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수행이나 명상은 인과법이 아니라고 하죠.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그에 따른 결과가 뒤따르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인과라는 세속법이죠.
불법(佛法)은 비인(非因) 비과(非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속에 인과법에만 익숙해 있어서
이 출세간(出世間)의 마음공부를 하는데도
인과법의 범주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결과를 얻으려는 방향으로 수행해 나가죠.
열심히 수행하고 조작하고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고
호흡을 통제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염불하고 독송하고
절하거나 오랫동안 앉아있는 등의 수행을 통해서
결국에는 고요한 마음을 얻는다거나
신비체험이나 삼매를 얻는다거나
우주와 합일한다거나
의식의 변성 상태나
비범한 의식 상태를 꿈꾸기도 하죠.
실제 이런 마음으로
즉, 유위법(有爲法)적인 무언가를 얻고 이루고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하고 노력하고
자신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방법을 쓰다보면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과법의 범주 안에서
유위법 안에서 이루어낸
세속적인 결과물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수행자가
신비체험이나 삼매체험을 바라면서
계속된 기도를 하거나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원했던
놀라운 신비체험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 효험은 거기까지가 전부이죠.
그것은 조작된 것일 뿐이고,
조작된 것은 세속법이지 불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런 신비체험은
하나의 병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그럼에도 많은 명상가들은 그런 신비체험을
정신적인 도약이거나
의식의 확장이라고 여기거나
수행의 척도쯤으로 여기곤 하데요.
사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러한 조작하는 수행, 유의(有爲)의 수행,
특정한 결과를 얻고자하는
생사법인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수행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또 처음 수행할 때는
그러한 방편의 수행으로 방향을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해온 것이
세속적이고 인과적이고
유위법적인 것들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조작하는 유위의 수행이
마치 불교수행의 전부인양 여기기기도 합니다.
그러한 수행을 잘하는 것 자체가,
또 그 수행을 통해 얻은 것,
경험한 것이 많을수록
수행을 잘하는 수행자라는 상에 갇히게도 되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수행의 기법들은 단지 하나의 방편이구요,
잠시 필요했던 뗏목이었을 뿐입니다.
강을 건넌 뒤에까지 계속해서 뗏목에 매달려
그것 자체가 수행인양 오해를 해선 안 되겠죠.
물론 이런 방편수행과 명상의 기법들에 매달리는 것도
처음에는 아주 중요한 수행의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수행자들은
그런 수행이나 명상방법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기도 하고
가행정진을 하고, 결가부좌하고,
눕지도 않고 정진하기도 하죠.
그러나 그렇게 목숨 걸고 해내고야 말겠노라는 노력 중에
깨달음을 얻었다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그렇게 수행을 하다가 결국 주저앉고 말죠.
아무리 해도, 해도, 해도, 안되구나 하는 사실에
절망하게 됩니다.
이 공부는
내가 애써서
유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는
완전히 힘을 빼고 나가떨어지게 되죠.
바로 그때,
그렇게 완전히 유위의 노력과 애씀과
뭔가를 만들려고 하던 조작의 방식이 저절로 놓아질 때
비로소 가장 자연스럽고 천연스러우며
본래 있었던 참된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로 깨달음은
그런 식으로 온다고 하죠.
바로 그런 점에서 수행의 방편이
일정부분 당연히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겠죠.
결국 참된 수행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유위적인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그저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도록
얼마나 허용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http://cfile258.uf.daum.net/image/2504B6415609C2E11E83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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