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 此兩者同出, 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此兩者同, 出而異名(차양자동, 출이이명)
이를 ‘차양자동출, 이이명’으로도 끊어 읽을 수 있고 ‘차양자는 동출이이명’이라고 읽어도 무방하다. 이 둘은 같이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하니 이를 현묘하다고 한다.
문맥을 따른다면 차양자는 가깝게는 상무욕이관기묘와 상유욕이관기요를 일컫는다. 무명과 유명을 일컫는 차양자이기도 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도와 명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도와 명은 하나에서 나온 둘이다. 무명과 유명도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길에서 나온 서로 다른 이름일 뿐 동일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둘은 새로운 길에서 시작되는 두 현상을 말한다. 도의 길에서 나타나는 두 작용이다. 무욕에서 진리의 싹을 보고, 찾고자함과 구하고자 함에서 진리의 모양을 보는 것이다. 이는 동일한 것에서 나오는 다른 이름이다. 모름지기 정신은 이전의 이름들이 사라지고 이름없는 상태 곧 무명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거기서 묘를 보게 되며, 천지만물의 이름을(유명 만물지모) 다시 찾음에서 성숙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이는 마치 돈오점수를 방불한다. 무욕에서 돈오하고 유욕에서 점수한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게 분명하지만, 돈오와 점수는 하나에서 나온 두 이름일 뿐이다. 돈오에서 묘를 보고 점수에서 요를 본다. 이름을 달리할 뿐 그 근원은 동일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교조적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천지의 원리에 대한 도그마로 읽혀져서는 매우 곤란하다. 사실 판단의 명제가 아니라 실존 판단의 명제들이다. 이론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궤적에서 그 정신활동의 역동성을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언컨대 새로운 길에서의 정신활동에 대한 명제들이다. 상도의 원리가 아닌, 실존적 삶의 도에서 겪게 되는 무명과 유명, 천지지시와 만물지모, 그리고 상무욕과 상유욕이 생성해내는 장엄한 생명현상을 노래하는 詩語들이다. 상무욕과 상유욕은 서로 대칭되는 상대어들이 아니다. 하나에서 비롯되는 두 현상이다. 한 뿌리에서 비롯된 두 개의 가지일 뿐이다. 무명과 유명도 마찬가지다.
무명은 이름 없음이다. 이전의 이름들이 無가 되고 새로 이름짓기가 이름있음 곧 유명이다. 여기서 유명을 이전에 가졌던 허위의 이름들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많은 노자의 독자들이 유명을 단순히 이름 있음으로만 생각하려한다. 여기서 이름이란 단지 사물들의 개념을 일컫는 명사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 사과나 배의 개념화와 그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인의예지신과 같은 정신을 지배하는 소위 윤리적, 실천적 덕목들, 당시 지배이데올로기의 가치들에 대한 이름들을 일컫는다. 노자 도덕경 전체를 보라. 거기 문제제기하는 명제들을 보라. 어느 곳에서도 사물의 이름과 그 원리를 강조해서 말하는 곳이 있던가. 사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비유로 차용될 뿐이더라. 도덕경은 삶의 덕목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名(이름)’은 실천적 덕목의 이름들을 일컫는 게 분명하다.
인생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이름짓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미 있는 이름들을 타의에 의해 학습하게 되고 습득하게 된다. 언어나 이름, 그리고 문화는 생득적인 게 하나도 없다. 이미 있는 이름은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이름지어서 그것을 그것이라고 해본 적이 없다. 전통과 관습, 부모와 사회에 의해 강제된 이름들이다. 충과 효가 그 대표적인 예들이겠다. 무수한 보편 개념들은 스스로의 주체적인 사고에 의해, 자각에 의해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강제된, 주입된 이름들이다. 행동준칙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인생이든 그렇게 노정되어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 소위 누구나 가고 있는 보편의 길을 상도라고 한다.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삶이다. 이것이 한 번 천지개벽을 하는 대 전환이 시작되는 지점(비상도)에서 논의 되는 이야기가 도덕경 첫 장이다.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여 이미 있는 이름이 부정되는 때가 무명의 때이다.
옛날 옛적 우주의 시원, 만물이 시작되던 때, 언어도 없던 그 때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현자들은 해석하려 한다. 형이상학적 교리로 흐른다. 모호한 해석이 난무하고 무수한 이론이 즐비하게 된다. 명가명비상명은 언어철학적 분석으로 해석할 명제가 아니다. 철저히 실존적 이야기이다.
이미 있던 이름이 부정되는 실존적 사건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새로운 이름이 드러나기 전 이름 없음 곧 무명이 도래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무명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기에 천지지시이며, 이제 비로소 세계에 대한 눈뜸,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 세계는 새로운 이름으로 옷 입혀지고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소위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고 이를 道라 이름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게 그게 아니더라. 의라고 하는 게 그게 아니더라. 이전의 예는 온갖 기만일 뿐 참 예가 아니더라. 앎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더라. 믿음이라는 게 그런게 아니더라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잠시는 무명이고 이전의 이름을 던져버리고 나서는 무욕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 때 새로운 싹이(묘)가 보이기 시작하더라.(상무욕이관기묘)
정신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묘가 보이면 궁구하게 된다. 仁이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일컬어 仁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를 궁구하게 된다. 이를 일컬어 상유욕이라. 욕은 욕심을 일컫는 게 아니라 생명의 특성, 정신의 한 속성을 일컫는 말이다. 도대체 인이 무엇일까를 골몰하게 되며, 마치 야경꾼의 눈매처럼 참된 ‘仁’에 대해 스스로 묻고 또 묻노라면 스스로 이름할 수 있는 인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상유욕이관기요’이다. 徼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바로 그것을 찾고 보게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묘와 요는 동일한 곳에서 나온 서로 다른 이름이라 할 수밖에 더 있을까. 상무욕과 상유욕도 동일한 샘에서 나온 하나의 물이다. 함이 없는 함의 역동적인 생명활동이고, 정신 활동이다. 동위지현이라. 현하다고 할 밖에.
현지우현하다고 감탄한다. 현하고 또 현하다는 까닭은 감탄이기도 하려니와 바로 정신은 위와 같은 돈오와 점수를 늘 반복하며 그의 길을 간다. 하나의 현이 지나고 나면 또 하나의 현의 세계가 다가오고 정신은 그렇게 무르익어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중묘지문이니 무수한 생명의 싹이 그렇게 트고 또 모양이 드러나는 문이 아니랴.
妙 (묘) 라는 글자는 女 (계집 녀) 변에 少 (젊을 소) 자를 덧붙여 만든 것이다.
女라는 글자는 여자가 모로 꿇어 앉은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고 풀이되고 있다.
少라는 글자는 小 (작을 소) 자 밑에 (삐칠 별) 자를 받친 것이다.
小라는 글자의 풀이는 두갈래로 이야기되고 있다.
①점 () 셋으로 물건의 작은 모양을 나타내 '작다' 의 뜻이 됐다는 풀이와 ②조금씩 나온 싹들의 모양을 본뜬 글자라는 풀이의 두갈래다.
少라는 글자는 작은 것 (小) 의 한귀퉁이 ()가 떨어져 나가 더욱 작아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젊다' 의 뜻이 됐다고 한다.
妙는 젊은 (少) 여자 (女) 는 '묘하고' '예쁘다' 는 뜻의 글자라고 풀이된다.
[출처: 중앙일보] [중국한자]235. 妙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