하숙방에 오셔서 그 책을 번역하여 읽어 주셨고,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이렇게 나는 일본어 화성법 한 권을 끝까지 번역하였다.
서울음대에 들어와 보니 내 실력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그냥 일본어 화성법을 번역한 수준으로 혼자 독학을 하고 입학시험을 봤으니 합격한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아마도 서울음대에 개인 지도를 받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필자 한 사람 뿐이었을 것이다.
입학 후에 구두회 교수님이 집필한 화성법 연구를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옆에서 선생님이 지도를 해 주는 것처럼 아주 자세하게 풀이를 적은 책이어서, 정말 선생 없어도 이해가 되는 책이었다. 이 책은 서양음악 작곡 이론 중 기초 중의 기초인 나의 화성법 지식을 단단하게 해 주었다. 또한 필자가 여러 학생을 지도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때 바로 화성법 연구를 활용하였다. 음악회에서 구두회 교수님을 뵐 기회가 있어 이 화성법 연구 말씀을 드렸다.
“아 그래? 정말 그 책은 나에게 직접 배우지 않고도 화성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집필한 책이라네. 자네가 내 책을 그토록 탐독하였다니 반갑네.”
구두회 교수는 숙명여대에 부임하기 전 필자의 모교인 대전사범학교 음악교사였다. 이 학교에서 윤양석을 지도하였고, 그 인연으로 윤양석은 숙대 교수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서울음대 강사로 출강할 즈음 윤양석의 딸인 윤혜진을 지도하였다. 지금 윤혜진은 전남대 국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윤양석은 필자가 대전사범학교 학생이던 시절 만난 적이 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분이다. 윤양석은 엄청 부지런한 분이어서, 일 년에 책을 몇 권씩 쓰던 초인적인 열정의 교수였다. 그는 KBS방송국에서 녹음하다가 쓸어져 아쉽게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모두들 안타까워했다.
구두회 교수 하면 생각나는 것이 ‘빨래줄 작곡가 사건’이다. 어느 유명한 분이 작곡발표회를 거창하게 개최하였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현재는 화재로 없어진 서울시민회관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성황리에 연주회를 연 것이다. 구 교수가 이 연주회를 비판하기를 “아무개는 빨래줄 작곡가이다. 겨우 멜로디 얼기설기 만드는 사람이 무슨 가곡 작곡가라니 말이 되냐?” 이러자 상대방이 고소를 한다고 난리가 났다. 그러자 구교수는 태연히 응대하였다. “고소하면 더욱 좋지. 그러면 내가 주제를 주고 그 자리에서 가곡을 반주까지 붙여 완성해 보라고 할 터이니 ---. 완성을 하면 내가 인정을 해 주지.” 이처럼 그의 대답은 명료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음악계 사람들은 여간해서 남의 작품이나 연주에 대하여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런데 그는 당시 저명인사를 이렇게 몰아붙인 것이다. 이런 꼬장꼬장한 성격, 잘못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선비 기질, 이런 분이 바로 구교수였다.
한편 구교수가 일본유학 시절 기도하였다는 두 가지 기도 제목이 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학비를 벌기 위해 주말마다 고된 노동일을 하던 구교수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한다. 첫째 제목은 ‘살면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주셔도 감사하게 받겠으니 다만 이겨낼 힘을 주소서’, 둘째 제목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킬 수 있게 부부가 해로하게 해 주소서’ 이었다고 한다. 구교수는 살아 생전 방송에서 “긴 세월동안 많은 어려운 순간을 지냈지만 하나님께 드렸던 이 기도가 모두 이뤄졌다”며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이제 필자도 이제 하늘나라로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요즘 이 기도는 바로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구두회 교수는 내가 직접 사사한 분은 아니지만, 직접 사사한 어떤 분보다도 내 음악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이렇게 촘촘하고 친절하게 설명한 화성법은 이후에도 나오지 않고 있다. 서점 서가에 진열된 구두회 교수님의 화성법 연구를 볼 때마다 50여 년 전의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또한 명절이면 형님 댁에 모여 부모님 추모 예배를 보면서 “사철에 봄바람” 찬송가를 부른다. 나도 이러한 명작 찬송을 하나라도 남기고 하늘나라로 가야 할 터인데----. 하나님께서 영감과 기회를 주시리라 믿으며 기도하고 있다.(202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