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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젖줄 한강은 한가람 아리수 대수 등으로 불리우며 서울로 흘러든다.
강건너 오른쪽에 힘차게 뻗어내린 아차산 앞부터는 그 강은 경강 서울의 강(Seoul's River)로 이름을 달리한다.
그 아차산은 서울 동쪽 끝자락에서 기가 약하디 약한 내청룡 타락산을 든든하게 받들어 주고 있다.
서울은 내사신사와 외사신사가 2겹으로 둘러쌓여 풍수로는 기가 막힌 명당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한양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5km의 반경내에 북악산(342) 인왕산(338) 남산(262)
낙산(125) 등으로 내사신사의 보호를 받고 있다. 15km의 반경내에 북한산(836) 덕양산(125m)
관악산(632) 용마아차산(348)으로 이어지는 외사신사가 둘러져 있다. 서울은 꽃에 비유한다면 겹꽃에 해당하며
두겹으로 싸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내사신사는 청룡이 백호에 비해서 약하였다.
그러나 외백호 덕양산에 비하여 외청룡 용마.아차산이 더 강하여 서울은 풍수로는 전후좌우 균형이 잘 잡혀있다.
거기에 한강이 외명당수로 한양을 잘 감싸고 흐르고 있어 세계적인 명당도시 중의 하나로 꼽히는 서울이다.
온조가 졸본을 떠나 개마고원 원산 추가령구조곡을 거처 한북정백을 타고 내려와 첫 도읍지를 정한 곳도
바로 아차산 일대다. 아차산은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던 격전지다. 지금도 그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이 아차산을 차지하려고 한 요세중의 요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로 진입한 것도 바로 광진이라고
한다. 아차산 남쪽에는 일찍이 한강을 건너는 광나루가 개설되어 도성에서 충청·강원·경상도로 향하는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흥인문과 광희문을 지난 교통로가 살곶이다리가 있는 전관원(箭串院), 광나루의 광진원(廣津院)으로 이어져 교통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 때도 북한군이 제일 먼저 한강 광나루를 뚫고 서울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탈환을 목전에 두고 한강도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 9월 26일 국군제17연대 1대대와 3대대가 아차산 줄기를 따라 북진하여 오후 반나절을 지나서 용마봉을
점령하고 다시 292고지를 확보하였다. 이렇게 망우리고개에 도착한 국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경춘국도를 차단하였다.
이날부터 아차산 일대에서 국군과 인민군과의 격전이 3일간 전개되어 인근 주민들이 아차산으로 피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아차산의 북쪽 능선으로 뻗은 망우산 기슭에 1933년에 공동묘지가 마련되었다.
독립유공자와 일반시민의 묘역으로 오늘날 서울 지역의 유일한 묘지공원을 애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교육·휴양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그 후 아차산은 1970년대에 들어 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으로 조성되어 서울시민들의 위락·휴양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용마봉 정상에는 해발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설치되어 있어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서울시 광진구의 북쪽에 위치한 아차산은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며 용마봉을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하여 야트막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아차산 정상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아차산성 성벽을
볼 수 있다. 아차산 정상은 헬기장이다.
이곳은 현재 고구려군 제 4보루라고 불린다.
고구려군이 한때 강을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는 백제군에 타격을 주기 위해 병력을 주둔시켰던 보루다. 이곳에서는 토기류 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온돌시설이 있는 막사터가
발견되었다.
아차산은 서울시 전역과 한강유역 일대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 남한산성 북한산성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삼국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위해 250여 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며 점령 후에는 한강과 한강 이남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는 등 전략적 요충지다. 둘레가 약 1천m에 달하는 아차산성은 표고 200m의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으로 한강을 향해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성벽을 쌓았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는 말굽형의 산성이지만 규모가 크고 성 안에 작은 계곡과 우물이 있어 포곡식(包谷式) 형태를 띄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이며 동쪽·서쪽·남쪽에 문터가 남아 있고, 북쪽 정상부(해발 205m)에 장대(長臺)터가 있다.
성벽의 구조는 삭토법으로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축 성벽을 쌓았다.
현재는 성벽이 무너져서 토석혼축과 같은 외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장성이 연결되어 있다. 본래 뚝섬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돼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망우리까지 산줄기를
따라 축조돼 있다. 아차산 주요 봉우리 마다 방위목적을 가진 수 많은 보(堡)가 설치됐으며,
이것이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장성벽과 연결돼 구리시 아천동까지 연결돼 있다.
아차산은 높지도 빼어나지도 않다. 산 위에 서면 서울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산과 시가지 전체를 거의 볼 수 있다.
특히 굽이치는 한강의 푸른 물과 강변의 경관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아차산은 워커힐호텔이 한강변을 바라보며 들어서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한편으로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이 남아 있는 곳으로 주목되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백제가 처음 오늘의 서울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을 때 남하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막기 위하여 아차산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이 성을 아차산성 또는 아단성이라 불렀다. 백제 책계왕 1년(286)에 이를 중수하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이 성 밑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한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한강유역을 놓고 고구려와 신라·백제가 서로 쟁탈전을 벌였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도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이 아차산성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설화도 전한다. 아차산에서는 백제의 유구와 고구려의 군사 보루와 석축 등이 오늘날에도 확인되며
많은 석실고분군이 산재되어 있음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 오덕구의 하나로 각광받아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려간 남행산으로 이름 보여진다. 기록은 찾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니 기존의 한양에 살던 주민들은 양주땅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곳이 동촌(東村) 대동리(大同里)이다. 옮겨간 양주의 부치(府治)가 있던 곳으로 양주군 고양주면에 해당한다.이곳이 곧 아차산의 남쪽 기슭인 것이다. 따라서 아차산은 풍수지리적이나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오늘날 북악을 주산으로 하는 도성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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