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나비가 된 향수의 시인
나비가 된 향수의 시인 박 미 자 (수필가)
정지용 문학관을 찾은 날, 간간이 부는 바람이 시인의 향수를 읊조리듯 리 듬을 타고 있었다. 싸리문으로 들어서니 꽃이 활짝 핀 아그배나무가 너른 품 으로 반겼다. 금방이라도 물을 길어 올릴 것 같은 마당 우물과 올망졸망 키재 기하는 장독들이 고향집에 온 것처럼 푸근하게 느껴졌다. 섬세한 이미지 표현 과 서정적인 언어구사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정지용 시인을 만나 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열린 방문으로 액자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호수」였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 감을 밖에
짧은 시속에 여운이 오래도록 남은 시였다. 누구든 가슴에 담아둔 사람을 그
릴 때 떠올릴만한 시가 아닐까. 간절히 보고픈 마음을 담아 쓴 시를 생가의 액 자 속에서 만났다는 것은 새로운 감동이었다. 그런데 정지용 시인의 원본 시집(이숭원 주해)에는 시가 세로쓰기인데 띄어 쓰기도 다르게 되어 있다. 익히 알고 있는 ‘호수’ 가 ‘호수1’로 발표된 것을 알 수 있다. 원본을 옮겨보면,
호수 1 얼골 하나 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 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 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이 시는 「시문학」2호(1930. 5)에 「호수」로 발표하였는데 시의 문맥을 살리기 위한 특별한 띄어쓰기가 눈에 띈다. 사실 분단 이후 그는 다른 납북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어 왔다. 그러다 수많은 문인들의 청원으로 1988년 3월 해금解禁되 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언급조차 꺼려왔지만, 아직 까지 기억되는 수많은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시인인지를 말해준다. 생
가 곳곳에는 그의 사진과 작품들이 정갈하게 걸려있다. 방에서 글을 읽다 인 기척 소리에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복원이 잘 돼 있다. 현재의 문학관은 젊은 날 그가 꿈을 향해 정진했던 곳이다. 「향수」를 비롯한 주옥같은 명작들을 탄생시킨 문학의 산실을 한참동안 서성였다. 문학관 마당에 들어서자 처음 눈에 띈 건, 정지용 시인의 동상이었다. 한 손 에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 우리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 이었다. 동상 옆에 나란히 서서 그의 문향이 스며들길 바라며 사진을 찍었다. 문학관 입구 외벽은 담쟁이덩굴이 뻗어나가 창문을 뒤덮고 있었고, 그 아래로 활짝 핀 철쭉과 영산홍이 어서 오라는 듯 원색의 꽃물결을 이룬다. 문학관에는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유리진열장이 있다. 길지 않은 생을 살 면서 발표한 많은 작품들이 수록된 저서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끊임없이 글을 써야하는 숙명을 지닌 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케 했다. 전시실에는 붓글씨로 표구를 한, 이동원·박인수가 노래로 불러서 더욱 유명해진 시 「향수」가 걸려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향수」 부분
「향수」는 정지용 시인 일본에 유학을 가 있던 시절에 썼다. 타국에서 자신이 살던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충북 옥천 읍에서 북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곧게 뻗어 나간 산줄기를 따라가면 일 자산一字山이 있다. 이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있 는데, 이 개천이 차마 꿈에서도 잊혀지지 않을 그 곳이 아닐까. 문학관은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1902년 한 살로 시작하여 1949년 마흔 여덟살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그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아버지 연일 정씨 정태국과 하 동 정씨 정미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어머니의 태몽에서 유래 되어 ‘지용芝溶’으로 하였다. 천주교의 세례명은 프란시스코였다. 생애는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4년간 한문을 수학하기까 지의 유년기(1~16세),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을 다닌 청년기(17~28세),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를 지낸 장년기(29~44세),
해방에서 6·25전쟁 중에 납북되기까지의 말기(44~49세) 로 구분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고독과 빈곤 속에 성장한 시인은 현실과는 다른 아름다운 꿈과 동경의 내면세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자연스럽게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청년기인 17세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을 한다. 휘문고보 1학년 때부터 문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그의 발안으로 명명된 동인지 『요람搖籃』의 산파 역을 맡으며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학생자치회와 동문회를 연합한 재학생, 동문의 자치기구인 <문우회>의 학예부장이 되어 휘문고보 교지 『휘문』 창 간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졸업과 동시에 휘문 교비로 일본의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6년 후인 1929년 동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1923년에 시인은 첫 작품 「카페 ‧ 프란스」 발표를 시작으로 등단하게 된다. 1929년 3월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그해 9월에 모교 영어 교사로 취임했다. 취임 후 곧 분가하여 종로에 살림을 차렸다. 12살에 동갑인 송 씨와 결혼했으 나 15년을 떨어져 살았으니 긴 타향 타국살이 끝에 얻은 가정이었다. 서울 생 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1930년 『시문학』 동인에 가담하게 되면서 문단의 중심 권에 자리를 잡게 된다. 『시문학』의 출발은 김영랑과 박용철의 만남에서 비롯 되었다. 이들은 동인지를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그들이 문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선 당시 한국과 일본문단에 이미 알려진 정지용 시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과 그의 시적 경향, 그리 고 한국문단의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한국문단은 ‘순수시 운동'을 운위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구인회》가 조직되면서 모더니즘 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상 등이 그들이다. 이 들은 기계문명과 도시생활의 영향 하에서 사물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과방법론을 갖게 하였다.
정지용은 1939년에 《문장》의 간행에 즈음하여 소설가 이태준을 도와 편집 위원이 된다. 시부문 고선위원〈신인추원위원〉으로 위촉되어 청록파 시인(박 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비롯한 몇몇 유능한 시인을 발굴하여 시단에 소개한다. 1930년대의 한국시단은 정지용에 의하여 주도되었다고 할 만큼 그의 문학활동이 활발하고 다채로웠다. 해방 직후 모교의 교사직을 사직하고 이화여전에서 한국어, 영어, 라틴어를 담당하는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약 3년간 이화여전에 재직하였고 시는 거의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 『곡마단』과 기념시 2편과 시조 5수 이외에는 작품이없다. 당시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정치상황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당국의 입장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정지용 선생의 강제 납북설을 제기 하며 문인들과 함께 그의 해금운동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학동 교수 였다. 김 교수는 정지용 가족들의 증언과 원로 문인들의 회고담, 월남한 인사 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납북설의 근거를 꼼꼼하게 제시했다. 이러한 노력이 정 시인을 포함한 판금작품의 해금과 민족문학의 자산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 다. 이후 김 교수의 노력으로 정지용의 납북설은 학계에서 정설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7월에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문인 4~5명 이 찾아와 한참을 이야기하다 함께 나간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납북되어 평양의 어느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 인민군과 함께 북쪽으로 가다 미군 폭 격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미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 등 소문 만 무성하게 떠돌았다. 분단의 비극과 함께 찾아온 천재 시인의 최후였다.
납북설이 정설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행적은 설명할 길이 없기에 안타까움만더한다. 문학관 내부를 돌아 나오려는데 어디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인의 시 를 녹음하여 들려주는 곳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시낭송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향수」를 비롯하여 「카페프란스」, 「백록담」 등 총 13편이다. 아름다운 배경에 토속적인 시어가 펼쳐지는 스크린은 환상적이었다. 거미 줄처럼 얽혀 있던 삶을 잠시 보류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시를 감상하는 시간 은 감성의 물꼬를 틔우는데 그저 그만이었다. 정문 입구에는 정지용 문학상 수상 작품이 빼곡히 걸려 있다. 1989년에 1회 박두진 시인의 작품 「서한체」를 시작으로 2014년 26회 나태주 시인의 작품 「꽃‧ 2」전문이 액자에 들어 있다. 정지용 문학상은 시행한 이래로 한 해도 빠짐없이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실개천이 흐르는 향수의 고향 옥천에선 그를 추모하고 시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고자하는 기념사업도 활발하다. 매년 5월 개최하는 문학축제인 지용제가 그 첫 번째 주자다. 그의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지용 시인의 문학 세계에 풍덩 빠질 수 있는 행사 중 하나이다. 옥천군과 옥천 문화원에서 후원하는 지용신인문학상은 정지용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한국문단을 이 끌어갈 역량 있는 신인을 발굴하는 장을 마련해준다. 그 외에도 지용 문학상, 전국지용청소년문학상, 전국지용백일장 등 정지용의 이름을 딴 다양한 대회들이 매년 개최된다. 정지용 시인은 시어 구사의 탁월한 감각을 지녔으며 독특한 줄글식 산문시 형을 보여주었다. 또한 시인의 감정이 시에 노출되는 것을 엄격히 배제한 대 상 묘사의 이미지즘의 시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어우 러져 주옥같은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리라. 아직도 그는 우리가 넘어야 할 큰산이다. 생가부터 문학관까지 영화처럼 그려진 그의 삶은 전체가 문학이었다. 납·월 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지금, 월북이냐 납북이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선생의 문학이요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앞날을 예고라도 하듯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1950. 6)에 《문예8》호에 시 「나비」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4·4조 5수라는 작품 속 나비’ 마 지막 수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내가 인제 / 나븨 같이/ 죽겠기로/ 나븨 같이/ 날라 왔다/ 검정 비단/ 네 옷 가에/ 앉았다가/ 窓 훤 하니/ 날라 간다
정지용 시인의 인생을 둘러보고 나오니 깨끗하게 정비된 넓은 하천이 보인 다. 몇 해 전 문학관을 찾았을 때 올망졸망한 돌이 어우러진 작은 실개천이 더 정겨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시인의 향기를 감싸는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스친다. 그 바람을 타고 「향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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